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아락투스의 마법사전 (1)
회장실에는 일성과 협회의 각 수장만 남아 있었다.
S급 각성자들의 만남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개적인 회담 한 번 한 번이 대서특필될 정도니.
그들 각자의 세력 구도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게 협회장쯤 된다면. 정치적인 이슈로 번질 수도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지? 뒤를 밟히지 않았을 리가.”
최태성이 짜증 난다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일성의 회장이 역정을 내기에 합당했다. 비밀리에 방문한 것도 아니고, 소란이라는 소란은 다 피웠다.
당연히 지금쯤 다른 세력의 귀에 들어갔을 테고.
“네놈과 내가 비공식적인 회담을 거친다? 다른 녀석들이 얼마나 발작할지 눈에 훤하다.”
중립을 지켜야 할 협회가 일성의 편의를 봐준다는 이야기가 돌 수 있었다. 나머지 세력들의 규합을 부를 수도 있었다.
손정연은 코웃음 한 번으로 그 말을 넘겼다.
“인재 관리를 잘했어야지. 그 녀석은 국가적 자산이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일어났다가는 정말로 각오해야 할 것이야. 헌데,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다. 무슨 생각으로 BTO를 나간다고 한 거지? S급 아이템이 아까워서 그런 것은 아닐 테고.”
아무리 S급 아이템이라 해도 잘 키운 각성자만 못했다. 잘난 S급 아이템도 결국 사용자가 있어야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검신의 재능을 물려받은 자라면 더더욱.
최태성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애송이의 말에 감명을 받았다? 한석훈이나 김석환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지만. 닳고 닳은 최태성은 능구렁이였다. 즉슨,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는다. 하물며 이태진에 관한 것이라면.
헌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식은 차를 한 모금 들이킬 뿐.
“이태진의 성장 속도 때문이냐? 하기야, 가히 놀라운 성장력이긴 하다만.”
대한민국 각성자 협회의 장이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이태진을 빼앗아야 하는 입장이라 한들 숨길 걸 숨겨야지.
되려 감탄하지 않는 것이 의심을 살 터였다.
“네놈 손자의 그릇도 작은 편은 아니지.”
최태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손영혁이 들고 온 방안은 최선이라 할 만했다. 그 짧은 시간에 한국과 중국, 일성과 화신에 얽힌 세력 구도는 물론이고 앞으로의 향방을 모두 분석하고 나온 결론이겠지.
“같잖은 도발은 집어치워라.”
대번에 협회장이 일축했다. 최태성의 속내를 꿰뚫어 본 것이다. 아니 그럴까. 아무리 잘 짜인 전략이라 한들 S급의 강한 힘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즉, 앞에 있는 최태성이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말은,
“타고난 자질이 제왕이다.”
손자의 전략은 참모일 뿐이고. 이것이었다. 손정연도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묵묵히 듣기만 했고.
최태성이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일성의 누구도 볼 수 없었던 표정이었다. 친아들도 아닌데 그랬다.
“보기 과하다. 그리도 아끼면 감시라도 하나 붙여뒀어야지. 혹여 이태진이 잘못됐다면 S급 아이템 하나가 문제였을까.”
최태성이 생각보다 더 이태진을 아낀다. 손정연은 그 모습이 불편했다. 언젠가 이 문제로 단단히 마찰을 빚겠구나, 생각하며.
“감시?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아니면, 그 친구 마나 민감도를 몰라서 하는 소리냐?”
이번에는 최태성이 협회장의 말을 일축했다. 새가 떠나갈까 두렵다고 새장에 가둬둔다? 더군다나 그 새가 봉황이라면.
“어중간한 짓을 벌였다가는 단번에 눈치채겠지. 네놈도 허튼짓을 꾸미려거든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최태성의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이번에는 같잖은 도발 따위가 아니었다. 다짜고짜 화신에 선전포고를 날렸을 때도 저런 얼굴이었을 것이다.
허나 손정연도 못지않게 굳은 얼굴로 그 눈빛을 응시했다. 자신의 대계를 위한 필수조건이 이태진이다. 그가 꼭 필요했다. 절박함으로 따지자면 최태성 못지않았다.
“최태성이. 네놈 머릿속에 능구렁이가 몇 마린데. 애송이 말에 홀린 것은 아닐 테고. 목적이 뭐냐. ”
지금은 당면한 과제가 먼저였다.
“이태진이 하오란을 이긴다. 그 판단이 섰다.”
“어떻게?”
손정연이 그렇게 물었다. 협회장의 직위에 올랐다. 받을 수 있는 정보의 질이 차원이 다른 법이었다. 그것은 최태성도 마찬가지일 터였고.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봤다는 걸까. 분명 지금의 이태진은 하오란을 이기지 못한다. 천운이 따른다 해도 그렇다. 같은 S급의 특성을 받은 이였다.
“손정연 너도 하오란을 회유할 생각은 못 하지. 왜지? 같은 S급의 자질을 지닌 자인데, 네놈이 이태진에 들이는 공에 비하면 지나칠 정도로 관심이 적어.”
“…….”
“이유를 알려주마. 정치밥 먹더니 헌터로서의 감각은 다 잊은 모양이다만. 본능의 문제라는 말이다. 네놈도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겠지. 끝내 이태진이 검신의 지위에 올라설 거라고.”
결국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는 소리였다. 허나, 묵묵히 최태성의 말을 들었다. 협회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고비를 넘겼다. 본능적인 감각은 무시할 게 아니었다.
“예언이라고 해 두마. 하오란은 죽는다.”
최태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선언했다.
***
집으로 가기 전, 아직 해결할 문제가 있었다.
1층 로비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오빠 또 어디 갔어?”
“회장님한테 불려갔다더니. 죽은 거 아니야?”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죽긴 뭘 죽어.”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듯 김세린과 박하영, 임한나가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전용철은 그 사이에서 곤란한 듯 머리만 긁적이고 있었고.
회피할 게 아니었다. 해명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게 맞다. 저들은 겨우 나 하나 때문에 목숨을 던지려 했다. 진실을 들을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미안하다.”
뚜벅뚜벅 걸어가 다짜고짜 한 말이 그것이었다. 현재로서는 해 줄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이었다. 검신의 축복만 해도 내 그릇에 벅차다. 감당할 수 없는 사건들의 연속만 봐도 그랬다.
그런데 미래를 보여주는 변태가 내 뒤에 붙어 있다는 것까지 밝힌다면.
“때가 되면 다 말해줄게.”
감당하지 못할 사건들이 터질 게 분명했다. 그 안에 저들이 다칠 것이고.
내 말에 되려 녀석들이 당황한 듯했다. 본성이 착한 이들이다. 그렇기에 되묻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겠지.
“뭔가 있긴 있네. 으잉? 뭔가 있긴 있어.”
그저 최찬규만 멋쩍은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깐족거릴 뿐이었다. 곧장 임한나가 눈총을 날린다. 좀 조용히 하라면서.
“그렇게까지 말하면 제가 할 말이 없네요.”
“언제는 얼굴을 갈긴다느니 하더니?”
“야! 그건 그때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김세린과 박하영이 투닥거렸다. 조만간 터질 폭탄 하나가 남아 있었지만 그건 그때 일이고. 지금 이 순간은 그렇게 남기고 싶었다.
그렇게 집으로 도착한 후.
이제부터 할 일이 있었다.
아락투스의 마법사전을 눈앞에 꺼내놨다. 위험한 물건이 맞았다. 곧장 발작하듯 사전에서 공명음이 퍼져 나왔다.
쿠웅! 쿵!
맥박처럼 진동하는 사전을 따라 퍼지는 기의 파동이 있었다. 내 멋대로 명명한 마기라는 것.
이 순간 덜덜 떨리는 손은 생존 본능에 기인한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만큼 거대한 기운이 밀집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기대해도 좋았다. 개고생을 해서 얻은 만큼, 효과 또한 그럴 것이다.
서둘러 사전의 첫 장을 넘겼다.
[마나 서클을 만드는 법.]
콰앙!
또다. 마법에 대한 영감이 뇌리를 강타하는 충격이 전해졌다. 문자를 읽은 것이 아니라, 직접 피부로 와닿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원리는 같다. 드래곤 같은 마나의 축복을 받은 존재가 아니라면, 서클 형태로 마나를 심장에 가둬두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이 몸 또한 필멸자 시절에 같은 과정을 밟았다. 단언컨대, 사전이 인도하는 흐름대로 마나를 유도한다면, 누구보다 뛰어난…!]
그런데 문제는 이 다음이었다. 불현듯 시야가 어두워졌다. 무아지경이었다. 문제는, 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사전의 마기로 인한 결과라는 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푸확!
사전에서 잠자고 있던 마기가 일순간에 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시스템이 스탯에 따라 분배해주는 정순한 마나가 아니라, 느껴지는 날것 그대로의 어두컴컴한 마나가!
거부할 수 없는 해일이 몰아쳤다. 방심했다. 아니, 대비했더라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애초부터 내가 막을 수 있는 종류의 힘이 아니었으니까.
어째서!
‘그것’에 대한 원망도 잠시, 서둘러 이 일을 해결해야 했다.
어떻게?
몸속에 들어온 마기가 혈로를 타고 마음껏 활개 친다. 이 또한 내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 순간 철저히 방관자의 역할이었다.
“흡!”
투둑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실핏줄이 터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입을 다무는 것뿐이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순간 조금이라도 숨을 내뱉었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후유증이 찾아올 것이란 사실을.
콰과광!
좁은 혈도를 난폭한 마기가 반복적으로 운동하며 넓혀댔다. 한 곳에 국한된 게 아니라, 전신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격통이었다. 그래, 너무 쉽게 생각했다. 검신의 축복처럼 쉽게 얻을 수 있는 힘이라 생각했었다.
“흐읍!”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 행동이 조금도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그런 것뿐이었다.
실제로는 찰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허나 시간은 상대적이다. 영겁 같은 세월 속에 갇힌 것처럼 이 고통을 끝낼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았다.
검신의 축복?
이 순간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아드레날린 부스트는 말할 것도 없었다.
“거르륵!”
그것이 마침내 뇌리까지 침범했을 때가 고비였다. 검은색 스파크가 이곳저곳에서 터졌다.
이대로라면. 이 고통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마기에 침범당한 광인이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베는 장면이 그려졌다.
그렇게 될 바에는 지금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는 게 맞았다. 더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 고통을 끝낼 수만 있다면 뭐가 됐든 좋았다. 설사 그게 죽음이라도!
욕심이 화를 부른 것이다. 미래를 예지해주는 놈이 이 장면은 왜 보여주지 않았겠는가. 애초부터 놈은 나를 살릴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놈이 나를 살인기계로 만들기 전에 이 목숨을 끝내는 게 맞았다.
그렇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까지도 시야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이곳보다 더 어두운 던전에서도 잘만 길을 찾아냈으니까.
쾅 소리를 내며 창문을 열었을 때였다. 불현듯 맑은 하늘이 보였다.
“커헉!”
그와 함께 참았던 호흡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불시에 찾아온 고통은 그처럼 한순간 사라졌다. 동시에 털썩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격통이 지나가고 후유증이 찾아온 것이다. 한참 동안 그렇게 멍하게 있었다.
아까 전까지의 나는.
그건 대체.
이전에 겪어본 적 없는 고통은 내 정신에 강한 타격을 입혔다. 동시에 수마가 몰려왔다. 정신을 지키려는 무의식의 발현으로 보였다.
거부할 필요 없었다. 스르륵 눈을 감았다.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심장에 고리 하나가 단단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