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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51화 (51/170)

51화 이계 (2)

음산한 기운이었다. 느낌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도처에 깔린 마나가 그랬다.

동시에 초점이 돌아왔다. 만약 방금 회복된 시야에 이 마나의 색이 보였다면 짙은 흑색이 분명할 것이다.

사막?

흐릿한 시야 곳곳에 붉은색 모래가 가득하다. 멀리 보이는 모래언덕도 마찬가지였다. 문명의 흔적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한 톨도 없었다.

더군다나 더 놀라운 것은, 대낮에 떠 있는 두 개의 달이었다. 마치 노란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게 무슨….”

그때 이곳에 온 걸 환영한다는 듯 덥고 건조한 바람이 훅 끼쳤다. 나는 망망대해에 떨어진 기분을 맛봤다.

두 개의 달?

너무 믿기지가 않아 다시 한번 시선을 위로 올렸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기는 분명 지구가 아니다. 다른 행성이었다.

혹시 몰라 파동을 넓게 퍼트려봤다. 절망적이게도, 이곳의 지형을 단 하나도 파악할 수 없었다.

협회 내에서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의도적으로 기감의 파동을 방해하는 마법적 처리가 된 게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었다.

화성에 떨어진 남자의 심정이 이럴까 싶었다. 심사숙고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는 X됐다.

“어떻게든 되겠지.”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 수학여행을 조금 먼 곳으로 왔다고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괜히 웃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이런 위기의 순간에는 의식에 부담이 가서는 안 된다. 머리가 무거워지면 판단이 흐려질 위험이 있었다.

그런 경각심과 함께 일단은 걷기로 했다. 발걸음 하나하나마다 부드러운 모래 입자가 사박사박 소리를 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사구와 지평선뿐이었지만 절망하기에는 일렀다. ‘그것’이 나를 비호하고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호흡이 고르지 않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미처 치유되지 못한 리저드의 독기가 조금씩 나를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환장하겠네.”

이곳이 외계의 행성이라는 자각을 없애려 해도 그럴 수 없었다. 비단 두 개의 달 때문만이 아니라.

지금처럼.

콰직!

밟아 터트린 그것은 작은 벌레였다. 꼭 개미처럼 생긴 벌레는 크기도 그 정도에 불과했지만. 굳이 신경 써서 죽인 이유가 있었다.

죽은 벌레의 몸에서 보라색 진액이 흘러나왔다. 개미의 몸집에서 흘러나오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었다.

뜨거운 쇠가 녹듯, 그 진액에 닿은 모래가 부글부글 끓으면서 사라지는 모습도 평범하지는 않았다. 이건 마치.

“리저드.”

그것들이 내뿜던 독기와 같은 종류였다. 놈들만큼 악랄한 독성을 가진 생명체가 또 있다니.

더군다나 이렇게 크기가 작아서야 눈에 띄지도 않는다. 만약 이것들이 떼로 달려든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꼼짝없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경험치 획득 : 147exp!]

아!

뒤늦게 울리는 메시지창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이 세상은 몬스터들이 주민인 세상이구나.

던전에 머물러야 할 그것들이 밖에서 활개를 치는 세상.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몬스터가 주체인 행성이라니. 그럴 리가 없겠지만 이 행성에 사람이 있다면 그 숫자는 매우 적을 것이다. 혹은 우리처럼 진화의 과정을 겪었거나.

콰직!

개미 한 마리를 더 밟은 이후였다. 그래도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름부터가 아락투스의 비밀창고잖아.”

아마 몬스터의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행성의 주인이겠지. 행성의 주인이 몬스터라니.

경황이 없는 가운데서도 꽤 충격적이다.다른 말로는 인간과 몬스터의 입장이 정반대라는 의미였으니까.

머릿속에서 꽤 흥미로운 추측이 이어졌지만 이내 그것도 한계를 맞았다. 체력과 정신력 모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장 물이 필요하다.

리저드가 남긴 독기의 잔상(殘傷)과 압도적인 자연의 위대함이 맞물리면서 지금의 나는 비각성자의 신세와 다르지 않았다.

그 증거로 탈수 증세가 찾아오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쉴 곳을 찾아야 했다.

억지로 마나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여전히 파동에 잡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빌어먹을….”

물. 물이 필요하다.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다던데, 하는 생각들만 뇌에 가득 찼을 때였다.

“어?”

신기루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전방 100미터 앞. 야자수가 보인다. 그 밑에는 오아시스가 햇볕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고.

조급함에 발을 굴렀다. 밟고 있던 모래가 폭탄에 부서지듯 움푹 파인 것도 잠시, 번쩍할 사이 내 몸이 야자수 앞으로 이동됐다.

“뒤지라는 법은 없구나.”

신기루가 아니었다. 바로 앞에 오아시스가 있었다. 소금물도 마실 판에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곧장 물에 입수하려던 순간이었다.

“रुकोकोु.?”

뒤에서 울린 음성이었다.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인벤토리에서 잠자던 헬리오스의 심장부터 장착하고 봤다.

뒤를 돌자 노인 하나와 젊은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이 순간 그들과 내 표정이 같을 것이었다. 경계의 눈초리. 언제든 전투에 돌입할 수 있게끔 말이다.

특히나 여자 쪽의 눈빛이 아주 살벌했다. 가죽옷으로 중요 부위만을 가렸는데 거기에서 어떤 외설적인 생각도 들지 않았다.

되려 나와 같은 부류라는 것이 느껴졌다. 전사. 그것도 목숨을 아끼지 않는 아주 호전적인 타입이다.

그녀에게서 뿜어지는 파동도 그랬다. 따끔따끔한 기세를 숨기지 않는데 그만한 자신감이 있을 만하다.

순식간에 그녀와의 전투를 그려봤다. 나와 동수거나 살짝 아래. 상당한 실력자였다. 이 행성에 각성자가 있다는 게 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두꺼운 로브를 입은 노인에게서는 이렇다 할 기운이 없었다. 그가 압도적인 강자가 아니라면 비각성자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대치하는 시간도 로브를 뒤집어쓴 노인이 손가락을 튕긴 것으로 마무리됐다.

“안심하게. 우리는 적이 아니야. 그저 도와주려던 것뿐일세.”

한국어?

노인의 입에서 유창한 한국어가 흘러나왔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마법사로군.”

통역 마법을 쓴 것이다. 그것도 손짓 한 번에. 노인에 대한 평가를 압도적인 강자 쪽으로 옮겼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몸이 많이 다쳤군. 그대로 있다가는 한 시간을 못 버텨. 자네처럼 훌륭한 전사에게 부상이란 늘 그렇듯 친구겠지만. 오늘은 내가 도와주겠네.”

또다시 노인이 엄지와 중지를 튕겼을 때였다. 신비로운 빛이 그의 손에 머물던 것도 잠시.

부지불식간에 허리가 꼿꼿하게 펴지고 반쯤 감긴 동공이 시야를 확장했다. 몸이 원상태로 회복된 것이다.

허.

마법사이자 힐러?

두 개의 직군을 쓴다는 멀티 클래스가 몇 있다고는 들었지만. 태생적 한계로 고등급을 이룰수는 없다고 했는데. 이 세계의 규칙은 다른 것일까.

“큰 은혜를 받고도 절을 올리지는 못할망정! 마스터. 이 자는 전사가 아닙니다.”

옆에 있던 여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언제라도 내게 달려들 수 있게끔 주먹을 말아쥐며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대가를 받고자 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셀라. 이 사내는 대전사의 자질을 가졌다. 안력을 높이는 게 좋겠구나.”

강자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띠던 노인의 얼굴이 그때만큼은 인상을 찌푸리며 여자를 나무랐다. 동시에 여자도 대번에 놀란 얼굴로 나를 다시 봤고.

그렇게 한소리 한 노인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오늘 자네를 만난 건 내게도 행운이 따랐다는 말이야. 이 근방까지 오게 된 사연은 모르겠다만, 이제 안심해도 좋네.”

그러며 오아시스를 손짓했다. 어서 갈증을 해결하라는 듯이. 여자를 힐끔 바라보자 벙찐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더 이상 적의는 없었다. 호의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노인이 나를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진작 그리됐을 테니까.

오아시스 속으로 풍덩 몸을 던졌다. 뜨거운 열기가 식고 몸 안에 수분이 들어오는 게 느껴진다. 이제야 살 것 같다는 기분도 잠시.

대가를 받자고 한 일이 아니다?

노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대가 없는 호의란 없는 법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수면 위로 올라오자마자 여자가 나를 정색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보이지 않았고.

“마스터께서 당신을 대전사의 자질을 타고난 자라 하셨어. 그것 하나만으로도 우리에게 극진히 대접받을 자격은 충분하지.”

“….”

“더군다나 당신이 제국민이 아니라는 것도 보증하셨고. 마스터께서 이런 호의를 보이는 경우는 아주 드물어.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거야.”

모래로 빚은 듯한 그녀의 주황빛 단발이 찰랑거렸다.

“일단. 우리 마을로 가자.”

“…….”

다짜고짜 자신의 마을로 초대하는 그녀의 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행성에서 대체 언제 탈출할 수 있는 거지?

뭐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그것’의 방식은 이렇듯 우연을 가장해 내게 기연을 건네준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그녀의 말을 따르는 게 맞았다. 몬스터들이 바깥에서 활개치고 있는 세상이다. 어떻게든 안전을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

“안내해.”

그녀의 반응을 살피고자 일부러 건방지게 말했는데도 그녀는 거기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되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녀가 따라오라고 말한 후였다. 예상대로 그녀는 전사였다. 발 쪽에서 움트는 마나의 흐름이 자연스러웠다.

콰앙!

체력은 물론 마나까지 회복한 상태였다. 사막을 건너는 우리의 속도는 슈퍼카와 흡사했다.

“마을에 들어가기 전, 확실히 해둘 게 있어. 넌 어디에서 왔지?”

내 옆에서 나란히 달리던 그녀가 물었다. 왜 안 물어보나 했다. 이셀라는 까무잡잡한 중동인이었으니까.

“다른 세상에서.”

짤막한 진실을 알려주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할 수 없다는 거네. 하지만 쿰베이라칸까지 오게 된 이유만큼은 들어야겠어.”

그녀가 멈췄다. 그와 함께 쿵 소리를 내며 우리 주위의 모래가 사방으로 번졌다. 급브레이크를 밟은 탓이었다.

“쿰베이라칸….”

이곳의 지명이 분명한 이름을 말하자 그녀, 이셀라가 턱짓햇다. 어서 말하라면서.

“아락투스를 찾고 있다.”

이 세상에 사는 그녀라면 분명히 그게 뭔지 알고 있을 것이다.

내 예상이 맞았다. 그녀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진다.

“왜지?”

그녀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아락투스의 비밀창고. 어디 있지?”

“하…! 그딴 도굴꾼들의 낭설을 믿고 여기까지 왔다고? 거짓말. 진실을 말해라.”

“아락투스는 누구지?”

질문에 질문으로 돌려줬다. 그녀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어갔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는군.”

“질문 그대로다. 아락투스가 누구냐.”

“마왕의 세 번째 군단장. 지금은 마스터께 봉인됐지만.”

또다시 듣는다. 마왕과 군단장. 정확한 단어의 의미를 알아내야 했지만 지금은 이게 더 중요했다.

“아락투스의 비밀창고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그녀가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나를 봤다. 정말 그것 때문이었냐는 듯.

“대체 누구에게 그런 헛소리를 들었는지는 몰라도. 수많은 탐험대가 그 전설을 믿었다가 사막의 일부가 됐다. 너도 똑같은 부류라면 정말 실망이군.”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자웅을 겨뤄보고 싶었는데’ 하는 말은 무시했다. 그녀의 기대감을 채워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전설?”

“나를 놀리려는 생각이라면 그만둬라.”

“네가 아니라도 알아낼 수 있다. 말하기 싫다면 그만둬.”

“…당신에게 보이는 마지막 호의야.”

잠깐 한숨을 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 사막 어딘가에 아락투스의 흔적이 있다더군. 그의 피로 만들어진 보석이 말이야. 그 보석이 사막에 묻힌 아락투스의 창고로 안내해 줄 것이라는 전설. 이제 됐나?”

마치 화를 꾹꾹 눌러 담은 듯 그녀의 숨소리가 묵직하게 떨렸다. 그녀가 화내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또다시 ‘그것’의 안배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인벤토리 안에서 잠자는 아이템이 하나 있었다. 여기 오기 전, 파티장에게 받은 검은색 보석.

“아무래도 당신과 더 함께할 수 없게 됐군.”

물음표로 덧칠된 그 아이템을 꺼내는 순간이 온다면 그녀가 없는 곳이어야 했다.

전설과 명확하게 일치하는 아이템을 꺼냈다가는 대번에 그녀가 어떻게 돌변할 것인지 뻔했다.

어쩌면 그 마스터라는 작자가 달려올지도 모르고.

“그럴 수는 없어. 마스터의 명이야. 당신을 데려오라는.”

“호의는 고맙다고 전해.”

콰앙!

몸은 충분히 회복됐다. 발을 구르자 내 몸이 대번에 그녀와 멀어졌다. 그녀가 쫓아올 수 없는 속도였다.

그렇게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며 안심하려던 그때.

“어쩔 수 없군. 내려진 명은 이행되어져야만 한다. 강제로라도 당신을 데려갈 수밖에.”

어느새 내 앞에 그녀가 나타나 있었다. 동시에 그녀의 손에 들린 스태프가 휘둘러진다. 그때 마나의 파동이 그녀의 심장 어림에서부터 쏟아졌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놀란 심정을 숨기고 롱소드를 휘둘렀다.

어중간한 마음가짐이 아니다. 호적수 인만큼, 죽인다는 각오로 전투에 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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