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BTO (3)
“한다고?”
임한나가 다시 한번 되묻는다. 얘가 왜 이래. 평소에는 그렇게 얼굴 좀 드러내라며 닦달하던 녀석이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란 모습이다.
언뜻 비치는 얼굴이 시무룩해 보여서 내가 더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너, 너. 원래 그런 거 싫어하지 않았어? 몬스터 박멸에만 관심 있던 거 아니었냐고. 지구상에 있는 어쩌구저쩌구는?”
그러면서 묻는다는 게 아카데미 시절부터 이어져 온 내 포부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몬스터의 박멸.
아직도 그게 내 꿈이기는 하다. 물론 2년 후 찾아올 괴한에게서 살아남는다면 말이다.
그나저나 임한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배신감이 잔뜩 묻은 얼굴인데 진짜 뭐라도 잘못 먹은 건가 싶었다.
“생각해 봤는데 좀 유명해져야 더 강해질 수 있겠더라. 나 무슨 일이 있어도 2년 안에는 S급이 돼야 하거든. 그래야 지구상에 있는 어쩌구도 할 수 있고.”
때문에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놔야 했다. 표정이 곧 죽을 사람처럼 돼서 굳이 말하지 않을 부분까지 말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강해질수록 기회가 찾아온다. 다른 말로 이름을 알릴수록 더 강해질 기회가 온다.
하지만 2년이라는 숫자가 충격적인 걸까. 임한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웃는 듯 푸르르 떨리는 입가와 울상인 눈가가 언밸런스했다.
“이, 이년? 너무 빠른데? 야, 욕심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니야?”
그러며 살살해 달라는 말을 덧붙인다.
“아주 날 죽여라 죽여.”
영문을 몰라 임한나를 가만히 쳐다보자 녀석이 한숨만 푹푹 쉬었다.
***
결전의 당일이었다.
BTO는 일성의 본사에서 치러진다. 국내에서 S급 각성자의 힘을 감당할 만한 곳이 각성자 협회와 일성, 단 두 곳뿐이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협회는 절대적인 보안 속에 있고.
카메라는 벌써부터 경기장의 내부 이곳저곳을 찍기 바빴다. 사실 들였을 돈에 비하면 조촐하기 그지없는 환경이기는 했다.
인테리어 하나 없는 커다랗고 하얀 방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연무장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꼴이니.
그럼에도 느껴지는 파동은 각성자협회에서 겪은 천신의 방어막 못지않았다.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흠집조차 못 낼 것 같았다. 심지어 A급에 올라선 나조차도.
“그나저나 회장님은 언제 오신대요?”
이제 곧 시작할 시간인데 최태성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일성은 물론이고 중재를 맡은 협회 측, 심지어 경기장 건너편에는 화신 사람들까지도 모였는데.
그러고 보니 악순청 회장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지금.”
옆에 있던 김석환이 대답했을 때였다. 경기장의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최태성과 협회장,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거구의 남자는 제 몸집만 한 언월도를 들고 위풍당당하게 입장했다. 풍기는 기운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안 느껴지는데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세상을 아래에 둔듯한 오연한 눈. 그가 바로 화신의 주인 악순청이었다.
S급 각성자가 셋이나 동시에 등장한 까닭일까. 장내의 전부가 미동도 없이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순간이었다. 악순청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너였군.”
사냥감을 보듯 이글거리는 눈빛 안으로 굉장한 분노가 담겨있었다. 그러면서 곁눈질로 하오란의 비어있는 팔을 보는데, 악순청은 아쉬운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스승으로서 얼마나 하오란을 아끼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그런 스승을 하오란은 오늘 죽이겠다 공언했고. 사실인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길게 끌 것 없었다. 별다른 인사나, 비무대회처럼 막을 올리는 화려한 어떤 절차도 없었다.
전운이 감도는 침묵 가운데 화신에서 선두로 나선 어린 여자가 있었다. 우리 쪽에서도 곧장 선수 한 명이 올라갔다.
“갔다 오겠습니다.”
정대길. D팀의 원거리 딜러는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D급 중에서는 김세린보다 강하다는 평가가 다수였다. 이번 인사평가 때도 일부러 이 자리를 위해 승급하지 않았다고 하고.
최태성, 김석환, 그리고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저 묵묵히 힘내라는 무언의 응원만 할 수 있을 뿐.
정대길뿐만 아니다. 이곳에 모인 열 명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나왔다. 한석훈의 말이 맞았다. 각성자의 세계란 이렇듯 죽음을 늘 가까이 두고 있는 것이다.
“이태진!”
그러던 때, 화신에서 나온 여자가 내 이름을 대뜸 불렀다. 그것도 유창한 한국어로.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 네놈인데 어찌 뒤에 숨어 남에게 네 일을 맡기느냐!”
갓 스무 살쯤 됐을까. 여자는 주먹을 덜덜 떨면서 내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
“동료의 애꿎은 목숨을 허망하게 보내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나와라! 네놈이 직접 단죄받아라! 하오란 님의 복수는 내가 대신할 테니!”
다른 건 모르겠고 지금 하는 말이 여자의 자의가 아님은 누구보다도 잘 알겠다.
슬쩍 옆을 보자 김석환이 내게 턱짓했다. 내 뜻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최태성은 아예 관심도 없어 보였고.
“올라와라!”
용케 목소리가 안 떨리는 것이 가상할 정도였다. 느껴지는 기운도 그랬다. 그래봤자 채 C급이 안 되는 깊이였다.
나와 생사를 다툰다는 말은 너무 거창했다. 때문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무슨 짓이지?”
여자를 무시하고, 그 뒤에서 팔짱만 낀 채 남 일 구경하듯 쳐다보고 있는 화신에 그렇게 말했다. 정확히는 악순청에게.
그럴 줄 알았지만 돌아오는 어떤 답도 없었다. 속삭이듯 말한 것도 아닌데 놈들은 나를 무시하고, 여자만 쳐다보고 있었다.
김석환처럼 당사자에게 뜻을 맡기는 것과는 다르다. 일종의 명령이었다. 가서 죽으라는.
이유도 뻔하다.
하!
내 감정을 동요시키기 위함이었다. 혹은 악천후. 덩치 큰 창술사에게 내가 가진 수를 보여주기 위해 이런 같잖은 수를 쓰는 것이다.
“나오지 않고 뭐해!”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여자에게 언뜻 동정심이 들려던 찰나, 마음을 굳게 잡았다.
“이태진. 내가 나가….”
“아뇨. 제가 갈게요.”
정대길이 나선다 해도 저 여자는 죽는다. 느껴지는 기운만으로 어떻게 전투가 이루어질지 머릿속에서 훤히 그려졌다. 절정을 향하고 있는 검신의 축복 덕이었다.
누가 상대하든 저 여자의 생은 오늘로 달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차라리 그럴 것이라면 내가 나서는 게 맞다.
“쯧.”
혀를 차고 무대로 걸어 나갔다. 내가 나서자 악순청 등은 마치 사냥에 성공한 하이에나들처럼, 통쾌한 표정을 지어댔다.
특히나 원래 내 대결의 상대인 악천후의 표정은 주먹을 한 대 꽂고 싶을 정도였다. 저 노골적인 얼굴에 담긴 감정은, 정신계 각성자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발악해서 이태진의 정보를 뽑아내라. 그게 안 된다면 이태진의 평정을 무너뜨려라.’
놈의 표정을 해석하자면 이런 식이었다.
정면을 바라봤다. BTO에 나온 투사라기에는, 여자의 손은 덜덜 떨리고만 있었다. 한 번 더 혀를 차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여자에게 말했다.
“너. 이름이 뭐지?”
“무, 뭐?”
여자는 이런 질문을 예상하지 못한 듯 당황했다. 슬쩍 눈길로 뒤쪽을 보질 않나, 좀 전보다 몸을 더 떨지를 않나. 예상에 없던 시나리오인 듯했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무슨 눈치를. 이름을 말해라.”
다시 한번 물었다. 그제야 여자의 요동치던 몸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제 죽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걸까. 여자가 눈을 감고 대답했다.
“화, 화유린. 화유린이다.”
“대가는? 이 짓거리를 하는데 아무 대가도 없는 건 아니겠지.”
“…….”
담담히 물은 질문에 화유린이 입을 다물었다 열었다를 반복했다. 깊은 망설임이 느껴졌다.
“네 최후를 헛되게 만들지 마라.”
“…우리 가족. 우리 가족의 안전이 내게 달렸다.”
그러더니 번뜩이며 나와 눈을 마주친다.
“이태진. 이름을 물어봐 줘서 고맙다. 그러니 죽어다오!”
그 말을 끝으로 화유린이 내게 돌진했다. 혼신의 힘을 담은 게 느껴졌다.
단검을 쓰는 레인저, 화유린. 기억해야 할 안타까운 희생양의 이름이었다.
스악!
신성한 파괴자의 롱소드가 검집에서 빠져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채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전력을 담은 일격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였다. 또한 화신의 잡것들이 바라는 장면이기도 했다.
어떤 스킬도 쓰지 않았지만, 검을 휘두르는 동작 하나만으로도 악천후에게는 소중한 정보가 될 터였다.
화유린이 털썩 쓰러졌다. 그럼에도 그녀의 목은 아직 몸에 붙어 있었다. 붉은 실선 한줄기만 남아 있었다.
씁쓸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화유린의 시신이 순식간에 치워졌다. 눈도 못 감고 죽은 그녀의 생은 이리도 허무하게 마감된 것이다.
슬쩍 눈을 깔았다. 언제 쥐었는지도 모를 내 주먹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젠장. 놈들이 바라는 것이 이것인데, 그런데 들불처럼 끓어오른 분노는 좀처럼 식지를 않는다.
참아라 이태진. 흥분하는 것이야말로 화유린의 목숨을 허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깊게 호흡했다. 놈들이 뭐라 말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다음 나와.”
내 딴에는 침착하게 말했다 싶었는데 그렇게 들리지 않았나 보다.
“다음?”
곧장 의문을 띠는 녀석은 악씨 가문의 막내였다. 원래라면 임한나의 대결 상대인 놈. 얼마 전 제 형이 하오란에게 뺨을 맞을 때 옆에 있던 놈 말이다.
방금까지 팔짱끼며 불구경하듯 우릴 쳐다보던 놈이 황당한 얼굴이 됐다.
“이태진. 너는 내 상대가 아니다. 기다….”
“네 양형제의 팔이 저 꼴이 됐는데 뭐?”
악씨 가문은 오늘 멸족한다. 반드시. 굳이 임한나를 쳐다보지 않아도 그녀가 허락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고맙다, 임한나.
굳이 카메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설마 나를 이대로 내려보낼 생각인가? 하오란의 팔을 내가 잘랐다. 화유린도 내가 죽였고.”
일부러 과장하며 웃어댔다.
“집안 수준 하고는. 직접 복수하지도 못하는 쓰레기 같은 것들.”
각성자들만 보는 것이 아니다. 생중계까지는 아니어도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이 전 세계에 퍼질 것이다. 위신을 생명처럼 여기는 이것들이 참을 수 있을 리가.
“나가라.”
기어코 형 악천후가 동생을 사지로 보냈다. 구태여 무표정한 얼굴을 보여도 소용없었다.
놈들의 계획이 틀어졌다는 게 여실히 증명됐다. 동생의 얼굴이 순간이나마 와락 일그러진 것이다.
화유린을 죽인 일격을 동생 놈도 본 것이다. 깨달았을 것이다. 그게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자신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지.
놈이 대리석 경기장에 올라오면서 하는 생각들이 훤히 보였다.
“내 이름은 악천….”
“시끄럽다. 닥쳐.”
마침내 결심한 듯 굳은 얼굴로 내게 통성명을 하는 놈에게 일갈한 후였다.
놈의 이름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다. 녀석은 최대한 고통스럽고, 치욕스럽게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몸을 날렸다.
콰당!
놈의 다리를 걸자마자 녀석의 거구가 부질없이 허물어졌다. 검을 뽑지도 않았다. 스킬도 쓰지 않는다.
놈의 레벨은 기껏해야 170정도에 불과하다. 일전에 말했듯, A급과 B급에는 넘볼 수 없는 벽이 존재하는 법이다.
퍼억!
주먹으로 놈의 안면을 가격했다.
“커륵!”
곧장 놈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튀어나왔다. 아직도 자신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놈이 바라는 식의 대결은 있을 수 없다. 고수와 하수의 차이로, 아쉽게 놈이 패배하는 아름다운 그림도 없다.
놈. 수치와 모욕 속에 죽어라.
퍼억! 퍽! 퍼벅!
놈의 이빨이 부러지고 코뼈가 휘고 눈알이 빠질 듯 튀어나와도 내 주먹질은 멈추지 않았다.
이곳의 규칙은 단 하나다. 누군가 죽어야 끝난다,
빠악!
놈의 손에 들린 창을 억지로 빼앗아 저 멀리로 던졌다. 놈이 장착한 아이템을 하나씩 해체했다. 종내에 놈은 벌거벗은 채였다.
“끄르륵…!”
허망하다는 놈의 눈빛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각성자다운 최후는 거기에 없었다. 벌거벗은 추남만 있을 뿐. 그렇게 놈의 생명이 꺼졌다.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끓어오르는 분노는 식지 않았다.
“다음. 다음 나와라.”
악천후를 턱짓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