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B급 같지 않은 B급 (3)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시전합니다.
잔여 시간 : 4:55]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합니다.]
던전에 입장 전, 단발적으로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터트리라는 정철규의 명령이 있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많은 수의 몬스터가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다. 스킬을 아낄 때가 아니었다.
잠시 후 공간의 압력이 우리를 토해낸 순간이었다.
[캬르르륵!]
낮은 울음소리를 내는 파충류 한 마리가 대뜸 튀어나왔다. 꼬리를 달고 있는 놈은 리저드인 게 분명했다. 다만, 익히 알던 리저드의 생김새와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나보다 족히 두 배는 커 보이는 몸집부터 그랬다. 충혈된 듯 붉게 물든 눈동자도 그랬고 갑옷처럼 두르고 있는 단단한 피부, 녀석에게서 풍기는 파동의 깊이까지도.
B급치고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 보였다.
아락투스의 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됐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의 몸에서 진한 마기의 향이 났다.
“함정이다.”
정철규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뻔해도 너무 뻔했다. 알고 나니 더 그랬다. 앞의 것을 쓰러트리는 순간, 위아래에서 놈들이 쏟아질 것이다.
“갑니다.”
사전에 약속된 대로. 내가 먼저 놈들에게 튀어 나갔다.
리저드의 붉은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저벅저벅 걸어오던 인간 사내의 몸이 사라지던 순간.
스악!
제 목이 분리되고 있었겠지.
부드럽게 리저드의 목을 가르자 보급형 롱소드가 웅웅대며 비명을 질렀다. 급하게 들어온 마당이다. 마땅한 장비를 챙길 틈이 없었다.
오러 블레이드의 강약조절이 극에 달한 한석훈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로서는 함부로 힘을 남발했다가는 이 허접한 롱소드가 금방 깨질 것이었다. 아이템을 아낄 필요가 있었다.
어쨌든. 경험치가 올랐다는 메시지가 뜬 후였다.
반 박자 늦게 놈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흔들리던 대지가 무너진 것이 먼저였다. 단단하게 고정된 천장의 석벽도 마찬가지였다.
쿠워어어!
아래, 위, 옆을 가리지 않고 내리꽂는 몬스터의 파동이 근 오십여 마리에 달했다.
“힐러부터 지켜!”
정철규의 침착한 명령이 내려졌다. 곧장 윤진아가 시동어를 외며 손을 휘저었다.
화르륵!
마치 태양이 떨어진 듯. 그때를 기점으로 던전 내부가 환해졌다. 불나방처럼 힐러 김아랑에게 뛰어들던 대형지네 센디타이드는 화염벽에 막혀 그렇게 재가 됐다.
단말마도 없이 죽은 몬스터를 보는데 왠지 소름이 돋았다. 미친. 경지에 오른 원거리 딜러가 어느 정도인가 했더니.
극악의 상황에서 어떻게 던전을 공략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다른 팀원들을 보는데 거기도 마찬가지다.
“이것들 힘이 보통이 아닌데?”
“미친것들. 광폭화 마법이라도 쓴 거 아니야?”
“정신 차리고 앞에부터 막아!”
쿠웅! 까드득!
분주해 보이지만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 중이었다. 몬스터가 작정하고 힐러만 노리고 들어오는데도 김아랑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것만 봐도 이미 성공이라 봐야 했다.
나도 구경할 때가 아니었다. 이번 파티에서 근접딜러의 숫자는 나까지 둘. 한 명은 약속대로 힐러 근처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를 베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콰앙!
내 몸이 제 차례를 기다리는 몬스터 사이로 뻗어갔다. 팀원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곳까지였다.
“이런 미친! 저 자식 저걸 진짜로 해? 그냥 하는 말 아니었어?”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것도 내가 먼저 제안한 것이고. 몬스터의 이목이 힐러 김아랑에 쏠려 있을 때, 반대로 내가 놈들을 기습하는. 어쩌면 무모한 도박수에 가까운 전략이었다.
[케르륵?]
우글거리는 몬스터 사이로 착지했을 때였다. 몬스터도 어이가 없었을까. 황당함이 느껴지는 시선이 곧장 박혔다.
그것도 잠시, 잘 걸렸다는 듯 손톱과 독을 품은 가시, 이빨이 여기저기서 들어왔다. 모두 가공할 속도였다.
방어하기에는 이미 늦은 때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생각과 함께 금빛 태양신을 내 몸 바깥으로 불러냈다.
[헬리오스의 심장을 착용합니다!]
까가가각- 콰과광!
쇠 긁히는 소리와 함께 정신이 번쩍할 만한 충격이 이곳저곳에서 터져댔다. 맨몸이었다면 진작에 죽었어야 할 치명적인 독기였다.
다른 말로는, 헬리오스의 심장 덕분에 녀석들의 공격을 너끈히 버텨냈다는 말이다.
[독성에 대한 저항력이 매우 높습니다!]
[저항에 성공합니다!]
시야가 어지럽게 번지며 때를 기다렸다.
놈들의 공격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잔뜩 소모된 독기를 충전시켜야 하는 타이밍이 그 기회일 것이다.
지금처럼.
아까부터 거슬리던 거미 새끼를 첫 타겟으로 잡았다. 한창 입을 오물거리며 독을 만들어내던 놈의 대가리를 향해 검을 찔렀다.
그러면서도 오러의 컨트롤에 집중했다. 원래부터 뼈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몬스터들이다. 딱딱한 외피만 벗겨내면 그 이후에는 거슬릴 것 없이 갈라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생각과 동시에 롱소드가 거미의 피부에 맞닿았다.
콰드드득!
예상대로였다. 놈의 피부가 딱딱한 갑각류처럼 거칠게 저항해왔다. 예상보다 더 단단한 질감에 놀랐던 것도 잠시뿐이었다. 단전에서 끌어낸 마나를 검 끝으로 밀어 넣었다.
쩌저적-
방금까지 철벽처럼 밀어내던 거미의 피부가 순식간에 갈라지기 시작했다.
예상대로였다. 두부처럼 말랑말랑한 속살이 느껴졌다.
끌어다 썼던 오러를 다시 단전으로 빨아들였음에도 더 이상 거미가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은 남아 있지 않았다.
콰득!
마침내 놈의 몸을 헤집었던 검이 등을 뚫고 나왔을 때였다. 팔꿈치를 안으로 당겨 검을 거두었다. 속절없이 놈의 몸이 무너졌다.
그와 동시에.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던 고리의 마기가 준비 완료를 알렸다.
“이제 내 차례다.”
마기가 밖으로 분출된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방사형으로 마기가 폭사되었다.
이것들의 근원과 같은 힘이었다. 놈들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쿠드드득!
내 근방에 있는 몬스터를 포함해 다른 멤버들을 덮치고 있는 것들까지 일시에 특정한 순간이었다.
몬스터한테는 처음 써보는 순간이긴 한데. 머릿속에서 그린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쿠웅!
중력마법이 70여 마리의 몬스터를 한 번에 덮쳤다. 광배처럼 내 뒤에서 부채꼴 형태를 이루고 있던 마기들이, 일시에 빛이 되어 각 개체로 쏘아졌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마기에 탈력감이 찾아온 것도 잠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케르르륵!]
붉게 충혈된 동공을 희번득거리던 몬스터들이 일시중지 버튼이 눌린 듯 동작을 멈췄다.
이거, 직접 써보니까 알겠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파괴적인 마법이었다.
B급, 그것도 아락투스의 영향으로 한층 강해진 몬스터들이 단체로 제 몸을 못 가누는 것만 봐도 그랬다.
“뭐, 뭐야! 놈들이 멈췄다!”
“또 다른 함정일 수 있어! 진정해!”
누군가 그렇게 외쳤다. 당황할 만했다. 나도 이 정도까지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으니까. 대번에 모두의 시선이 윤진아로 돌아갔다. 마법사이자 원거리 딜러인 그녀가 뭔 수를 썼나 해서.
“정신 안 차려!”
부팀장인 윤진아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모두들 아차 하는 얼굴로 전장으로 고개를 돌린다.
앞으로 3초. 마법이 파훼되기까지의 시간이었다. 바로 앞에서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는 리저드부터 요리를 시작했다.
스걱!
아까보다 놈의 급소를 쉽게 벨 수 있는 이유도 다름 아닌 중력 마법 덕분이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놈들의 몸은 살아있는 고깃덩어리와 다를 바 없었다.
한 번에 한 마리씩. 검신의 축복이 알려주는 경로대로 몸을 이끌었다. 초침이 한 발자국 움직였을 때 열 한 마리의 몬스터가 바닥에 쓰러졌다.
콰과광!
방어에만 전념하고 있던 팀원들이 목줄 풀린 짐승처럼 날뛰어댔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지금이 절호의 찬스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단순히 동작을 제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윤진아의 화염마법을 위시로 한 팀원들의 스킬이 던전을 가득 매웠다.
째깍.
그렇게 3초가 지났다. 그런데 예상을 뛰어넘는 상황이 발생했다. 나쁜 쪽이 아니라 좋은 쪽으로.
원래라면 진즉 마법을 파훼했어야 할 몬스터들이 여전히 몸이 묶인 채 아우성치고 있는 것이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마기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것들이 죽어감에 따라, 다른 쪽의 중력이 더 강해져 갔다. 점차 마기에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서른 마리가 남았을 즈음에는 중력마법이 절정에 달했다.
종래에 놈들은 아예 발악하지도 못하며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전투가 아니라 전리품을 챙길 시간이었다.
[경험치 획득 : 579exp!]
[경험치 획득 : 521exp!]
[레벨업!]
경험치가 끝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놈들을 베고, 베고, 또 벴다. 그렇게 마지막 한 놈의 모가지까지 썰어버린 후였다.
[레벨업!]
던전에 들어오길 잘했다. 믿지 못할 이야기지만. 벌써 레벨 세 개를 올렸다. 이제 겨우 첫 번째 방이었다.
***
숨을 고르고 있는데 옆에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옆을 돌아보자.
“쟤 성격 장난 아니네.”
“그러니까. 선배고 뭐고 까불었다가는 쥐어 터지겠는데?”
“어우, 아까 전에 확인사살까지 하던 거 봤냐? 눈빛 한 번 살벌하더라.”
“몬스터가 아니라 경험치 덩어리처럼 보는 표정 봤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제 막 B급 초입 단계 아니었던가? 이제는 나보다도 강한 것 같다만.”
오싹하다는 얼굴로 모두가 한마디씩 더했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처음 던전에 들어온 애송이로 바라보는 눈빛은 없었다. 되려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괴물을 쳐다보는 것에 가까웠다.
정비시간이었다. 부상자는 적었지만 휴식이 절실했다. 힐러가 독기를 날려버린 바닥이 우리의 침대였다.
“그나저나 진아 선배. 그게 뭐였어요?”
누워서 검을 매만지던 중, 누군가의 말에 움찔하고 말았다.
“마비계열인가? 갑자기 멈칫거리니까 나까지 당황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스킬은 또 언제 얻은 거예요?”
“그 정도면 못 해도 A급이겠던데.”
그렇게 한마디씩 거들었다. 정철규마저도 윤진아를 돌아보며 뭐냐는 듯 턱짓한다.
“이거 완전 바보들 아니야?”
오직 윤진아만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쳤다. 로브를 입은 그녀가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이후였다. 그러더니 나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혹시나 마법이 들킬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오직 윤진아만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사람들을 쳐다봤다.
얘들이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건가 하는 표정으로. 조용히 윤진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로 해달라는 뜻으로. 아무래도 BTO 전까지는 조용히 있어야겠거든. 괜히 알려봤자 도움 될 것도 없었다.
“푸핫!”
그러기를 문득 윤진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네. 진짜.”
그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아 선배가 저런 얼굴도 할 줄 알아?”
“난 저 사람 웃는 거 처음 봐.”
“스킬 패널티 같은 거 아니야? 막 웃음을 참지 못하는 병 같은 거.”
그러거나 말거나 윤진아는 박장대소만 할 뿐이었다.
그것과 별개로.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내가 죽인 몬스터들, 아니 던전에 널부러진 모든 몬스터의 사체 위로 마기가 두둥실 떠올랐다.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새카맣게 물든 마기가 스멀스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정확히는 내 입과 코를 통해 심장까지 쭉.
텅 비어있는 고리가 잘됐다는 듯 그것을 반갑게 맞았다.
쪼오옥!
효과음이 있었다면 이런 식이었을 거다. 순식간에 고리 두 개를 가득 채운 것도 모자라 아직까지도 남은 마기가 재촉하고 있었다. 자신도 받아달라고.
콰과과곽-!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던 두 개의 고리 위로 새로운 고리가 하나 더 생겼다. 순식간에 말이다. 내 생각보다 훨씬 빠른 성장에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헷갈리기까지 하다.
아니, 당연히 좋아해야지. 고리 두 개로 사용한 마법으로도 그 정도의 효용이 드러났다. 그러면 세 개는? 네 개는?
그렇게 행복한 상상에 젖어 들고 있는데, 정철규와 이규호의 표정이 보였다. 상당히 좋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어. 이 던전이 좀 이상한 거지. 어차피 다른 애들 스킬 쿨타임도 기다릴 겸 천천히 대기해보자.”
“예. 그전까지는 반드시 시야 확보해 놓겠습니다.”
아. 뭔 상황인가 했더니.
이규호의 기죽은 듯한 목소리에 정철규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괜찮다고 말한다. 그런데 영 괜찮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럴 것이 던전의 구조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공략의 난이도가 결정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깥의 김석환, 안에 들어와서는 정철규가 내게 그토록이나 고맙다고 한 이유도 여기 있었다.
전멸에 가까울뻔한 위기가 코앞이었는데 자그마한 정보 하나로 아무도 다치지 않은 상황이 됐다. 던전 공략의 핵심이 정보라는 것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 이유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번쩍 들었다.
“그거. 제가 도움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웬만하면 나댄다는 이미지를 만들기 싫었는데. 한 번 경험치를 맛보니 나도 의욕이 샘솟았다.
“다음 갈림길이요. 왼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