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B급같지 않은 B급 (6)
[독 내성이 대폭 상승합니다!]
[대부분의 독기는 감히 침범할 수 없습니다.]
네 번째 고리가 심장 바깥으로 안착한 것과 동시에 뜬 메시지였다. 친절하지 않은 시스템께서 이유를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독 내성의 상승은 아락투스의 마기 때문일 것이 확실했다.
이런 효과까지는 생각 못했는데. 의외의 소득이었다. 더불어 충만한 기운이 심장에 가득했다. 단전과 비교하자면 8할에 가까운 양이었다.
이 정도라면.
직전의 작전을 회상했다. 내가 탱커와 메인딜러를 맡고, 이규호와 윤진아가 후방을 지원하고. 어쩌고저쩌고했던 말들.
훌륭한 전략이다. 당연하지. 이규호가 차후 대책으로 보고서에 적었던 내용이니까.
그런데 그건 내가 고리 세 개일 때의 이야기고. 지금에 와서는 번잡하고 시끄러운 작전이 됐다.
힘으로 짓누르면 그만인데 뭐하러.
강화된 능력에 신난 것이 아니다. 속전속결로 전투를 끝내려면 이것이 최선이다.
네 번째 고리가 완성된 이후 확신할 수 있었다. 앞에 있는 것들 정도는 혼자서 처리할 수 있겠다고.
콰앙!
몸을 앞쪽으로 던졌다. 벽에 걸린 인력이 내게 가속을 붙였다. 거기에 더해 단전의 마나까지 끌어올리자.
“어어!”
다른 팀원들이 점처럼 멀어졌다. 미처 따라올 수 없는 속도로 통로를 질주했다. 발끝에 집중된 마나가 몸을 타고 올라왔다.
어깨를 지나 두 손 끝에 응집된 오러가 선명하게 던전을 비췄다. 때마침 놈들이 전방에 숨어 있었다. 땅 밑에서 우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치졸한 녀석들의 수법은 늘 그랬듯 매복이었다.
정철규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더러운 것들.
그대로 주먹을 땅에 꽂았다. A급 헌터의 전력이 담긴 오러다. 겨우 몬스터 따위가 견딜 수 있을 리가!
쩌저적!
놈들이 숨어 있던 대지가 무너졌다. 파충류 따위는 반응하지 못할 속도였다. 숨어 있던 놈들이 기겁하며 튀어 올라왔다.
그중 바로 앞에 있던 리저드는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사지가 찢겨 죽었다.
[경험치 획득 : 440exp!]
[레벨업!]
[스탯을 분배해 주십시오.]
[맨손 격투술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레벨에 비해 지닌 능력치가 매우 높습니다. 가파른 성장 속도가 부여됩니다!]
고개를 돌렸다. 그때까지도 놈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놈들로서는 이 모든 상황이 천재지변처럼 느껴질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상에 강림한 염라대왕이었다.
공중에 붕 떠오른 놈들의 개체수는 서른아홉이었다. 갸르륵, 소리를 내는 놈 중 하나를 특정했다.
공중을 유영하던 놈이 내 앞으로 끌려왔다. 손바닥을 펼쳐 발악하는 리저드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퍽!
내장이 터져버린 놈이 사후경직하듯 부르르 떨어댔다. 쓰레기를 버리듯 놈의 시체를 던지고서 바닥에 착지했다.
살아남은 놈들이 당황한 듯 이곳저곳으로 독기를 뿌려대고 있었다. 무너진 땅밑으로 내 힘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었기에, 그곳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들도 있었다.
상, 하, 좌, 우.
사방으로 힘을 일으켰다. 중력에 저항하지 못하는 놈들이 놀이기구를 타듯 저항하지 못하며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어려울 것 없었다. 차례차례 다가가 그것들을 손수 죽였다.
밟고, 터트리고, 쥐어짜고.
갖가지 방법으로 쓰레기들을 처리했다. 내 손속이 잔인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지만. 놈들은 그래도 싸다.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팀원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독단이라 욕할 줄 알았는데 아니다.
나를 믿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심지어 달려들려는 이규호를 윤진아가 막아서기까지 한다.
쿠웅!
마지막으로 남은, 그마저도 도주를 시도하던 리저드의 대가리를 터트렸다. 사방에서 짓누르는 압력을 녀석 따위가 버틸 리 만무했다. 주위에 놈들이 남긴 흔적이 가득했다.
공기 중으로 흩어지던 마기가 심장 안으로 쑥 빨려 들어왔다. 빠져나갔던 양만큼 새로 충전됐다. 이 던전 안에서만큼은 무한동력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아!
그제야 실감했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바라마지 않던 영역에 들어섰음이. 정철규를 다치게 했다는 분노를 실컷 풀어낸 다음에야 말이다.
“저거…아무리 봐도 B급 헌터는 아닌 것 같은데. 들어올 때만 해도 170레벨 정도 아니었나?”
눈썰미가 좋은 이규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신이 본 게 맞냐는 듯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현장을 둘러보면서.
“그사이에 30레벨을 올렸다는 건데. 검신의 축복이 있다 한들 그게 말이 되나?”
“몸만 보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다. 그 너머를 봐야지.”
마치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처럼, 윤진아가 징그럽다는 얼굴로 말을 끝맺었다.
“오랜만에 일성에 새로운 A급 헌터가 등장했다. 다들 뭐해? 박수라도 쳐야지.”
슬며시 웃는 윤진아의 미소가 꼭 미친 과학자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
각성자 사이에는 불문율이 있다.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상황이 아니라면, 럭키박스는 쳐다도 보지 말라는 것.
럭키박스에서 뜨는 것들이란 대게 적아를 구분 못 하게 하는 저주 따위여서 그렇다.
길 가다 벼락 맞을 확률로 원하는 게 뜨는 경우도 있다. 가령 던전 탈출석이라든지, S급의 특성 같은 것이.
그래. 길가다 벼락맞을 확률이다. 아니, 그것보다 낮다.
그런데 일어나서는 안 될 미래에서는 실제로 기적이 일어났었다. 정철규를 구할 치료제가 거기서 뜬 것이다.
이규호의 보고서에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보스전을 앞에 두고 럭키 박스를 뜯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정철규는 죽었으며, 윤진아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럭키 박스에 독을 치료할 치료제가 뜨기만을 바라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적같이 럭키박스에서 상급 리저드 독 치료제가 뜬 것이다. 내게는 기적 같은 우연이 아니라 약속된 필연처럼 느껴졌지만.
바로 여기서.
“이 다음이 보스전입니다.”
초조해하는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 이전까지의 전투를 미루어보아, 보스전의 난이도를 짐작할 수 있다. 죽음을 각오해도 모자랄 것이다.
그럼에도 윤진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사경을 헤매는 정철규가 드디어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덕분이었다.
차마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눈으로나마 당장 보스전에 돌입하자고, 간절하게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조급함이 헌터를 죽이고 만다. 이대로 보스전에 돌입했다가는 불 보듯 뻔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언제 돌입하는 거지?”
주섬주섬 던전 구석을 돌아다니는 나를 보며 윤진아가 답답하게 외쳤다. 이규호도 마찬가지였다. 왜 여기서 서성이냐고, 뭐하는 거냐며. 입술을 달짝였다.
힐러 김아랑에게 독기 중독이니 어쩌니하는 소리를 덧붙이면서였다.
“어차피 이대로 뒀다가는 죽어요. 얼마나 보스몹을 빨리 죽이든.”
아까 전, 정철규는 심정지까지 겪었다. 그가 내뱉는 숨마다 독운이 가득하다. 자주빛으로 물든 정철규의 전신에서 부글부글 거품이 들끓었다.
반드시라고 말해도 좋았다. 이대로라면 3분 이내에 정철규는 죽는다. 김아랑이 아니라, A팀의 힐러 박지현이 온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윤진아가 입술을 깨물며 나를 쳐다봤다. 간절한 눈빛과 함께였다. 제발, 지금이라도 정철규를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그런 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부서진 대지 사이로 금빛 박스 하나가 보였다. 저벅저벅 걸어가 금빛 럭키박스를 들자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왜…?”
다들 설마설마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 설마가 맞다.
“여기 안에 정철규를 살릴 방법이 있습니다.”
이제껏 무슨 수가 있겠지, 하며 기대하던 윤진아가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허망한 그녀의 표정이 보였다.
“겨우. 겨우 그거라고?”
말문이 막힌 그녀의 입에서 기어코 절망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거 한 번 보시죠.”
윤진아가 얼굴을 짓쳐 들었다. 그녀가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왔다. ‘빌어먹을 럭키박스’를 중얼거리면서였다. 내가 보는 앞에서 던져버릴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바로 내 앞에 다가온 순간, 럭키박스를 열었다. 박스가 열리자마자 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부릅뜬 윤진아의 눈이 금빛 박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눈을 못 뜰 정도로 강렬한 금빛 색채가 던전을 샅샅이 밝혔다.
화악!
얼마 후였다. 박스가 사라지고 나타난 내 손에 포션병이 들려 있었다.
“말했지 않습니까. 여기 있다고.”
***
서둘러 정철규의 입에 포션을 들이부었다. 무려 최상급 해독제다. 효과는 바로 드러났다.
“커럭!”
정철규가 몸에 잔재한 독기를 뿜어냈다. 곧 죽을 듯 보이는 혈색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기포가 서서히 가라앉고,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들렸다.
안심해도 좋았다. 바깥으로 나가 치료받아야 한다는 점은 변함없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모두가 설명을 바라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특히나 윤진아는.
“대체. 대체 이게 무슨.”
내 손을 잡으며 어쩔 줄 몰라했다. 사과를 해야 할지, 고맙다고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인사는 공략이 끝나고 해도 늦지 않습니다.”
가식이 아니라 사실이다. 이 앞에 있는 놈은, 보고서에 적힌 게 반만 사실이라도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모이시죠. 브리핑할 시간입니다.”
정철규를 살리기 전에도 팀장이란 이유로 내 말에 힘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을 해라고 말해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의 설득력이 더해졌다.
“리저드 퀸. 앞에 있는 몬스터입니다. 전략은 이전과 같습니다. 제가 메인 탱커를 맡고….”
줄줄이 브리핑을 이어나갔다. 상황과 패턴에 따른 대응법을 몇 번이나 그들에게 주지시켰다. 그러고도 모자라 절대 방심하지 말라는 말을 몇 번이나 덧붙인 후였다.
진입 직전, 이규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슬그머니 물어봤다.
“너 말이야. 분명 필기점수는 별로라고 들었는데. 아카데미에서나 일성에 들어와서나. 이런 말하면 좀 재수 없긴 한데. 나만큼 분석능력이 뛰어난 것 같아서. 이래 봬도 상황 판단 만큼은 내가 백인호 팀장님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데 아까부터 네 오더를 들으니까 마치….”
이규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나였다면 꼭 그렇게 말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속으로 뜨끔했다. 아닌 게 아니라, 미래에서 이규호가 적어놓은 그대로를 말했기 때문이다.
“…공부를 좀 했습니다.”
“공부 좀 한다고 그렇게 늘 수 있는 게 아닌데. 어디서? 혹시 어떤 래퍼런스를 참고하는지 나도 알 수 있을까?”
“…….”
본론이 이거라는 듯 이규호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어왔다. 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래퍼런스고 자시고 그게 뭔데.
“물론 로우 데이터로만 판단하는 거겠지? 아무래도 리저드 계열의 몬스터들은 학계에서도 아직….”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있는데 이규호가 신난 듯 혼자 주절주절거린다.
“이렇게 디테일한 분석은 오랜만이라 내가 흥분했네. 끝나고 다시 대화하자. 꼭이다.”
어깨를 툭툭치며 흐흐하고 웃는 이규호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 뭐가 됐든 일단 이곳을 빠져나간 이후에 생각해볼 문제였다.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시전한 후였다.
“갑시다.”
익룡을 사냥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