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갈등 (1)
“창고를 털어올 때 쓸만해 보이는 건 다 털어왔다. 그런데 보는 눈이 희한하군. 이건 정보도 읽히지 않는 아이템이야.”
손영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골라도 뭘 그런 걸 고르냐는 듯. 그런데 이태진이 어쩐지 기뻐 보이는 표정이었다.
“검술과 달리 아이템 보는 눈은 형편없어.”
그러던 손영혁이 씨익 웃었다. 마침내 하나를 이긴 듯한 승리의 기쁨이 거기에 있었다.
애초부터 나보다 강한 양반이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갈 따름이었다. 굳이 거기에 대꾸하지 않았다. 표정을 관리하는 것만 해도 온 힘을 기울여야 했다.
아락투스의 흑색 마기가 반지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진득한 농도의 마기 때문에 숨쉬기도 곤란할 지경인데 어째선지 손영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만 응시하고 있었다.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애초에 마기 따위는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고 보니.
정보도 읽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 앞에 뜨는 메시지는 무엇이란 말인가.
[고귀한 암흑마법사 아피아의 반지(A) : 아락투스의 총애를 받는 고위 흑마법사의 반지이다. 흑마법을 익히는 자들은 착용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경지를 엿보게 된다. 허나 허락되지 않은 자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다.
정보 제한 : 아락투스 계열 흑마법을 익히는 자.
착용 제한 : 아락투스 계열 흑마법을 이해한 자.
효과 : 아락투스 마법의 효율이 대폭 상승합니다. 마기의 흡기량이 대폭 상승합니다.]
심플하게 효율이 대폭 상승한다고 적혀 있었지만 그 뜻이 얼마나 큰지는 착용하지 않은 나도 알 수 있었다.
아이템을 착용하고 마법사전을 펼친다면. 그것만으로 고리 하나를 더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무조건이다. 이건 무조건 얻어야 한다.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이것으로 인해 내 목숨이 위협받는다 할지라도 고민할 거리조차 아니었다.
“원한다면 주겠다. 물론 다른 것들 전부도 말이야.”
손영혁이 신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우쭐대는 표정이 대단한 장난감을 자랑하는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그의 체면과 별개로 대단한 아이템은 맞았다. 다른 것들은 전부 눈에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허나 내 표정은 아까부터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아까 전 내 속내를 꿰뚫린 직후부터였다. 아무렴 다른 건 몰라도 표정을 숨기는 일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이거 하나만 받겠습니다.”
심드렁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목숨을 위협받는 일을 감수하리라 다짐했다 해도, 먼저 빌미를 주는 것도 바보같은 짓.
상대는 다름 아닌 협회의 감찰과장이다. 협회 내에서도 권력을 따지자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자였다.
내게 보이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그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했다.
‘아주 냉혹해서 공사를 구분하는 데 있어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다. 나 정도쯤 아니라면 만나자마자 오줌을 지릴 만도 해.’
‘김석환 팀장님도 예전에 그 사람한테 한 번 잘못 까불었다가….’
‘이 새끼가. 까분 게 아니라 A급 각성자 간의 피를 토하는 사투였다니까.’
어쨌든.
내 연기가 어떻게든 먹혔는지 손영혁이 대번에 샐쭉한 얼굴이 됐다.
“이것들 전부 네 것이라니까?”
“누구 좋으라고. 이거 다 받으면 그걸로 약점 잡겠다는 거 아닙니까?”
“무슨. 나를 뭘로 보고. 못 믿겠다면 정식으로 협회 감찰과장….”
“아뇨. 됐습니다. 이거 하나만 받을게요.”
나는 존댓말, 손영혁은 반말로 대화하는데 정작 갑을은 바뀐 느낌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손영혁이 더 간절하니까.
“그럼 그렇게 하는 겁니다?”
“젠장할. 이러면 또 빚진 셈이잖아. 네 검술을 가르침 받는데 겨우 이런 걸로 때울 수 있을 리가.”
“생각이야 알아서 하시는 거고. 나중에 환불해 달라 해도 그런 거 없습니다.”
“내 안목을 무시하지 마라. 네 자질은….”
“그만요. 그만. 그리고 저도 지금 당장 알려줄 처지는 아닙니다. 살아남아야 뭘 어떻게 도와주든 하지.”
“BTO?”
손영혁이 의뭉스럽게 물었다.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싶군. 네 자질이야 무엇보다 인정한다만,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할 때다. 헌터로서의 호승심은 이해한다. 허나 하오란은 아직 네 상대가 아니야.”
그러면서 엄중한 표정으로 내게 조언했다. 어처구니가 없을 노릇이었다. 가진 걸 모두 팽개치고 일성에 들어오려는 놈이 무슨 이성 운운을.
“크흠.”
저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지, 나와 눈이 마주친 손영혁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미 결정된 일입니다.”
“너희들은 언제나 이런 식이야. 저질러 놓고 해결법을 찾으라고 하지. 하아.”
쯧, 하고 혀를 찬 손영혁이 마땅찮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놈의 정보는 협회에서도 최근에서야 알게 됐다. 분명히 요주의 인물이야. S급의 특성은, 그것도 전투에 관련된 것들은 하나같이 위험해. 너처럼.”
“…….”
“솔직히 말하자면 협회에서는 어부지리를 취하고자 한다. 일성에서 화신을 없애준다면 그만한 이득도 없는 것이지. 물론 반대의 경우도 썩 나쁜 전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놈들도 있지만. 어쨋든, 원한다면 우리가 파악한 정보를 주겠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일성이라 해도 일개 기업일 뿐이었다. 세계 각국에 요원을 뿌려놓은 협회와는 정보력에서 비교할 수 없었다. 협회의 정보야말로 지금 시점에서는 내 앞에 산처럼 쌓여있는 아이템보다 귀한 것이었다.
“하오란에 대해 아는 거 있습니까?”
“놈의 정치적 리스크를 공략해야 할 거다. 일성과는 달라. 화신의 후계자 구도는 네 생각보다 복잡하다. 이용할 거리가 많다는 뜻이야.”
손영혁이 감찰과장다운 면모를 드러냈다. 후계자 구도를 입에 담은 손영혁의 눈빛이 사나웠다.
“물론 네가 신경 쓸만한 일은 아니지만. 이런 일에 일성의 귀공자를 쓸 리가 없지. 그 양반이.”
알 수 없는 말을 하던 손영혁이 대뜸 말을 끝맺었다.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레벨을 올리는 것뿐이다. 우리가 하오란의 정보를 파악했듯, 저들로서도 마찬가지일 거다. 네 레벨은 당연하고 가진 특성, 습관, 검을 쥐는 버릇, 발놀림. 머리카락 개수까지도 알아냈을지도 모르지. 헌터 대 헌터로서 낭만적인 대결을 기대했다면 지금이라도 접는 게 좋을 거다. 언제 네 목숨을 노리고 살수들이 찾아올지 모를 일이야. 그러니 BTO 당일까지 호위를 맡겨라.”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그 목적이 내 검술 때문이라 해도, 손영혁이 다시 보이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허나 손영혁이 모르는 게 있었다. 아락투스의 마법에 관련된 건 이 세상 누구도 모른다.
손영혁이 들고온 아피아의 반지를 보고 나서 확신이 더해졌다. 지금 당장 내 목숨을 살릴 것은 검술이 아니라 마법일 것이라고.
“조언 감사합니다. 어쨌든 아이템은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그리고 일성에 오지 않겠다는 약속. 꼭 지키셔야 할 겁니다.”
반지를 제외하고 싹 다 가져가라 말했다. 반지 하나 정도라면. 더불어 손영혁이 협회에 자리를 보전한다면 협회장이 길길이 날뛸 일은 없겠지.
그러고도 손영혁은 한참이나 아쉬워했지만 단호하게 그것들을 물렸다.
당연하지. 저것들 다 받으면 죽는 목숨인데.
“네가 뭔데 이래라저래라….”
스윽 반지를 손에서 빼고 나서야 손영혁이 안절부절못하며 알겠다며, 성격 한번 더럽다며 구시렁대다 끝내는 수긍했다.
근데 나, 이제 목숨은 보전된 거. 맞겠지?
***
손영혁의 조언에도 굳이 호위를 요청하지 않은 이유는 전적으로 ‘그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확실해진 것이다. 하늘 위에서 나를 보살피는 놈이 내가 죽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일성에서도 내게 똑같은 제안을 했지만 거절했다. A급 헌터 셋을 내게 붙여준다는 말이었다.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과한 조치에 기겁하며 사양했다.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게 위험이 찾아온다면 어련히 하늘 위의 예언자가 경고해 줄 것이 분명했다. 비록 악랄한 고통이 수반된다 해도 말이다.
다른 말로. 지금 내 뒤를 밟고 있는 놈은 내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살기를 풀풀 날리는 녀석이었다. 안 그래도 최근 들어 기감을 잡아내는 감각이 극도로 발달되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러나 놈의 기척은 아카데미에 있는 견습생들도 잡아낼 만큼 거리낌이 없었다. 놈의 속내가 뻔히 보였다.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말이었다.
입사 첫날부터 지금까지 ‘그것’이 내게 들인 공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뜬금없이 나를 죽인다는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애지중지하는 예언자께서 이 순간 잠잠했다.
그 말인즉슨, 오늘 죽을 놈은 내가 아니라 뒤에서 바짝 쫓아오고 있는 녀석이라는 뜻이었다.
마나를 담은 발이 지면을 박찼다. 순식간에 건물들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예상대로 놈이 따라왔다.
몇 번 더 발을 구른 끝에 인적이 드문 공터에 도착했다. 곧바로 끈질기게 쫓아오던 녀석이 나와 마주섰다.
“화신에서는 상도덕도 없구나.”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공격보다 놈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주인에게 칭찬 한번 받아보려는 강아지 같아. 보기 좋다는 말이다.”
그렇게 놈을 도발해도 놈은 비릿한 미소만 지을 뿐 말이 없었다.
“그대가 이태진이군. 듣던 대로 어려.”
나와 연배가 비슷한 사내가 쓰는 말투는 늙은이의 것이었다. 창백하게 하얀 얼굴에 새까만 머리. 제법 귀티나는 놈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놈은 화신에서 보낸 자객이 아니었다.
“일 장로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속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겉모습만 보자면 말이야.”
여유로운 얼굴 그대로 놈이 말을 이었다. 헌데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일 장로. 난데없이 그 마녀의 이름이 튀어나온 것이다.
서울역에서 벌어진 게이트 참사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 마녀의 손짓 한 번에 무참히 대가리가 터져버린 B급의 몬스터들이.
그 이름이 들리자마자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나 보다. 헬리오스의 심장부터 장착하고 봤다.
허연 얼굴의 사내는 그런 내 무장을 보고도 씨익 웃고 말 뿐이었다.
허장성세가 아니었다. 놈의 기운이 제법 따끔하다. 느껴지는 파동또한 놈을 상당한 고수로 보고 있었다.
“차라리 내 목숨을 노리고 온 살수였다면 환영이라도 해 줄 텐데. 빌어먹을 시스템쟁이였잖아. 그래, 그 같잖은 교리를 내게 전파해 봐라. 어디 전도가 되나 보게.”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다. 대번에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아닐까. 놈들에게 시스템이란 전지하고 전능하신 유일신인데.
빌어먹을 것들.
놈이 뭐라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척에 닿은 지금이라면 선공을 가져가 볼 만했다. 상대가 호흡을 들이마시는 때가 기점이었다.
지면을 밀기 위해 발끝에 힘을 가했다.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시전합니다.]
망설일 것 없었다. 오늘 나는 죽지 않는다. 녀석의 앞으로 빠르게 도약했다. 순간, 녀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