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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74화 (74/170)

74화 그것 (1)

극비리에 일성에서만 알음알음 퍼지는 이야기가 있었다. B급 이상이 아니라면 열람조차 불가능한 보고서의 형태로.

이태진이 B급 던전에서 어떤 활약을 펼쳤는지에 대해서였다.

[단일로 무찌른 몬스터의 숫자만 70마리.]

[상황파악 A+, 던전분석 A+, 인원통제 A+]

[보스전 당시, 혼자 리저드 퀸의 체력을 70% 이상 소모시켜 파티 부상 최소화….]

정철규와 이규호가 작성한 보고서가 김석환을 거쳐 최태성에게 전달되기까지도 순식간이었다.

“이게 진짜야?”

김석환이 굳은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원탁에 앉은 스물다섯의 고위급 헌터들이 모인 자리였다.

“예.”

평소처럼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회의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엄중하게 과실을 따져야 할 때였다.

“죄송합니다.”

백인호가 고개를 숙였다. 제일 처음 던전의 구성을 조사한 게 자신이었다.

별 것 없는 던전이라 치부했던 게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감봉이나 근신 따위의 징계로 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B팀 최대전력과 A팀 두 명을 한순간에 잃을뻔했다.

“알긴 아네. 이태진 아니었으면 넌 회장님한테 모가지 따였어.”

눈으로 보고서를 읽어내려가던 플래시가 혀를 쯧쯧 찼다. 그러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디테일하게 적힌 공략과정을 글로만 봐도 그림이 그려졌다. 어떻게 싸우고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어지간한 A급 던전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던전의 난도가 높았다.

“그 친구 아니었으면 싸그리 전멸이었겠네. 쯧.”

몇 번이나 보고서를 읽던 플래시가 혀를 찼다.

“특히나 다섯 번째 전투가 고비였겠어.”

“뒤질뻔했죠.”

맹독에서 회복한 정철규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서도 당시의 고통이 생각났던지 어쩔 수 없이 정철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산성도만 따져도 평범한 리저드보다 세 배는 더 높아. 철규가 골골댈 정도면 맹독은 따질 필요도 없겠어. 그 와중에 칼귀신께서는 처음 간 B급 던전을 아주 깔끔하게 캐리하셨고. 얼레? 거기에 팀장 역할까지 도맡았네? 너희들 제정신이야?”

“어쩔 수 없었어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이번엔 윤진아가 그렇게 대답했다. 윤진아는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선택에 떳떳했다. 그 이상의

“이것만 보면 아주 문무겸비한 사기캐가 따로 없어.”

치열했던 전투가 나노 단위로 분석됐다. 보고서에 쓰인 이태진의 활약상이 사실이라면 칼귀신이라 할 만했다.

전투뿐만이 아니라 작전을 세우는 능력에서는 더 그랬다. 미래를 본 것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보고서를 훑어가던 백인호는 말없이 인상을 찌푸리기만 했다.

“어이가 없네.”

이태진의 활약은 종이에 쓰인 데이터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B급 던전 이상에서 나오는 부산물들은 여러 가지로 쓰인다. 특히나 리저드의 피나 가죽은 실험재료로 값비싸게 팔리고 있고.

일성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다. 플래시가 못 믿겠다 하면서도 끝끝내 수긍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공룡이라 불려도 될 리저드 퀸의 시체가 연구소에 떡하니 존재했다.

“미안하다.”

백인호가 정철규를 향해 사과하자.

“저 말고 이태진한테 하셔야 할걸요. 아니지. 고맙다는 인사가 먼저겠네요. 이태진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전멸당했을 테니까.”

“그나저나 여기 적힌 스킬은 뭐야? 염동력을 기반으로 한 것 같기는 한데. 당기고 밀고 쓰러트리는 걸로도 모자라서 직접적인 공격에도 활용된 것 같네? 여기에 터져 죽은 것들만 서른이잖아.”

플래시가 신기한 듯 윤진아를 쳐다봤다. 이 정도 범용성의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면 보고되지 않았을 리 없는데.

“크흠.”

윤진아가 대뜸 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뭐야. 진짜였어? 스킬 확장을 그런 식으로도 할 수 있다는 거야? 완전히 다른 분야 아니야?”

“아, 네, 뭐. 넘어가죠.”

“에라이, 치사하고 더러워서 더 안 묻는다.”

윤진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터를 속였다고 추궁당해도 할 말 없었는데. 물론 그렇다 해도 이태진을 팔아넘길 생각은 없었지만.

이태진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개인적인 일이었다. 지금껏 이태진이 검신이라느니, 제2의 성요한이라느니 치켜세워도 딴 나라 이야기 듣듯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는데.

‘어쩌다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잘 보여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평소 가지고 있었던 원소 계열 스킬에 대한 의문과 궁금증.

스킬의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그런 의문이 더해져 갔다. 힘의 원천이 어디서 나오고 원리는 또 어떻게 되는 걸까.

그것만 알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 같은데. 리저드 퀸에 대적하기 직전, 그런 대화를 나눴었다.

‘음. 스킬이라기보다는, 초능력에 가깝죠. 눈치챈 거 아니었어요? 뭐 자연계에 대한 이해도가 필요하긴 한데…. 더 자세한 걸 말해주기에는 장소가….’

슬쩍 흘린 말에 자신이 그토록이나 궁금해하던 답이 숨어 있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진리일 법한 말을 해대는데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알아내야 할 답이었다.

“그나저나 A급이라니. 비약 아니야? 이 부분만큼은 내가 믿기 힘든데.”

백인호가 넌지시 딴지를 걸었다. 여기서 이대로 일을 끝마치면 자신이 모든 책임을 떠안게 생겼다. 무엇이든 빌미를 잡아야 했다.

이태진은 기껏해야 160레벨이었다. 잘 쳐줘봤자 170정도.

던전 한 번 돌았다고 170레벨 짜리가 200이 된다? 지나가는 개도 안 믿을 소리였다. 그간 봐왔던 이태진의 대단하다는 자질을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뭐, 보여줬던 힘만 보면 그래요. A급이라 불려도 손색은 없습니다.”

윤진아가 심드렁한 투로 확언했다. 그 정도의 무력과 마법까지 쓰는데. A급 헌터가 아닌 것도 우스웠다.

그쯤 되자 백인호도 황당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냉정하다던 윤진아가 왜 저렇게 이태진 편을 드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겨우 목숨 살려줬다고 저럴 사람이 아닌데.

“제가 확인 안 해줘도 조만간 알게 될 겁니다. A급 맞아요. 걔.”

***

원래는 이렇게까지 급격한 성장을 예상하진 못했었다. 기껏해야 B급 최상단에 올라설 것이라, 그리고 네 개의 서클 정도면 된다고 여겼었다.

가상의 심상 속에서 그려본 하오란에게는 그 정도로도 약우세를 점쳐볼 만했다. 그러했던 계획이 한순간에 틀어졌다. 엄청나게 좋은 쪽으로.

우연에 우연이 겹쳤다. 아니, 본래부터 예정된 필연이라 보는 게 맞았다.

하필 아락투스의 가호 아래에 있는 던전에 들어간 것부터. 던전의 난이도만큼이나 넉넉한 경험치를 받은 것도, 몬스터의 마기가 내게 흡수된 것까지.

단순히 우연이라 부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의 수작이라 부르는 게 맞지. 늘 그렇듯 죽음에 필적할만한 위험과 고통이 동반된 수작.

얼굴에 칭칭 감긴 붕대 사이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상태창.”

[이름 : 이태진.

레벨 : 170

스킬 : 오러 블레이드(A), 아드레날린 부스트(A), 상급검술(A), 일점폭발(B), 집중(B), 도약(B), 청강멸마검법(C)

특성 : 검신의 축복(S), 무아지경(B), 인내하는 자(B), 전사(B)

체력 : 225

마력 : 203

근력 : 325

민첩 : 250]

이번 던전에서만 스무 개에 달하는 레벨을 올렸다. 레벨이 아니라 스탯만 따졌을 때는 200레벨에 달하는 수치.

마침내 A급에 도달한 것이다.

과연 한석훈이 말한 게 맞았다. B급과 A급은 한 차원 정도 윗단계가 아니었다.

특히나 300을 돌파한 근력 수치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이전과 궤를 달리할 정도였다. 근섬유 한 올 한 올에서 느껴지는 자극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줬다.

실제로도 그랬다. A급 헌터가 마음만 먹는다면 불가능한 일이 없었다. 괜히 국가 차원에서 데이터에 등록된 A급 헌터들을 일일이 관리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마음먹고자 한다면 도시 하나를 궤멸시킬 수도 있는 일이기에.

더불어.

우우웅!

다섯 개의 고리가 심장을 둘러싼 채 제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더 이상 검술을 보조하는 용도라 부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품은 채였다.

애초에 이계 군단장에게서 비롯된 힘이었다. 보조 수단에서 끝나기에는 품고 있는 잠재력이 무한했다.

능력에 대한 점검이 가능하다는 말은, 이제 슬슬 일어나도 된다는 뜻이었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세우려던 문득.

생각난 게 있었다. 내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임한나.

얘는 왜 집에 안 가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그런데 넌 언제까지 여기 있냐?”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겨진 직후부터 임한나가 내 옆을 떠나가지 않고 지키고 있었다. 마치 병 걸린 강아지 쳐다보듯 나를 보는데 기분이 묘했다.

“배고파?”

지금도 그렇다. 내가 몸을 꿈틀거리기만 해도 옆에 있던 임한나가 벌떡 일어나 물이며 식사며 과일과 간식까지 챙겨주기 바빴다.

그것만 하면 참 고마운데. 저 눈빛. 제집에서 키우는 반려견 보는 듯한 저 눈빛이 상당히 마음에 걸린다.

“내 말 못 들었어?”

“넌 지금 안정이 필요해. 여기 붕대 풀린 것 좀 봐. 안 되겠다. 내가 다시….”

“아 왜 이래! 다 나은 지가 언젠데.”

당장 얼굴에 빙글빙글 감긴 붕대부터 다 떼어냈다. 오버도 적당히 해야지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A급 각성자는 체력회복부터가 초인적이다. 지독한 중독상태는 물론이고 덜렁거리던 왼손과 뻥 뚫린 복부까지도 씻은 듯 깨끗이 나았다.

더군다나 일성에서 내게 들이부은 포션값만 해도 7억 원이라고 하는데. 병상에 더 누워있는 게 사치지.

“네 얼굴 좀 봐. 너무 개판이잖아.”

“…….”

“이래서는 BTO고 뭐고 나가지도 못할 판이야. 차라리 내가 하오란인지 뭔지 죽여줄까?”

임한나가 멀쩡한 내 얼굴을 가리키며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며칠 못 씻어서 꾀죄죄하기는 한데 그 정도인가?

임한나가 내 얼굴을 물티슈로 벅벅 닦는 것까지가 한계였다.

“나가!”

녀석을 병실에서 내쫓은 즉시 옷을 갈아입었다. 동시에 앞날에 대해 생각해 봤다.

앞으로 삼일.

하오란과의 생사결이 조만간이었다. 일성에서 거액의 돈을 내게 쏟아부은 것도 그 때문이겠지. 몸도 멀쩡하겠다 마지막으로 내 능력치를 점검할 시간이 필요했다.

곧장 회사로 달려갔다. 당연히 옆에서는 임한나가 쫄래쫄래 따라왔고. 그런데 일성 건물 앞이 시끌벅적했다.

평소에도 그렇긴 했는데 영 분위기가 이상하다. 그러던 것도 잠시, 나도 모르게 인벤토리에서 잠자고 있던 아이템을 장착하고 말았다.

“이런 미친.”

곧이어 임한나 또한 몸을 굳힌 채 눈을 부릅떴다. 그럴만했다.

“드디어 만나는군.”

멀끔한 남자 하나와 떡대 두 명이 본사 앞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엄청 놀랐다. 이렇게 대놓고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라서. 그것도 적진 한복판이라 할만한 곳에.

순간 꿈을 꾸나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오란이 내 앞에 있었다. 노이즈가 가득한 영상에서 봤던 그대로 얼굴에는 한가득 여유를 담고서.

“저 새끼가 미쳤나.”

순식간이었다. 건물 안에서 일성의 헌터들이 한순간에 몰려 나왔다. 언제라도 준비됐다는 듯 손에는 각자 무기를 든 채였다.

특히 가장 선두에 선 플래시와 한석훈은 죽일 듯 녀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명령만 떨어지면 단숨에 놈을 벨 수 있게.

하오란이나, 녀석의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두 놈이나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래서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녀석이 S급이 아니라면. 놈은 무슨 수를 쓰든 여기서 죽는다. BTO고 나발이고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앞에 있는데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런 생각으로 놈에게 달려들기 직전이었다. 하오란의 입술이 뻐끔 열린 것도 그때였다.

-당신도 미래를 봤겠죠. 어떻습니까. 거기서 본 미래에서 내가 죽습니까?

놈의 그 한마디가 내 몸을 멈춰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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