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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45화 (45/170)

45화 청운적하검법 (3)

이태진이 협회 성문을 나간 직후였다. 손현욱이 곧장 협회장을 찾아갔다.

“어떻게 됐습니까?”

조마조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조만간 제 발로 찾아올 것이다.”

실패했다는 말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설마 충무공의 검을 받고도 그랬다는 말입니까?”

“그럴 리가. 그것은 놈이 들어온다고 약속한 후에나 쥐어줄 것이다. 지금은 청운검법만 해도 충분하다. 그것도 불완전한 것이고.”

“불완전이요?”

“핵심 구결만큼은 보여주지 않았어. 그것만으로는 아무리 놈이라 해도 검법을 완성시킬 수 없다. 제 발로 찾아온다 하지 않았느냐. 청운검법의 가치를 대번에 깨닫더구나. 지금쯤이면 몸이 근질근질할 테지.”

그나마 약간은 안심이 된다는 표정으로 손현욱이 이어서 말했다.

“그렇다 해도 그렇습니다. 아직 도장도 찍지 않은 놈에게 주기에는 너무 과분한 것이었습니다.”

“쯧쯧. 손현욱. 당근도 채찍도 줄 거면 확실하게 주라 했지 않느냐! 보아하니 네놈은 큰 인물 되기는 글렀다.”

그게 아니라는 듯 손현욱이 더욱 협회장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다급하게 말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벌써 협회 곳곳에서 말이 돌고 있습니다. 감찰과 소속 정예가 신출내기 헌터 한 놈한테 탈탈 털렸다고, 그런데 그걸 갚아주기는커녕 놈에게 잔뜩 선물만 안겨서 보냈다고. 치적 리스크가 큽니다. 놈을 그대로 보내면 안 됐습니다.”

하지만 손 회장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울 뿐이었다.

“생각은 네놈만 하는 줄 알지? 무지렁이들이 하는 말 따위는 신경 쓰지 마라.”

“가문을 위해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틈만 나면 회장님을 위협하는 놈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외인에게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가는 것은 분명 문제의 소지가 다분합니다. 여기에 충무공의 검까지 쥐여 준다면 놈들이 먹잇감으로 삼지 않을 리 없습니다.”

아들의 말을 들은 손 회장이 마치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먼 곳으로 이동했다. 아득한 과거를 헤집는 손정연의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S급의 검술 재능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성요한 고놈이 종적을 감춘 지 너무 오래됐어. 그러니 잡것들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것이지. ‘재능’이라 이름 붙은 특성이 등급도 S급이다. 가만히 놔두기만 해도 능히 대성할 놈이야. 척을 지는 게 더 위험하다는 말이다.”

“위험이라 하셨습니다. 훗날 놈이 회에 위협이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습니다.”

“방금도 말했거늘! 당근도 채찍도 확실하게. 때가 되면 놈은 반드시 죽는다.”

“그게 언제입니까?”

자신의 아들이 평소와 달리 이리도 조급해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비각성자인 아들의 눈에도 보였던 것이다. 이태진 그놈의 무한한 잠재력이. 그랬기에 인자한 미소를 띨 수 있었다.

“네놈 아들의 무력이 무르익었을 때. 영혁이가 뭐라더냐. 당장 폐관에라도 들어간다고 하지 않던?”

“…….”

“끌끌. 아들 사랑하는 네놈 마음이야 나도 이해한다만, 걱정 말고 기다려라. 어디 페이스 메이커가 완주해서 될 일이더냐. 충무공의 검도 그때 회수하면 될 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때까지 살려뒀다가 무슨 일이 생길 줄 안단 말입니까.”

그러자 손 회장은 걱정 말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놈이 회에 들어오는 즉시 세뇌마법을 걸어놓을 셈이다.”

“못 들으셨습니까? 어제 성문을 들어오는 즉시 감지마법을 파악한 놈입니다.”

“그래서 뭐. 인도의 땡중 한 놈이 내게 빚이 있다. S급의 세뇌마법이면 알아챈다 해도 벗어날 방법이 없지.”

그러던 손정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튼 웃기는 놈이란 말이지.”

“왜 그러십니까?”

“주겠다는 플레티넘 박스를 거절하고 골드박스를 받아갔어. 그것도 자기가 보고 골라야겠다고 하면서. 마치 뭔가를 찾고 있는 눈치였단 말이지.”

“놈이 박스 안의 내용물이 뭔지 안다는 말입니까?”

그런 능력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게 사실이면 S급의 검술 재능보다 더 위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당장 죽여도 할 말 없을 만큼.

“곧바로 진실의 수정구에 손을 대게 했다. 안의 내용물을 알고 있느냐고.”

한 달에 한 번, 진실과 거짓을 판별시켜주는 보구를 말하는 것이었다.

“놈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어. 제 딴에는 빚을 지운다는 기분으로 그런 것이겠지. 어쨌든, 이 일은 영혁이는 모르는 일로 해야 할 것이야. 고놈이 또 순수한 면이 있지 않냐. 쯧.”

“…예.”

말만 들어보면 완벽한 계획이 따로 없다. 방심 따위도 없다. 애송이 하나를 위해 S급 마법사까지 준비한다는데. 또한 성공만 하면 가문의 입지는 무소불위의 영역이 될 것이었고.

손정연이 단언한 일 가운데 계획대로 되지 않은 일이 어디 있던가. 이번 일 또한 그럴 것이다. 애송이 하나 구워삶는 것쯤이야.

그런데 왜일까.

손현욱의 마음 한편에서 불안감이 끊이질 않았다. 어제 놈의 눈빛을 보고 난 이후부터 그랬다. 꼭 화근이 될 것 같은 기분.

과한 걱정이겠지.

손현욱이 고개를 털었다.

***

협회를 빠져나온 즉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직전까지도 간담이 서늘했다. ‘그것’이 미래를 보여주는 척 내게 미션을 던졌다.

협회 창고 안 깊숙한 곳에 있는 골드박스 중 하나를 가져오라는 임무였다.

준다는 플레티넘 박스 대신 골드박스를 받아야겠다고 했을 때 협회장의 서슬 퍼런 눈빛이 생각났다.

눈치 빠른 노인네가 하얀색 구슬에 손을 데라고 했을 때는 심장이 얼마나 쿵쾅댔던지.

그나마 청운적하검법에 대해 묻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래서 이 안에 있는 건 뭐지?”

협회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곳이었다. ‘그것’에게 물어봐도 돌아오는 답이 없다.

이 골드박스는 애초부터 놈의 계획 속에 있었던 게 분명했다. 놈이 보여주는 환상 속의 내가 전주의 D급 던전 안에서 이것을 뜯고 있었으니까.

놈이 굳이 장소와 시기까지 지정해준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제는 기대될 지경이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준비했길래 이렇게나 난리를 치는 것인지.”

내게는 절대자로 보이는 협회장보다 위에 있을 ‘그것’이었다. 대체 이놈의 정체는 뭐고 목적은 또 뭘까.

문득 협회장이 말한 SS급 각성자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또 시작이군.”

되먹지도 않은 추측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곧장 일성의 본사로 향했다.

의무는 아니었지만 신의의 문제였다. 협회가 나를 원한다는 사실을 일성이 모를 리 없다. 그만두기 전까지 괜한 미움을 살 필요는 없으니까.

[지금 본사로 가고 있습니다.]

A팀의 단체대화방에 그 말을 올린 직후였다. 휴가철임에도 불구하고 채팅이 쏟아졌다. 하나같이 지금 당장 본사로 가겠다는 말이었다.

한둘이 아니다. 그쯤 되자 안 오는 사람을 세는 게 더 빠를 지경이다.

몬스터와 생을 함께하는 각성자라 그런 걸까. 우리들은 삶의 낙이란 게 별로 없다.

아직 신입사원 딱지를 못 벗은 놈이 협회 감찰과 과장과 한판 붙었다는 말은 충분히 흥미가 돋을만한 주제였다.

“또 뭔데.”

시끄러운 채팅창의 알림을 끈 이후에도 휴대폰의 진동이 끊이질 않는다. 뭔가 했더니 김주현이 보낸 문자였다.

[말씀하신 대로 게이트 보상안으로 나온 금액은 모두 유가족분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이와 관련한 기사 첨부해 드립니다.]

아무리 최소한의 피해로 막았기로서니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발생한 희생자가 있었다.

그중에는 나처럼 부모 잃은 어린아이도 있었고.

그들의 마음을 그깟 돈 몇 푼으로 달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내 나름대로 부채의식을 덜어내는 일이었다.

꼭 일성의 참사 때문이 아니더라도 내가 강해져야 하는 이유였다. 그래야만 희생자 없이 모두를 지킬 수 있다.

“내 코가 석 자다.”

한숨을 쉬며 보내준 링크를 따라 들어가자 포털의 메인에 대문짝만하게 걸린 기사가 보였다.

[서울역의 영웅 이태진, 게이트 사태 유가족들에게 남몰래 기부한 것 밝혀져….]

이들을 내 목적을 위한 수단에 써도 될지 고민이 많았다. 이런 건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그럼에도 이런 논조의 기사를 허락한 까닭은 결국 이름을 알려야 하는 게 내 처지였기 때문이다.

꼭 강해질 수 있는 기회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사이비 교주나 전체주의자 따위는 아니겠지만 훗날 내 세력을 구축할 날이 올 것이다.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도 개인보다는 단체가 유리하기 때문에.

단체의 규모가 클수록 대중들의 관심을 사게 되는 법이다. 그들의 호감을 얻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씁쓸한 감정은 어쩔 수 없었던지 일성 본사 앞의 유리문에 비친 내 얼굴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쓰게 웃으며 문을 연 직후였다.

“어떻게 됐어!”

“쉿! 일단 조용한 데로 끌고 가.”

“아차! 오케이, 오케이.”

기다렸다는 듯 A팀 무리가 대기하고 있었다.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그들이 나를 잡아챈다.

반항도 할 수 없었다. A급 헌터들의 힘을 받아내기에는 아직 한참이나 모자랐다. 그들의 연무장으로 끌려간 직후였다.

“이제 말해도 되지? 어떻게 됐어!”

“맞아. 어떻게 됐니?”

“현기증 날 것 같아. 빨리 말해줘!”

“표정만 보면 이긴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손영혁이다. 팀장님이랑 붙어도 장담 못 해.”

그 말에 흥분하는 와중에도 팀장이 발끈했다.

“이 새끼가 날 뭘로 보고! 손영혁 그놈 순 혈연빨이야! 거품 걷으면 나한테 잽도 안 된다고!”

“잔뜩 제한하고 겨룬 비무겠지? 그래도 진 건 당연한 거고. 근데 뭔가 너라면 보여줬을 것 같기도 하단 말이지.”

나야말로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미리 보고하지 않아서 죄송하다 하고 먼저 사과할 생각이었는데.

김석환을 쳐다보니 빨리 말하라며 애꿎은 바닥을 차고 있었다. 그런 것은 애초에 염두에 뒀던 것도 아니라는 듯이. 걱정했던 것이 무색했다. 잠시 후 목을 가다듬은 후, 비로소 답했다.

“뭐, 한 방 먹인 것 같기는 합니다.”

디테일한 부분은 협회와의 관계를 위해서도 함구해야 했지만,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잔뜩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멱살을 잡던 녀석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데 그 말로도 충분했던 걸까.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반응도 가지각색이었다.

박장대소를 터트리는 것부터 흥미롭다는 시선, 그 옆으로 눈썹을 찡그리며 그럴 리 없다며 의심하는 모습까지.

“한 방 먹여? 이거 진짜 웃긴 녀석이네.”

정철규가 웃음을 터트리며 내 어깨를 찰싹거렸다. 생긴 것이나 매체 속 인터뷰에서 봤던 귀공자의 모습은 어디 가고 어째 볼 때마다 푼수 같은 모습을 보여 준다.

“자세한 내용은 말해줄 수 없다는 거지?”

그런데 눈치는 또 빨랐다. 한마디 속에 진의를 알아채고 더 캐묻지 않는 모습이 노련하다.

“기세도 달라졌어. 더 깊고 진하게. 협회 안에서 뭔가 얻은 거구나?”

윤진아가 흥미로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디테일한 내용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어도 대번에 달라진 마나의 깊이를 느낀 것이다.

다시금 느끼지만 나를 살린 건 순전히 협회장의 방심 때문이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었더라면. 어우, 다시 생각해도 아찔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옆을 보는데 김석환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부담되는 눈빛으로.

그러면서 위아래로 나를 훑는데 마치 맛있는 음식이라도 앞에 둔 표정이었다.

이 사람 갑자기 왜 이래?

“늙은 여우가 귀한 영약이라도 주던? 아니야. 소화 시키기에는 시간이 짧아.”

기막히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그새 깨달음을 얻었구나. 철규랑 붙을 때부터 느꼈지만 스펀지 어쩌구 하던 게 사실이었어.”

그러더니 갑자기 눈을 빛내며 서서히 내게 다가온다.

“한석훈 그 양반 오기 전에 나도 스펀지에 물 한번만 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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