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BTO (4)
걸레를 버리듯 놈의 시체를 화신 쪽으로 휙 던졌다. 악천후의 얼굴은 그때까지도 덤덤했다. 옆에 있는 악순청도.
제 친아들과 동생이 죽었는데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만 있다. 이미 올라갈 때부터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말이다.
“천정이가 질 거라 생각은 했다.”
저벅저벅 무대 위로 올라오는 악천후가 덤덤하게 말했다. 눈길은 여전히 곤죽이 돼버린 동생에게 향해있다.
“그래도. 최후만큼은 명예롭게 보내줄 줄 알았는데. 너도 한 명의 각성자로서 그 정도 예우는 지켜줄 수 있지 않았나?”
무미건조한 음성이었지만 아우를 잃은 형의 분노가 여실히 전해졌다. 순간이나마 악천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빡빡 깎은 놈의 대머리에서 힘줄이 불끈 솟아났다.
내 착각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친동생이 죽었는데 감정에 아무 이상 없는 게 이상한 거다.
옆에 있는 하오란처럼 소시오패스가 아니라면 말이다. 심지어 아우를 사지로 내몰았던 게 다름 아닌 자신인데.
“악천후!”
놈의 말에 곧장 아비의 엄포가 쏟아졌다. 거기까지 하라는 경고였다. 또한 이성을 찾으라는 조언이었고.
“쓰레기를 쓰레기 취급하는 게 어때서. 걱정 마라. 너도 똑같이 만들어 줄 테니. 아니지. 애비까지 세트로 저승길 효도여행이나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감정을 억누르며, 별일 아니라는 듯 놈에게 빈정거렸다. 이날을 화신 쪽에서 기다렸다는 걸 알고 있다.
왜 아닐까. 제 이름을 높일 수 있는 일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게 각성자들인데.
애초에 질 거라 생각했다면 BTO를 요청하지도 않았을 거다. 여기 있는 모두가 죽음을 각오한 동시에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과연 화신의 적장자다웠다. 악천후는 크게 숨을 내뱉더니 곧장 이성을 되찾는 듯했다. 녀석이 창을 가지런히 잡으며 말해왔다.
“화신의 악천후다. 악가창법을 연마했다.”
“그래. 수고했다.”
“예의를 지켜라. 이태진. 숭고한 결투에 사사로운 감정을 집어넣지 마라.”
훈계하듯 놈이 나를 꾸짖었다. 무고한 목숨을 사사로운 감정이라고 한다. 제 아래에 있는 사람을 이제껏 얼마나 죽여왔을까.
그럴수록 마음을 다잡았다. 방심은 없다. 놈이 숨기지 않고 제 힘을 드러내고 있다.
창을 다듬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하오란과 동급이거나 한 수 위. 다시 말해 나에게도 한 수위의 헌터다. 그런데 도무지 내가 질 것 같지가 않다.
“유언은 그쯤하고. 이제 그만 죽어라.”
그 말과 함께 놈에게로 몸을 던졌다. 심판 따위는 이곳에 없다. 무대 위로 올라선 순간부터 언제든 싸울 준비를 마쳐야 하는 것이다.
달려가면서 헬리오스의 심장을 장착했다. 몸 곳곳에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신성한 파괴자의 롱소드는 이미 한참 전에 뽑아둔 상태다.
놈 또한 방어 자세를 취하며 내가 달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수를 일부러 내주며 내 힘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생긴 것과 다르게 영악한 녀석이었다.
“막아 보든가.”
대번에 목을 노리고 들어갔다.
아드레날린 부스트, 오러 블레이드, 일점폭발….
할 수 있는 전력을 끌어내면서였다. 놈의 단전에서 뿜어져나오는 마나의 양도 폭발적이다. 그 순간.
쩌어엉!
“흥!”
놈이 여유 있는 척 횡으로 치고 들어오는 내 공격을 막았지만. 울리는 공명만 따져봐도 놈 또한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전력을 다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한 수 아래가 맞았다. 그래, 검으로만 보자면 확실히 그렇다.
반격을 들어오는 놈의 창날이 날카로웠다. 동시에 그것이 아슬아슬하게 내 목을 스쳐 지나갔다.
곧장 뒤로 물러섰다. 본능적인 감각이다. 여기서 수를 더 주고받으면 내가 밀린다.
널뛰는 심장을 달랬다.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사실은, 시간은 내 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 순간에도 아드레날린 부스트의 잔여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 끝이 도래하는 순간 내 목이 날아가는 건 자명할 테고.
심장의 고리를 움직일까 생각했다가 바로 접었다. 아직 검신의 축복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악가창법인지 뭔지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비장의 무기는 아껴둬야 한다. 승부를 가르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를 노린다.
발바닥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신성한 파괴자의 롱소드’는 B급임에도 충분히 내 오러를 받아내고 있었다.
쿠웅! 쩌정! 쿵!
상중하로 이어지는 연격을 놈이 부드럽게 막아냈다. 대머리의 창술이 예사롭지 않았다. 방어에 특화됐나 싶을 정도로.
내 움직임이 예상된다는 듯 찌르는 곳마다 녀석의 창이 먼저 가 있었다. 마치 청강멸마검법을 겪어 본 것처럼.
“실제로 보니 더 대단하군. 너. 적이지만 존경한다. 내 레벨이 높아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경을 치를 뻔했어.”
잠시간의 소강 동안, 놈이 감탄 어린 얼굴이 돼서 그렇게 말하는데 그 속뜻이 훤히 보여 우스웠다.
“건방지긴.”
내 심정을 임한나가 대변했다. 힐끔 뒤를 돌아봤는데 팔짱을 끼고 구경하듯 보는 자세와는 반대로, 두 눈은 언제라도 튀어나갈 듯 선명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것보다 정말 녀석이 이곳에 난입할 것 같아 아찔했다.
그때는 그야말로 전면전이 벌어지겠지. 그 꼴을 막기 위해서라도 내가 이겨야 한다. 그것도 2분 30초 안에.
“악가창법의 묘미는 공격에 있지. 네 검은 이제 알겠다. 그러니 내 창을 받아봐라.”
악천후가 씨익 웃으며 자세를 바꿨다. 놈에게서 느껴지는 파동 또한 공격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온다!
콰앙!
왼쪽 복부에서 강한 충격음이 터졌다. 급소는 피했지만 놈이 애초부터 노린 곳은 오른쪽 복부, 그러니까 간이 위치한 곳이었다.
정타로 맞으면 각성자도 어쩔 수 없이 고통을 느끼는 부위 중 하나였다.
“흡!”
억지로 신음을 참아낸 뒤였다. 젠장할 검신의 축복은 아직도 악가창법의 데이터가 부족한지 미동도 없었다.
꽈앙! 쩌적!
날카로운 채찍처럼 악천후의 창이 내 몸 이곳저곳을 노리고 들어왔다. 놈의 말은 사실이었다.
놈의 투박한 손과 달리 공격 루트 하나하나가 창의적이었다. 순식간에 열 번의 합이 지나갔다.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빠악!
“커헉!”
결국, 내 입에서 새카만 피가 흘러 나왔지만 끝끝내 심장의 고리를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믿기 힘들 정도의 인내심이었다. 특히나 방금의 공격은 정말로 아찔했으니.
왼쪽 어깨부터 양단하고야 말겠다는 악천후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놈으로서도 비장의 수가 틀림없었다. 그러니 태양신의 가호도 한순간에 벗겨져 버렸겠지.
죽지 않기 위해서는 뭐라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심장을 기준으로 우측으로 죽 그어진 자상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오러가 깃든 상처는 이래서 문제다. 지혈조차 쉽지 않은 것이다. 대번에 시야가 겹쳤다. 몽롱한 정신을 붙잡았다. 조급한 마음도 억눌렀다. 억누르고 또 억눌렀다.
젠장!
단 두 합. 두 합만 더 버텨낸다면 내가 이긴다. 허나 그게 문제였다. 견뎌낼 수 있을까?
한 수위란 다른 말로 합이 길어질수록 격차가 벌어진다는 뜻이다. 작은 눈덩이가 커다란 산사태가 되듯 조금씩 놈과 나의 뚜렷한 격차가 느껴졌다.
“유연함이라면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 그 검법의 이름이 뭐지?”
놈의 말을 무시하고 돌진했다. 허나 아까부터 그랬듯 악천후는 영악한 포지션을 계속 유지했다.
내가 한 발짝 다가가면 그만큼 멀어진다. 놈이 조금씩 갉아먹듯 나를 요리할 생각인 것이다.
콰앙!
한 번. 창날을 막은 대신 기다란 쇠막대가 왼쪽 어깨를 가격했다. 아직까지 무대 위로 올라오지 않은 임한나에게 문득 고마움을 느꼈다.
쿵!
두 번. 놈은 지독하게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며 또다시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그게 놈의 패착이었다.
오래도 기다렸다. 뇌리에서 터져대는 신호가 악가창법을 완벽하게 분해했다.
그쯤에서 확신했다. 악천후는 하오란의 전력을 본 적이 없다. 그랬다면 이렇게 여유롭게 싸울 생각을 못 했을 테니.
화악!
퍼지는 희열 속으로 악천후의 다음 투로가 훤히 보였다. 검신의 축복은 한 수 차이를 무력화시켰다. 달리 검신이라는 이름이 붙은 게 아니다.
“끝이…?”
놈이 내리긋는 모션을 취하고 있다 해도 그것은 나를 속이기 위함이 분명했다.
아마 다음 동작은 창을 거둔 즉시 다시 한번 내 왼쪽 어깨를 찌르려는 것이겠지. 이번에야말로 심장을 꿰뚫으려 말이다.
이미 다 파훼된 마당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놈이 창을 거둔 그때의 빈틈을 이용해 멀찍이 뒤로 물러났다. 때마침 심장의 고리가 드르륵 돌아갔다.
우우웅-!
놈의 머리 위로 잠깐이나마 공간이 일렁거렸을 때였다. 헛, 하는 숨소리와 함께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뭔지는 몰라도 당했다는 것만큼은 알겠다는 듯이.
전력을 실었다. 앞의 놈을 보스몹이라 상정했다. 일순 다섯 개의 고리가 일시에 빠져나갔다.
하오란의 노골적인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었다. 뒷일을 생각하기에는 앞에 있는 녀석 하나 상대하는 것도 벅차다.
쩌엉!
보이지 않는 해머가 내려찍은 듯 악천후의 몸뚱이가 바닥으로 푹 꺼졌다.
원래 놈이라면 당하지 않을 공격이었다. 겪어본바, 악가창법의 공수전환은 내가 만든 검술과 비견될 정도로 부드러웠으니.
허나 지금은 다르다. 놈의 모든 동작을 훤히 꿰뚫고 있다. 빈틈을 노리고 들어간 공격에 맥을 못 추는 게 당연했다.
가해지는 압박 속에서도 기어이 몸을 일으키는 녀석이 이상한 거지.
“크흡!”
혈관이 터져 피눈물을 줄줄 흘리는 놈이 비틀대며 자세를 잡으려 했다. 원래라면 진심으로 놈에게 찬사를 날렸을 거다.
같은 상황이었을 때 나는 저러지 못할 테니. 허나 놈은 비참하게 죽어야 한다.
놈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저벅저벅.
검을 내린 채였다. 놈은 자세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벅찬 듯했다. 놈의 고민이 여실히 느껴졌다.
마법을 파훼할 수는 있다. 허나, 그 즉시 내 검에 목이 떨어진다. 일전에 말했듯, 동수의 싸움은 턴제게임과 유사하다.
어쩔 수 없는 간극 사이에 벌어지는 일은 막을 수 없는 것이다.
파훼하지 않는다면?
지금 걸어가는 내가 죽음의 사자처럼 보일 거다.
그래. 뭘 해도 죽는다.
“고민이 길다.”
악천후는 내가 바로 앞에 올 때까지도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듯했다.
제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거겠지. 놈의 비참한 최후로 이만한 그림이 없었다.
톡톡 녀석의 심장 어림을 검으로 두드렸다. 언제라도 녀석의 심장을 찌를 수 있다. 간질환자처럼 몸을 떠는 놈은 그걸 막을 수 없고.
“내…가 졌다. …나를 죽여라.”
힘겹게 내뱉은 말이 그것이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등을 숙이면서도 끝끝내 균형을 잃지 않으면서 말이다.
쯧. 그럴 거라면 내가 여기까지 오기 전에 그랬어야지.
“멋진… 승부였다. 내 최후에 걸맞은 상대…였다.”
“나는 아니야.”
흐뭇하게 웃으려던 놈의 표정이 내 말에 굳었다.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뭐…뭐라고…?”
“네 창술. 허접했다는 말이다. 방어는 빈틈이 많고 공격은 단순하기 그지없어. 진심이다.”
악천후의 안색이 파리하게 물들어갔다. 아직도 중력 마법이 놈을 묶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과 별개였다. 놈의 표정은 인생을 부정당한 망연자실함에 가까웠다.
“멋진 승부? 경험치 덩어리일 뿐이다. 너는.”
푸욱!
놈의 심장 어림에 맞닿아 있는 검을 천천히 전진시켰다. 녀석은 그런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놈든 고개를 젓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중얼거렸다.
그대로 다시 롱소드를 회수했을 때. 레벨업 메시지와 함께 놈의 몸이 뒤로 고꾸라졌다.
그래.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라. 그게 네 최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