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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66화 (66/170)

66화 갈등 (2)

놈은 내가 지척에 다가올 때까지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재밌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올테면 와보라는 뜻이었다.

아무리 내가 놈보다 레벨이 낮다해도. 헌터에게 방심은 늘 치명적이다.

한낱 D급 던전에서도 방심이라는 글자가 허무하게 헌터들의 목숨을 가져가는 법이다.

전력을 다했다.

[일점폭발을 시전합니다!]

[오러블레이드를 시전합니다!]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시전합니다!]

[신성한 파괴자를 시전합니다!]

아락투스가 남긴 흔적은 마법에만 영향을 끼친 게 아니었다. 체내에 마나가 흐르는 길이 넓어졌다. 그 효과로 마나의 순환이 폭발적으로 빨라졌다.

순식간에 검에 맺힌 푸른색이 짙어졌다. 이 현상은 능력치로 계산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때문에 자신 있었다. 놈을 중심으로 퍼지는 파동이 나보다 깊고 진할지라도, 내게도 승산이 있다고!

후웅!

올곧게 뻗어 나간 검이 사이비를 반으로 가르기 직전이었다.

그때였다.

뇌리에서 강력하게 보내는 경고가 있었다. 정확히는 검신의 축복이 내게 신호를 주는 것이었다.

내게 미래를 보여주는 능력만큼은 아니었지만 그와 비슷했다. 본능의 영역에서, 이 경로로 검을 내지를 때의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팔이 잘린 내 모습이 그려졌다. 뿐만 아니라, 놈의 손이 내 심장을 꿰뚫는 장면이 잔상처럼 시야에 맺혔다. 사이비라 해서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무력의 깊이가 차원이 달랐다.

곧장 뻗은 손을 다시 회수했다. 단 한 톨의 반동도 없이 검을 물들였던 마나가 배꼽으로 회수됐다.

다른 검술이었다면, 설령 그것이 청운적하검법이었다 해도 마나를 회수할 때의 반동은 어쩔 수 없을 것이었다.

마나가 단전으로 모이는 과정에서의 극렬한 반동은 회로를 망가트리기 때문이다.

허나 D등급에 불과한 ‘신성한 파괴자’는. 시전한 나조차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유연함을 지니고 있었다.

[신성한 파괴자(D)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전투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근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거기까지도 찰나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허. 기가 막히구나. 마나 운용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지?”

놈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피어났다. 탐욕 어린 눈빛이 슬쩍 스쳐 지나가기도 잠시, 사이비가 고개를 저었다.

“알려준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로군. 혈도 자체가 범인과는 차원이 다르다. 내 직위 정도는 들을 자격이 생겼소 소교주. 본인은 교단의 팔 장로요.”

놈의 직위 따위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웃기는군. 일 장로니 팔 장로니. 사이비 주제에 음침한 지하에서 하찮은 감투나 나눠 쓰는 꼬라지하고는. 쓰레기 같은 것들. 차라리 길가의 돌멩이를 섬기는 게 어떠냐.”

녀석이 얼굴을 굳혔다.

“말조심하시오.”

“어디 조선 시대에서 시간여행이라도 왔나. 그런 말투는 어디에서 배우는 거지? 그래. 본좌가 명한다. 가서 죽어라.”

“일 장로가 경고한 이유가 있었군. 아직 마음가짐이 사특한 것들과 다르지 않아. 헌데 의문이 생긴단 말이오. 교단을 이끌 교주라면, 애초부터 그것들에게 현혹되어선 안 되지 않소?”

사실 팔 장로의 애늙은이 같은 말투는 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놈의 용모와 달리 연배는 나와 다를 것이 확실했다. 말투뿐만 아니라 무력 또한 그랬다.

최소한 A급. 실질적으로 현재 B급인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자였다.

그렇기에 회피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놈이 마음먹고자 한다면 지옥 끝까지 나를 쫓아올 수 있었기에.

검신의 축복을 재촉했다.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네가 내게 길을 보여라. 놈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특성, 검신의 축복(S) 숙련도가 올라갑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였다. 번쩍하는 전류가 머릿속에서 타닥타닥 터졌다. 동시에 몸이 궤적을 따라 움직였다.

허공에 검을 띄운 즉시, 놈에게 주먹을 뻗었다. 최대 세 합 안에 놈을 쓰러트려야 한다. 장기전은 내게 승산이 없었다. 검신의 축복이 쥐어짠 최대한의 답이었다.

“호오.”

팔 장로는 흥미로운 시선 그대로 나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까지도 계산된 행동이었다.

“소교주의 수는 몇 수 앞이나 바라보는구려.”

놈이 비릿하게 웃기 무섭게. 놈의 명치를 노리고 날아간 주먹이 허무하게 막혔다.

보자기로 감싼 듯 놈이 내 주먹을 감아쥐었다. 미처 반응하지도 못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

타오를 듯 머릿속이 뜨거웠다. 검신의 축복이 끊임없이 운동하며 수정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검신의 축복이 전달하는 여러 그림 속 결론은 하나였다.

지금의 내가 대적불가능한 강자라고. 도망치라고. 속으로 욕지기를 삼켰다.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했겠지!

“소교주께서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구려. 때문에 이 몸께서 오늘 그대를 시험해 봐야겠소이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놈의 신형이 사라졌다. 번쩍하는 순간 다시 놈이 나타났다.

왼쪽이라 생각한 건 놈의 잔상이었다.

가드를 올린 직후 바람 소리가 맹렬하게 오른쪽을 스쳤다. 그 사이로 놈이 씨익 웃는 것이 보였다.

당했다는 생각도 잠시, 찰나 간에 내 몸이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콰앙-!

공기를 가르고 처박힌 곳에는 흙더미가 가득했다. 입안 가득 찬 흙을 뱉어낸 즉시였다. 놈이 또다시 발을 굴렸다.

번뜩이며 나타난 놈의 발이 태산처럼 거대했다.

본능에 가까운 속도로 마나를 명치에 집중시켰다. 피한다는 생각도 못 했다. 놈과 나의 차이는 그만큼 명백했다.

“흡!”

쿠웅!

“커헉!”

눈이 뒤집어지며 잠시간 의식이 끊어졌다. 멀어지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귓전으로 울리는 팔 장로의 말이 멀게 느껴졌다.

“그 짧은 시간에 내 공격을 예측해서 막아낸다? 굉장하다. 소교주의 자질이 보통 이상이야. 허나, 아직까지도 교좌에 오르기에는 부족하다. 더. 더 보여다오.”

놈의 평가는 엄연히 고수로서 하수에게 내리는 가르침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부상이 치명적이었다. 지금 몸을 움직이면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야 했다.

빠르게 손을 뻗어 중력 마법을 펼쳤다. 놈의 전신을 짓누르는 동시에, 저 멀리 떨어진 롱소드가 내 손안에 착 감겨왔다.

“으음?”

엿 같은 감탄사를 더 들어줄 필요도 없었다. 그쯤에서 검신의 축복이 놈을 분석해내는 데 성공했다.

220레벨 정도. 예상대로 완연한 A급 각성자가 맞았다. 놈이 나를 내려다보는 것이 당연했다.

이 순간, 심장의 고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위험을 느낀 생물이 본능적으로 발악하듯, 고리 속 마기가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콰드드득!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급격하게 무거워졌다. 놈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신기한 듯 나를 바라봤다.

“이건 또 무슨 공능이오? 소교주.”

놈의 말을 무시하고 사지를 움직였다. 놈의 팔과 다리에 매달리듯 달라붙었다.

나를 떼어놓으려는 놈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간 순간부터였다. 재롱 보듯 쳐다보던 놈의 표정이 짜증으로 물들었다.

대지가 푹 꺼짐과 동시에 내 위에서 나를 노려다 보던 팔 장로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만두시오. 소교주. 그대를 더 다치게 했다가는 나도 문책을 면하기 힘드니. 소교주!”

“까고 있네.”

죽음을 각오한 비장의 수다.

단전은 물론이고 심장의 고리에 맺힌 마나까지 모조리 끌어다 썼다.

팔 장로를 중력으로 짓누르는 동시에 먹이를 삼키는 뱀처럼 더 단단히 놈의 사지를 조였다. 필살의 각오였다.

“그, 그만. 그만하시오!”

팔 장로의 혈색이 붉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녀석의 몸이 조금씩 무너져 갔다.

허나 나 또한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다. 반발력에 의해서였다. 놈이 받는 고통만큼 나 또한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쿠구궁!

“그만!”

놈의 외침과 함께 의식이 옅어졌다. 순간적으로 마나가 끊어졌다. 팔 장로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곤 내 멱살을 잡아 올렸다.

아, 젠장할. 이러면 안 되는데.

눈이 저절로 감겨왔다.

***

궁전 같은 곳이었다.

왕좌가 그녀의 앞에 있었다. 언젠가 교주가 될 그날에 그녀가 앉을 자리였다.

일 장로는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교주가 된 자신이 세상을 정화하고 몬스터들을 살육하는 모습을.

그런데 전능하신 시타둠의 명령은 자신의 뜻과 달랐다. 웬 얼빠진 놈을 교주로 섬기라 하셨다.

‘이태진? 불경하게도. 불경하게도!’

일 장로가 생각했을 때 이태진은 얼빠진 인간에 불과했다. 하물며 그뿐일까. 그 인간 남자는 시타둠을 부정하기까지 했다.

“전능하신 시타둠이시여. 어째서 저를 믿지 못하십니까!”

그렇게 울부짖어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시타둠의 뜻은 확고했다.

“제가 시험할 수 있게 하소서.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겠습니다. 그것까지는 막지 마십시오. 시타둠이시여.”

일 장로가 교좌를 향해 부르짖었다.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하지만 그게 허락의 뜻이라는 건, 누구보다 일 장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이태진의 마나를 쫓아 지상에 떨어졌을 때.

콰앙!

팔 장로 앞에 이태진이 쓰러져 있었다.

“뭐?”

일 장로는 이 믿지 못할 장면에 자신이 본 게 맞는지 눈을 비볐다.

“너, 너. 뭐해?”

일 장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그것마저도 사람을 홀릴 만큼 매혹적인 음성이었으나, 정작 팔 장로는 사신이라도 만난 듯 흠칫 놀랐다.

“일 장로.”

굳은 얼굴 그대로 팔 장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소교주께서 과연 우리를 이끌 자격이 있으신지 시험해봤다.”

마치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하는 팔 장로의 개소리는 처음부터 궁금하지 않았다. 팔 장로를 스쳐 지나쳐간 일 장로가 쓰러진 이태진 앞에 섰다.

이태진은 의식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그를 지키고 있던 갑옷은 인벤토리로 돌아간 후라 더더욱 외상이 눈에 띄었다.

특히 왼쪽 갈빗대가 완전히 부러진 건 살의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이건.”

답지 않게 일 장로의 목소리가 떨렸다. 천년을 살면서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분명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모시는 신께 불경을 저지르지 않으면서, 뜻을 이룰 수 있는 기회.

이대로 못 본 척 지나가면 된다. 혹은. 죄를 지은 팔 장로를 단죄하면 그뿐이다.

죽은 이태진은 어쩔 수 없었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고. 시타둠께 결백하다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왜 갈등이 이는 것이란 말이냐!’

이태진을 죽일지, 살릴지.

고민이 이어지던 중 뒤쪽에 있던 잡것이 말을 걸어왔다.

“일 장로. 확실히 그대의 말이 옳았소. 저자는 교주가 될 자격이 없는 자요. 시타둠께서 실수하신 게….”

떠벌리는 잡것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일 장로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죽여도 내가 죽이지.”

피식 웃던 일 장로의 얼굴에 서슬 퍼런 살기가 일렁거렸다. 그것을 눈치챈 잡것이 항변하고 나섰다.

“내게도 소교주를 시험할 권한은 있다. 일 장로. 네 마음대로 교단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팔 장로가 변명하듯 팔짱을 끼며 말했다. 여유로운 듯한 태도를 유지하려 했지만 멀리서도 느껴지는 팔 장로의 심장박동은 초조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더군다나 일 장로 당신도 이 자를 인정 못 한다 하지 않았소. 그러니 내 시험은 합당….”

“치료해.”

두 번 말하지 않았다. 팔 장로에게는 치유의 은사가 내려졌다.

‘시타둠께 아주 과분할 정도의 은혜를 받은 놈.’

잠시간 팔 장로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태진에게 손을 뻗었다. 손이 하얀색 빛에 물들기도 잠시, 이태진의 외상이 깨끗하게 없어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깨끗한 신체로 곤히 잠든 이태진만 있을 뿐이었다.

혹시 뭔가 다른 수작을 부렸을까 몇 번이나 살펴봤지만 치유된 게 맞았다. 이태진은 잠자듯 기절해 있었다.

“그럼 이제 죽으렴.”

낮게 울리는 일 장로의 말이 팔 장로에게 매섭게 다가왔다. 팔 장로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장로끼리의 단죄는 있을 수 없다. 교리에 따라서도 마찬가지야.”

“닥쳐. 더러운 입으로 교리를 입에 담지마.”

뚜벅뚜벅 일 장로가 천천히, 그러나 막힘없이 걸어왔다. 팔 장로는 선 자리에 굳은 듯 가만있을 수밖에 없었다.

“멈춰라. 일 장로. 마지막 경고니까.”

그 말에도 일 장로는 흑색머리를 휘날리며 걸어올 뿐이었다.

“일 장로. 네 뜻이 그러하다면 정식으로 장로대회의를 열겠…! 어?”

서걱!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팔 장로의 시야가 돌아갔다.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지척까지 다가온 일 장로가 느릿하게 팔을 휘두른 순간이었다. 미처 마나를 끌어올리기도 전에 목이 떨어져 나갔다.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팔 장로가 본 것은, 잔뜩 짜증이 난 일 장로였다.

“죽여도 내가 죽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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