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내가 없어진 사이에 (4)
장내에 폭탄이 떨어진 게 맞았다. 아니라면 사람들의 공통된 표정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특히 한석훈의 얼굴은, 그야말로 황당함을 감출 수 없어 보였다.
“자, 잠시만.”
답지 않게 그가 당황했다. 팔을 움직이려 했던 듯하지만 텅 빈 소매만 이리저리 흔들릴 뿐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잘한 결정이다 싶었다.
누가 시작한 일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놈과 나 둘 중 하나는 죽어야 원한을 끝맺을 수 있다.
“미쳤군. 이 하룻강아지 같은 놈이 단단히 미쳤어.”
백인호는 까불지 말라는 듯 경고를 날렸고,
“…다시 말해주마. 하오란, 그놈은….”
더불어 김석환도 얘가 왜 이러냐는 침음성을 내뱉었다.
“아뇨. 잘 알아들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려는 김석환의 말을 끊어냈다. 입사한 이래로, 큰 힘을 얻었다 한들 겸손하려 했다.
내가 가진 잠재력은 모두 행운에 기반한 것이었기에. 허나 지금만큼은 강하게 밀어붙일 때였다.
“저도 자신 있….”
“그만. 자네가 나설 일이 아니야.”
하려던 말을 맺지 못했다. 대번에 최태성의 일축이 떨어진 것이다. 뭐라고 반박할 틈도 없이 단호했다. 그것으로 내 역할이 끝났다.
그저 햇병아리 헌터의 치기 어린 행동. 그들의 눈에 비친 나였다.
그러고 보니, 문득 정신이 들었다.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최태성이 내게 베푼 호의가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달았다.
당장 징계를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무려 3주 가까운 시간을 합당한 사유 없이 잠적해 있었으니까.
“…협회에서 마련한 방안입니다.”
애송이의 어리광이 끝난 후, 손영혁이 의례 비즈니스적인 어투로 태블릿을 우리 쪽으로 건넸다. 자연스럽게 화제가 넘어갔다.
“모금회?”
한석훈이 손영혁에게 턱짓했다. 나를 대하는 것보다 훨씬 차갑고 딱딱한 말투였다. 이게 진짜 한석훈의 모습인가 싶을 정도로.
“예. 얼마 전 서울에서 발생한 B급 게이트를 빌미 삼아, 기금회를 열 생각입니다.”
“그래서?”
“참석명단을 보시면.”
태블릿이 자동으로 넘어갔다. 미국, 일본, 대만, 중국. 유럽의 기업들까지. 모두 들어본 적 있는 유명한 헌터 기업이었다. 당연히 화신 또한 그 안에 있었고.
“이들 기업 전부를 초대할 생각입니다.”
“B급 게이트 하나 터졌다고 이 엉덩이 무거운 기업들 전부를 부른다고?”
합당한 의문이었다. B급 게이트 사건이 대단하다 한들 어디까지나 국내에 국한된 사고였다. 더군다나 사상자도 적었고. 그들을 한자리에 모을 명분이 부족했다.
“이태진 씨가 있지 않습니까?”
손영혁이 나를 가리켰다. 난데없이 등장한 내 이름에 대번에 한석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가만히 듣고 있던 김석환도 팔짱을 꼈고. 최태성은 여전히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이태진 씨를 보기 위해서라도 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훗날 자신들의 경쟁자가 될 사람 아닙니까.”
“뭐?”
반발이 튀어나올 수밖에. 그 말인즉,
“놈들로서도 이태진 씨를 육안으로 살필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기회가 된다면 회유책 혹은 암살시도 또한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에 따른 대비책도….”
“내가 잘못 들었나? 이 녀석을 미끼 삼으라는 말로 들리는데.”
“…이게 최선입니다.”
손영혁이 문제 있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 보면 저 양반도 강단이 여간 센 것이 아니다. 이곳은 놈이 자랑하던 궁전 같은 협회가 아니라 일성 본사의 최상층이다.
최태성이 마음먹고자 한다면 이 자리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헌데도 놈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내게 검술을 빼앗기고 허둥대던 헌터는 거기에 없었다. 강단 있는 협회장의 후계자가 제 소신을 펼치고 있었다.
“계속 지껄여봐. 어디까지 하나 들어보게.”
최태성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중얼거리듯 속삭인 말이 회의실 내부를 가득 채웠다. 최태성의 마나가 일순간 퍼진 것이다.
“그러면 이 친구를 잃을까?”
손정연이 제 손자를 제지하고 나섰다.
“누가 먼저 시작했든, 화신 그놈들도 이번 사건을 명분 삼아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다. 흥, 놈들 입장에선 이만한 무대도 없지. 하오란이 세계무대에 출사표를 던질 적절한 무대이지 않느냐. 차기 검신과의 대결은.”
말만 들어보면 그럴듯했다. 화신에서도 나를 죽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네놈도 장사치니 셈 계산 정도는 할 줄 알 터. 두말할 것 없다. 기금회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네놈이 가진 S급 아이템 하나를 화신에게 내놓아라. 다른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손정연이 엄포를 놓듯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최선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헌데 정말 그런 것일까.
대번에 반발할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뜨거운 기운을 내뿜던 최태성은 물론이고 차가운 시선으로 협회 쪽을 노려보던 한석훈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협회장의 말도 안 되는 방안을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겨우 내 목숨 하나 살리겠다고 S급 아이템을 내놓는다고?
모두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었다. 애송이의 치기 어린 행동이라 해도. 근질거리는 입을 참을 수 없었다.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기에는, 더군다나 이 사건의 발단이 된 녀석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들끓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순간 한석훈과 눈을 마주쳤다. 부쩍 수척해진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당장이라도 중국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대로 물러나면 놈들이 우릴 뭘로 보겠습니까? 또 협회는 저희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잘 길들인 돼지쯤으로 여기지 않으면 다행이지.”
이판사판이었다. 이번 일로 협회의 눈에 찍힌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차라리 잘 된 것일지도. 협회장에게 만만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보다는 이게 나았다.
“후우.”
참을 인을 새기듯 깊은 숨을 토해내던 협회장이 달래듯 입을 연다.
“젊은 패기라기에는 자네 혼자만의 일이 아니야. 이해하네. 아니 그렇겠는가. 압도적인 성장 앞에서 두려울 게 없었을 테지. 더군다나 동료 선배의 팔이 잘린 마당에. 허나, 지금은 혈기를….”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협회는 외부세력일 뿐, 그들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 더군다나 외부인에게 휘둘리기에는, 장소부터가 일성의 본사 안이지 않은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최태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무언의 표시이기도 했다. 최태성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냐고.
“큭.”
내 행동에 최태성이 심각한 표정을 지우고 픽 웃어 보였다, 협회장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고.
“나도 저런 취급 받을까 두렵군.”
하고 한석훈에게 말한다. 좋아할 것 없었다. 곧장 최태성이 표정을 지우고 엄정하게 말했으니까.
“기분 나쁘지만 저놈 말에 틀린 점이 없어. 하오란은 아직 자네가 상대하기에는 이른 상대지. 자네도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이유가 뭔가?”
“…….”
그때만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같잖은 핑계 몇 가지가 생각났지만. 섣부른 거짓말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의 총수였다.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차라리 당당한 자세를 끝까지 유지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놈들이 먼저 시작한 싸움입니다. 무사히 넘어가긴 했지만, 화신이 먼저 저를 죽이려 하지 않았습니까. 그뿐입니까.”
거기까지 말한 내 시선이 잠시 한석훈의 팔에 머물렀다.
“한석훈 팀장을 포함한 동료 다섯이 죽다 살아났습니다. 이대로 넘어간다면 화신이 우리를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다른 국제사회는 저희를 또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한석훈이 차 안에서 한쪽 소매를 덜렁거리던 순간이 떠올랐다.
“지금이야 S급 아이템 하나를 넘겨주고 끝내는 것이지. 또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있습니까? 그때는 S급 아이템 두 개를 넘길 것입니까?”
속사포로 말을 뱉어냈다. 그러면서도 내가 지금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속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냈다.
“무엇보다. 원한을 정리할 합당한 기회를 주십시오. 회장님.”
그렇게 솔직한 심정을 토했다. 할 말을 다 했다. 불어올 후폭풍이 걱정됐지만 후회는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다. 비수 섞인 조롱을. 애송이라느니, 너는 가만히 있으라느니.
눈을 질끈 감았다. 그들의 기세를 감당하기에는 내 레벨이 부족했다.
어쨌든 그들의 입에서 나올 말은 부정적일 게 뻔하다고 생각돼서, 머릿속으로 다음 상황을 그렸다. 정 안되면 나 혼자라도 몰래 중국으로 출국할 생각….
“……?”
응?
그런데 생각보다 분위기가 잠잠하다. 그래도 고민하는 척은 해 주는 것일까.
슬쩍 눈을 떴다. 곧장 백인호의 얼굴이 보였다. 하룻강아지 쳐다보듯 짜증이 잔뜩 난 그의 표정이야 익히 예상했지만.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최태성을 포함한 한석훈과 김석환 묘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정면에는 협회장과 손영혁이 똑같은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고.
“저희 체면이 말이 아닌데요? 고레벨 헌터라는 사람들이 지레 겁부터 먹고.”
문득 김석환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더니.
“중국 갔다 온 사이에 애송이 티는 완전히 벗었나 보네.”
한석훈이 거기에 동조했고.
“동감이야.”
최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성의 가족이 팔이 잘려 돌아왔다. 그것만으로 화신은 이 땅에서 사라져야 마땅하다. 자네가 옳아.”
그러며 나보고 잘했다고 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무심코 던진 다트가 표적 중앙을 맞춘 기분이라 해야 하나.
아무래도 좋았다. 어찌 됐든 상황이 긍정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할 말이 없군.”
꼬장꼬장한 얼굴로 고개를 젓던 협회장마저 거기에 동조했다.
“자네의 말이 옳다. 일성을 건든 것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는 없다. 자네의 의견을 전격 반영하지. 두 달 후, 회사의 명운을 걸고 화신과 BTO에 임한다.”
최태성이 그렇게 선포했다. 모두의 시선이 일성의 회장에게 향했다.
어라. 그런데 어감이 좀 이상하다. 말하는 게 꼭 하오란과 나뿐 아니라….
“또 한 가지. BTO에 임할 후보는 본 회장을 포함해 총 다섯. 그에 따라 조만간 후보를 가리는 선발대회를 열겠다. 자네도 예외는 없어. 복수를 하고 싶다면 합당한 증명을 해야 할 것이야.”
마지막 선심을 쓴 듯 최태성이 그렇게 말했다. 허나 그것보다 앞선 말이 내게 더 충격을 줬다.
회사의 명운을 걸고 최태성이 직접 화신과의 생사투에 참가한다니. 이 사건의 파장이 얼마나 커질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내가 원한 방향은 이게 아닌데.
“…….”
지엄한 일성 회장의 명이었다.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건 아무도 없다. 나는 물론이고 협회장이라 해도 말이다.
“자세한 사항은 추후에 다시 정하기로 하고.”
최태성이 협회장을 제외하고 모두 나가라며 손짓했다. 그 이후로 어떻게 집무실을 빠져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석훈의 손에 이끌려 나온 것 같기는 한데, 정신이 혼미했다.
“이렇게 된 거 끝장을 보자.”
한석훈이 그렇게 말하며 등을 두드렸다. 표정을 보니 비꼬는 게 아니었다. 기특해하는 마음이 얼굴에 뚝뚝 묻어나왔다. 옆에 있는 김석환도 마찬가지였고.
“아니, 그게.”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벌써 엎질러진 물, 여기서 아니라고 하는 게 더 우스웠다.
“허.”
속마음을 숨기고 그렇게 멋쩍게 웃어넘겼다. 또다시 깨달았다. 세상사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