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그것 (2)
이제껏 나 말고도 누군가는 미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능력이 부여되지 않았을까 하고 고민했던 적이 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 마주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그게 지금, 그리고 이런 식일 줄은. 정말로 상상도 못 했다.
“…….”
발바닥에 모은 마나를 날려버렸다. 그때쯤 하오란은 일성 고위 각성자들에게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놈은 여유로운 얼굴 그대로 나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놈의 여유는 오만이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놈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 당장은 놈의 혀가 제 목숨을 연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태진. 물러서.”
임한나의 말을 무시하고 하오란에게 걸어갔다. 놈에게 턱짓하며 말했다.
“저 놈이 저한테 따로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꽤나 중요한 말.
“제가 한번 얘기해 볼게요.”
내 얼굴이 꽤나 심각하게 보였던 것 같다. 안 된다고, 놈을 여기서 죽여야 한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다들 멍하니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말은 할 줄 아나 보네. 따라와.”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떤 말을 지껄이나 들어보자. 적진의 한복판까지 온 녀석이 온전히 혓바닥 하나로 살아나갈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시간은 내 편이다. 괜한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장담컨대 놈은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
응접실에 올라온 후, 하오란에게 이렇게 말하려 했다.
너도 미래를 볼 줄 안다고?
그런데 놈이 응접실을 구경하듯 서성이는 걸 본 순간 생각을 바꿨다.
녀석이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이거나, 찻잔을 만지거나, 팔짱을 끼는 이유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놈은 심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부던히 애쓰고 있었다. 들었던 대로, 머리가 비상하다. 어디서부터 상대를 압박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말투부터 바꿨다. 참고할만한 교과서도 충분했다.
미래에서 보고 들은 것들, 예컨대 시타둠교의 교주, 세계정복을 꿈꾸는 협회장이 된 나를 상상하기만 하면 됐다.
가면을 쓰듯 미래의 내 목소리를 덧씌우며 말했다.
“앉아.”
이렇듯 내 입에서 자연스러운 하대가 튀어나왔다. 녀석은 그게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말대로 자리에 앉았다.
놈을 턱짓하자 자판기의 버튼을 누른 듯 놈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일전에 그쪽에 대한 분석이 담긴 영상을 확인했습니다. 이태진 씨. 당신 또한 마찬가지겠죠. 어떻습니까? 제게서 느껴지는 ‘파동’이 당신이 머릿속에서 그렸던 것과 같습니까? 그럴 리가.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상상하던 이태진 씨보다 훨씬 많이 성장했죠.”
인정했다. 놈은 영상 속에서 봤던 모습보다 훨씬 강해진 모습이었다. 순수한 무력만으로 따지자면 나보다 한 수 위다. 순수 무력만으로는 그렇다.
“참으로 웃기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 운명 말입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빤히 녀석을 쳐다보기만 했다. 속으로는 그 생각뿐이었다. 과연 녀석이 내 심장에 둘러진 고리를 발견했는지에 대한 생각.
그런데 생각해 보니 금방 답을 알 수 있었다. 나부터가 하오란에게서 시스템이 부여한 힘 외의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놈이 고리를 발견했을 리가.
“처음에는. 그때는 그저 우연의 일치라 여겼습니다. S급 특성을 내가 얻었듯이, 다른 사람도 얻을 수 있는 거니까.”
녀석의 특성은 ‘제우스의 투신창술.’ 이름만 다를 뿐이지 검신의 축복과 유사한 특성이라 보는 게 맞았다. 나는 검, 녀석은 창으로서 신기에 가까운 잠재력을 품은 것이다.
찻잔의 물을 한 모금 들이킨 녀석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당신의 행보를 보면 저와 닮았다는 느낌을 도무지 지울 수 없더군요.”
“쥐새끼마냥 뒷조사를 했군.”
“내 형제들에게 이간질을 시킨 것에 비하면 이런 것쯤은 애교이지 않습니까?”
의미 모를 말을 하던 녀석이 뭐가 됐든 상관없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반응을 보니 역시 제 예상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당신도 미래를 볼 줄 아는군요. 선택된 자. 당신도 나와 같은 부류입니다.”
“거창하기도 해라. 네놈 같은 부류를 안다. 작은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이 특별한 줄 착각하는 인간. 듣기로 10년 동안 D급을 벗어나지 못했다던데. 왜인지 알 것 같다. 지금 보니 더 그렇군. 넌 특별할 것 없는 D급 나부랭이가 걸맞다.”
구태여 그렇게 놈을 깎아내렸다. 당황스러운 속내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녀석에 대한 내 평가는 승부와 별개로 호의적이기는 했다.
긴 시간 D급에 머물면서도 매일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지. 그 노력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에 하오란을 우습게 볼 수 없었다.
“예. 그런데 지금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특히나 우리 같은 신인류에게는.”
예상했지만 하오란은 이깟 도발 따위에 휘둘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 미간이 꿈틀거린 것은 놈이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놈이 우리를 지칭한 단어가 영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신인류. 그 단어가 묘한 불쾌감을 줬다.
“밤을 새워서라도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심정입니다.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 전지한 ‘그분’을 처음 영접했을 때의 심정이 어땠습니까?”
“전지? 그분?”
“우리를 이토록 고강한 경지에 오르게 만드신 분 말입니다. 마땅한 이름이 없어 그렇게 부릅니다만. 전지라 불러 마땅하지 않습니까?”
하오란은 마치 꼭 그래야만 한다는 듯, ‘그것’에 대한 지극한 경외를 보였다. 좀 전의 기묘한 불쾌감의 정체였다.
“처음에는 시스템이 ‘그분’의 정체인 줄 알았습니다. 허나 당신도 경험했을 여러 가지 모순점을 확인한 후. 그분은 시스템의 위에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때 제가 느낀 감격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하오란이 ‘그것’에게 보이는 경외는 일장로를 포함한 시타둠교의 신도들과 다르지 않았다. 감격에 눈을 감고 몸을 부르르 떠는 놈에게 한마디 했다.
“꼭두각시 신세를 좋다고 떠드는 꼬라지 하고는. 더 지껄여봐.”
“이해합니다. 저 또한 ‘그분’을 부정했던 시기가 있었으니. 꼭두각시? 아닙니다. 이태진 씨. 저희는 신의 사자라 부름이 마땅합니다.”
놈은 내 비아냥은 안중에 없다는 듯 눈빛을 반짝거렸다.
“피를 나눈 형제는 없다만. 꼭 당신이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런 겁니다. 우리의 운명.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뭐?”
“어쩌면 세상에 둘밖에 없을 신인류가 내일이면 서로에게 칼을 겨눠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하죠. 안 그렇습니까?”
“안 그렇다. 넌 내 손에 죽는다. 오늘이 됐건 내일이 됐건.”
딱 잘라 거절했다. 뭔 소리를 늘어놓나 했더니. 최고조로 높아졌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푹 꺼졌다. 결국 녀석이 한다는 장황한 헛소리의 결론은, 이쯤하고 화해하자는 뜻이었다.
김찬현의 손을 빌려 나를 습격했던 것과 더불어 한석훈의 팔을 잘랐다. 그것만으로 하오란이 죽을 이유는 충분했다.
죽음이 아니라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든가.
“더 들어줄 가치도 없군. 할 말은 그게 끝이냐?”
“이태진 씨는 저를 죽일 수 있다 확신하는군요.”
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확신하시는 이유는, 역시나 당신이 본 미래에서는 제가 죽었기 때문이겠죠. 아마 유언은 이런 식이었지 않습니까?”
처음으로 놈의 표정이 구겨졌다.
“모든 게 예비 돼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느냐고.”
못 할 말을 했다는 듯 하오란이 잠시간 말을 멈추고 바닥을 응시했다. 말문이 막힌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봤던 미래에서, 놈이 똑같은 유언을 남기고 죽었었다.
하오란이 자신이 죽은 미래를 봤다는 뜻일까? 아니, 그것보다는.
별안간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네놈이 본 미래에서는….”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예. 제 손에 당신이 죽고 있었습니다. 방금과 같은 말을 하면서요.”
안면 근육을 강제로 경직시키고 봤다. 녀석에게 내 표정을 곧이곧대로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생각은 그다음이었다.
저 말이 사실일까?
당연히 거짓…이라기엔 하오란의 심장박동은 아까부터 평이했다. 사람의 자율신경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아니다. A급에 달하는 각성자가 불가능할 일이 뭐가 있다고. 당장 나도 마음만 먹으면 맥박을 조절하는 일 따위야 얼마든지 가능한데.
“제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혹, 제가 본 미래에서 제가 죽고, 그것을 막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오란이 굳은 얼굴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대결 전에 당신을 죽일 기회가 수없이 많지 않았습니까. 지금에 이르러서는 당신도 알 텐데.”
반박하지 못했다. 하오란이 말한 그대로, 놈이 나를 죽이고자 했다면 수없이 많은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만 해도 하오란은 이런 식으로 제 패를 까면서까지 등장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심정을 끝끝내 숨기며 말했다.
“큭. 네 말마따나 과연 전지하신 그분께서 그런 짓을 허용하셨을 리가. 결국 네놈은 죽음이 두려워 여기까지 찾아왔군.”
슬그머니 기세를 끌어올렸다.
“진짜 자신 있었다면. 네가 그토록이나 떠받드는 그분께 온전히 미래를 믿고 맡기면 될 것을. 불안했던 거지. 혹시 정말 죽는 게 아닐까 하고. 전지전능한 그분에 대한 믿음이 그것밖에 안 되는 거야.”
주도권은 내게 있다. 놈을 죽이고자 한다면 언제든 그렇게 할 수 있다. 지금도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한석훈과 김석환을 부르면 될 일이다.
아니,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임한나 한 명만 가세해도 놈의 목을 분질러버릴 수 있다.
“어디 계속 지껄여 봐. 재미라도 있으면 살려는 줄테니.”
“…이태진 씨. 제가 솔직한 만큼, 당신도 그렇게 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저희 둘 다 죽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놈이 구미가 돋는 말을 꺼냈다.
“우리 둘 다 죽지 않는다?”
“당신이 모르는 미래가 있습니다. 알려드릴 수는 없지만, 저희 둘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미래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겠군요. 허나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미래를 바꿀 방법 말입니다!”
열기를 띤 놈의 얼굴이 잔뜩 상기됐다. 놈의 말을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일단은.
“원인의 싹만 잘라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계속.”
“애초에 일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된 이유 말입니다. 당신이 습격받은 그때, 암습을 지시한 사람은 화신 그룹의 회장 악순청입니다. 악순청만 사라지면 될 일 아닙니까? 또한 비루한 제 목숨 따위보다, 명분에서부터 그편이 더 나을….”
“자기 하나 살자고 스승을 팔아? 역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지.”
“스승…허울 좋은 말일 뿐입니다. 제 고루했던 과거사를 들려드리기에는 시간이 없는 듯한데.”
피식 웃었다. 끝없는 조롱에도 녀석은 제 나름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1년 전 이태진 씨를 습격한 일도, 이태진 씨의 스승이 저를 암살하려 한 것도. 태풍의 격랑에 휘말리듯 저는 그 모든 일에 휩쓸렸을 뿐, 주도적으로 관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당신 스승의 팔을 자른 것은 사과드립니다. 요지는, 단지 제 억울한 입장을 한 번 살펴 달라는….”
“아주 변호사까지 선임할 기세야. 변명은 거기까지 하고. 악순청을 죽일 수 있다는 것처럼 말하던데. 방법이 뭐지?”
“말씀드릴 수 없지만.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놈은 반드시 그 방법이 있다는 것처럼 자신감을 내보였다. 볼수록 웃기는 놈이다.
“좋다. 나를 습격한 대가로 악순청의 목을 받고, 그러면 내 스승의 팔은 어떻게 할 거지? 태풍이니 격랑이니 헛소리하지 말고. 네놈이 내 스승의 왼팔을 자른 건 사실잖아.”
“제 오른팔을 드리겠습니다.”
망설임 없이 녀석이 그렇게 말했다. 웃기지도 않은 소리였다. 우리같이 무기를 쓰는 각성자에게 한 팔이 가지는 의미가 어떤 것인데. 천금을 줘도 바꾸지 않을 그것을….
어?
뿌드득!
하오란이 말을 끝맺기 무섭게 제 오른팔을 뜯어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붉은 피가 놈의 팔을 따라 응접실에 확 퍼지기도 잠시, 놈이 일언반구도 없이 지혈을 시작했다.
이런 미친놈. 그 말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놈의 저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멍하게 있었더니.
“혹여나 의심을 차단할까 하는데.”
하오란이 잘린 오른팔을 내게 넘겼다. 봉합수술이나, 회복 스킬을 쓰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진심이다. 놈은 진심으로 나와의 대결을 원하지 않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매우 강렬하게 말이다.
“이것으로 인해 저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당신을 쓰러트리지 못하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