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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46화 (46/170)

46화 전주 D급 던전 (1)

A팀에 들어오지는 않되 훈련에는 참여하겠다는 약속. 저번에 김석환과 악수하며 말했던 내용이었다. 게이트가 터지고 협회까지 다녀오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설마 잊은 건 아니지?”

김석환이 짐짓 상처라도 받은 얼굴로 말한다. 털이 수북한 아저씨가 저런 표정으로 저렇게 말하니 속이 더부룩했다.

“그럴리가요. 저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점점 거짓말이 느는 기분이다. 내가 생각해도 한점 어색함이 없는 말투와 표정이었다. 앞에 있던 김석환이 헤벌쭉 웃는다. 그럼 그렇지 하며.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르침을 받는 것도 아니고 준다는 사람이 이렇게 기뻐할 일인가?

“벌써 기대된다. 한석훈 그 양반은 한 달 안에 밑천 다 털릴 것이라 했지만, 글쎄. 난 자신 있거든.”

그러며 마치 악당이라도 되는 듯 켈켈거리며 웃는데 그때만큼은 참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들을 보니 모두 나와 같은 표정이다.

꼭 일성이 아니더라도 A급 던전을 공략하는 팀의 장이라면 어디를 가도 그만한 대우를 받는다. 다른 말로 체면을 차릴 일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김석환의 팀이 왜 이리 격의가 없나 했더니 팀장부터가 그랬던 것이었다.

“내일부터 괜찮지? 몸만 와, 몸만. 다 준비돼 있으니까.”

프러포즈를 하는 남자처럼 쑥스러움이 담긴 얼굴과 말투였다.

“아, 진짜. 좀 화나려고 하네.”

“난 토할 것 같아. 우욱-!”

보다 못한 정철규와 윤진아가 구역질 난다는 얼굴로 말했다. 동감이었다.

이튿날, 김석환뿐만이 아니라 A팀의 거의 모든 인원들이 모여 있다. 하나같이 훈련에 열중하는 모습. 휴가철인데도 그랬다.

“경험치 포인트 하나에 영혼도 바칠 놈들이야. 쉴 시간이 없다.”

김석환이 내 의중을 읽은 듯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뿌듯함이 얼굴에 잔뜩 걸려있다.

경험치 포인트 하나에 영혼도 바친다라. 이들 한 명 한 명의 사정도 궁금했지만.

“바로 시작할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시간은 가고 있다. 내 절박함도 이들 못지않았다.

“저번에 보니까 검술이 희한했어. 한석훈 그 양반 것이 기본 베이스 같긴 하던데. 재밌는 수가 군데군데 섞여 있어서 말이지.”

“검을 알려주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실망인데. 아무리 김석환이 A급의 헌터라 해도 그는 레인저다. 그에게 청운적하검법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실망하긴 일러. 내 주력은 전략과 회피거든.”

회피?

“레인저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자신과 옆에 있는 원거리 딜러를 살리는 것이다. 일단 살아야 딜을 쑤셔 넣든 활로를 찾든 작전을 짤 수 있거든.”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고등급의 파티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레인저와 원거리 딜러의 생존이다. 그들의 생존 여하에 따라 취할 수 있는 전략도 늘어난다.

“전투 센스 하나는 나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너무 좋아. 나무랄 데가 없지. 그런데 그게 네 발목을 잡으면 어떨까. 전투 중 도주는 생각해 본 적도 없지?”

“…….”

“몬스터 따위에게 등을 보일 수 없다는 무식한 칼잡이들이 무수히 많지. 내 옆에도 그런 놈들 천지였고. 치기 어린 것들. 그놈들 결말이 어땠겠어?”

옆에 있던 정철규가 혀를 ‘끽!’ 튕기며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전략의 다양성을 가져라. 온갖 해괴한 환경이 득실대는 B급부터는 필수 덕목이야. 하나를 잃고 두 개를 얻을 수 있다면 망설임 없이 하나를 버려.”

넓게 보라는 이야기였다.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냥 보이는 것들을 모조리 썰어버리면 되는 일 아닌가? 왜 하나를 포기해야 하지?

의문을 묻기도 전 김석환이 이름을 호명했다.

“상황을 부여하겠어. 윤진아. 박지현.”

동시에 마법사와 힐러가 흥미로운 얼굴로 튀어나온다.

“지금부터 나는 B급 던전의 중간 보스몹이다. 교활한 놈이지. 저주 마법에 능통하고 궁술의 달인이며 검도 다룰 줄 알아. 그래, 맞아. B급 던전에 등장하기에는 너무 굉장한 몬스터야. 워워. 겁먹기는 일러. 다행히 내 힘이 봉인됐다는 가정을 하자고.”

그 말에 윤진아가 또다시 구역질 난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것을 본 김석환 또한 아랑곳하지 않고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고.

“지금부터 네가 리더의 역할을 맡는다. 이 녀석들이 오롯이 네 말에 의지한다고. 뭐해, 전투는 벌써 시작됐다고. 안 움직여?”

말이 끝난 직후였다. 바람이 훅 끼쳤다. 김석환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그의 손에 단검이 들려 있었다. 스쳐 지나간 김석환의 목표는 내가 아니었다.

“윤진아 선배님!”

“뭐든 말해! 반말로!”

윤진아가 스태프를 손에 들고 내 말만 기다렸다. 명령만 주면 불구덩이라도 들어갈 눈빛처럼 보인다. 믿음직했다.

“쉴드, 박지현 쪽!”

기다렸다는 듯 반투명한 방어막이 힐러 박지현 앞으로 펼쳐진 직후였다.

쿠웅!

“호오.”

타격 즉시 쉴드가 깨질 듯 금이 갔다. 김석환의 손이 한 번 더 올라갔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내 몸이 움직였다. 헬리오스의 심장이 덧씌워진 것은 당연하다. 머릿속에서 검로가 그려졌다.

상상 속 김석환이 내 검에 반응하지 못하고 무참히 찢어진다. 이상한 것은 상상 속에서만 검술을 펼쳤을 뿐인데.

[청운적하검법의 이해도가 높아집니다.]

[청운적하검법의 스킬이 E급으로 상승했습니다.]

[청운적하검법의 스킬이 D급으로 상승했습니다.]

이런 메시지가 뜬다. 그것을 무시하고 곧바로 김석환의 목을 노리고 횡으로 검을 그었다.

콰앙!

역시 상상과 현실은 달랐다. 보스몹이 몸을 틀어 내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후끈한 열기가 몸을 덮쳤다.

“시야를 가려!”

반말이 자연스러웠다. 박지현도 불만 없이 재밌다는 얼굴로 내 말을 순순히 따랐고. 주문대로 저주를 건 듯했다.

순간 김석환이 멈칫했다. 그 틈을 놓칠 리가. 청운적하검법이 손안에서 꿈틀거렸다.

동시에 뇌리를 스친 게 있었다. 본래 가지고 있던 검술과 청운적하검법을 합칠만한 단초. 조만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

내 검이 김석환의 목에 닿기 직전, 김석환이 그렇게 말했다.

후웅!

일점폭발은 물론이고 아드레날린 부스트와 오러 블레이드까지 쏟아부은 공격이었다. 검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공간 또한 베이듯 휘었다.

내가 느끼기에도 가공할 정도다. 허나 A급의 격은 아직 높고도 높다. 바로 다음 공격을 준비해야 할 것….

그때 시야가 빙글 돌았다. 바로 앞에 있던 김석환은 어디 가고 천장이 눈앞에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분간도 못 하겠는데 누군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들고 정면을 보니 김석환이 자신의 목을 쓰다듬고 있었다.

“어…. 미안. 내가 생각했던 게 이게 아닌데.”

그러며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분명 네 깨달음을 감안하고 힘에 제약을 뒀어. 그런데 그 살벌한 기운은 또 뭐지? 그 검술은 뭐고. 아니야. 그렇다 해도. 아! 설마, 그 짧은 순간에 또?”

김석환이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아무런 핀잔도 오고가지 않았다. 대신 모두의 시선에 내가 있었다.

“성장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되니까 재능이라는 거다. 이런 걸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흔할 리가 없지.”

“그보다, 방금 그 검술은 뭐였지?”

“분명 느려 보였는데. 부드럽기도 했고.”

“느려 보였다고? 진짜 알못이네 이거.”

그러며 자기들끼리 다투기 시작한다. 이건 어쩌고 저건 어쩌고. 내 검술, 아니, 청운적하검법에 대한 분석이 단번에 이루어졌다.

“수준과 별개로 개안되는 기분이야. 팀장님! 다음은 접니다.”

급기야 자신과 비무해야겠다며 근질근질하다는 얼굴로 튀어나오는 근거리 딜러도 있었다. 김석환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말리지도 않는다.

“생각해보니까. 네 성장 속도라면 꼭 굳이 하나를 포기할 필요 있을까? 그냥 앞에 있는 것들을 다 썰어버리면 되잖아. 전략? 그거야 힘이 없을 때 이야기고.”

하며 아까와는 180도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넌 그렇게 해라.”

***

“활을 가르쳐 달라?”

내 건방진 말에 김석환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히려 가르칠 게 생겼다는 듯 좋아라 하면서.

“가슴은 집어넣고. 그래, 이미 했네. 시위는 저울에 추를 걸듯 항상 중앙…, 음. 뭘 알려달라는 거지?”

느낌대로 잡아본 활에 김석환이 볼멘소리를 했다. 마나의 흐름도 그랬다. 오러 블레이드를 연마한 이후, 이런 식의 응용도 가능할 것 같았다.

시위를 놓은 순간이었다. 오러를 머금은 화살이 표적을 찢어놓는다. 직후 거센 충격음이 연무장을 뒤덮는다. 더불어 예상했던 메시지도 함께.

[스킬 획득! : 중급궁술(B)!]

다룰 수 있는 무기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 전주에 가기까지 열흘 남짓한 시간이 남았다. 그 안에 A팀의 골수까지 뽑아먹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훈련에 임했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먼저 부탁해도 모자랄 판에 왜 이리 적극적으로 나를 도와주는 것이지?

아무리 한솥밥 먹는 사이라 해도 그렇지, 그들은 자신의 비기를 아낌없이 꺼내놓는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심지어 까마득한 후배인 내게 평가까지 바란다.

그들의 숨김없는 모습에 나도 편안함을 느낀 듯했다. 서슴없이 의문에 관한 것을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묘했다.

“다른 놈이었으면 절을 백번 받아도 모자랐을 테지만. 너처럼 바로 응용까지 하는 녀석이라면 오히려 가르쳐 주는 입장이 더 얻는 게 많은 법이지. 특히나 네 배꼽에서 시작되는 마나의 흐름은 나도 배울 정도니까. 어떻게 한 거지? 느낌 말고 방법을 알려줘.”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려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듯 정철규의 표정이 덤덤하다.

“방법이라뇨.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났다고 했을 뿐인데.”

일성을 떠나야 하는 입장이다. 정을 주지도, 받지도 말아야 하는데 이런 농담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무의식 간에 그들을 완전히 동료라 인식한 것이 틀림없었다.

정을 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래서는 안 되지.”

만약 참사의 원인이 내게 있다면 나 하나로 끝내는 게 옳다. 다른 사람까지 휘말리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됐고.

문득 달력을 봤다. 그것과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알림이 울린다. 이틀 후 이 시간에 던전에 들어가야 한다.

허나 아직까지도 ‘그것’이 별다른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마치 나를 믿는다는 듯.

“과정은 역시 알려주지 않는 것이냐?”

나름대로 전주의 던전과 관련된 정보를 찾으려 했다.

“합법은 아니고.”

협회 사이트를 뒤져봐도 전주와 관련한 어떤 것도 나오는 게 없었다. 지금쯤이면 공시가 뜨고도 남을 시간인데. 그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협회도 모르는 일이다? 보름 안에 부수고 나와야 하는군.”

가능할까?

단순히 D급 던전이라면 지금의 나로서는 하루도 필요하지 않을 테지만. 그것이 준비한 기연 속에 어떤 장치가 숨어 있을지 몰랐다.

D급이라 얕봐서는 안 된다. 어떤 것이 튀어나오든 상당한 고난이 있을 것임은 예지를 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 가지 더. 내가 허락한 이후, 김주현과 홍주연은 참 열심히도 나를 홍보했다. 덕분에 인터넷에 내 이름만 쳐도 주르륵 내 얼굴이 뜨는 지경이었고. 알 사람은 안다는 뜻이다.

함부로 몸을 움직이기에는 리스크가 컸다. 다른 것에 앞서, 얼굴을 변장시킬만한 아이템이 필요했다.

“역용주.”

당장 떠오르는 게 있었다. 잠시 동안 얼굴은 물론이고 체형까지 바꿔준다는 술. 당연히 불법이다.

“뭐든 걸리면 감옥행이야. 할 거면 차라리 확실하게 하는 게 낫지.”

오대산 때와 비교해도 대범해진 나였다. 거리낄 게 없었다. 마찬가지로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뒷골목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임한나와 함께 들어갔던 술집이었다. 나무로 된 문을 걷어찬 즉시였다. 살벌한 눈빛이 여기저기서 쏟아진다.

그것도 잠시.

“어, 어? 너!”

가장 끝에 있던 털보 하나가 나를 보고 기겁한다. 기억난다. 한 달 전쯤, 녀석의 동료들을 교육해준 적이 있었다.

이 중에 그 녀석들이 있었을까. 죽일 듯 나를 노려보던 녀석들의 동공이 좌우로 흔들거렸다.

“너희들에겐 볼 일 없다. 가서 화이 불러와.”

녀석들의 대장이 분명 그 이름을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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