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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82화 (82/170)

82화 경호 (1)

소용돌이치듯 사건이 지나가 버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하나.

하오란과 ‘그것’. 둘 중 하나는 무조건 거짓말을 했다. 내 목숨을 가지고서.

BTO에 돌입하게 될 시, ‘그것’은 내가 하오란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 했다. 하오란은 그 반대를 이야기했었고.

당시로서는 도박할 이유가 없거니와, 하오란의 말이 꽤 신빙성 있게 들렸었다.

어떤 쪽의 말이 진짜일까?

BTO가 끝나버린 지금은 영원히 알 수 없는 비밀로 끝나버렸지만. 지금에 와서 굳이 정답을 추론하자면, ‘그것’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것’의 의도가 악하다고 욕할지언정 한 번도 틀린 적은 없었으니까. 아마 ‘그것’이 인격체라면, 지금쯤 나를 비웃고 있지 않을까.

***

전 국민이 티비 앞에 모여 있다고 한다. 결과는 이미 다 알려졌다. 그런데도, 아니, 그러니까 기대감이 상승했다고 한다. 우리 편이 이기면 알고 봐도 재밌는 법이니까.

목숨을 건 국가대항전이다. 과몰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 드가자~]

[언제 시작함? 벌써 광고만 30분째.]

[공짜로 보는 주제에 말이 많음.]

[걍 쳐 봐.]

커뮤니티며 인터넷이며 온통 일성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시작한다! 시작한다!”

“너희 준비됐어? 깜짝 놀랄 준비.”

“그 정도라고요?”

“이걸 라이브로 못 본 게 진짜 불쌍할 정도라니까?”

관심은 일성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예 일성의 전사원이 함께 보기로 했다. 이유도 합당했다. 최태성이 챙긴 전리품, 그러니까 화신의 주가지분을 포함한 아이템 전부를 사원들에게 일괄적으로 배분한다고 선포했다.

애사심이 절로 생길만 했다.

“이제부터 이태진한테 뭐라고 하는 새끼들 다 뒤질 줄 알아라.”

돈 싫어하는 각성자 없다고. 일성 내부에서 내 입지가 상당히 높아졌다. 급격한 성장과 별개로 이제껏 사내에서 목소리 높일 처지는 아니었는데.

이번 일로 인해 목에 힘 좀 주며 꺼드럭대도 괜찮은 급으로 올라섰다.

“시작한다. 어? 처음부터 이태진이 나오네?”

영상이 시작된 직후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나도 의외였다.

최태성이라든지, 악순청이라든지. 두 명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줄 줄 알았다.

결과와 별개로 긴장감을 높이려면 보통 그러지 않나?

그런데 웬걸. 다짜고짜 내 얼굴부터 보인다.

얼마 전 언론과 나눴던 인터뷰였다. 의자에 앉아있는 나와 자막에 뜬 질문들.

Q. 첫 번째 BTO라 들었다. 현재 심정은 어떤지?

덤덤한 얼굴과 비례해 대답도 심플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게 유감입니다. 그래도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죠.]

답변이 예상외였던 걸까. 잠깐의 딜레이 이후 질문이 이어졌다.

Q. 두렵다거나 혹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없으셨는지?

[네. 없었습니다. 이길 걸 아는데 왜 도망칩니까.]

Q. 굉장한 자신감이다. JBC 자체조사 결과, 대결 상대 악천후의 레벨이 조금 더 높은 걸로 알고 있다. 자신감의 원인은 어떤 것인지?

[레벨로 속일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정 궁금하시면 결과로 확인하면 될 것 같습니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있으신지?

특히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가관이었다.

[이 커피가 식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어우.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시켜서 한 인터뷰라지만 정말 이 부분만큼은 결사반대했었다.

홍주연이 사정사정해서 그대로 말한 거긴 한데. 이렇게 방송에 내보낼 줄 알았으면 절대 안 했다.

“캬! 이 커피가 식기 전에 돌아온단다.”

“멋있다 이태진!”

“오우 무서워.”

바로 비아냥이 날아왔다. 평소 내 성격을 아는 사람들은 웃기 바빴다. 나와 안면이 없는 사람들은 꽤나 패기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일성이면 저렇게 대답해야지. 잘 배웠네.”

“왜들 저래? 놀릴 게 아니라 본받아야지 저런 건.”

“운만 좋은 놈인 줄 알았더니. 헌터로서 패기도 나쁘지 않아.”

“연무장 가면 이태진 없는 날이 없구만 뭘. 운만 좋은 건 아니야.”

B급 이상, 특히 나와 던전을 가지 않았던 선배들의 흡족한 미소가 이어졌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ㄷㄷ자신감;;]

[근데 검신을 곁들인.]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저런 패기 있는 헌터가 등장하네. 요즘 애들 죄다 겸손만 떨어서 재미없었는데 패기 지림.]

[다른 헌터들 까내리지 말고 그냥 이태진 칭찬만 좀 해라.]

[숨어있는 김현일 팬 검거.]

인터넷 여론도 화끈하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졌다면 무덤에서도 발을 걷어찼을 만한 발언들이 승리로 돌아오자 자신감의 표출이 됐다.

“질질 안 끄네? 바로 시작하고.”

누군가의 말 그대로였다.

바로 장면이 이동됐다. 안타까운 얼굴이 비쳤다. 화유린. 덜덜 떠는 그녀의 주먹이 줌업되면서부터였다. 뒤쪽에서 팔짱끼고 있는 놈들은 여지없이 악당처럼 보인다.

“동료의 애꿎은 목숨을 허망하게 보내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나와라! 네놈이 직접 단죄받아라! 하오란 님의 복수는 내가 대신할 테니!”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이어졌다. 내가 올라가 그녀의 이름을 묻고 일검에 그녀를 베는 것까지.

장면이 이어질수록 침묵이 감돌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쓰레기 같은 것들.”

임한나가 모두의 심경을 대변해 한마디 했다.

옆에서 잔뜩 상기된 얼굴로 인터넷 반응을 보여주던 김세린도 이때만큼은 조용히 그녀의 면을 지켜봤다.

왁자지껄 떠들던 박하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만의 애도였다.

“다음 나와.”

화면 속 이태진이 부들거리는 목소리로 대머리 형제 중 동생을 불러냈다. 자세한 스토리를 모르는 일성에서도 ‘어?’ 하는 반응이 이어졌다.

“다음? 임한나 차례 아니야?”

“듣기로는 이태진이 세 번 연달아 나섰다더라.”

“그게 돼?”

“나도 몰라.”

퍼억! 퍼벅! 퍼버벅!

놈의 자세한 상태는 화면에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BTO라 한들 심의에 걸릴 정도로 잔인한 묘사는 송출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주먹만 쓴다거나, 놈이 거기에 꼼짝없이 당하는 것은 여실히 느껴질 만한 연출이었다.

[일부러 주먹만 쓰는 거 맞지?]

[그런 듯. 이태진 개빡친 거 같은데? 저런 모습이 있었나?]

[빡돌 만하지ㅇㅇ. 저새끼들 굳이 검신 멘탈만 건드렸네.]

[그래도 이태진이 애꿎은 사람 하나 죽인 건 팩트.]

[팩트는ㅋㅋ 넌 BTO가 애들 장난으로 보이냐?]

분쟁이 일어나 댓글과 대댓글, 누가 맞냐, 네가 틀리네 하던 사람들도.

“다음. 다음 나와라.”

이어지는 내 말에 정전이 일어난 듯 조용해졌다.

[?]

[쟤 지금 뭐라고…?]

[원래 싸울 상대기는 한데.]

[세 번 연달아 이태진이 나선다고? 저래도 되는 거임? 된다 쳐도 체력은?]

글 올라가는 속도가 전에 없이 빨라졌다. 아까 전이 소나기라면 지금은 폭풍이었다.

내용 때문에 더했다. 압도적으로 내가 지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생각해도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의 연속이었다. 조금만 삐끗했어도 그대로 염라대왕이랑 악수할 뻔했으니.

꾸드득!

“어?”

찰나에 악천후 주위의 구붓하게 휘어 들어갔다. 화면이 빈 허공으로 돌아갔다.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푹 하고 가죽 찌르는 소리가 퍼진 직후.

“방금 그거 뭐야?”

티비를 보고 있던 일성의 고위급 헌터들이 대번에 시선을 돌렸다. 모두 내 쪽으로.

상위 헌터들의 동체시력은 찰나간에 지나간 중력마법을 잡아챘다.

“자, 잠깐만. 저 스킬. 어디서 많이 봤던 건데.”

특히나 나와 같이 아락투스 던전에 들어갔던 팀원들의 얼굴은 아예 사색이 되어 있었다.

윤진아와 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는데 배신감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한 데 있었다.

“진아 선배가 아니었다고?”

“레인저 스킬에, 검술에, 마법까지?”

이규호는 특히나 못 믿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기까지. 뭐라고 해명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그냥 팔짱만 꼈다. 알아서들 생각하라고. 이제껏 이 방법이 제일 잘 통하기도 했다.

“일단 마저 보고 얘기하자.”

윤진아의 말에 아차하던 B팀원들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다음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최태성의 등장과 짧은 전투, 후에는 BTO 전승이라는 자막과 함께 뜬금없이 어느 시골이라는 자막과 함께.

화유린의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모자이크 처리된 채로 보였다. 그게 끝이었다.

잠시만.

이게 끝이라고?

내 분량이 왜 이렇게 많아?

***

입지에 대한 변화. 내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원래 명예욕이나 권력.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 없었다.

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있다 보면 언젠가 강해지고, 또 그러다 보면 새로운 기회를 얻을 줄 알았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검신의 축복이 없었다면 차라리 못 느꼈을 문제였다. 명성이나 사회적 위치. 그런 것들.

내 이름이 드높아져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아무리 힘의 논리대로 이 세상이 움직인다 한들, 나처럼 급격한 성장세를 띈다면 말이 달라진다.

일성 내부에서도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놈 너무 나대는 거 아니냐고.

차라리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누르는 방법을 쓰면 될 텐데 내가 그 정도는 또 아니었고.

지금의 이 애매한 위치에서 직위가 주는 힘이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오그라드는 인터뷰와 일성 사원들에게 신뢰를 얻으려고 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특히나 아락투스의 던전에서 확실하게 체감했다. 팀장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다.

모두가 목숨을 걸고 내 말에 따라줬다. 그때 느꼈다. 반드시 내 세력을 만들어놔야겠구나. 하고.

다른 말로 하자면,

“당분간은 던전은 꿈도 꾸지마. 인마. 너 지금 너무 조급해. 지금도 충분히 성장 빠르잖아. 왜 이래?”

내 세력이 있어야 이런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다. 김석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던전 공략을 막아섰다.

“예?”

“너 휴가 좀 가든가 해라. 이러다가 사달 나겠다. 요새 너 훈련하는 거 보면 애들이 무섭대.”

“무섭긴 뭐가 무서워요.”

“내가 봐도 무서워. 어디 쫓기는 것마냥 그러고 있는 거 보면.”

아니. 하루하루가 아까운 이 시점에 뭐라고?

강제로 휴식 당하게 생겼다. 던전에서 몬스터 한 마리 잡기에도 아쉬운 이때 휴가는 무슨 휴가?

“요즘 들어 B급 던전이 많이 출몰한다던데.”

은근슬쩍 그렇게 흘려봤다. 아닌 게 아니라 근 3년 이래 던전과 게이트 출몰 빈도가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전과 비교할 수도 없이 많이.

특히 최근 1년은 유례없이 많은 던전이 등장했다 하고.

“선배들이 너무 고생하시던데.”

“말이 짧다?”

“요.”

“그건 네가 걱정할 게 아니고. 기다려 봐.”

“또 뭘….”

시간이 째깍째깍 흐르고 있는데도 단호하게 던전에 가야겠다고 하지 못한 이유는. 김석환뿐만 아니라 모두가 나를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만 안 해서 그렇지 한석훈과 임한나도 전전긍긍하고 있는 판이다. 특히 임한나는 아예 손톱을 물어뜯으며 조금 쉬엄쉬엄하라고 말릴 정도고.

얼굴 오래 보자는 말로 임한나가 내 걱정을 할 정도면 좀 살벌하게 훈련한 것 같기도 하다.

“B급 정도 되면 던전만 돌아다닐 위치는 아닌 거 알지?”

한숨을 내쉰 김석환이 종이 한 장을 건네왔다.

[의뢰요청서.

목적 : 경호.

요청사항 : 반드시 이태진일 것.

의뢰인 : 민수정.

의뢰 기간 : 7일]

짧고 간결하게 적힌 내용에 그렇지 못한 임팩트였다.

“민수정이면 그 민수정이요?”

최연소 아카데미 총장 민수정이 떠올랐다. 또한 그녀는 여당에서 4선을 성공한 민정락 당대표의 손녀다.

협회의 손영혁, 일성의 김석환, 그리고 아카데미 총장 민수정.

그 셋이 전설의 기수라 불리는 건 유명했다.

“그 민수정 맞아. 그 밑에 보이지? 반드시 이태진일 것. 거기서 내놓은 금액 들어보면 너 입이 떡 벌어질걸?”

맞다. 입이 떡 벌어졌다. 겨우 일주일 경호하는데, 그것도 한 명에 불과한데도 50억 원을 선지급한다고 돼 있다. 이건 안 하는 게 바보처럼 보인다.

“대체 얼마나 위험하길래요?”

“위험하면 얘가 널 부르겠냐?”

아차. 민수정이면 A급 중에서도 최상위겠지. 이제 막 A급에 들어선 나와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이상했다. 왜 경호 대상으로 나를 선택한 거지?

“얘 성격이 원래 좀 또라이야. 헌터가 돈만 주면 위법행위 빼고 뭐든 하는 거지. 뭔 말이 많아? 휴가 간다는 생각으로 갔다 와라. 끝나면 네 인센티브도 넉넉하게 챙겨줄 테니까.”

반박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김석환이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쳤다. 나도 차마 반박할 생각을 못 했고.

일이 순식간에 진행됐다.

***

정신 차리니 어느새 민수정 앞에 서 있었다. 작년 이맘때, 아카데미 졸업식 때 잠깐이나마 본 얼굴이었다.

30대처럼 보이는 주황빛 단발에 냉정해 보이는 이목구비.

“네가 이태진? 근데 뭘 봐? 눈 안 깔아?”

김석환의 말이 맞았다. 웬 또라이 하나가 나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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