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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61화 (61/170)

61화 두 번째 장 (1)

각성자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연 등급을 올리는 것에 관한 것이다.

시스템이 직접적으로 정해주지는 않았지만 50레벨마다 분명한 힘의 차이가 있었다.

때문에 D급에서 C급, C급에서 B급으로. 혹은 100레벨, 150레벨 같이 등급이 바뀌는 일은 각성자에게 가장 중요한 이벤트다.

단순히 알파벳이 바뀌는 말장난 따위가 아니다. 등급의 상승이란 다른 말로 사회적 신분의 상승이란 뜻이다.

각성자가 처음 등장하고 혼란을 겪은 시기는 이미 50년도 더 된 일이다. 과도기를 겪은 끝에 자본주의가 다시 정립됐다.

돈만 있다면 A급 아이템도 구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말이다. 각성자들이 기를 쓰고 이름값을 높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보다 많은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다.

몬스터가 이 땅을 침공하고 있다. 지금도. 아니, 과거보다 시간이 갈수록 게이트와 던전의 생성이 빈번해지고 있었다.

엄연히 우리는 외계와의 전쟁 중이라는 말이다. 당연히 힘의 논리가 그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세상이다.

당장 내게 치근덕대며 검 좀 알려달라고 징그럽게 달라붙는 최찬규가 비록 한심하게 보일지라도. 민간인들이 최찬규를 바라볼 때는 무한한 경외심을 담는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장비를 걸치든, 몇 명이 달려들든 일반인이 궤도에 오른 각성자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물며 그것이 B급이나 A급 각성자라면.

그래서였다.

기본적으로 사회가 각성자를 대하는 모습에는 존중이 깔려 있다. 등급이 높을수록 그들이 보이는 경외가 짙어진다.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권력이 생기는 것이다. 각성자 본인의 성향이 선하든 악하든.

하지만 헌터들이 강함에 집착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강함이 강함을 부르기 때문이었다.

돈과 명예는 거기에 따라오는 부산물 같은 것일 뿐, 주된 목적이 아니다. 언뜻 무식해 보일 수 있는 기준은 그렇기에 합당하다.

다시 말하지만 몬스터가 위협하고 있는 세상이다. 강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언젠가 세상이 안정화된다면. 몬스터가 사라지는 세상이 마침내 도래한다면. 그때는 이 넘치는 힘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이야 몬스터를 죽이겠다는 기치 아래 헌터들이 뭉쳐 있지만 그것들이 없어지고 나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외계의 적이아먈로 인류의 안전을 지켜주는 도구가 아닐까?

***

일성은 엘리트 헌터들의 집단이다. 한 명 한 명이 아카데미에서부터 최상위권을 유지하던 자들이다. 그런 만큼 구성원들의 성장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래서였다. 오히려 진급에 관해서는 너그러울 정도다. 김세린, 이지은, 박하영, 전용철.

그리고 애초부터 힘을 숨기고 있던 임한나까지도 C급에 올라섰다. 파동만 봐도 그랬다. C급 헌터에 합당한 기세였다.

“헤헤. 나도 어엿한 C급이다, C급.”

김세린이 헤실헤실 대며 웃었다. 진급시험 당시 폭발마법을 뿌려대던 무서운 마법사는 어디 가고 푼수 같은 얼굴로 돌아와 있다.

“이게 다 저 오빠 덕분이야. 아주 고마워 죽겠어.”

박하영이 대뜸 나를 돌아보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말과는 달리 전혀 고맙지 않다는 표정이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단번에 A급으로 올라갈 줄 누가 알았겠어. 겨우 C급으로 올라섰는데 또 저 멀리 가 있잖아.”

맥이 빠진다는 얼굴로 박하영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야아. 그래도 동기부여 하나는 확실히 되잖아. 그걸로 위안 삼아야지.”

옆에서 토닥이는 김세린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도 엄연히 우리가 선배니까. 언젠간 따라잡을 거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이지은이 그렇게 말했다. 순간 내 귀가 잘못된 건가 싶었다. 이지은이 주먹을 불끈 쥐며 또렷한 눈망울로 나를 보고 있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쟤가 저런 말을 하던 캐릭터였나?

“허. 어이가 없어서.”

어처구니가 없는 심정과 별개로. 김세린을 포함한 D팀의 맥이 빠지는 것도 이해는 갔다.

아무리 진급에 너그러운 일성이라 해도 D급에서 A급으로 곧장 진급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입사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신입사원이 별다른 진급시험도 보지 않고서.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생각보다 일성 내부에서는 이에 관해 별말이 없었다. 각성자들의 세계는 오로지 힘의 논리로만 작용하는 곳.

나야 어안이 벙벙했지만 아무런 반발이 없는 것도 그래서였다. 오히려 당연히 A팀에 가야 한다는 반응이었다.

“B급? B급이야 당연한 거고. 이태진이 보여준 게 있는데. 김석환 팀장님도 공인하셨잖아. 근데 그것보다는….”

정작 이목을 받는 것은 따로 있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한석훈에게 검술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이후부터였다.

“한 팀장님이면, 검술로는 일성 제일 아니야?”

“플래시가 있기는 한데. 어쨌든 1, 2위를 다투는 분이지.”

“그런 분에게 이제 갓 입사한 애송이가 검을 가르친다고?”

“애송이라 부르기에는 엄연히 A팀이기는 하다만. 거기에 검신의 축복의 주인이기도 하고. 그래도 한석훈 팀장님한테 뭔가를 가르친다는 게 이해가 안 가기는 동감이다.”

엉뚱한 부분에서 의혹이 터져 나왔다. 이태진을 띄워주기 위한 쇼가 너무 과하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바깥에서는 몰라도, 일성 내부에서 한석훈의 위상은 실로 컸다. 그는 자타공인 일성의 검이었다.

“한 번 구경이나 가볼까?”

“검사들의 수련이 얼마나 프라이빗하게 진행되는데. 당연히 개인수련실에서 하고 있겠지.”

“아니던데? 그냥 연무장 중앙에서 하고 있던데?”

“뭐? 당장 가보자.”

그렇게 의심을 품고 찾아오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모두 나와는 면식이 없던 선배들이었다.

처음에는 그랬다. 의심 반 호기심 반 우리를 지켜보는 시선에 흥미만 가득했다.

“검만 봐도 알겠어. 이태진 저 녀석의 성품이 느껴진다고. 정직하고 뚜렷해.”

“그러게. 기본기 하나는 나무랄 데 없어.”

“너는 C급이니까 당연히 나무라면 안 되는 거고.”

“…….”

그런데 훈련이 계속될수록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정직한 줄만 알았는데, 저런 궤도는 어떻게 생각해낸 거지? 마나의 분배도 그렇고.”

“한 팀장님 표정도 그래. 진심으로 가르침을 받고 있다는 얼굴이잖아.”

“눈이 트이는 기분이다.”

하나같이 감탄, 혹은 절망어린 얼굴로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한석훈이 말한 대로였다.

“하오란이랑 붙고 싶다는 녀석들이 많아. 주제도 모르는 것들. 귀찮은 과정을 겪고 싶지 않다면 내 말대로 해 봐.”

하오란과의 BTO는 모두가 바라던 것이었다. 왜 아닐까. 이기기만 한다면 단숨에 모든 명예를 거머쥘 수 있다. 지원자의 수만 서른이 넘었다.

특급대우를 받으며 A급으로 단숨에 진급한 나 또한 그 경쟁에는 참여해야 했다.

1분 1초도 허투루 낭비할 수 없는 지금이다. 명백히 하오란은 나보다 강했기에 쓸데없이 힘을 낭비해서는 곤란했다.

“아마 네놈 검 몇 번 휘두르는 것만 봐도 알아서 나가떨어질 거다.”

한석훈이 말한 대로였다. B팀의 인원 중 나와 별다른 접점이 없던 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내 검술을 지켜보던 중이었다.

“저 친구한테 감동을 느꼈어. BTO는 내가 포기하겠다.”

“지면 쪽팔릴까 봐 그런 건 아니고요?”

“…….”

서른이 넘던 지원자들이 모조리 기권을 선언했다.

“꼭 복수에 성공해라.”

“일을 시작한 사람이 마무리 짓는 게 깔끔하지.”

하나같이 B급 이상의 선배들이었다. B팀장인 백인호만 팀원들을 재촉하며 난리를 피웠다는 후문이 전해졌다.

그들의 결단에 감동받기도 찰나, 한석훈이 진실을 말해줬다.

“희생은 개뿔. 지면 개쪽이니까 그렇지. 잃을 게 많으면 겁도 많아지는 법이야.”

일성의 B급 각성자라면 밖에 나가서 어깨 좀 펼 수 있는 위치라고 한다. 그런 만큼 행동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태진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게 한석훈의 설명이었다.

이유야 뭐가 됐든.

귀찮은 절차가 모조리 스킵됐다. 곧장 다음날 BTO에 나갈 투사들이 모두 정해졌다.

[최태성, 김석환, 이태진, 임한나, 정대길.]

***

일성의 회의장 중 한 곳이었다. 그곳에 빔 프로젝트가 영상 하나를 띄우고 있었다. 치지직거리는 동영상에서 하오란의 움직임이 보였다.

“어렵게 구한 거다.”

한석훈이 농담처럼 말했지만 사실이었다. 무려 팔 하나를 내주면서 찍은 자료였으니까.

흔들리는 화면과 노이즈가 가득했지만, 그것도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하오란이 일성의 암수들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그것으로도 놈의 수준을 확인하는 것에는 문제 없었다. 놈의 기발한 움직임과 번뜩임이 느껴졌다.

확실했다. 놈은 A급을 목전에 두었다. 더군다나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놈의 무위 속에서 나와 다르지만 비슷한 향기가 난다. 놈이 S급의 특성을 얻은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확실히 지금의 너보다 강해.”

가감없이 한석훈이 말했다. 사실이었다. A팀에 올라섰지만, 능력치로 따졌을 때 나는 B급에 불과했다. 아직은 말이다.

“그래도 이깁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있었다. 근본적인 이유였다. 하늘 꼭대기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변태스러운 작자가 내 승리를 점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석훈도 전적으로 믿고 가는 듯했다. 이미 결정된 사안이다. 이제 전략과 믿음만 필요할 뿐인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다.

“그래서 방법이 뭔데?”

한석훈은 각성자와 각성자의 대결에 빠삭한 인물이었다. 비슷한 레벨이라면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혹은 스킬의 상성에 따라 이겨볼 여지가 있다.

허나 하오란과 나는 비슷한 종류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레벨과 숙련도는 놈이 확실히 높고.

“방법이 있습니다. 근데 지금은 말해 주기가 좀.”

미래를 봤다. 거기에서 하오란은 내게 죽는다. 이것만큼은 믿고 가는 거다.

‘그것’의 의도를 의심하는 것과 별개로 놈이 바라는 게 뭔지는 알고 있으니.

내가 강해지는 것.

겨우 하오란에게 죽기 위해 일을 이 지경으로 벌이지 않았다는 강력한 확신이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라는 문제가 남는데.

굳이 과정을 추측하자면 딱 한 가지가 생각나기는 한다. 아락투스의 마법사전.

하지만 그것도 말해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작은 행동이 어떤 나비효과로 돌아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믿어주세요. 언제 제가 실망시킨 적 있습니까?”

그저 당당하게 믿어달라는 말밖에 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한석훈과 눈이 마주쳤다. 믿음과 신뢰를 듬뿍 보냈다.

제가 이깁니다. 제가 팀장님의 복수를 하겠습니다.

그런 말을 담아 그를 바라봤다. 진심이 전해진 걸까. 한석훈이 나를 보는 시선 또한 묘했다. 진심이 통한 건가?

“이거 완전 대책없는 미친놈이네. 지금이라도 포기시켜야 하나.”

그때 한석훈이 질색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환장하겠다는 표정으로 ‘얘 어떡하지?’ 하며 백인호를 쳐다보기까지.

아무래도 진심이 잘못 전달된 듯했다.

“쩝.”

***

집으로 돌아오자마자였다. 곧장 사전을 펼쳤다. 내가 할 수 있는 발악을 해야 했다. 넋 놓고 있다가 미래가 바뀌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허나 덜덜 떨리는 손은 어쩔 수 없었다. 처음 그것을 펼쳤을 때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동반했던가.

그 지독했던 통증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사전이 펼치자마자였다.

화아악!

검은색 마기가 펼쳐진 페이지에서 뿜어져 나왔다. 농도 짙은 기분 나쁜 마기였다.

쏟아지는 마기가 내 몸을 휘감았다. 순간에 코와 입을 통해 들어간 마기가 온몸의 혈도를 타고 갔다.

정체불명의 마기에 잠식되어 가는 내 신체를 관조하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제발 이번엔 좀 덜 아파라 염원했다.

위이잉!

소리가 있다면 이랬을 것이다. 심장에 자리 잡은 고리가 회전을 시작했다. 마치 제 친구를 만난 듯 신난 모습이다.

곧 닥칠 고통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전신이 덜덜 떨렸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

심장의 고리가 마기를 빨아들였다. 고리가 두꺼워지는 것까지도 찰나였다.

그래서 고통은 언제 오는 건데. 하고 의문이 들 무렵이었다. 두꺼워진 고리가 더 이상의 한계를 맞고 멈췄다.

허나 마나는 끊임없이 심장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첫 번째 장을 열었을 때의 두 배쯤 되는 양이었다.

고통도 두 배겠구나, 하고 생각할 무렵.

아!

예상했던 통증은 없었다.

대신 깊은 희열이 함께했다. 방금까지도 찐득하고 기분 더러웠던 마기가 조금이나마 친숙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아락투스의 마법사전의 두 번째 장이 열립니다.]

고리 하나가 더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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