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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47화 (47/170)

47화 전주 D급 던전 (2)

“이 새끼가 미쳤나. 그 이름이 뉘신 줄 알고.”

깊숙한 곳에 처박혀 술을 홀짝이던 놈이었다. 화이라는 이름에 발작하듯 녀석이 테이블을 박차고 내게 달려왔다.

“이, 이봐! 가만있…!”

털보가 재빨리 녀석을 막으려고 했지만. 그보다 놈의 주먹이 빨랐다. 스킬을 쓴 것이겠지.

놈의 주먹이 붉게 빛나던 것도 잠시, 제법 강한 기운을 머금은 공격이 내 얼굴을 향해 쏟아졌다.

이딴 쓰레기 소굴 가운데서도 최찬규 정도의 실력자가 있었던 것이다.

녀석의 공격을 흘린 직후였다. 놈이 예상했다는 듯 바로 다음 공격을 준비한다. 반대편 손바닥을 펴는 놈의 얼굴이 굳건했다.

웃긴 놈이다. 분명 내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아는 놈이다. 그런데도 제 두목의 이름 한 번 불렀다고 이러는 것이다.

놈의 갸륵한 충성심을 봐서 손속에 사정을 두기로 했다. 더군다나 거래를 위해서도 녀석들의 심기를 너무 건드리는 건 곤란할 터.

그렇게 녀석의 앞니 두 개를 부수려던 순간, 내 주먹을 막는 것이 있었다.

카앙!

정면으로 놈이 보였다. 수려한 외모로 씨익 웃으면서 칼을 들고 있는 화이가.

“어째 올 때마다 이런 식이군.”

“부하 관리를 잘했어야지.”

“인정하는 바야. 이 친구들을 컨트롤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

화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내 얼굴이 나도 모르게 험상궂게 변했다.

처음의 계획은 그랬다. 뭣하면 놈들의 면상을 곤죽으로 만들어서라도 역용주를 가져오고자 했는데.

화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생각을 바꿨다. 일이 생각보다 복잡해질 것 같았다.

이놈, 내 생각보다 강하다. 아니, 나보다 월등히 윗등급의 녀석이다. 어쩌면 백인호보다도.

저번에는 느끼지 못한 파동이 이제서야 느껴졌다. 놈의 농도 진한 마나는 확실히 A급을 말하고 있었다.

“화이 선생님!”

방금까지 죽일 듯 나를 공격하던 녀석이 황송하다는 눈빛을 화이에게 보낸다. 뒷골목 잡배들에게 이런 의리가 가능하다는 게 웃겼다.

“다들 나가주겠어? 털보. 술 남은 거 있나?”

“어, 어! 준비해둘게.”

약에 취한 듯 비틀거리던 녀석들이 화이의 말 한마디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순식간에 주점 안에는 녀석과 나만 남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돈으로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만, 역용주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외부인에게 쉽게 내줄리 없었다.

“기사는 봤어. 그새 또 강해졌더군.”

녀석이 익숙한 동작으로 샴페인을 열었다. 나를 안다는 표정이었다.

어째선지 화이가 나를 보는 눈빛에 호감이 서려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것 마냥.

녀석이 의자를 손짓했다. 역용주를 받아야 하는 입장인 만큼, 지금만큼은 녀석의 말을 따르는 게 맞다. 앉자마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있다.”

“급하기도 하군. 한 잔 받아. 비싼 거라고. 메리 크리스마스.”

화이가 내게 잔을 건넸다. 나는 그런 녀석을 빤히 쳐다봤고. 녀석의 여유로운 웃음이 거슬렸다.

나와 동년배로 보이는 저 얼굴은 당연히 거짓이겠지. 그랬다면 내가 모를 리 없을 테니.

그나저나 화이가 검을 휘두르던 순간부터 거슬리던 게 있었다. 녀석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파동이 낯익었다. 바로 얼마 전 겪어봤던 기운.

“당신, 협회에 있었나?”

녀석이 순간적으로 흠칫한다. 나를 돌아보는 순간, 녀석의 동공을 스친 안광이 살벌하다.

나를 향한 것은 아니다. 아득한 과거를 헤매는 듯한 눈빛이었다.

“어떻게 안 거지? 아아, 그렇군. 알만해. S급의 검신의 축복이라면.”

그러던 문득, 녀석이 숨길 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있었다 뿐일까. 손정연이 내 조부인데.”

“…….”

정보가 주는 충격도 그랬지만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정도면 손 씨의 피는 정말로 시스템의 선택이라도 받은 건 아닐까 싶은 의문이 들었으니.

할아버지는 S급 각성자에 손자 둘은 모두 A급의 헌터.

각성과 유전에 관한 연구가 있었던가? 그게 사실이라면 녀석은 축복받은 유전자임이 틀림없었다.

“네가 손영혁의 동생이라고?”

그렇게 녀석을 떠봤다.

“영혁이를 본 적 있나 보군.”

협회장은 자식을 하나밖에 두지 않았다. 손영혁의 친형이라는 소리였다.

“협회장의 장손이 이런 뒷골목에서 쓰레기들과 놀아나는 걸 알면 세상이 놀라겠어.”

“그러니까 부디 비밀로 해줄래? 나도 내 친구들 입단속은 확실하게 시킬 테니. 이태진은 오늘 여기 오지 않았던 거야.”

화이가 다정한 얼굴로 말했다. 도저히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뻔한 대사가 나갈 정도로.

“내게 네 비밀을 알려주는 이유가 뭐지?”

“글쎄. 친구가 되고 싶어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본 모습이나 드러내고 말해.”

“아. 미안하지만 그건 곤란해. 이래 봬도 나름 고등급의 마법적 처리가 들어갔거든. 다시 시전하기에는 나도 부담이 커서 말이야. 예상은 했지만 기감이 굉장히 예민하잖아? 단번에 알아챌 줄은 몰랐어.”

“본명은 뭐지?”

“화이. 태어날 때 받은 이름은 가문을 나오면서 버렸어.”

녀석이 선의 어린 얼굴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자신은 뭐든 숨길 게 없다고, 내게 어떤 것이든 줄 듯 저렇게 구는 녀석들이 요즘 많이 보인다.

녀석을 신뢰하기에는 협회장과 손영혁이 가면을 쓴 채 건넸던 호의가 잊히지 않았다.

화이의 사정 따위는 알 바 아니다. 원하는 것만 받으면 그뿐. 경계는 하되, 녀석의 보이는 호의를 이용하기로 했다.

화이는 눈치가 빨랐다. 내 얼굴을 보고 먼저 말을 건네왔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라고?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썩 합법적인 것은 아닌 것 같고.”

“역용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남는 게 있어.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는 신진께서 신분을 숨길 일이라. 뭔지 궁금하군.”

“…….”

“맞춰보지. 살인? 죽일 놈이 있는 건가? 아니야.”

녀석이 내 표정만 보고 그렇게 유추한다. 여럿 고수들을 이미 속여본 적 있는 포커페이스다. 녀석이라고 다를까 싶었는데.

스무고개를 맞추듯 화이가 이것저것을 물어봤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진실의 유무까지도 알아보기까지.

“도피? 범죄를 저지른 적 있나? 음. 당연히 이것도 아니군. 하기야, 검신께서 잘못 좀 저질렀다고 처벌할 협회가 아니야. 그렇다면 던전! 던전인가? 호오. 맞구나?”

기어코 녀석이 내 목적을 맞췄다. 그 수법이 궁금해졌다. 마법의 영역인가?

굳이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까처럼 묵묵한 얼굴로 녀석을 쳐다봤다. 그리고 녀석은 이것마저도 숨기지 않고 말해주겠다는 투였다.

“나는 너처럼 천재가 아니라서. 기감이나 표정만 보고 알 수는 없지. 아이템을 쓴 거야. 본가에 있는 수정구를 보았나? 그 영감이 쓰지 않았을 리 없지. 그거랑 비슷한 거라고 보면 돼. 어쨌든.”

녀석이 허공을 뒤적거리는 모션을 취한 직후, 손에 들린 자색 술병을 테이블에 얹었다.

“B등급의 역용주야. 술만 담그는 아티펙터 장인의 숨결이 들어간 거라고. 돈만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이어서 아이템의 효과를 설명했다.

“효과는 최대 일주일간 지속, 능력치 또한 일정부분 제한되지만 이 정도면 훌륭한 편이야. 물론 던전용으로 쓰기에는 썩 추천할 수는 없지만.”

그런데도 쓸 거야? 하고 눈짓한다. 녀석에게 굳이 대답할 필요성이 없었다. 그런 내 모습에 화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불법공략으로 이것만큼 안성맞춤인 아이템도 없지. 장담컨대, 협회에 발각된다 해도 도주하는 데 문제없을 거야. 그나저나 어딜 가는 거지? B급? A급?”

얼마 전 손을 맞댔던 손영혁이 떠올랐다. 시도 때도 없이 도발을 걸어오는 동생에 물음표 살인마 형이라. 환장할 형제였다. 녀석의 말을 무시했다.

“얼마지?”

“말했다시피,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돌리지 말고 원하는 걸 말해.”

“지금 당장은 말해주기가 좀 그래서…. 이렇게 하는 거 어때. 나중에 내 부탁 하나 들어주는 걸로.”

“부탁? 두루뭉술한 말은 사절이다.”

“나중에 듣고 결정해도 좋아. 아니다 싶으면 거절해도 뭐라고 하지 않을게.”

화이가 자신 있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순간 진실을 구분하는 아이템이 간절했다. 괜한 찜찜함을 남기는 것은 사절이니까.

내 의심스러운 눈빛에도 녀석은 결백을 주장하며 몇 번이고 듣고 결정하라고 말해왔다.

이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한번 믿어볼 만했다. 고개를 끄덕인 후, 역용주도 얻었겠다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다.

“이런 아이템은 대체 어디서 구하는 거지?”

“해외에서 밀수하는 것도 있고, 우리가 던전에서 구해오는 것도 있고.”

“던전?”

“왜 이래. 불법 각성자들도 강해질 권리가 있다고.”

“그러다 적발이라도 되면 어쩌려고.”

“일성의 도련님께서도 불법을 저지르는 판인데 우리가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있겠어?”

비꼬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나를 웃기려는 시도 같아 보였는데 실패했을 뿐이지.

“어쨌든. 이런 아이템들의 입수 루트는 다양하지. 밑바닥 인생이라고 너무 무시하지 마. 나름 고객들이 많다고. 플랫폼 역할은 물론이고 윗분들의 세탁기 노릇도 담당한다고 하면 믿으려나.”

그러며 녀석이 휴대폰을 건넨다. 제법 흥미가 돋는 주제였다. 순순히 화이가 건네오는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블랙마켓?”

그렇게 적힌 어플리케이션이었다.

“설마 우리들에게 네이밍 센스를 기대한 거야?”

“…그 말이 아니라. 생각보다 규모가 크군.”

“바야흐로 온라인시대라고. 인터넷에서 취급하는 물품이 훨씬 많을 수밖에. 이 친구 의외로 모르는 게 많군. 미래의 검신께 가르쳐 줄 게 있다니. 영광이야.”

화이의 깨발랄한 말투를 들어보면 녀석이 진짜 손영혁의 형인지 의심될 정도다.

진중한 면이 있는 동생과는 전혀 딴판이다. 녀석의 얼굴 만면에 장난기가 서려 있다.

그것과 별개로 블랙마켓에 대한 감상은 놀라웠다. 이깟 뒷골목이 녀석들의 본거지인 줄 알았더니.

카테고리별로 나누어진 상품들만 해도 그랬다. 어지간한 아이템 샵보다도 상품의 가짓수와 종류가 많다. 내 생각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편리한 UI는 또 어떻고. 헤맬 필요가 없이 원하는 내용이 척척 나온다.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던전에 관련된 건 여기야.”

화이가 [던전 파티 모집] 이라 적힌 곳을 클릭하자 주르륵 뜨는 것들이 있었다.

갈수록 가관이다. 등급별로 분류된 것들을 또다시 지역으로 2차로 거를 수 있게 만들어놨다. 불법으로 공략되는 던전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었다.

“접속하는 방법을 알 수 있나?”

“다음번에 방문할 때쯤이면 네 아이디가 만들어져 있을 거야. 기뻐해도 좋다고. 블랙마켓의 최고 레벨 아이디는 값어치를 매길 수 없으니까. 더군다나 너는 특등급의 상품만 취급하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말해주지 않은 과정에 블랙마켓이 있지 않을까?

“지금 당장은 전주의 D급 던전. 그곳의 정보가 필요해.”

녀석도 내가 던전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판이다. 이제 와서 숨길 것도 없었다.

“D급? 거길 네가? 아차. 이런 것까지 묻는 건 실례겠지. 아무튼, 그것쯤이야 아이디를 새로 만들 필요도 없지.”

화이가 휴대폰을 몇 번 클릭한 후였다. 대번에 전주의 D급 던전으로 특정되는 게시글이 떴다.

며칠간 나 혼자 고군분투하며 정보를 뒤적거리던 노력이 허탈해진 순간이기도 했다.

[D급 던전, 몬스터 소재 파악 불가, 현 인원 3명, 근거리 딜러 모집, 파티장 C급 힐러 계열.]

“일단 뜨기는 했는데.”

정말 이거냐고 묻는 듯한 말투다. 아무리 봐도 내가 들어가기에는 수준이 너무 낮은 등급의 던전이었으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띄웠던 모양이었다. 그런 나를 보며 화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게 휴대폰을 건넸다.

“정말 이거 맞아?”

맞다. 동시에 쾌재를 불럿다. ‘그것’의 머릿속으로 한발 들어간 기분이 들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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