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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58화 (58/170)

58화 아락투스의 마법사전 (2)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바닥에 엎드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상태였다. 고통에 몸부림친 흔적이 가득했다. 찢어지고 할퀸 자국들.

의식을 되찾고도 한참을 그렇게 호흡만 가다듬었다. 다시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고통이었다. 살면서 통증이라는 것에 이골이 났다고 여겼었다.

헌데도 그랬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은 감정이 든 것이다. 실제로도 실행하기 직전이었고.

까맣게 물든 바깥 하늘이 보였다. 덜덜 떨리던 손이 잦아들었을 때. 그제야 선명하게 느껴지는 게 있었다.

죽음을 극복하고 돌아온 대가라는 것일까. 얻은 보상이 상당했다. 심장 어림에서 만들어진 고리 하나.

마나량으로 따지자면 갓 각성한 햇병아리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손을 뻗었다.

화르륵!

손바닥 안에서 불꽃이 튀어나왔다. 마나의 성질과 똑 닮은 칠흑같이 어두운 불꽃이.

아직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미량의 불꽃을 소환해내는 것일 뿐. 그때마다 심장의 고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것인지 몰랐다. 굳이 설명하자면 강제로 지식이 주입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당장 이 불꽃을 써먹을 수 있는 곳이라고는 라면 끓이는 것 정도겠지만, 청운적하검법처럼 이것 또한 잠재력의 문제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멀리 던져놓은 사전에서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더불어 흘러나온 그 마기가 내 몸 안으로 조금씩 흡수되고 있었고.

가만히 있어도 강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알 수 있었다. 다음 장을 열기까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것을 손에 쥐여준 그놈에게 엎드려 절이라도 해야 할까? 천만에. 과거로 돌아간다면 절대 다시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미래를 보여주지 않은 것이겠지.

극한의 고통은 사람의 정신을 무너뜨린다. 혹여라도 광인이 됐을 수도 있었다.

“대체 원하는 게 뭐지?”

미래를 보여주는 예언자에게 외쳤다. 놈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 애써 퉁명스러운 말투를 사용했지만.

새삼 놈에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놈이 내게 건네준 힘은 시스템이 허락한 것 이상이었기에.

“상태창.”

[이름 : 이태진.

레벨 : 128

스킬 : 오러 블레이드(A), 아드레날린 부스트(A), 상급검술(A), 일점폭발(B), 집중(B), 도약(B), 청운적하검법(C)

특성 : 검신의 축복(S) 무아지경(B), 인내하는 자(B), 전사(B)

체력 : 199

마력 : 183

근력 : 247

민첩 : 220]

상태창을 살펴봐도 심장 어림에 자리 잡은 서클에 관련된 말이 일절 없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스템이 우리에게 허락한 것은 ‘스킬’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게임 캐릭터에 가까운 것이 각성자였고. 때문에 각성자가 등장했을 때 세상에 그토록이나 혼란이 빚어졌던 것이다.

각설하고. 이렇게 비체계적인 힘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청운적하검법과도 다르다. 그건 비체계적인 힘을 체계 안으로 집어넣은 것이니까.

레벨이 올라갈수록 생각의 틀이 깨지는 기분이었다. 강해질수록 많은 것들이 보인다. 전에는 불가능이라 여겼던 일들이 점점 당연시되는 기분이었다.

더불어. 또 한 가지의 목표가 생겼다. 내 뒤에서 나를 조종하는 ‘그것’. 놈을 찾아내야 한다. 이번 일로 확실하게 느꼈다. 언젠가는 놈 때문에 죽을 일이 생길 것이라고.

***

다음날이었다. 당장 뉴스를 틀었다. 혹시나 ‘일성과 화신의 명운을 건 한 판 승부’ 같은 말이 튀어나올까 봐.

[전격 취재! 이태진, 서울역 게이트의 영웅을 분석하다!]

이런 말만 떠도는 것을 보면, 아직 일성에서 어떤 조치가 나온 것은 아닌 듯했다. 회사의 인트라넷에도 별말이 없었고.

허나 조만간 알려질 일이다. 그리고 그 파장은 B급 게이트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할 것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회사로 달려갔다. 어제의 고통에 몸부림칠 시간도 아까웠다. 한 번이라도 검을 더 휘둘러야 한다.

곧장 사내 훈련장으로 향했다. D팀의 훈련장에 들어가자마자였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순간 하던 동작을 멈추고 휙하고 나를 쳐다본다. 한둘이 아니라 거기에 있던 전부가.

단체로 마법에라도 걸린 게 아닐까 의심하던 차. 한창 훈련 중이던 김세린이 뚜벅뚜벅 내게 걸어왔다. 뿐만 아니라 전용철, 박하영, 이지은까지도.

“오빠. 각오하세요. 저 이번에 C급 가니까.”

김세린이 선포하듯 그렇게 말했다. 나를 보는 녀석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등산가처럼, 정복할 대상을 바라보듯 의지를 불태우는데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얘가 왜 이래.

“C급? 나는 B급으로 간다.”

늘 묵묵히 제 할 일만 하던 전용철도 느닷없이 열의를 불태웠다. 시선은 계속 나를 향한 채로.

“이태진 게 섯거라!”

평소라면 시니컬하게 김세린을 구박할 박하영까지도 그랬다. 이쯤 되자 내가 또 뭔 일을 저질렀나 싶었다.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이지은 또한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에서 확신이 들었던 차였다.

“왜들 이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정말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한번 그들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 이후부터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는다. 다시 훈련에 몰입하는 데 집중력을 온전히 쏟는 것이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말도 안 나올 무렵.

“인사고과 시즌이잖아.”

내 옆구리를 툭 치며 나타난 임한나가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매년 이맘때쯤 승진시험이 치러진다고 했지. 레벨뿐 아니라, 직급으로도 슬슬 C급에 들어설 준비를 하는 모습들이었다.

애초부터 나보다 먼저 회사에 들어온 김세린을 비롯한 팀원들이었으니까.

나 또한 마찬가지다. 언제까지 D팀에 있을 수는 없었다. 보기에도 그랬다. 어엿한 B급에 들어선 나다. 아래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자체가 실례되는 일이었다.

“아니 그래서 쟤들 저러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몰라서 물어?”

그런 내 물음에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임한나도 저들과 같은 눈빛으로 돌아서는데, 나로서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진짜 뭔데.”

날 보며 동기부여를 다지는 것 같기는 한데.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고개를 갸웃하며 나도 슬슬 훈련을 준비할 때였다.

연무장은 넓다. D급의 1, 2, 3팀 모두가 사용할 정도로. 그 가운데 왼쪽 소매를 펄럭이며 이리저리 움직이는 한석훈이 곧장 보였다. 검을 쥔 그대로 한석훈에게 걸어갔다.

뭐라 말을 걸려던 찰나,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한 팔로 검을 쥔 채 이리저리 움직이는 한석훈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감히 방해할 수 없을 정도로.

평소와는 기세부터가 달랐다. 그랬기에 사람들이 그 주변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고 있었고.

한석훈이 호흡을 가다듬고 검을 내질렀다. 조절했을 게 분명하지만, 넘실거리는 파동이 검 끝에서 피어났다.

한석훈의 검은 선명하고 또렷한 색을 띤다. 정직한 그의 검술은 결코 흔들림이 없다.

한때 그의 검을 한창 배우면서, 그것이 변칙에는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최태성이 나를 위해 개최했던 비무대회에 참여했을 때만 해도 그랬다.

헌데 지금 보니 그때의 나는 건방져도 그렇게 건방진 놈이 따로 없었다.

변칙에 약하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뿐이다. 하고자 한다면 무수하게 변화를 줄 수도 있는 검술이었다.

애송이 티를 벗고 나서야 볼 수 있는 깊이였다. 스킬로 나타나지 않을 뿐, 극한까지 다루게 된다면 청운적하검법 못지않은 검술이었다.

그때 한석훈의 검무가 시작됐다. 강한 힘은 사람을 매혹시키는 법이다. 저마다 훈련을 멈추고 한석훈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 가운데는 나도 있었고.

정직하고 또렷하게 상하좌우를 가르는 한석훈의 검술을 보며 불현듯 깨닫는 게 있었다.

몇 달 전, 내가 조합해낸 검술. 대현의 김현일과 맞붙었을 때 만들었던 것이 있다.

그것을 머릿속에서 당장 폐기했다. 그때와 지금은 보는 눈이 아예 달라져 있다.

누구는 그것을 보며 천재적인 검술이라 불렀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조잡한 몸짓에 불과했다. 때문에 폐기하는데 있어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하나를 비우니까 다른 하나가 찾아온다. 이거, 좀만 손질하면.

머릿속에 스파크가 터지는 기분이었다. 청운적하검법과 한석훈의 검술. 어쩌면 굉장한 게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왔냐?”

인기척을 느낀 한석훈이 슬쩍 돌아봤다. 기척도 못 느낄 만큼 열중했던 탓인지 놀란 티를 숨기지 못했다. 서둘러 감추려 하던 심각한 표정도 채 못 지웠고.

“이 새끼가. 누가 그런 눈으로 보래.”

한석훈이 다짜고짜 발끈하며 성낸다. 부끄러운 장면을 들켰다는 듯이.

표정을 숨기지 못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까부터 거슬리던 것 때문이었다. 애석하게도, 팔 하나를 잃은 한석훈은 자신의 검술을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수는 언제 붙일 겁니까?”

그렇게 어색함을 달래려 했지만. 나부터가 한석훈이 의수를 착용하는 게 어렵다고 느껴졌다. 고레벨로 갈수록 그랬다.

세밀한 마나 조절능력이 중요해지는 법이다. 의수 따위로 대체를 바라는 건 욕심이다. 오히려 그것이 마나 제어를 방해할 가능성이 더 높았고.

한석훈은 어쩌면 영원히 외팔이로 살아야 하는 신세인 것이다. 양손이 베이스인 한석훈의 검술이 퇴보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이게 멋이야, 인마.”

한석훈이 멋쩍게 말한 직후였다. 그러고 보니. 좋은 방안이 떠올랐다. 많은 힘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약간의 수정만 있으면 될 일이었다.

양손 검술로 만들어졌다면 한 손 검술로 바꾸면 될 일 아닌가. 다른 검술이 아닌, 한석훈의 검술이라 더 그랬다. 변칙이 아닌 정석에 기반한 것이었기에 수정에 매우 용이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내가 한 생각을 한석훈도 하지 않았을 리 없을 텐데.

“왜 수정 안 하는 겁니까?”

가감 없이 말했다. 한석훈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우리 사이에 격식은 무슨. 저 양반이 사랑의 매라고 불렀던 때를 상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뭘.”

한석훈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짜증 난다는 게 아니라 진짜 뭘 말하느냐는 그만의 표현이었다.

“그거요. 팀장님 검술. 한 손만 쓰게 바꾸면 될 걸 뭘 그리 고민하시냐고요.”

똑같이 맞춰서 대답해줬다. 나도 짜증 내는 거 아니다. 그냥 걱정하고 있다는 나만의 뜻이었지.

“둘이 싸워요? 왜 이런데.”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김세린의 표정보다 나를 당황시킨 건 한석훈의 눈이었다.

무슨 미친 소리를 하냐는 듯, 해괴한 얼굴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누구 약 올리나. 할 수 있으면 진작 그렇게 했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답답해 죽겠다며 왼쪽 소매를 펄럭거렸다. 마치 나 보라는 듯 그러는 건 기분 탓이겠지?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한다고요?”

그런데 나로서도 의문이었다. 크게 바꿀 것 없이 몇 개만 수정해도 제법 쓸 만해질 것 같은데.

완벽하게 숙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만 그거야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고.

“…뭐야, 너. 그런 걸 할 수 있다고?”

한석훈이 떨떠름한 얼굴이 됐다. 그러면서도 약간의 기대를 품는 듯한데.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아니면 나 놀리려고?

그냥 이렇게 하면 되잖아.

롱소드를 들고 그의 옆에 섰다. 허락을 표하는 눈빛을 보내자 한석훈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얼른 해보라는 그만의 재촉이었다.

뭐 어려울 게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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