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B급 같지 않은 B급 (1)
“커헉!”
번쩍 눈을 뜸과 동시에 자리를 박찼다. 당장 인벤토리 안에 있는 아이템들을 장착한 것은 물론 가용할 수 있는 스킬도 사용했다.
“…….”
위잉-위잉-.
팔 장로는 온데간데없이, 방에는 적막감과 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가습기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우선 상황 파악을 위해서 잠시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상하다. 분명 팔 장로와의 전투에서 폐가 손상당했을 텐데. 호흡에 전혀 지장이 없다. 뿐만 아니라 외상 또한 모두 사라져 있었다.
혹시나 다른 내상이 있을까 단전의 마나를 돌려봤지만 가뿐하기만 하다. 오히려 전보다 컨디션이 더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불현듯 불안한 마음에 시간을 살폈지만 아침 여덟 시였다.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새에 이 부상이 다 치유됐다고?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건데.”
난데없이 나타난 팔 장로라는 놈이 나를 후드려 팬 후, 치료까지 해서 침대 위에 올려뒀다? 그것도 가지런히 이불까지 덮어서.
사이코패스 같은 건가?
그런데 내 상태도 좀 이상했다. 당황할 법도 한데, 내가 생각해도 굉장히 이성적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불과 몇 시간 전에만 해도 목이 날아갈 뻔했는데도 그랬다. 머릿속에서 앞으로의 계획이 차곡차곡 정리되고 있었다.
우선 사이비 종교를 뒷조사하는 건 미뤄둔다. 팔 장로라는 놈이 나를 살려주고, 심지어 치료까지 해준 것만 봐도 놈들이 당장 나를 죽일 의도는 없다고 봐야겠지.
지금은 하오란과 화신을 상대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판단이 섰다.
다만, 문득 떠오른 가정은.
놈들이 나를 소교주니, 교주니 하며 이상한 호칭을 썼다는 건데. 내 생각엔 ‘그것’과 굉장히 연관이 높을 것 같….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깊어지려는 순간, 시간이 정지했다. 공기의 운행이 멈춘 것이 느껴졌다.
바람 한 점 없는 적막감이 나를 둘러쌌다.
의식이 미래로 빨려갈 때의 전조현상이었다. 동시에 무색무취의 마나가 코를 스쳐 지나갔다. 전보다 조금 더 짙은 자취를 남기면서.
그렇게 한참 정신없는 가운데 ‘그것’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에 집중했다.
조금만 더. 아니, 한 번만 더.
딱 한 번만 더 ‘그것’이 내게 신호를 보낸다면 그때는 정말 녀석의 정체를 알 것도 같은데.
그런 가능성과 함께 의식이 옅어져 갔다. 동시에 부유하듯 정신이 공중으로 빨려갔다.
화악!
잠시간 시야가 깜박거리더니, 곧 주변 풍경이 맺히기 시작했다.
“…철규 선배가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시작부터 뜬금없는 말이 들렸다.
철규? 정철규?
A팀에 들어온 이후, 아니 그전부터 살갑게 챙겨주던 메인 탱커의 이름이 곧장 들렸다. 정면을 보니 최찬규가 씁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B급 던전에서 죽을 양반은 아니었는데.”
뭐?
사이비 종교쟁이들에 대한 단서 정도나 나올까 했는데 뜬금없이 정철규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심장이 철렁거렸다. B급 던전에서 정철규가 죽었다고? A팀 메인탱커가?
아니지. 아직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지금은 정보를 수집할 때였다.
“…어떻게 된 거래요?”
내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B급 던전에 간다고는 들었다.
A급 헌터가 B급 던전에 가는 게 드문 일은 아니다. 하향공략은 협회에서도 추천하는 안정적인 헌팅 루트였으니까.
언제 간다고 했더라?
시기를 떠올려 보고 있는데, 최찬규가 말없이 종이 한 장을 건네왔다. 문서의 맨 앞쪽에는 당일 날짜와 함께 사건 경위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B팀 메인 레인저 이규호 작성.
1월 14일. …….]
내일이었다.
미친. 이 환상에서 벗어나자마자 회사로 달려나가야 할 판이다. 그전에 눈앞의 문서부터 확인했다.
[B팀 메인 레인저 이규호 작성.
1월 14일.
대테러집단 정보수집을 위해 공략 멤버에서 백인호 팀장 제외, 정철규 팀장대리 및 7명 전주 폐교 B급 던전 진입. 진입 전 던전 내부 파악을 몇 번 시도했으나 실패. 몬스터 종류, 던전 형태 등등을 알지 못한 상태로 진입.]
단서 하나를 얻었다. 전주 폐교에 위치한 B급 던전.
잠깐만.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전주. 폐교. B급 던전. 이거 꼭….
고개를 저을 수 있다면 그랬을 것이다.
잠시 생각은 접어두고, 일단은 미래의 내가 읽어나가는 초점을 따라 계속 읽어나갔다.
[진입 직후 리저드를 포함한 ‘센디타이드’, 거대 독거미 ‘앙겔리온’이 기습.]
당시의 상황이 대략적이나마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센디타이드가 질질 흘려대는 산성용액과 함께 수많은 다리로 일행을 휘몰아쳤을 것이다.
그와 함께 어둠 속에서 쏘아대는 앙겔리온의 거밀줄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함정으로 추정, 도합 70여 마리 규모. 매뉴얼 대로 대응했으나 극심한 피해를 입음. 힐러 임혜선 몬스터 기습에 중상, 팀장 정철규 중상.]
거기까지 읽은 내가 탄식을 흘렸다. 힐러와 탱커의 부상은 전투의 지속력을 떨어트린다. 아마 여기서부터 어그러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미래의 내 인상이 찌푸려진 건 그다음 때문이었다.
[공략불가 판단, 탈출석을 사용했지만 아락투스(던전 보스몹으로 추정)의 권역 내라는 메시지와 함께 탈출 불가 판정. 또한 탈출석 사용으로 인한 ‘아락투스의 분노’ 효과가 더해짐. 시간의 흐름에 따른 던전 난도 상승. 부상자 속출했으나 탈출 불가 판단으로 공략 강행.]
아락투스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우려했던 상황이 맞았다. 전주의 B급 던전은 내가 갔던 곳이었다. 거기서 겪었던 리저드들의 끔찍한 독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다섯 번째 갈림길, 첫 번째와 비슷한 수준의 몬스터들이 대거 등장….]
여기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다음 대목에서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정철규 사망. 임시팀장으로 윤진아가 역할 수행 …중략… 보스몹 공략 직후 윤진아 중상 및 의식불명.]
내 손이 덜덜 떨렸다. 아마 자책 중일 터였다. 눈앞이 뿌옇게 변한 건 볼을 타고 흐르는 액체 때문일 것이고.
“냉정한 말이지만. 너도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 BTO를 준비….”
최찬규가 어깨를 두드리며 하는 말이 흐릿하게 들렸다. 의식또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제 이 악몽에서 깰 때가 된 것이다.
그래. 미래는 바꾸면 될 일이다. 단서는 충분히 얻었다. 그러니 이‘빌어먹을 미래’에서 나를 꺼내라.
화악!
***
차키를 들고 당장 집을 나섰다. 회사에 가면서도 전주 던전에 관련된 사내자료를 훑으면서였다.
예상했던 대로 대상 던전의 유형 파악은 되지 않았고 정철규가 팀장 대리를 맡게 됐다.
며칠 전 백인호 팀장도 던전 유형을 파악하기 위해 전주까지 사전답사를 다녀왔다고 한다. 인트라넷으로 보고 있는 사내 보고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마나 밀도가 다른 B급 던전에 비해서 낮아. 그런데 유형 파악은 또 안 되고. 억지로 분석하려고 하면 할 수는 있는데. 시간이 좀 걸리겠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던전도 아닌 것 같고. 어이, 잘나신 A팀 탱커님. 이 정도는 충분하지?]
백인호가 내린 결론이었다. 정석적인 판단이었지만 그게 패착이었다. 밀도가 낮게 보이는 것부터가 함정이었겠지.
보고서에 적힌 대로라면 전주의 B급 던전은 A급에 육박한다고 돼 있었으니. 이걸 어떻게 알려야 되나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전주 던전은 아락투스라는 놈의 함정입니다. 마나 밀도가 낮은 것도 방심을 노리고 있는 거고요.
정철규와 힐러는 첫 번째 방과 다섯 번째 방에서 중상과 죽음을 당할 거니까 꼭 주의 부탁드려요.
이걸 어떻게 아냐고요? 제가 미래를 봤거든요.
환장하겠네. 정신병원에 끌려가지 않으면 다행이지. 어디 적당한 핑계가 없나, 하며 회사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뭘 그렇게 사색이 됐어? 뭔 일 있어?”
이제 막 출근하고 있는 최찬규가 내 얼굴을 확인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습격이라도 받은 거야? 그런 거야?”
BTO에 대한 이야기는 일성 내에서 가장 핫한 주제였다. 때문에 모두가 내 신변에 대해서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중이었다.
그리고 더러운 화신 놈들이 무슨 수를 쓸지도 모른다고, 전전긍긍하며 호위를 자처한 사람이 최찬규였다.
“뭐? 습격? 이태진!”
그것은 한석훈과 김석환도 마찬가지였다. 바람처럼 등장한 그들이 내 주위를 둘러쌌다. 김석환은 호들갑을 떨어대며 내 몸을 이리저리 만지기까지 했다.
“멀쩡한데?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탄탄해졌어.”
“얼굴도 빤질하고. 눈빛이 더 깊어졌나?”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말하는 두 팀장의 말을 무시했다. 헐떡이는 호흡을 가다듬은 후였다.
“팀장님. B팀 공략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정철규 선배가 팀장 대리로 간다는. 아, 그리고 윤진아 선배도.”
“그거? 어, 맞아. 진입은 내일이지. 애들은 오늘 내려가고. 갑자기 거긴 왜?”
환장하겠네.
빠르게 말을 이었다.
“사실 어제 말씀 못 드렸는데. 제가 손영혁 과장 만난 건 알고 계시죠?”
“…알지. 왜, 그 새끼가 협회로 오래? 그 씹어먹을 놈.”
그 말과 반대이기는 한데. 어쨌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감찰과장이 일성의 이태진을 만나러 왔다는 소식은 벌써 회사 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듣기로는 김석환 팀장이 특히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건드릴 게 없어서 자기 부하를 건드렸다며.
예상대로 김석환이 눈썹을 까딱거렸다. 한번 말해 보라는 듯 팔짱까지 끼면서.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한석훈은 되려 신난 듯 낄낄거리고 있었다.
“그것보다는 전주 던전 관련해서 찝찝한 소리를 들어서요. 협회 쪽에서 따로 조사한 게 있대요. 아무래도 B급 던전이니까 협회에서 더 신경을 썼나 봐요.”
“갑자기 웬? 그래서?”
당연히 전주 던전 관련해서는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나도 오늘 아침에 알았으니까.
손영혁에게는 미안했지만, 지금 댈 수 있는 핑계로는 그가 제일 적절했다. 김석환이 가지고 있는 손영혁과의 라이벌 관계를 이용해보기로 했다.
“김 팀장님이랑 백 팀장님 욕을 그렇게 하던데요. 뻔히 보이는 그걸 탐색 못 했냐며. 아마 이대로 진입했다가는 큰코 다칠 거라고, 저보고 그런 것도 확인 못 하는 놈 밑에 있을 바에는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더라고요.”
“…정말이야? 그 새끼가 그런 말을 했다고?”
아니다. 손영혁은 김석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라이벌로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듯 관심도 없어 보였다. 오로지 나와 내 검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만 눈빛이 반짝거렸다.
이 거짓말이 들통나면 어떡하지 싶으면서도 입에서는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그 말이 너무 찜찜해서요. 아무래도 협회 과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허튼 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확실히 흘려들을 말은 아니긴 하네. 아니 근데 그러면 어제 당장 말하지 그랬어. 그 새끼 면상에 주먹이나 한 대 꽂아 주는 건데.”
“바로 말씀드리기에는 괜히 불길한 말 해서 초치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제가 직접 확인하고 싶었거든요.”
“뭘?”
기왕에 거짓말한 거, 끝까지 밀어붙이기로 했다. 연기도 할수록 는다고, 거울에 비친 내 표정이 심각해 보였다.
“사실 어제 제가 전주까지 내려갔다 왔어요. 도경초등학교 3학년 1반 맞죠? 거기 던전 입구 있던데.”
“뭐? 아니, 거기가 맞긴 한데. 그새 거기까지 갔다 왔다고?”
김석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의심스럽다는 투가 아니라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황당한 얼굴 그대로였다.
“확실히 제가 느끼기에도 뭔가 이상하더라고요. 쓸데없이 마나 밀도가 낮은 것에 비해 건너편 바로 첫 번째 방에서 느껴지는 몬스터들의 숫자가 이상…!”
“자, 잠시만. 태진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던전 안을 봤다고?”
김석환이 아연실색하며 물었다. 아차 싶었다. 백인호 팀장도 못 본 던전 내부를 내가 봤다고 하면 당연히 이상하지. 너무 급해서 말이 막 튀어나와 버렸다.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예상과 달리 지금 김석환이 짓고 있는 표정은 무슨 괴물을 쳐다보는 듯했다.
옆에 있던 한석훈도 내가 지금 뭘 듣고 있냐는 듯한 얼굴이 돼 있었다.
가만히 옆에서 듣고만 있던 최찬규도 뜨악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조용히 ‘진짜야?’라고 묻기까지 하며.
“검신의 축복이 요새 좀 이상해요. 뭐랄까, 능력이 개화된다고 해야 하나.”
위기의 순간이라고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검신의 축복이 이래서 좋았다. 어디에 갖다 붙여도 다 그럴듯해 보인다.
잠깐이나마 궁술은 물론 단검술, 격투술, 심지어는 함정 파훼까지 내게 가르쳤던 김석환이다. 가르치는 족족 흡수한다며 소스라치게 놀라던 모습이 생각났다.
탐색이라고 또 못할 건 없지 않을까 싶어 억지를 부려봤다. 다행히도 믿지 않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쟤는 내가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어쩌면 탐지 스킬도 익혔을지도 모를 일이지. 얼마 전에는 암살 스킬도 배운 것 같더니만. 아무렴. 누가 키운 건데.”
암살 스킬을 배운 건 아니다. 그냥 대충 움직임만 따라 하다 보니까 비슷하게나마 된 거지. 어쨌든 중요한 건 한석훈이 내 말에 힘을 실어줬다는 것이다.
김석환을 넌지시 쳐다봤다. 이 순간 무엇보다 팀장인 김석환의 말이 중요했다. 김석환이 내 말을 무시하고 일을 강행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하긴. 이놈이 보통 놈은 아니죠. 아무렴, 누구 밑에 있는데. 아니 그것보다 그 새끼가 그런 말을 했다고?”
어쩐지 다른 포인트에 꽂힌 듯했지만.
“손영혁이 말한 것도 있고.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뭔가 있긴 한가 보네. 그래, 일단 애들이랑 같이 가 보자. 진짠가 보게.”
몸에 힘이 쭉 빠졌다. 1단계는 일단 통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