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B급 같지 않은 B급 (5)
흐릿했던 정신을 깨운 것은 누군가가 고통을 참아내는 신음 소리였다.
“크으윽….”
참혹했던 사투 이후 3일이 흘렀다. 리저드 다섯을 죽인 끝에 네 개의 레벨을 올렸지만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놈들이 남긴 흔적이 아직까지도 우리 모두를 괴롭히고 있었다. 특히나 정철규는.
헐떡이는 정철규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잘생긴 미남자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자주빛으로 물든 그의 몸 곳곳이 풍선처럼 부풀고 있었고 입에서는 독기를 머금은 진물이 흘러나왔다.
벌어진 상처에는 지혈도 소용없었다. 끔찍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간신히 살아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반면, 경이롭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점이 있었다. 정철규는 탱커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다 했다. 쏟아지는 집중 공격을 방어해내면서도 팀장으로서 지시도 잊지 않았다. 힐러 김아랑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였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반드시라 해도 좋았다. 그는 죽을 것이다. 지금까지 용케 숨이 붙어있는 게 더 이상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거, 내가 안 들어왔으면 똑같은 미래가 펼쳐졌겠구나.
“무리예요. 바깥에서 치료 받아야 해요.”
한창 힐링 마법을 쏟아붓던 김아랑이 고개를 저었다. 전투 불능은 고사하고 당장 죽을 것이라는 짙은 경고도 함께였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윤진아와 정철규가 연인 사이라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모두가 윤진아를 쳐다봤다. 이성을 유지하는 듯해도 꿈틀거리는 미간이 그녀의 심리 상태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그럼 공략은.”
“그래도 공략은 계속한다. 여기서 물러날 순 없어.”
윤진아의 말에 동감했다. 다만 이유는 조금 달랐다. 겨우 경험치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아락투스의 진노 때문이었다.
탈출석을 쓴 즉시 던전의 난도가 대폭 상승될 것이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릴지는 미래에서 충분히 확인한 바다. 들어오기로 각오한 이상, 끝을 봐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원래 팀장인 정철규에게 전투 불가 판정이 내려졌다. 따라서 팀장을 새로 선출해야 했다.
당연히 그건 윤진아일 것이고. 그런데 모두의 눈이 이상했다.
왜 죄다 내 쪽을 쳐다보는 거지?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구보다 팀장으로 적절한 사람이 너야.”
윤진아가 그렇게 말했다. 쉽사리 호흡이 정돈되지 않은 채였다.
“젠장할. 이 던전. 처음부터 이상했어. B급치고 지나치게 많은 몬스터며, 공격력이며. 겨우 B급으로 치부할만한 곳이 아니야. 그런데 더 이상한 게 뭔지 알아?”
억지로 냉정을 유지하던 윤진아의 얼굴이 그때 무너졌다. 나를 보면서였다. 윤진아의 붉은 동공 안으로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백인호, 김석환 팀장들도 못 본 던전의 구성, 몬스터 종류, 던전 공략 방법까지. 모든 걸 네 오더대로 하고 있잖아. 심지어는 척척 들어맞고 있고. 더군다나 다섯 번째 방을 넘기면서 전투력마저 나를 추월했지.”
부탁이 아니라 강제에 가까웠다.
“농담하는 거 아니야. 너 말고는 적임자가 없어. 내가 팀장을 하라고? 빌어먹을 이 던전의 보스몹이 뭔지, 보스전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감도 안 오는데 내가 무슨 수로?”
윤진아가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눈으로는 쓰러진 정철규를 바라보면서였다.
“다시 한번 말할게.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릴 이끌어야 할 사람은 너야. 부담가지지 말라는 소리 못 해. 팀장은 그런 자리니까. 그러니까 우리를 이끌어줘. 이태진.”
다른 쪽을 돌아봤다.
레인저 이규호를 포함해 다른 모든 사람들도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뜬금없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 상황을 잠깐이라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돌아갈 리 없었다.
이 던전을 성공적으로 공략해냈을 때의 내 입지,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 무엇보다 내가 팀장이 됐을 때 정철규를 살릴 수 있는지까지.
그러고 나서도 계산이 서지 않았다. 이곳은 그냥 B급 던전이 아니라, 군단장이라는 놈이 작정하고 만든 곳이다. 내 오더가 잘못돼서 팀원들이 다 죽는다면? 그걸 내가 감당하라고?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귓전으로 끔찍한 말이 울렸다.
“일단 정철규부터 내보내고.”
윤진아가 인벤토리에서 던전 탈출석을 꺼낸 순간이었다. 아차 싶었다. 지금 팀장이고 자시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탈출석을 쓰는 게 더 문제다. 다른 무엇보다 막아야 할 문제였다.
“잠깐만요.”
덜덜 떨며 정철규에게 다가가는 윤진아를 막아섰다. 순간 윤진아가 나를 쏘아봤다. 자칫하다가는 화염 마법이라도 날릴 기세였다.
그러나 그런 윤진아보다도 탈출석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손에서 탈출석을 빼앗은 후 말했다.
“정철규 지금 못 나가요.”
“뭐? 무슨 소리야?”
“왜? 이태진! 뭐하는 짓이야!”
“정신이상 저주 걸린 거 아니야? 아랑아!”
정철규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비켜!”
못 비킨다. 왜냐고?
그야.
젠장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리스크고 뭐고.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다.
“탈출석 쓰지 마세요. 팀장으로서 명령입니다.”
***
던전 내부에서는 사회의 법이 통하지 않는다. 오로지 팀장의 명만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다. 자신의 생존을 온전히 팀장에게 맡긴다는, 일순 무식하게 보이는 이 방법은 그래서 효과적이었다.
지휘체계를 단순화시키고, 팀원들이 전투에 집중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팀장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 어떤 것이 됐든.
팀장이라는 직위가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여기에서부터 알 수 있는 것이다.
“기다려요.”
생떼 같은 내 말에도 팀장의 권위가 실리면 무게가 달라진다. 윤진아가 표정을 찌푸릴지언정 내게 곧장 항명하지 않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왜지?”
아까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윤진아가 물어왔다. 시선은 여전히 컥컥대는 정철규에게서 못 뗀 채였다.
윤진아가 그렇게 나오니 다른 사람들도 반발할 수 없는 것이다. 의문이 가득한 채로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력만 높은 애송이 헌터를 대하는 태도는 애저녁에 없어졌다. 이제야 실감 났다. 이 사람들의 목숨이 내 손에 달려있다는 게.
“보스전을 상정해서 하는 말입니다.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앞으로 두 칸. 그 앞에 보스몹이 있습니다. 매정하게 생각될 거 압니다만 전력 손실을 위해서라도….”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놨다. 예비전력을 위해서라도 정철규가 필요하다, 지금 밖으로 내보내는 게 더 위험하다, 김아랑이 같이 나갔다가 돌아오는 동안 기습이 있을 수도 있다 등등.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다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다. 예비전력은 고사하고 목숨이 위태롭다, 힐러의 남은 마나를 생각해서라도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등등.
그 모든 의견을 모조리 무시했다. 기왕에 팀장이 된 마당이다. 철면피를 깔고, 뒤에서 욕 좀 먹어도 이들을 살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둬야 했다.
“그래도…!”
윤진아의 말을 끊었다.
“정철규를 살릴 방법이 있습니다. 던전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 이게 더 나을 거예요.”
이전까지 내가 보여준, 예지에 가까운 기예를 보여준 것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의 눈이 순간이나마 밝아졌다. 혹시, 설마, 이태진이라면. 하는 감정이 쏟아졌다.
지금 이 상황을 넘어가려고 대충 둘러대는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미래에서 봤던 보고서를 토대로 하는 말이었다. 정철규를 살릴 방법이 확실히 있었다.
“…팀장의 명령이야. 이제 의문은 없다. 다들 말 들어.”
그때 윤진아가 내게 힘을 실어줬다. 의심은 일단 접어두는 모양새였다. 푸들푸들 얼굴을 떨면서도 그녀는 불합리한 상황을 꾹 참아냈다. 박수를 쳐야 마땅한 인내심이었다.
그제야 팀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어떻게든 수긍하는 척이라도 했다.
“이제껏 보여준 게 있으니까.”
“첫 진입부터 저 녀석, 아니, 이 팀장 오더에 따랐잖아. 이번에도 뭔가 뜻이 있겠지.”
“철규 형. 좀만 참아요. 새 팀장님이 아직 못 보내 주겠답니다.”
***
“최대한 시간을 끌지 않습니다. 다들 지친 건 알지만 곧장 다음 방으로 넘어가야 해요.”
“던전에서 다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명령만 내려주십쇼.”
두 가지 갈림길 중 오른쪽을 가리켰다.
“리저드 스물다섯, 포이즌 스파이더 열다섯. 레벨은 높지 않지만 숫자가 많습니다. 그래도 직전의 전투보다는 안심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오더를 내렸다.
“우선 인원분배부터 하겠습니다. 먼저 메인탱커는 제가 맡습니다. 메인 딜러도 저입니다.”
본래 세부적인 전략을 구상하는 건 레인저의 몫이지만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보고서를 토대로 인원, 스킬 분배, 상황에 따른 전략까지 모두 내가 주도했다.
“최윤재 선배는 힐러 옆에 붙어주십시오. 그리고 진아 선배의 역할을 바꾸겠습니다. 힐러를 지키는 것보다 공격에 집중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팀장으로서 위신을 챙겨주려는 걸까. 윤진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존댓말을 해왔다. 팀원들의 묘한 눈빛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김아랑 선배는 최대한 전황과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놈들이 영악해요. 이제껏 그랬듯이 힐러부터 노릴 게 뻔합니다. 그러니까 버프와 힐링보다 생존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제껏 굳이 디테일한 지시까지 하지 않은 건 그래도 됐기 때문이었다. 일성의 B팀이다. 그리고 정철규와 윤진아라는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A급 헌터도 있다.
이들에게는 조금의 힌트만 쥐여줘도 알아서 상황을 타파해 나갈 만한 노하우가 있다고 믿었다.
“…확인했습니다.”
허나 오판이었다. 아락투스의 가호를 받고 있는 던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난도가 높았다. 눈치고 자시고 사릴 때가 아니었다.
“이규호 선배. 선배는 저와 같이 전방에 섭니다. 탱킹 스킬 하나 있는 걸로 아는데. 속도전이 생명이에요. 체력 관리가 된다는 전제하에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주세요.”
“어…네. 알겠습니다.”
레인저 이규호 또한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1시간 후 출발한다는 말까지 끝낸 직후였다. 뒤쪽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싫다고 하던 사람 맞아? 그러기엔 리더십이 제법….”
“얼떨결에 맡은 것 치고 잘한단 말이야.”
“이거 잘하면 백 팀장님 다음으로….”
속닥거리는 말들을 무시하고 다음을 준비했다.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할 일이 있었다.
보스전에 돌입하기 전, 심장을 둘러싸는 네 번째 고리를 만들어야 한다.
눈을 감고 흘러들어오는 마기에 집중했다. 전투가 끝난 지 사흘이 지난 지금도 끝없이 심장으로 모여들고 있는 마기의 양이 상당했다.
어떻게든 남은 인원으로 공략이 가능하겠다는 판단도 여기서 기인했다. 네 번째 고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약지에 끼운 아피아의 반지가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드르르륵-!
뚫어놓은 길을 따라 폭발적인 양의 마기가 심장으로 모여들었다.
이번 전투에서 절실하게 느꼈다. 마법은 그저 검술을 보조하는 것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다. 고리가 몇 없어서 그렇게 느꼈을 뿐이었다.
동급의 레벨이라면 우열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락투스의 마법 또한 검신의 축복 못지않게 고강했다.
사막의 전사 이셀라가 살고 있는 이세계에서 마법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몰라도. 내가 해석한 마법사의 핵심은 고리의 개수에 달려있다.
서클이 늘어날수록 마법의 효율과 파괴력이 제곱으로 증강되는 것이다.
가령, 서클 세 개를 가진 마법사의 힘을 9라고 한다면, 4서클 마법사의 힘은 16인 셈이다.
그렇다면 고리가 9개쯤 되면 어떨까. 각성자의 등급과 마찬가지로 마법사 또한 일정 수준에 이르게 되면 아랫것들이 얼마나 덤벼대든 무의미할 것이다.
지금부터는 내 추측일 뿐이지만. 마법사의 고리란 검사의 검술처럼 깨달음과 흡사해 보인다.
고리가 많아질수록 사용자의 격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것이다.
종래에는 마법이 검술을, 검술이 마법을 서로 돕고 상호작용하며 성장을 도모하지 않을까?
생각을 마치며 일어섰다. 죽은 리저드 시체에서 단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마기를 흡수한 후였다. 맞물리며 돌아가던 고리 위로 두껍고 튼튼한 서클 하나가 추가됐다.
네 개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