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BTO 이후.
일성이 화신에게 이겼다. 아직 영상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결과는 이미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중국을 떠받드는 열 둘의 존자(尊者) 중 일좌가 무너졌다, 상해의 화신이 한국의 일성에게 패배했다, 동북아 힘의 균형이 비틀어졌다, 등등.
그것도 전승으로 이긴 상황이다. 일성의 저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온갖 곳에서 각기 다른 반응이 이어졌다.
“영상 자체는 기가 막힌데.”
컴컴한 편집실이 한참 동안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적막을 깬 것은 박중현 부장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얼떨떨한 심정이 음성 가득 묻어 있었다.
말한 대로 영상은 기가 막히게 뽑혔다. 일단 일성이 승리했다는 점에서 그랬고, 전승이라는 큰 성과가 영상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었다. 다만.
“어째 주인공이 바뀐 느낌이네요.”
영상을 초 단위로 쪼개고 있던 조연출이 그렇게 말했다. 얼떨떨한건 마찬가지였다.
두 S급 각성자들의 싸움은 찍지도 못했다. 그걸 카메라에 담겠다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니까.
그럼에도 당연히 이번 매치의 주인공은 최태성과 악순청이었다. 애초에 중계권을 얻어낸 뒤 편집 방향을 그렇게 잡기도 했고.
중국의 열 두 존자 중 한 명과 한반도 사방신(四坊神)중 일인 간의 목숨을 건 전투.
사람들이 열광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무편집 영상을 보니 달랐다. 스토리 라인을 다시 짜야 할 판이다. 주인공을 이태진으로 해서.
“첫 번째로 나와서 악천후까지 모두 죽인 후에 드라마틱하게 내려갔어.”
“그것뿐이면 뭐라 말 안 하겠는데, 그다음에 최태성이 이태진 때문에 화난 장면. 그것도 그래요.”
모든 방향이 이태진을 향해 있었다. 영상이 없는 두 절대자 간의 승부 때문에 더 그랬다.
원래라면 최태성과 악순청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로 영상 대부분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러기에는 이태진 활약상이 운다 울어. 넌 어때 보여?”
편집실 막내에게 그렇게 물어봤다. 아무래도 창의적인 생각은 신입에게서 많이 나오기 마련이니까.
한참 전부터 입을 꾹 닫은 채 영상만 살피던 막내가 우물쭈물하기도 잠시.
“솔직히 전 이쪽이 더 좋은데요? 비하인드 스토리 같은 거 사실 사람들이 별로 궁금해할 것 같지도 않고, 볼 수도 없는 최태성보다 확실할 것 같고요. 중요한 건 어쨌든 BTO잖아요? 그런 관점에서 이태진 중심으로 바꾸면, 아니, 바꿔야 그림이 더 살 것 같아요. 그리고 그림이 일단 좋잖아요. 전형적인 선악구도. 몰입하기도 좋을 것 같은데요?”
꽤나 당돌하게 제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끝부분에는 화유린 저 사람 가족들이 어떻게 됐는지 슬쩍 비춰 주는 걸로 마무리하면 어떨…까요?”
그러면서 똘망똘망한 눈으로 부국장을 쳐다보기까지.
“……아주 그럴듯해.”
이렇게까지 기대한 건 아닌데. 아예 편집 방향까지 정해준다. 그것도 상당히 괜찮은 쪽으로.
“…화유린 가족 생사 알아내는 데 얼마나 걸려?”
“삼 일이면 됩니다.”
“이틀 줄게. 자자. 다들 피곤한 거 아는데 조금만 힘들 내자. 우리 성과급 얼마 안 남았다. 바짝 땡겨야지! 파이팅하자, 파이팅해. 빨리!”
“…파이팅.”
***
협회로 돌아가는 길, 손정연이 손자를 불렀다. 그렇게만 말해도 어떤 뜻인지 능히 짐작이 갔다.
“이태진 고놈 말이다.”
“예.”
“네가 보기엔 어때 보이더냐?”
정작 최태성에 관한 건 일언도 없었다. 원래부터 그리될 줄 알고 있었고, 그대로 됐다는 반응뿐이었지.
되려 BOT가 끝난 직후 코웃음 치며 칼이 무뎌졌다고 핀잔이나 줄 뿐이었다.
“검술이 꽤나 진보했습니다. A급이라 불러도 손색없어 보입니다.”
“그래. 검술도 있었지.”
손정연의 얼굴이 차가웠다. 평소 이태진을 언급할 때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하던 것과 달랐다. 문득 손영혁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청운적하검법이 아니었어. 색채가 조금 남아 있었지만 완전히 다른 것이라 봐야 했지.”
“쓸 만은 했다만 부족한 점도 많았습니다.”
빈말이었다. 사실 당장이라도 일성에 달려가 안 되겠다고, 그냥 일성 들어가야겠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놈이 기겁하며 거절할 게 뻔해서 가만있는 것이지.
그것을 알기에 손정연도 코웃음 한 번 치고 마는 것이었다.
“세상엔 저런 괴물도 있는 거다. 어디 굼벵이가 천 년을 긴다고 호랑이를 이길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것보다. 너도 분명 느꼈겠지?”
“염동력 말씀이십니까?”
“귀여운 장난이라고 보기에는 고약한 효과였지.”
귀여운 장난.
이태진의 상태창이 면밀하게 적힌 보고서에는 분명 그런 스킬이 없었다. 공간이 구붓하게 휘어지며 악천후를 짓누르는 그 힘은 최소한 A급에 달하는 능력이었다.
“조사해 보겠습니다.”
“됐다. 어련히 감사를 피할 방법도 구해놨겠지. 경계심만 부를 뿐이야. 다만, 이태진의 성장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빨라. 한창때의 성요한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보다도 빨라.”
혀를 끌끌 차던 손정연이 차마 말은 하지 않았지만,
‘죽이거나 아예 내 아래로 두거나. 결정을 빨리 내려야 한다.’
마음에 칼을 세웠다. 반면 손영혁의 생각은 달랐다.
‘무조건. 무조건 일성 들어가든가 해야지. 가만있다가는 조만간 따라잡힌다. 그러기 전에 놈에게 잘 보여야 해. 데이터 조작으로 협박해 볼까? 아니다. 회장님 말씀대로 괜히 적개심만 부르는 꼴이지. 차라리 선물을 더 떠안기자.’
동상이몽이었다.
***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내 몸이 앰뷸런스에 실려 가고 있었다. 당장 치료가 급하다는 말도 들려왔다.
포션으로 막고는 있었지만 응급조치였을 뿐이다. 아드레날린 부스트의 반동 때문에 더했다. 몽롱한 정신에도 후련한 마음이 우선이었다.
A급 같던 B급 던전을 해치웠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묵혀왔던 큰일 하나를 드디어 치른 기분.
더불어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A급 각성자 하나를 내 손으로 해치웠으니.
단 한 가지 찝찝한 점이라면 역시나 하오란이었다. 녀석의 선명한 눈빛이 기억났다. 내 검술 하나하나를 꿰뚫을 듯 관찰하는 시선.
특히나 중력으로 악천후를 묶어 뒀을 때의 그 노골적인 시선은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내 근본을 파헤치겠다는 열망이 생사를 오가는 중에도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볼수록 위험한 놈이다. 할 수 있다면 죽여 놓는 게 상책이다. 못해서 그렇지.
내 밑천 한번 보겠다고 내놓은 게 무려 오른팔이다. 지금 당장 놈을 건드려봤자 내게도 좋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더 소름끼쳤고.
결국 놈이 말한 대로 일이 진행됐지 않은가. 나와의 생사결을 없던 일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악순청이 죽는다는 말도 이루어졌다. 어떤 수를 쓴 건지는 몰라도, 혹은 어떤 미래를 봤는지는 몰라도.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준비됐다는 듯 힐러들이 내 옆에 붙었을 때였다. 시야가 번잡하게 흐릿해졌다.
점점 의식이 멀어져 갔다. 아드레날린 부스트의 반동효과 때문이 아니라, 의식이 미래로 날아가는 신호였다.
화악!
***
순식간에 장면 몇 개가 스쳐 지나갔다. 일성의 건물 내부, 혈향, 심장이 꿰뚫려 널브러져 있는 김주현의 시체, 죽어가는 한석훈과 내 손에서 쏟아지는 하얀 빛무리.
“도, 도망….”
“말하지 마요. 내가 지금 살릴 테니까.”
허나 이미 몇 번이나 확인했듯 한석훈은 죽고 말았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미래가 끝나가고 있었다. 귀가 먹먹해지고, 뎅겅 날아가는 내 목이 느껴졌다. 그것으로 끝.
화악!
그렇게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기쁘고, 후련하고, 개운했던 마음까지 순식간에 날아갔다. 황당했다. 왜 이 엿 같은 미래를 보여주느냐고 욕하기에는.
전과 비교했을 때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
시간이 또 줄어들었다!
그것도 무려 1년이나!
줄어든 시간이 1년, 남은 시간도 1년. 환장할 노릇이다.
이유가 뭐지?
굳이 절망에 빠지지는 않았다.
참상의 데드라인이 앞당겨지는 것은 이미 경험한 일이다. 한창 서울역의 영웅이니 어쩌니할 때.
시간 좀 줄었다는 게 거슬려서 그렇지 어차피 일어날 일이다. 좀 심하게 줄어든 경향이 없지 않아 있지만. 진짜 좀 심하게.
다만 시간이 줄어든 현상 그 자체보다는 근본적인 이유가 궁금했다. 왜 참사가 일어난 시점이 빨라졌는데? 그것도 지금 이 타이밍에.
혹시 내가 강해졌기 때문에?
생각해보니 그랬다. 누구 말처럼 눈 깜박일 때마다 강해지는 나라지만 등급의 경계를 지나갈 때가 있다. 지금처럼 A급에 올라설 때가 그런 경우였고.
번뜩인 생각이 꽤나 그럴듯하다. 뭐가 됐든 시간은 줄어들었기에 깊게 추측하지는 않았지만.
개같네 진짜.
하오란과 달리 내가 ‘놈’을 혐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정적인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
범인이 누군지, 혹은 범인을 잡으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범인의 목적은 또 뭔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강해지라고 염불만 왼다. 이럴수록 ‘그것’의 실체를 보고 싶었다. 면상에 주먹이라도 박아주게.
“뭐, 쫄기라도 해야 하나? 오늘 죽나, 내일 죽나.”
짐짓 여유로운 척 따위가 아니라 실제로도 마음이 그랬다. 조급하지도 않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에 새겨둔 목표치를 조금 앞당겼다. 임한나에게 2년 안에 S급이 돼야 한다고 했었는데.
바뀌었다. 1년 안에, 혹은 그 전에 S급을 찍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든.
“표정 펴. 표정 펴. 얘 왜 이래? 이겼다며. 아니면 내가 지금 시체를 보고 있는 건가?”
드르륵-!
예고 없이 병실 문을 연 외팔이 한석훈이 꼼짝없이 누워있는 나를 보며 낄낄거렸다. 엄격히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고 했다더니. 김석환이 한석훈에게 졌는가 보다.
“이제 팀장님도 까불면 저한테 죽어요.”
미래에서 본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한석훈이 얼레, 하면서 웃는다.
“한참 이르다. 일러. 이제 겨우 A급 들어선 햇병아리 주제에 누가 누굴.”
“팀장님. 조심해야 할걸요? 저 오빠 단단히 벼르고 있던데.”
어느새 다가온 김세린이 말을 덧붙인다. 그게 기점이었다. 우르르 몰려온 인원이 한둘이 아니었다.
김세린, 박하영, 이지은, 전용철, 최찬규…. 주르륵 나열된 이름이 B급까지 올라간다. 이규호, 김아랑, 심지어 A급 섬전도 흐뭇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VIP 병실이라며, 아무도 못 들어올 거라며 푹 쉬라더니. 아주 바글바글하다.
“어디 기다릴 수 있어야지. 우리 영웅.”
영웅?
오글거리는 그 단어를 듣자마자 저릿한 가슴의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듯했다.
“서울역의 영웅, 일성의 영웅. 아주 히어로가 따로 없어. 다음엔 어딜 구해주러 가십니까?”
한석훈이 누워있는 내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대번에 주변 사람들이 왁자지껄 웃는다.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었다.
농담이 아니라 한석훈 저 양반 진짜 손 좀 봐줘야겠다. 레벨업 조금만 더 한 후에.
찰칵-
얼씨구.
김세린과 박하영은 아예 내 옆에 와 인증샷까지 남긴다. 제 sns에 올릴 거라는 말을 덧붙이며.
“오빠. 출세해도 저희 잊지 않는 거죠?”
“야 김세린. 너 우리 오빠 그렇게 쓰레기 새끼로 만들래? 저번에 약속했어. 최소 30억씩은 물려주겠다고.”
“아차차! 제가 사과할게요.”
깁스에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매직으로 낙서까지 한 후에야 만족스럽다는 듯 물러나는 녀석들을 황당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데, 한석훈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며 입을 열었다.
“자자. 우리 영웅께서 부끄러우시단다. 다들 얼굴 확인했으면 나가.”
“팀장님은요?”
“난 우리 영웅님 소변 보는 것 좀 받아주게.”
“아하.”
끝까지 수치를 안겨주며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을 때였다. 대뜸 진중한 얼굴의 외팔이 검사가 입을 열었다.
“그래. 네가 자만할 성격이 아니긴 하다만. 그래도 그렇지. 기쁘지도 않냐? 왜, 화유린 그 여자 때문에 그래?”
김석환에게 들었나 보다. 나도 오늘 들은 여자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걸 보니. 관심 없는 척하더니 가만 보면 과할 정도로 나를 꼼꼼히 챙긴다.
“그거야 가타부타 말 안 해도 알아서 잘 정리할 거고. 그보다는 너 인마. 앞으로가 더 중요한 거 알지? BTO 한 번에 원한이 끝난 게 아니야. 악순청, 악천후랑 엮인 놈들부터 해서 이름값 높이려는 놈들까지 앞으로는 더….”
심각한 표정의 외팔이가 주절주절 건네는 조언이 사뭇 진지했다.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은 해 볼게요.”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결심의 말이기도 했다. 일 년 후, 혹은 더 앞당겨질 날에 찾아올 그 새끼를 꼭 잡고야 말겠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