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손영혁 (2)
뜸 들이지 않고 곧장 미래가 보였다.
“네 놈을 살려두려 했다.”
야밤?
아니다. 칠흑 같은 시야는 어떤 마법적 효과 때문이었다. 몸이 속박당한 것도 그와 비슷한 마법일 터였고.
“헌데 어지간히 말을 안 들어야지. 자질을 믿고 까부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손정연의 목소리였다. 근방에 있었다. 음성에 실린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화산 같은 느낌이었다. 잔뜩 분노한 것이다.
대체 왜?
“집에서 키우는 개를 상전처럼 모시는 걸 본 적 있나?”
전과 같은 다정한 말투는 없었다. 나를 회유하려던 부드러운 손길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흉흉한 살기가 의식 너머 여기까지 따끔할 지경이다.
“네놈 꼴이 그래. 감히. 감히 주인 될 자에게…!”
뭔데. 뭐 때문에 이 늙은이가 이렇게 지 화가 났을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다른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연관 없는 미래를 보여준 적이 없으니.
손영혁의 철없는 발언이 눈덩이처럼 굴러간 거겠지. 감찰단 과장을 그만두고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는 그딴 헛소리를.
“죽어도 할 말 없을 거다. 영혁이를 대체 어떤 말로 구슬렸는지는 몰라도 말이야.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어.”
협회장이 쉭쉭 뿜어내는 콧김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어지간히도 화가 난 것이다.
나 같아도 그런다. 애지중지하는 제 손자를 내가 낚아채 갔다고 여기는 거겠지.
변명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만, 그런 기회는 없었다. 미래의 나도 체념한 모습이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마법을 끊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없었다.
“네 죄는 통감하는 모양이구나. 아까워. 너무 아깝다. 너를 어떻게든 사용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칼날이 워낙 날카로워야 말이지. 주인마저 벨 셈이야. 네 자질을 정말 몰랐던 건 어쩌면 나일지도 모르겠군.”
분노에 가득 찬 손정연이 이리저리 말하기도 잠시, 아쉬운 기색을 드러냈다. 내 머리가 번쩍하고 들렸다. 살려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듯하다.
그래, 비굴하든 말든 일단 살고 볼 일이었다. 목숨을 위해서라면 자존심 따위를 부릴 때가 아니다. 가랑이 사이라도 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내게 오지 않았다.
“쯧. 이래서야. 네놈은 그릇도 크다. 자존심을 부릴 때와 부리지 않아야 할 때를 너무도 잘 아는 탓에. 이대로 살려뒀다가는 아무리 봐도 우리 가문에 악재로 남겠어. 거국적으로 보자면 네놈만 한 천재가 또 언제 나오겠냐마는.”
쓰걱!
번쩍하는 순간 시야가 밝아졌다. 손정연이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시야를 방해하던 마법이 풀렸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다. 이미 내 목이 몸에서 분리되고 있었으니까.
“그게 우리 가문보다 중요하겠나. 가는 길 너무 노여워 말게. 그래도 내 손에 죽었으니 억울하진 않을 것이야.”
화악!
“이런 미친.”
미래를 빠져나온 즉시였다. 내 입에서 자동으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 식의 죽음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평소 나답지 않은 모습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푸들푸들 떨리는 내 얼굴이 그대로 느껴졌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
단번에 그렇게 말했다. 처음에 느꼈던 황당하다는 감정도 이제는 없다.
함정. 이건 함정이다. 손영혁이 멀뚱멀뚱 나를 보고 있었다. 진심이 담겼다는 눈빛 안에는 한점 거짓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저것이 연기라는 걸. 나를 죽이려는 수작이 아니라면 손영혁이 저러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무슨 일이 있어도 손영혁이 일성으로 오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헛소리? 내 행동을 마치 제약할 수 있다는 듯 말하는군.”
“뭐?”
손영혁이 되려 무슨 네가 뭔데 되니 안 되니를 판단하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진심이다. 네놈에게 검술을 배울 수 있다면 가랑이라도 길 수 있는 심정이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네놈과 맞붙었던 내 수하들이 그날 이후로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그게 뭘 뜻하는 바겠어.”
녀석이 미간을 한 번 찌푸리더니 말을 이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태진의 가르치는 재주가 실로 뛰어나다는 거겠지. 또한, 이대로라면 네놈은 머지않아 나를 뛰어넘겠지. 격차는 점점 벌어질 테고. 내가 용을 써도 마찬가지일 거다. 아, 물론 네놈이 하오란에게 살아남는다는 전제하에.”
나를 칭찬하는 건지 까내리는 건지 헷갈린다. 손영혁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수려한 외모의 남자가 내 눈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게 검을 알려다오.”
남에게 부탁하는 어조치고는 꽤나 당당했다. 마치 날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남에게 굽히는 법을 모르는 듯하다. 그게 놈의 본래 성정인 듯했다.
남에게는 잘도 가면을 쓰는 놈이 내게는 제 본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나 내가 만만했으면.
그래서 좀 더 들어보기로 했다. 놈의 수작을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타일러야 할 때였다. 여기서 더 놈을 자극했다가는 진짜 일을 치를 것 같은 표정이다.
손영혁의 진심이 담긴 눈빛이 내게는 광기 어린 미친놈의 뒤집힌 눈으로만 보였다.
“일성에 들어오는 이유가 뭡니까? 그거나 들어 봅시다. 제 밑으로 들어오는 이유가 겨우 저와 검을 맞댈 수 있는 것 때문은 아니겠고.”
다시 존대로 돌아갔다. B급으로 올라섰다 해도 협회 감찰과장에 비할 바는 못됐다.
하도 어이없는 말을 들어서 순간 발끈해서 그렇지, 손영혁의 사회적 계급은 나보다 한참 위였다.
“몇 번이나 말해야 하지? 네놈 밑에서 검을 배울 수 있다면 가랑이 밑이라도 들어갈 준….”
이마를 짚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진짜 이 사람이 뭐라도 잘못 먹은 건가 싶었다.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겨우? 겸손도 적당히 떨어야 가치가 있는 법이다. 정말 겨우라면, 매일 나와 시간을 내서 대련해 줄 수 있나?”
순간 말문이 막혔다. 겨우 검 몇 자락 알려주는 것 따위야, 혹은 자세를 교정시켜주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래, 같은 일성이라면 말이다. 빈말인지는 몰라도 덕분에 큰 덕을 봤다는 사람이 많기도 했다.
허나 그게 외부인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가족 같은 구성원이 아니라면 굳이 그런 짓을 왜?
아니, 애초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적국의 병사들에게 무기를 나눠주는 것과 다르지 않은 행동이다.
“그래서다. 감이 좋다고 들었다. 허나 나도 지금껏 목숨을 걸고 싸운 게 적지 않아. 내 직감이 말해주고 있어. 네놈을 따라가라고.”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자기가 쌓은 커리어를 포기하고 내 밑으로 온다고 한다는데, 내가 그걸 무슨 수로 막을까. 오히려 일성의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했다.
손영혁 같은 A급 헌터는 굉장히 귀중한 자원이다. 한 명 한 명이 전력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B급 헌터 한 명이 안 된다고 해도 막을 수 있을 리가.
그런데 이대로 흘러가면 내 목이 날아간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BTO만 해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까마득한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검만 알려주면 되는 겁니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저 표정을 보니 도저히 포기할 것 같지도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뭐가 됐든 일단 손영혁의 미친 돌발행동을 막아야 했다.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동료들에게 산업스파이라느니, 배신자라느니, 정신이 나갔다느니 하는 말들을 듣는 것은 모두 감수하기로 했다. 죽는 것보다야 쪽팔린 게 나으니까.
이렇게 큰 결심을 했는데도 손영혁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아니, 좀 전보다도 더 결의에 차 있는 듯하다.
“이태진이 아무 대가 없이 내게 검을 가르쳐 준다? 지나가는 개도 안 믿을 헛소리를 잘도 하는군.”
손영혁이 내 말을 딱 잘라 거절했다. 나를 존중하는 건지 개무시하는 건지 헷갈리는 말투는 여전했다.
이 새끼가 진짜. 뭐 어쩌라는 건데.
“믿든 말든 자유긴 한데, 원하는 게 있다면 알려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당장 시작하죠. 저도 시간이 없는 몸이라….”
벌떡 일어났다. 따라오라는 손짓과 함께였다. 그러나 뭐가 또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앉은자리에서 손영혁이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마치 자존심이 잔뜩 상한다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기까지.
“내가 일성에 들어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이상하군. 분명 네 입장에서도 좋은 일 아닌가?”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던 손영혁이 내놓은 말이 꽤나 날카로웠다. 헌터 잡는 감찰단의 수장인 사람이다. 이제껏 얼마나 많은 각성자들이 그의 앞에서 심문을 받았을까.
그에게 애송이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 터였다. 그래서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예. 안 됩니다. 단언컨대, 과장님이 일성에 들어온다 해도 제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을 겁니다.”
“…….”
손영혁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보아, 살면서 한 번도 거절이라는 걸 당해본 적 없는 듯했다. 아주 잘나신 귀공자님이 따로 없었다.
“어떻게? 친히 내가 이곳에 와주겠다는데.”
그러며 고개를 저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부정하는 듯 천천히 고개를 저으면서.
“아니 친히고 나발이고 필요 없다니까요. 진짜 토 나올 것 같네.”
가감없이 솔직한 말을 전했다. 생각해 보니 이 사람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내가 왜 굽히고 나서야 해? 차라리 배 째라고 나오면 굽히지 않을까 싶었다.
“그 자질에는 차라리 그런 성정이 더 어울리는군. 아까의 겸손이 과했다는 건 아는구나.”
되려 역효과만 불러일으킨 듯했다. 내 신경질에도 오히려 합당하다는 듯 손영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합의점을 찾자. 이유는 모르겠다만 너는 내가 일성에 들어오는 걸 바라지 않는군.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게 검을 배워야겠고.”
흥정하듯 구는 손영혁에게 차라리 잘됐다고 느꼈다. 뭐가 됐든 일성에만 들어오지 않으면 된다. 이 거머리 같은 놈에게 검 몇 자락 알려주면 알아서 떨어지겠지.
“네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다만, 혹시 몰라 가져온 게 있다.”
의미 모를 말을 한 직후였다. 허공에서 아이템이 와르르 쏟아졌다. 모두 손영혁의 인벤토리가 토해낸 것들이었다.
“이게 무슨.”
넓은 테이블이 아이템으로 가득 채워졌다.
검, 반지, 방패, 귀걸이….
수는 물론이고 종류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것들이었다.
“내가 모은 것들은 물론이고 협회의 창고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모두 A급 이상이지.”
자랑스럽게 말하는 손영혁을 보며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왜 손정연이 나를 죽이나 했더니. 이게 원인이었다.
협회의 창고를 다 털어와 내게 넘겨준 것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왕자님이 내 앞에 있었다.
“환장하겠네. 전부 다 필요 없습니다.”
순간순간 탐나는 것들이 보이기는 했다. 최태성의 무구 창고 무제한 대여권을 받은 나다. 비록 던전에 갈 때만 쓸 수 있다지만 그게 어디라고.
그래서 아이템에 대한 욕심은 별로 없었다. 비싼 아이템을 가지고 싶다던 사람들을 남 일처럼 바라봤다.
그래도 손영혁이 꺼내온 것은 달랐다.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은 것들로 가득했다.
하나만 시장에 풀려도 억대는 가볍게 넘길 것들이었다. 욕심이 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이거 받았다가는 내 목이 날아간다. 아무리 아이템이 탐 나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그래. 네 눈에는 그렇게 보이겠지.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내 정성이라 생각하고 받아라.”
정작 손영혁이 이해한 것은 전혀 다른 의미였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산처럼 쌓인 아이템을 손영혁 쪽으로 밀어냈다.
그때였다. 조그맣게 빛나는 반지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어?”
S급 아이템이라 해도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내 손이 멈칫하고 만 것은.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었다.
반지에서 넘실대는 기운은 분명 아락투스의 마기와 동일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