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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52화 (52/170)

52화 이계 (3)

이셀라는 바로 앞의 사내가 이렇게 나와주니 오히려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차라리 잘 된 것이지.

대전사의 자질을 지닌 자다. 무려 마스터가 공인한바, 의심할 여지는 없을 터였다.

예정대로라면 마을로 데려가 그를 융숭히 대접하는 한편, 부족의 전사들이 그를 시험했을 터였다.

대련의 순번을 정하기 위해 한바탕 난리가 날 게 뻔했다. 부족 내에는 이셀라 못지않은 호승심 강한 전사들이 즐비하니까.

‘가장 먼저 대전사의 자질을 지닌 자와 손을 섞을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이셀라가 손을 휘저은 직후. 이태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곧이어 바닥에서 올라온 모래 채찍이 그를 옭아매려 하자, 그가 검을 휘둘렀다.

‘퍼버벅’ 하는 소리와 함께 채찍이 순식간에 분해됐다. 자신의 마법이 대번에 파훼 당한 것이다.

‘호. 읽어냈어?’

사실 사막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락투스의 기운은 감각을 교란시킨다.

기감으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강자일수록 더더욱 그랬다.

부족의 훈련법을 연마한 전사가 아니라면 이 사막은 그들의 무덤이 되기 십상이다.

헌데 저 남자는 부족의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닐 텐데 자신의 기운을 읽어내고 있다.

‘어떻게?’

마스터의 말이 모든 걸 이해시켰다. 대전사의 자질. 천 년에 한 번 나온다는 기재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강자와의 전투는 늘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주니까.

더군다나 앞의 남자와 같이 젊은 나이에 고수의 반열에 든 자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나 또한 자질이라면 뒤지지 않는다.’

호승심이 들끓었다. 부족에서 그녀만큼 빠른 성장을 이뤄낸 전사는 없었다.

격투술과 마법, 모두 그랬다. 자신이 다섯 살에 창시한 맨손 격체술은 아이들도 배우는 입문 체술이 되었다.

스물셋의 나이로 5서클을 달성해낸 마법 재능은 고금을 통틀어도 몇 없었다.

이셀라의 아름다운 외모로도 가려지지 않는 천재성. 아직 한참은 모자라다 한들, 재능 만큼은 차기 대전사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마스터께 그런 말은 듣지 못했어.’

대전사의 자질. 아까부터 그 말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경외해 마지않는 마스터께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자신도 대전사가 될 그릇이라고.

드르르륵-

심장에 묶여있는 다섯 개의 고리가 쉴새 없이 돌아갔다.

다른 곳도 아니고 사막이다. 자신의 집과 같은 곳. 이곳의 모래는 모두 자신의 친구였다.

무심하게 검을 내지르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캐스팅도 필요 없었다. 그저 손짓 한번에 그의 주변 모래가 해일처럼 일어나 감싸 안 듯 그를 덮쳤다.

동시에 모래로 만들어진 독사가 그의 몸을 옭아맸다. 빠져나갈 틈은 없었다.

“부디 죽지는 마라.”

그녀는 그 말과 함께, 뻗은 손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직후 그를 옭아매고 있던 독사가 강성한 마나를 품은 모래 파편을 뿜어내며 터져나갔다.

콰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번지는 바람이 주변을 휩쓸었다. 자신도 중심을 잡기 힘들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폭발의 후폭풍이 귓가를 스침과 동시에 후회가 몰려왔다. 힘을 조절하지 못해 사내가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당했을까 봐.

하지만 섣불리 다가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현재 사막의 기후, 온도, 습도 등의 자연력에 상당 부분 기댄 마법이기 때문에, 시전한 자신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파괴력이었다.

“응?”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래 먼지 사이로 옅은 푸른 빛과 금빛이 섞여 아른거렸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무언가의 주위를 공전하는 듯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던 것도 잠시. 이셀라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그걸 돌파해 낸다고?”

그렇게 형세를 파악하자마자 본능적으로 마나를 쥐어짜 일으켰다. 뇌리에서 강력한 경고음이 울렸다.

콰아앙!

순식간에 일으킨 모래가 방벽을 이루었다.

사막을 주름잡는 마군단 중에도 이 방벽을 무시할 수 있는 몬스터는 몇 없다. 그런데.

쾅! 콰앙-!

직후 거기에서 전해지는 진동이 보통이 아니었다.

사면을 둘러싼 모래 방벽에서 큰 충격이 전해졌다. 동시에 방벽에 쩌저적 금이 갔다.

이게 무슨.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사내가 해일을 뚫고 순식간에 자신을 공격한다?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어떻게 벌써?

콰과광!

방벽이 한 번 더 흔들렸다. 방벽에 새겨진 실선 또한 깊어졌다.

앞으로 한 번. 그 후에 방벽이 깨진다. 다섯 고리의 마나는 이미 동이 났다.

대신 배꼽 아래의 마나는 충분했다. 마스터가 자신을 거둔 이유였다. 근접 박투와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능력.

꽈앙!

방벽이 부서진 즉시였다. 황금빛 갑옷을 장착한 사내는 무너져 내리는 돌벽을 헤치며 나타나 오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사가 아니었잖아?”

그러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뒤로 멀티클래스 어쩌구 하는 말은 관심 없었다.

전사가 아니다?

이셀라의 얼굴이 붉어진 것도 그때였다.

“뭐?”

흐릿하게 말했지만 분명히 들었다. 자신을 무시하는 언행이었다. 사내의 성정이 익히 보였다. 거만한 얼굴로 이셀라를 내려다보는 사내의 얼굴은 위풍당당했다.

그럴 만도 했다. 태어날 적부터 대전사로 떠받들어졌겠지. 얼마나 세상이 우스웠을까.

그럼에도 이셀라는 얼굴만 붉힐 뿐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회심의 일격이라 생각했던 공격이 단번에 파훼됐으니까. 그렇다 해도.

“나는 너를 전사로서 대우했다. 그런데 너는…!”

가슴 깊숙이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자라며 들었던 어떤 도발보다도 모욕적이었다.

사내의 표정부터가 그랬다. 자신을 도발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어 보여서 더 그랬다.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있는 그대로를 내보이는 얼굴.

“전사가 아니다? 옳아. 내가 증명해야 하는 순간이지.”

“그게 무슨 말…?”

사내가 의뭉스럽다는 듯 고개를 꺾었지만 그것조차 이셀라에게는 굴욕적이었다.

‘얼마나 더….’

이셀라가 입술을 깨문 순간. 단전에 잠자고 있던 마나가 꿈틀거렸다.

우우웅!

이셀라의 주위로 공간이 일렁거렸다. 수련이 깊어지고 몇 번의 깨달음을 얻으면 이렇게 유형화된 기운이 나타난다.

비록 옅은 색이었지만 오러 블레이드가 주먹에 맺혔다. 그대로 이셀라가 주먹을 뻗었다. 공간을 이동하듯 자신조차도 주체못할 속도였다.

사내도 검으로 대응할 시간은 부족할 것이다. 그만큼 허를 찌르는 타이밍이었으니까.

잠시간 눈을 번뜩이던 사내가 곧장 검을 버리고 주먹을 뻗어왔다. 자질답게 근접 박투에도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콰아앙!

석양이 지는 가운데 두 주먹이 맞닿았다. 정순한 마나 간의 폭발이었다.

화산이 폭발하며 분화구가 생기듯 이셀라와 이태진이 서 있던 땅이 움푹 꺼졌다. 기류가 폭풍처럼 하늘로 뻗어갔다.

“생사투라도 하자고? 적당히 하지 그래?”

주먹을 맞닿은 그대로 이태진이 황당하다는 듯 턱짓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먼저 도발한 건 너야.”

“도발이라니. 무슨….”

“여전히 나를 전사로 봐주지 않는군. 어디 끝까지 가보자.”

이를 까드득 갈아대며 자신의 두팔을 교차했다. 자신이 창시해낸 맨몸 박투술이었다. 공격 일변도의 연계가 자신의 성격을 닮았다.

후웅! 후웅! 후웅!

명치와 인중, 배꼽을 노리는 공격이 날카로웠다. 나름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다.

때문일까. 이태진의 눈이 이채로 물들었다. 그리고 흥미롭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봤다.

왜일까. 자존심이 상하는 것과 별개로 드디어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주먹이 오고 갔다.

“커헉!”

“커헉!”

그의 갈빗대와 자신의 복부를 맞바꿨다. 허나 투로가 점점 파악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손을 섞을수록 아슬아슬하게 피하던 사내의 얼굴에 점점 여유가 늘어갔다.

슬그머니 불안감이 들었다. 분명 처음만 해도 호적수라 여겼던 사내와 실시간으로 격차가 벌어지고 있었다.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나는 불가능하지만 저자는 가능하다.’

상대를 분석하고 파훼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이셀라도 시간만 주면 그렇게 하겠으나, 긴박한 전투 도중에 그런 것을 한다?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정말로 경악스러운 것은….’

이태진이 무릎을 굽혔다. 완벽하게 자신과 같은 타이밍에. 팔을 뻗는 타이밍까지도 같았다.

마치 거울을 보듯 전신에 흐르는 마나의 기류까지도 동일했다.

아니, 사내는 오히려 더 효율적인 길로 마나를 인도하고 있었다. 20년 간 자신이 쌓아 온 수련을 한순간에 뛰어넘은 것이다.

타이밍이 안 좋았다. 사내의 공격이 자신보다 먼저였다. 그럴 수밖에. 이태진의 공격은 자신의 것보다 상위호환이었으니까.

마침내 주먹이 이셀라의 옆구리를 타격했을 때.

“미, 미친…!”

콰앙!

그 말을 끝으로 이셀라의 의식이 날아갔다.

***

“괜찮느냐?”

따스한 목소리가 들렸다. 불현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스터가 자신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셀라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마스터가 내린 명이었다.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것이었음에도 실패했다.

더군다나 상대에게 완벽하게 패배했다. 전사로서의 긍지도 지키지 못하고.

“전력을 다했다 한들 네 상대가 아니었다. 너무 마음 쓰지 마라.”

“…….”

마스터는 늘 그렇듯 인자한 목소리로 자신을 다독였다. 허나 불경스럽게도 이셀라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그를 막아서지 않으셨지?’

마스터의 능력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었다. 아무리 사막이 광활하다 한들, 마스터께서 마음먹으신다면. 그를 특정하고 추적하는 일쯤이야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일 테니까.

“위대하신 라(La)께서 예비하신 일이다. 내 욕심이 앞선 것이었지. 쫓아갈 것 없다. 다시 보게 될 테니. 그보다, 얼굴이 좋지 않구나. 심마에 들었더냐?”

미처 자각하지 못한 사실을 마스터께서 일깨워주셨다. 마스터의 앞이라는 사실도 잊고 이셀라는 방금 전의 전투 아니, 교육을 상기했다. 그래, 자신이 경험했던 것은 분명 교육이었다.

“처음입니다. 저와 비슷한 연배에게 패배한 것은. 그것도 압도적이었죠. 혹 보셨습니까. 마치 저와 똑같은…. 아니, 제가 창안하고 체화했던 권각법보다 한 단계 위의 것을…. 이게 무슨. 지난 20년 간의 제 노력은 대체….”

마스터의 앞임에도 혼자서 중언부언하는 모습은 이셀라답지 않았다. 그런 불경은 평소의 그녀라면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으니까.

허나 그것도 뛰어넘을 정도로 방금의 그 남자의 능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잠시 뒤, 나름대로 마음을 수습한 이셀라가 신비로운 주황빛 단발을 찰랑거리며 말했다.

“다시 한번 싸운다면 지금보다 더 압도적으로 패배할 것입니다.”

수긍은 빨랐다. 그와 자신의 격차는 앞으로 더 벌어질 것이다.

마스터께서도 자신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재능의 차이였다.

***

“미친 거 아니야?”

이 행성 놈들은 다 이런 건가? 정말 미친 여자가 따로 없었다.

단순한 비무 수준이 아니라 아예 생사결을 나누자는 수준으로 달려들었으니까.

아직도 이셀라의 주먹에 타격당한 갈빗대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한치만 더 가까이 맞았더라도 심장이 멈췄을 만한 공격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셀라의 박투술은 내게 영감을 주기 충분했다. 어차피 나와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이었다. 기술을 베끼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우우웅-

잡념이 이어지는 가운데 인벤토리를 빠져나온 흑색 보석이 진동을 시작했다. 또 뭔데.

D급 던전에 들어가고 지금까지.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제 슬슬 쉬고 싶은데.

내 마음과 달리 부르르 떨던 보석이 점차 발광하기 시작했다. 아이템의 설명을 읽으려는 시도도 거부됐다.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B급 각성자의 눈으로도 쫓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진동하던 보석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허공에 떠오른 보석 뒤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검은 기운을 뿜어내는 그것과 주황빛 태양이 한데 어우러지던 순간이 찾아왔다.

콰앙!

인지하지 못하는 속도였다. 땅에서 올라왔는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도 파악이 불가능했다.

강한 충격음과 함께 정면으로 거대한 문이 보였다. 순간 밤이 찾아온 줄 알았다. 그만큼 묵빛 일색의 성문이었다.

-끼에에엑!

그것만이면 다행일 텐데. 디자인 한번 고약하다. 어떻게 만들어진 건진 몰라도 문에 박힌 수없이 많은 인간의 형상들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다.

마치 지옥의 한 장면이 연상되는 모습이었다. 비위 좋은 나도 속이 메스꺼울 정도다. 더 보고 싶지 않았다.

마침 문이 열렸다. 비주얼답게 스산한 소리였다.

끼이익.

귓가에 수없이 많은 벌레가 기어다니는 느낌을 주는 소음이었다.

한 점 빛이라도 있을까 했던 기대와 달리 암흑천지만 문 안쪽에 가득했다. 어쩔 수 없는 공포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꿀꺽 침을 삼켰다. 그렇다고 계속 여기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개고생을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얻어가자는 생각으로 발을 내디뎠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걸 주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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