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BTO (2)
한 장 한 장이 내 상체만큼 큰 마법 사전을 다음 장으로 넘기는 데는 굳이 몸을 쓸 필요가 없었다. 의지만으로도 휘리릭 넘어가는 것이다.
허나 이번에는 조금 다른 듯했다. 곧장 메시지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조건 : 아락투스의 예비된 시험이 존재합니다. 공간의 이동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동하시겠습니까?]
시험? 갑자기 웬 시험? 그냥 고리만 만들면 되는 거 아니었어?
듣기만 해도 험난한 과정이 예상되는 단어가 등장했다. 지금껏 ‘아락투스’라는 단어가 붙은 것들 중에 평범했던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분명 그럴 테고.
더군다나 공간이 이동된다고 한다. 당장 추측할 수 있는 곳은, 사막의 여전사 이셀라가 살고 있는 그 외계행성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또 내가 성공할 수 있느냐의 여부보다도. 다른 공간으로 전이됐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느냐가 더 문제였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책을 덮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BTO를 생각해도 중력 마법이면 충분했고, 일성에서 참사가 벌어지기까지는 아직 2년이나 남았다. 그때까지 조금씩 강해지면 된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박스들을 까보기로 했다. 상위 박스들로만 구성된 것들이다. 당장 최태성의 창고에서 수급할 수 있는 아이템만 아니라면 어떤 것이든 좋다.
그런 마음으로 먼저 골드 박스 하나를 열었다. 금빛 화려한 색채가 상자 밖으로 퍼지는 순간.
[근력을 +3 획득했습니다!]
“…….”
뜰 수 있는 최악의 경우가 떴다. 하지만 괜찮다. 아직 골드박스는 네 개나 남아 있으니까.
[체력을 +3 획득했습니다!]
[체력을 +2 획득했습니다!]
[체력을 +1 획득했습니다!]
.
.
.
“…….”
이어지는 박스들도 마찬가지였다. 최악. 최악. 최악. 차라리 브론즈 박스라면 이해라도 한다.
골드박스인데 고작 최대 3포인트? 스탯이 뜬다면 10 정도는 나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럴 수가 있나?
“괜찮아. 진정하자.”
그래. 아직 플레티넘 박스와 그 위의 다이아 박스도 남았 있다. 진짜는 지금부터인 것이다. 액뗌했다 치고….
그런데 왜일까. 좀처럼 불길한 예감이 가시질 않았다.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궁정기사단원 찰스의 갑옷 :
등급 : B
착용레벨 제한 : X
물리 방어력 : 80/80
마법 방어력 : 80/80
효과 : 사용 시 공포 효과에 대한 면역이 발동됩니다.
설명 : 왕궁을 지키는 검, 궁정기사단원 찰스가 생전에 사용하던 갑옷입니다. 특수합금으로 만들어져 탄탄한 내구성과 방어력을 자랑합니다.]
금빛으로 빛나는 게 헬리오스와 닮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지만. 효과는 천차만별이었다. 태양신의 가호라는 봉인을 해제한 헬리오스의 심장과 비교하자면 더 그랬다.
그래,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이번에도 꽝이다. 팔면 돈이야 되겠지만. 지금 내게는 돈보다 중요한 게 당장의 성장이다. 수명을 끌어써서라도 성장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은 심정일 정도니.
어쨌든. 빠르게 다음으로 넘어갔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다시 박스를 열자마자.
[근력을 +10 획득했습니다!]
“개같네 진짜!”
욕지기가 절로 튀어나왔다. 자그마치 플레티넘 박스다. B급 던전은 돌아야 하나가 나올까 말까한 보상이란 말이다!
언제는 브론즈 박스만 까도 A급 스킬이고, 럭키박스를 까면 S급 특성이 나오더니. 이제는 플레티넘 박스를 열어도 이런 거지 같은 것만 뜬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이 언제부터 운이 좋았다고. 아카데미 시절부터 운수 하나는 더럽게 없었는데.
박스를 열어도 별 쓸데없는 것들만 튀어나와서 동기들의 웃음거리가 된 적도 많았다. 단적으로 입사 첫날만 해도 던전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이쯤 되니 다이아 박스도 열기 두렵다. 다이아 박스. 무려 다이아 박스에서 안 좋은 게 튀어나올까봐 무섭다니.
이 위로 마스터와 챌린저 박스밖에 없다는 걸 생각하면 배부른 소리라 욕먹어도 쌌다.
“에라이!”
이깟 박스가 뭐라고.
화악!
다이아 박스를 열었을 때였다. 환한 빛이 내 방 전체를 휘감았다. 동시에 이거다!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은빛 찬란한 광채 속에 파묻혀 있기도 잠시, 빛이 사그라들었다.
제발. 아이템만 아니면 다 괜찮으니!
하지만 예상은 또 빗나갔다. 곧장 뜨는 메시지부터가 아이템을 가리켰다.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신성한 파괴자의 롱소드 :
등급 : B/S
착용레벨 제한 : X
물리 공격력 : 115/115
효과 1 : 성장형 아이템, 성장 잠재력 S
효과 2: 현재 사용자의 능력이 낮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설명 : 고대의 대전사…더 이상의 설명은 현재 사용자의 능력이 낮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아이템이 떠서 실망했던 것도 잠시뿐. 아이템의 설명을 읽을수록 이해가 안 갔다.
B등급밖에 안 되는 롱소드면서 공격력이 115는 무엇이며, 성장 잠재력이 S는 또 뭔데.
A급 전사계열 각성자도 읽을 수 없는 효과 두 개는 뭐라 설명해야 할까.
너무 얼떨떨해서 표정까지 굳어진다. 이름도 그렇다. 신성한 파괴자의 롱소드?
굉장히 낯익은, 아니, 낯익은 정도가 아니다.
[신성한 파괴자의 검술.]
내가 만든 스킬이다.
새하얀 검신의 신성한 파괴자의 롱소드를 보자니 소름이 끼쳤다.
이걸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
나라의 대들보가 무너질 수도 있다. 혹은 더 크게 성장하든가.
일성에 관한 이야기로 전국이 들썩였다.
아니, 일성과 화신 두 기업의 대결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눈이 지켜보고 있었다.
치러지는 방식도 그랬다. 전통적인 각성자 간의 대결. 초법의 영역인 것이다. 고루하고 지난한 법정 다툼 대신, 화끈하게 생사를 걸고 싸우는 거다. 승자가 모든 걸 가져가는 방식도 그랬다.
일성이 이기면 화신의, 화신이 이기면 일성의 주가지분을 모두 가져간다. 정확히는, 각 수장들이 보유한 지분만큼 승자에게 넘기는 승자독식 구조였다.
이 화끈한 방식의 경합은 의외로, 혹은 예상대로 사람들의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전쟁 나는 거 아니냐며 불안에 떨던 사람들도 결국엔 그래서 티비 중계는 어디서 하냐고 물어볼 정도였으니.
“이거, 무조건 따내야 한다.”
박중현 부장, 이제는 JBC의 박 부국장이 된 남자가 두 눈 시뻘겋게 뜨며 말했다.
“말이야 쉽죠. 지금 달려드는 애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MBN은 아주 작정을 했던데요?”
옆에 있던 조연출이 볼멘소리를 했다. 성공이 확보된 프로젝트가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따내야 할지 감도 안 잡혔기 때문이었다.
“그 새끼들은 갑자기 왜 그런대? 잘하던 예능이나 처 찍을 것이지.”
“세계 최강자전 말이에요. 이태진 우승한 비무대회. 처음 중계 제안한 애들이 걔네들이잖아요. 이번엔 안 뺏긴다고 아주 독을 품었더라고요.”
“얼씨구? 뺏겨? 개뿔이. 돈 좀 올리니까 관심 없다고 줄행랑친 게 누군데. 그리고 걔네들이 중계했으면 그 시청률이 나오긴 했고?”
“어쨌든 MBN에서 이번에 제안한 가격이 백억이래요. 넘보지 말라 이거죠.”
“이런 미친 것들. 걔들은 돈을 땅에서 찍어내나. 그랬다가 망하면 어쩌려고?”
박 부국장의 말에 조연출이 글쎄다 하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부국장님은 이게 망할 것 같아요?”
“아니. 내 아들이 휴대폰으로 찍어도 시청률 50퍼는 나오지. 광고 완판은 당연하고. 누가 나오는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헌터 중 한 명과 신예가 목숨을 걸고 출전한다.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이것들만으로도 화제성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광고 완판?
단가가 얼마부터 시작인지가 문제였다. 분위기는 월드컵, 혹은 그 이상이라 봐도 됐다.
“그래 뭐 돈이야 그렇다 치자. 국장님이 무조건 밀어붙이라고 했으니까. 근데 일성이 문제야. 그래서 걔들이 원하는 조건이 뭔데?”
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하는데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한다더니. 지금 방송사들의 태도가 꼭 그랬다.
“요지부동이죠 뭐. 중계는 안 한다, 결과만 통보한다. 솔직히 일성쯤 되는 대기업에서 그런 식으로 일 진행하는 거. 국민들한테도 무책임 한 거 아니에요?”
“그걸로 기사 몇 줄 쓰는 건 어때? 거대기업의 무책임한 도덕적 해이. 국민의 알권리는 어디로? 이런 식으로. 어때?”
“좋죠. 근데 부국장님 아들이 몇 살이라고요?”
“열 살. 그건 왜…. 에라이. 답답해서 그러지 답답해서. 넌 일성에 아는 사람 없어? 그쪽에 뭐 뿌리는 거라도 있을 거 아니야.”
“있죠. 근데 걔들도 모르는 눈치더라고요. 홍주연 팀장이잖아요.”
일성의 홍보팀 홍주연 팀장. 깐깐하기로 소문난 여자다. 매스컴을 상대하는데 아주 도가 텄는데, 기자들 사이에서도 더럽고 치사하다고 정평이 나 있다. 그러니까 그쪽 세계에서는 극찬이나 다름없는 평가였다.
“아오. 이거 어떡하지? 내가 홍주연이랑 밥이라도 한 끼 할까?”
“그런다고 그 여자가 쥐뿔이라도 듣겠어요? 차라리 그것보다는.”
“뭐 누구? 홍보팀에 아는 사람 있어?”
“네. 김주현이요.”
“누구? 어째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예전에 이태진 최초로 인터뷰 한 사람 말이에요. 우리가 영상 1억에 산다고 질렀던.”
“아!”
그 유튜버. 생각났다. 전해 듣기로는 결국 인터뷰 영상의 원본은 일성이 가져갔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다.
“걔가 일성에 있어?”
“그런가 봐요. 저도 얼마 전에 알았는데 홍보팀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이태진 전속 매니저로.”
“출세했네.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인데? 결국 홍주연 선에서 커트 되는 거잖아.”
“에이. 부국장님. 이 사달이 난 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이태진이 만들었잖아요 결국.”
“어?”
“이제 감이 와요? 뭐 최태성도 이태진 말 한마디에 껌벅 죽는 거, 이제 비밀도 아니고. 이태진만 어떻게 꼬시면 되는데. 근데 여기서 또 재밌는 게 매스컴 싫어하는 이태진이 김주현 그 여자 말은 또 잘 듣는다고 하더라고요.”
“둘이 뭐 있어?”
“그럼 없겠어요? 김주현이 얼마나 대단한 경력이 있다고 이태진 매니저를 맡겠어요.”
딱!
부국장이 손가락을 튕겼다. 이거 냄새가 난다. 될 것 같은 냄새가. 마침 인연도 있겠다.
“그 사람 전화번호 아직 가지고 있지? 통화되면 바로 넘겨라!”
부국장은 그 길로 국장실로 뛰어갔다. 예산안 100억. 아니, 101억을 만들어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
“참 신기하네요.”
김주현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인생이 꼬일 때는 답도 없이 꼬이더니. 풀리려니까 또 아우토반이 따로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입사할 수 있었던 일성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낸 성과라고 하기엔, 한 게 너무 없었다.
그저 인터뷰 하나 했다고 차기 S급 각성자가 확실할 사람의 매니저가 된다는 건 그녀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됐다.
“청탁 많이 들어오지?”
홍주연이 알만하다는 듯 쓰게 웃었다.
아무렴. 대한민국 신예, 아니. 이제 신입이라는 말을 쓰기도 민망할 만큼 위상이 달라진 이태진이다. 그것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오죽하면 일성 내에서도 눈 깜박이는 것보다 이태진이 레벨업 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말이 돌고 있을까.
“이번엔 JBC요.”
이골이 난다는 듯 김주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쪽이면 믿을 만은 한데.”
홍주연이 입술을 핥았다.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모습이었다.
“어떡할까요?”
“어떡하긴. 해야지. 회장님 허락은 받아왔어. 문제는…. 우리 슈퍼스타 이태진의 허락인데.”
“회장님 허락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홍주연이 피식 웃었다.
“우리 회장님이 누구 밀어주고 있는지 알지? 회장님 말씀이, 중계권은 이태진한테 전권으로 맡긴다고 하시네.”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홍주연이 이마를 문지르기도 잠시, 김주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자기! 자기가 한 번 설득해봐. 응? 주현 씨 말은 잘 듣던데.”
“제 말을 잘 듣는다고요?”
‘아닌데. 나도 눈치 보기 바쁜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어서 식사 식사는 하셨냐고 묻기도 무서울 정도였다.
하지만 홍주연은 굳게 믿고 있었다. 김주현이라면 무조건 성공할 것이라고.
“힘들걸요? 걔가 메스컴 그런 거 정말 싫어해서.”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임한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태진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며, 내가 설득해야 들은 척이라도 할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흐음. 두고 보시죠.”
그런 임한나의 말에 홍주연 또한 자신만만하게 김주현을 내밀었다.
그리고 승부는 곧장 성사됐다. 그 길로 임한나와 김주현이 이태진을 찾아갔다.
“이, 이태진 씨. 이번 화신과의 대결 중계권에 대한 문제로…….”
더듬더듬거리는 김주현을 보며 임한나는 확신했다. 승리는 자신의 것이라고.
“네. 할게요.”
하지만 이태진의 대답은 자신의 예상과는 한참 달랐다. 임한나가 보기에는 그랬다.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이태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김주현을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