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내가 없어진 사이에 (1)
들어가자마자였다. 어두컴컴한 던전을 예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화려한 샹들리에가 먼저 보인다.
천장에 붙은 조명과 벽과 바닥은 잘 닦인 대리석으로 조성돼 있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연회장이 거기에 있었다.
연회장의 중심에는 유리로 된 상자 안에 전시된 물품이 보였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물건들이 동선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곳곳에 깔려 있었다. 그것마저 인테리어의 일부인 듯 고풍스럽게.
“뭐야.”
정장이라도 챙겨입고 올 걸 그랬다. 풍기는 분위기로만 따졌을 때 고위층의 기금을 위한 연회장처럼 보였으니까.
예상은 했지만 퍼트린 파동이 읽어 내는 정보는 한 톨도 없었다. 사막에서 느낀 기운과 똑같은 것이 나를 방해하고 있었다.
혹시 또 뭐가 튀어나올지 몰랐다. 그에 대비해 헬리오스의 심장은 이미 장착돼 있었다.
천천히 한 발자국 내디뎌 봤다. 어떤 함정이 숨어있을지 예상이 안 간다. 다만, 연회장의 끝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점만이 이곳이 얼마나 넓은지 말해주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첫 번째로 전시된 물건부터 살펴봤다. 범상치 않아 보였다.
아락투스 이 양반의 취향은 흑색인지, 묵빛의 반지가 유리막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나름대로 S급 아이템과 스킬 몇 개 얻어봤다고 그간 보는 눈이 생기긴 했나 보다.
딱 봐도 이 반지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이거, 최소 A급 혹은 S급이다.
홀리듯 유리막에 달린 손잡이에 손을 갖다 댔을 때였다. 그때 시스템 메시지가 ‘띠링’ 소리를 내며 눈앞에 떠올랐다.
[군단장 아락투스의 초대를 받은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비밀창고입니다.]
[아락투스는 자비로운 군단장입니다. 아락투스의 초대를 받은 자에 한하여 누구든지 원하는 아이템 하나를 가지고 나갈 수 있습니다.]
[아락투스의 경고 :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기물 세 가지를 선택할 시, 아락투스의 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천천히 메시지를 읽어 보았다. 대충 갖고 싶은 아이템 하나를 준다는 내용 같기는 한데. 뭘 골라야 하지?
무의식적으로 천장을 쳐다봤다. 화려한 샹들리에 또한 내 눈을 즐겁게 해 줬지만, 시선은 그보다 한 차원 너머의 것을 좇고 있었다.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 의식이 쑥 빠져나가는, 이제는 익숙한 묘한 감각이 찾아왔다.
이것도 S급 검술 재능의 발달 때문일까. 점점 의식이 다른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과정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빛이 번쩍이는 동시에 직후의 미래가 보였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것’이 내게 바라는 행동이기도 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먼 훗날의 미래와 직후의 미래를 보여주는 이유를. 지금처럼 직후, 혹은 근접한 미래는 내게 보내는 경고, 혹은 명령 같은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의 미래는 내가 이대로 계속 간다면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보여주는 예지에 해당할 것이고.
그곳의 내가 전시장을 뚜벅뚜벅 걸어갔다. 소심하게 한 발자국 움직이던 나와 달리 녀석은 이동에 거침이 없었다.
끝도 없는 연회장의 깊숙한 곳으로 갈수록 화려한 아이템들이 튀어나왔다.
현실에서 봤던 흑색 반지는 에피타이저였던 것처럼,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깊은 파장을 보내는 것들이 보였다.
미래의 나는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다는 듯 한참을 뚜벅뚜벅 걸어가던 내가 발길을 멈췄다.
가장 깊숙한 곳에 연회의 하이라이트를 알리듯 화려한 단상이 놓여 있었다. 단상 위로 세 가지 물품들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문득 헬리오스의 심장을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났다. 단지 아이템일 뿐인 것에게 압도당하는 기분이.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했다. 묵직하고 사이한 기운이 압도적으로 나를 옭아매는 듯하다.
겨우 낡은 책 한 권과 아무 장식도 없는 반지, 그리고 스태프 하나가 말이다.
의식 너머 내게 검신의 축복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저것들은 위험하다고.
최태성의 창고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던 반응인 점을 미루어 보면, 얼마나 저것들이 위험한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아까 봤던 아락투스의 경고에서도 그러지 않았나? 가장 안쪽에 있는 것들은 손도 대지 말라고.
그런데 정작 나는 거침없이 유리막을 연다. 가져가지 말라는 경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내가 손댄 것은 낡은 책 한 권이었다. 고작 책 주제에 두께는 내 몸통만 한 낡은 고서였지만.
그것이 유리막을 벗어나자 진정한 위용을 드러냈다.
사람의 심장박동처럼 두근대는 고서의 파동은, 시스템의 경고가 아니었더라도 그 가치와 위험성을 알 수 있었다.
화악-!
낡은 서책의 첫 장을 펼치는 것을 끝으로, 현실로 돌아왔다. 혹시 내가 잘못 봤을까 싶어 다시 한번 허공에 떠 있는 메시지를 살펴봤다.
변한 게 없다. 제일 끝에 있는 기물 건드리면 뒤진다는 내용 그대로다.
“진짜 이거 맞아?”
요 며칠 새 몇 번이나 환장할 기분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멈출 수도 없는 노릇.
‘그것’이 보여줬던 미래와 달리 나는 꿀꺽 침을 삼키며 천천히 움직였다. 가는 곳마다 휘황찬란한 아이템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냥 대충 저것들 중 하나만 가져가도 이 고생한 것들을 다 만회할 정도로 값져 보이는데.
아락투스인지 뭔지 하는 양반의 분노를 사면서까지 그 낡은 책을 가져갈 필요가 있을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걷다 보니 어느새 이 고급 아이템 전시회의 끝자락에 닿았다.
세 가지의 기물이 보였다. 낡은 책, 반지, 스태프.
“환장하겠네.”
독이 든 성배라는 말이 딱 맞았다. 삼키면 무조건 죽는다. 뇌리에서 보내오는 강력한 경고음은 무시할 게 아니었다. 이거 진짜 위험하다.
실제로 보니 더 그랬다. 저 아이템이 얼마나 고등급인지는 말 안 해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또 이걸 가져가면 얼마나 개고생을 해야 할지도 눈에 훤했다. 그래서 고민됐다.
하지만 투정 부리던 것과 달리 유리막에 비친 내 눈동자에는 욕망이 넘실거렸다.
어찌 아닐까. 각성자라면 이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고심 끝에 유리막을 열었다. 두꺼운 고서가 악마의 손짓처럼 나를 유혹한다.
울렁거리는 기분은 다른 게 아니라,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때문이었다.
‘그것’이 보여줬던 미래 속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책의 첫 장을 넘겼을 때였다.
[아락투스의 마법 사전을 발견했습니다.]
[사용자의 수준이 너무 낮아 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용자의 수준을 고려하여 첫 장만이 허용됩니다.]
메시지가 뜨기 무섭게 첫 장에 외계어처럼 쓰인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대로 된 마나 서클을 만드는 법.]
콰앙-!
첫 문장을 읽은 즉시 뇌리를 강타하는 충격이 이어졌다. 아락투스의 분노에 대한 걱정이나 근심 따위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철학자들이 진리를 찾았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단순한 글자들의 나열뿐인데도, 어떤 우주적인 존재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아마도 글자 자체에서 뿜어지는 기운 때문이겠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야말로 기존 지식 체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마법은 스킬로 구현되어 있지 않은 이상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기 때문이다.
허겁지겁 다음 문장을 읽으려 할 때였다.
[경고 : 봉인된 마왕군 제3군단장 아락투스가 사전의 부재와 당신의 존재를 인지합니다.]
[마법 저향력이 매우 낮습니다.]
[감히 저항할 수 없습니다.]
[???가 사용자 이태진의 은멸(隱滅)을 시도합니다.]
[저항에 성공했습니다.]
[공간이 전이됩니다. 저항할 수 없습니다.]
순간 몸이 쑥 꺼지는 기분을 받았다. 저항이고 뭐고 할 새도 없었다. 마치 던전에 들어갈 때처럼 허공의 한 점으로 강력한 중력이 작용하는 기분이었다.
시스템에서 알리는 메시지로 보건대, 물음표라 적힌 그것이 나를 보호해준 것이겠지만. 이는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싸움이었다.
비록 물음표로 표현됐지만 나를 숨겨준 존재가 바로 내게 미래를 보여주는 ‘그것’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손 놓고 구경할 생각은 아니었나 보다.
우주적 진리에 접근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도 잠시, 어느새 내 몸이 익숙한 장소에 도착했다.
후덥지근한 외계 행성의 사막이 아니었다. 음습한 공기가 가득한 곳. 던전이었다.
아락투스의 B급 던전. 원래 세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행성을 넘나드는 마법이라니. 또 한 번 ‘그것’에게 놀라는 순간이었다.
시선을 돌려보니 이곳에 오기 전 파티를 맺고 있었던 녀석들이 보였다.
혈향이 진동했다. 녀석들이 끔찍한 상태로 죽어있었다. 독에 중독된 게 분명한 시체 세 구였다.
[파티장이 사망했습니다.]
[파티가 해제됩니다.]
애도를 표할 생각은 없었다. 이것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와중에 죽은 계집의 손에 들린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던전 탈출석으로 보이는 보랏빛 돌멩이였다. 옆에 오픈된 럭키박스도 같이.
안 봐도 뻔했다. 내가 사라진 직후, 뭐라도 하고자 천천히 이동하다가 럭키박스를 발견했겠지.
박스를 여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희박한 확률이라 해도 이처럼 던전탈출석이 나오기도 하니까.
다만 탈출석을 쓸 틈도 없었을 것었다. 냄새를 맡고 달려온 몬스터를 감당하기에는 녀석들이 너무 약했다.
어쨌거나 내게는 행운으로 작용했다. 모든 게 딱딱 맞아떨어지는 게 아주 작위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소름 끼치기도 하고.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망설이지 않고 탈출석을 사용했다.
[아락투스의 권역 내입니다. 탈출할 수 없습니다.]
[아락투스의 마나로 빚은 던전 탈출석입니다. 탈출석을 사용합니다. 던전에서 이탈합니다.]
그렇게 무사히 탈출했을 때였다. 먼 옛날처럼 느껴지던 폐교 교실이 눈앞에 나타났다.
더불어 B급으로 진화한 던전 입구가 기이한 파동을 내뿜고 있었다.
다만,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보름이 훌쩍 지났는데도 출입금지 스티커가 없었기에.
이유는 몰라도 아직까지 협회에서 이 던전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나로서는 안도할 일이었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역용술이 풀린 마당이다. 괜히 이쪽 근처에서 얼쩡거려봤자 도움 될 일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머릿속에는 인벤토리에 잠든 아락투스의 고서밖에 없었다.
순간 그럴듯한 가정이 떠올랐다. 사막에서 맞붙었던 이셀라. 모래를 다루는 마법과 오러를 동시에 쓰는 수준 높은 강자였다.
이성을 잃고 내게 돌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지 몰랐던 승부였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때문에 두근대는 심장이 멈추질 않았다. 어서 빨리 집으로 가, 다시 그 책을 확인해 봐야 했다. 마나 서클을 만드는 방법.
뛰다시피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마침 생각이 들었다. 던전으로 출발했을 때와 비교하면 딱 20일이 지났다.
거의 한 달 가까이 자리를 비운 것이다. 두고 온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가 잔뜩 쌓여 있을 터였다.
장기 무단결근이었기 때문에 이유가 뭐가 됐든 징계 확정이기는 한데. 얻은 게 너무 커서 불만도 없었다. 오히려 좋다.
눈발이 거세게 휘날리고 있었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전주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스산하게만 생각했던 눈보라가 이제는 나를 축하해주는 함박눈처럼 보였으니까.
그런데 집 앞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왜일까. 나도 모르게 웃음 짓고 말았다.
“뭡니까. 제가 어디 도망이라도 갔을까 싶어서 헐레벌떡 찾아온 겁니까?”
한석훈이 그곳에 서 있었다. 이 양반 괌으로 휴가 간다고 한 지가 한 달 전인데. 되게 오랜만에 만난 느낌이다.
실실 웃으며 농담을 건넸을 때였다. 한석훈의 얼굴이 어딘가 묘했다. 어쩐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것 하며, 전보다 수척해진 것 하며.
눈발과 함께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이 그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한석훈의 왼쪽 소매가 힘없이 펄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