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미래를 본다-80화 (80/170)

80화 BTO (5)

“어디, 내 창도 한 번 받아 보거라!”

그 말과 함께 누군가 뛰어 올라왔다. 순식간이었다. 미처 반응조차 못 할 속도였다.

찔러 들어오는 창의 뒤편으로 중년의 남자가 보였다. 내게 죽은 놈들의 삼촌 되는 자, 김석환의 상대로 예정된 남자였다. 악진청이었다.

A급 중에서도 절정에 달한 공격은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미 심력을 모두 소진한 뒤인 지금은 말할 것도 없고.

콰앙!

몽롱한 정신 가운데 이대로 죽나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김석환이 두 팔을 교차하며 악진청의 공격을 막아냈다.

탱커가 아님에도 이 정도의 방어력이라니. A급이라도 다 같은 A급이 아니라는 게 여실히 느껴진다.

“쪽팔린 줄도 모르고.”

김석환이 정면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표정은 안 봐도 알겠다. 슬쩍 옆을 보자 어느샌가 튀어나온 임한나가 장비까지 풀세트로 장착하고 주먹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뒤쪽의 최태성은.

눈썹을 한번 꿈틀거리며 악진청을 노려보고 있다. 아까 전 내가 두 형제의 목숨을 앗아갈 때와는 전혀 다르다.

탈인의 영역에서 여유롭게 BTO를 지켜보던 절대자의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분노에 찬 S급 각성자가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검신 나리의 검술이 워낙 뛰어난 까닭에. 근질거리는 몸을 가만 놔둘 수가 있어야지.”

악진청이 비릿하게 웃으며 턱짓했다. 김석환은 어디서 개가 짖는다는 듯 악진청을 무시하며 자연스럽게 장비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김석환에게 악가창법의 약점에 대해 말해 주려던 찰나였다. 몸이 한쪽으로 훅 쏠렸다.

“괜찮아?”

끌어내다시피 내 몸을 부축한 임한나가 그렇게 물었다.

괜찮지 않다. 악가창법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임한나에게 고맙다는 말도 못 할 정도로.

오러에 당한 가슴의 상처는 아직까지 제대로 된 지혈조차 못 한 상황이다. 허나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절정에 달하는 두 A급 각성자의 싸움과, 또 그 뒤로 이번 BTO의 대미를 장식할 전투. 그건 꼭 봐야겠거든.

그렇게 몽롱한 정신을 꾸역꾸역 붙잡고 있자 임한나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어디서 난 건지 모를 포션을 꺼내 내 몸 위로 들이부었다. 굉장히 성의 없이.

“이런 게 있었어?”

억지로 입을 열어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그저 한 병 더 꺼내 다시 콸콸하고 부어댈 뿐. 하지만 대충 붓는다 해서 효과까지 엉성한 건 아니었다.

꽤나 비싸 보였다. 맥을 못 추던 눈꺼풀이 뜨이고 늘어지던 팔다리가 힘을 되찾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방금까지 나를 보고 있던 최태성의 몸이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딜 어물쩍 넘어가려는 거지?”

최태성이 그 말과 함께 나타난 곳은 결투장 위였다. 정확히는 악진청의 정면.

김석환에게 막 달려들려던 악진청의 몸에 급제동이 걸렸다.

“…이게 무슨?”

악진청이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다시 한번 최태성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내 사람을 죽이려 들었다. 위협 같은 게 아니라 진짜로. 아닌가?”

무미건조한 말투 속에 깊은 분노가 숨어있었다. 내가 사라졌을 때도 꼭 저랬다던데. 피해자는 난데 괜히 내가 간 떨린다.

“흥, 최 회장께서는 경우가 없군. 차례를 지키시오!”

“지금부터 내 차례다. 내가 네놈을 상대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억지 부리지 마시오. 최 회장. 다시 한번 말하지. 차례를 지키시오.”

악진청이 단호하게 그 제안을 거절했다. 아니, 최태성으로서는 제안이 아니라 확언이었지만.

“내 사람을 건드렸을 때 마나를 쓰지 않더군. 좋다. 나 또한 스킬을 쓰지 않겠다. 네놈은 창을 들고 저 친구를 죽이려 했지만 나는 무기도 들지 않겠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제안이 아니라 이미 확정된 사실을 알려주는 거다.”

처음이다. 최태성의 저런 모습을 보는 것은. 한석훈 말로는 소싯적에 한 성격 했다고 하던데 저걸 보니 그런 것도 같다.

그래. 일성의 회장이라면 저 모습이 더 자연스럽기는 한데. 늘 부드러운 모습만 봐온 나로서는 이런 상황이 낯설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방금 전의 일이라면 내 사과하리다. 진심으로 저 녀석을 죽이려던 건 아니었으니. 최 회장 말대로 마나도 싣지 않은 공격이었잖소.”

“그러니 나 또한 마나를 쓰지 않고 네놈을 상대해 주겠다는 거다. 그 사과는 저승에 가는 걸로 대신 받지.”

어찌 보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조카를 둘이나 잃은 작은아버지의 분노로 생긴 헤프닝 정도로.

하지만 각성자의 생태는 대개 명분으로 일이 이루어진다. 그 명분이라는 건 만들려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거고.

더군다나 이렇게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더더욱 쉽다.

“죽어가던 하수를 상대로 창을 내질렀으니 나 또한 그렇게 만들고 시작해야 마땅하지만. 내 성격이 그리 모질지가 못해서 말이야. 다행인 줄 알아라.”

“하!”

악진청은 차마 하겠다는 대답은 못 한 채 코웃음을 치며 김석환을 한 번, 악순청을 한 번, 그리고 종내에는 협회장을 쳐다봤다.

허나 명분이 여기에 있는 이상 누구도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석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협회장은 팔짱을 낀 채 최태성을 쳐다보고만 있다.

마지못해 악순청만 한마디 거들 뿐이었다.

“네 목숨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 말은 죽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 애비에 그 자식이라고.

동생이 최태성의 체력을 깎아 놓으면 자신이 마무리하겠다는 건데. 앞서 있었던 비슷한 전개가 어떻게 결말이 났더라.

“…예.”

회장의 말은 지엄했나 보다. 파르르 손을 떨던 악진청이 명령을 받들었다.

“마나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그 약속. 꼭 지키시오.”

각오를 다지듯 눈을 감았다 뜬 악진청이 자세를 잡았다.

고개를 끄덕인 최태성이 발을 구른 것과 동시에 대결이 시작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최태성의 패배가 도무지 그려지지 않는다. A등급에 올라서니 알겠다. S급과 A급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지.

쿵!

파동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관찰하지도 못했다. 눈 한번 감았다 뜬 순간, 최태성의 신형이 악진청 바로 앞에 있었다.

추측건대 주먹에 명치를 맞은 듯했다. 선 채로 주르륵 뒤로 밀려난 악진청의 입에서 검은색 피가 쏟아졌다.

“큭. 과연 소문대로요.”

그래도 A급 최상단에 위치한 자로서 뭐라도 보여준다는 걸까. 악진청의 창이 순간 사라졌다.

쩌저정!

주변 공기가 괴성을 지르며 터져나갔다. 같은 등급 사이에서도 이 정도나 차이가 난단 말일까.

악진청의 창술은 궤가 달랐다. 상대가 최태성이 아니라면, 저걸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공할만한 힘과 속도, 그리고 궤적이었다.

자유자재.

제 몸 다루듯 창을 휘두르는데, 꼭 채찍처럼 보이기도 했다. 유연함이 극에 달한 것이다.

하지만 강함은 늘 상대적인 법이다. 재롱 피우는 아기를 보듯 가볍게 피하는 최태성이 괴물처럼 보일 지경이다.

심지어.

이건 내 착각이겠지만 꼭 나 보라고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다.

[최절정에 달한 존재의 전투를 지켜봤습니다.]

[민첩이 소폭 상승합니다!]

실제로 내게 도움이 되고 있고. 그렇게 맹렬한 움직임에 푹 빠져들 무렵이었다.

슥-

교육의 한 장면 같던 전투는 어느 순간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바닥에 나뒹구는 악진청의 가슴께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A급 각성자의 최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허무했다.

“눈을 돌리지 마라. 언제든 저게 우리가 될 수 있으니까.”

김석환이 자못 씁쓸한 듯 그렇게 말했다. 언제든 저렇게 될 수 있다. 각성자에게는 숙명 같은 말이었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몬스터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고 한다. 그렇기에 한석훈은 적이라 생각되면 망설이지 말고 베라고 했다.

단기간에 급성장한 나로서는 채 느끼지 못한 감정과 경험이었다.

“늘 그대의 능력이 궁금했다. 무기의 잠재력을 극한까지 끌어내는 힘.”

제 동생이 죽었는데도 덤덤하게 말한 악군청이 결투장에 곧장 올라왔다.

마지막 주자이자 이번 BTO의 가장 중요한 매치였다.

앞선 네 번을 모두 이겼어도 최태성이 죽는다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

꿀꺽.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침을 삼키며 그들을 지켜봤다. S급 헌터의 전투를 볼 기회가 살면서 몇 번이나 될까.

심지어 이건 카메라로 담지도 못한다. 담을 수 있는 속도도 아니거니와, 지금부터는 일반인이 감당할 수 있는 마나 또한 아니었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 죽을 수 있다.

촬영팀이 모두 나간 이후였다. 최태성이 장비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악진청이 죽기 전 약속을 지키라고 말했던 이유. 최태성의 능력이 특별하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딜러와 탱커로 구분할 수 없는 종류의 능력이 몇 있다. 그중 최태성은 무기의 잠재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쪽에 속했다.

시작하기 전, 내게 ‘빌려’ 줄 수 있냐며 물어보길래 헬리오스의 심장을 건네줬다. 모든 능력치가 해금된 헬리오스가 어떤 힘을 발휘할지 궁금했다.

우우웅-!

과연 달랐다. 금빛 갑주가 최태성의 몸에서 가진 모든 힘을 드러냈다.

정말 태양이라도 떨어진 줄 알았다. 밝게 빛나는 그의 근처로 감히 어떤 것도 접근할 수 없을 듯했다.

그 뒤로 반지, 귀걸이, 팔찌, 검…. 확인된 장비만 열 개가 넘었다. 달랑 창 하나 쥔 악순청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내가 이긴다.”

악순청의 그 말을 끝으로. 흑색 선과 금색 선이 교차했다. 그다음은 그저 정신을 부여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폭음도 없었다. 이명이 고막을 가득 채웠다. 금빛과 흑색이 이리저리 뒤엉키는 것만 간간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직후에 터진 돌풍에 가로막혀 더 이상 볼 수 없었고. 열복사로 인한 후끈한 열기만 장내에 가득했다.

청각도 시각도 막혔지만 공기 중으로 전해져 오는 파동과 진동이 전투가 한창임을 말해줬다.

대체 몇 번이나 공방이 오고 갔는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보다 궁금한 것은 이 건물이 정말 저 충격을 버텨낼 수 있느냐였다.

아니나 다를까. 점점 땅이 움푹 꺼지고 있었다. 중력마법을 쓴 것도 아닌데 부서진 알맹이가 자연법칙을 거스르며 공중위로 떠올랐다. 더 놀라운 건 이제 호흡 한 번 할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고.

그때였다. 모든 것을 쓸어버릴 기세로 우리를 집어삼키던 폭풍도, 이대로 고막을 찢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던 이명도 한순간에 사라졌다.

화악!

두 남자가 보였다.

“멀쩡해?”

두 사람 모두 흠집조차 없었다. 싸우기 전과 마찬가지로 호흡 또한 일정했다.

일그러진 악순청의 표정만 아니었다면, 전투가 시작되기 전이라 해도 믿었을 것이다.

“하오란. 네 이…!”

하오란이 말을 끝내기 직전, 두 사람이 또다시 사라졌다. 추측건대 최태성이 공격을 날린 게 아닐까 싶었다.

콰앙-!

폭음과 함께 엄청난 양의 빛이 번졌다가 하나의 점으로 다시 응축되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순간에 시작된 전투는 그렇게 돌연 끝났다. 돌풍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최태성이었다.

그가 서 있었다. 호흡이 벅찬 듯 헐떡이고 있었지만, 상대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커르륵!”

심장이 꿰뚫린 악순청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분노가 여실히 담긴 시선은 여전히 최태성을 향해 있었다.

허나 그것도 곧 의미가 없어졌다. 생기가 꺼져가던 악순청의 동공이 회색빛으로 죽어버렸을 때.

“일성은 금일.”

최태성이 선포했다.

“화신에게 합당한 복수를 끝마쳤다.”

거기에 반박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멀찍이서 구경하던 하오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저 고개를 숙이며 화신의 종말에 순응할 뿐이었다.

완벽한 우리의 승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