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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43화 (43/170)

43화 청운적하검법 (1)

협회장의 검무가 이어질수록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협회장의 말이 맞았다. 대구궁진법은 생각이 안 날 정도로 몰입됐으니.

온 세상이 까맣게 변하고 연무장의 협회장만 홀로 빛나고 있었다.

부드럽다? 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무섭도록 차갑고 비정한 칼이 그 안에 숨어있었다.

느릿하게 보이는 일격이라 우습게 보고 다가갔다가는 순식간에 격살당할 터. 잠시나마 자만했던 마음이 단번에 씻겨 내려갔다.

하늘 위의 하늘. 그곳에 협회장이 있었다. 개안한 기분이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찾아왔다.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청운적하검법(F) : 간절히 바랐지만 닿을 수 없는 손정연의 마음이 담긴 검술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한 손정연의 정수가 담긴 기술입니다.]

[스킬의 숙련도가 매우 낮습니다.]

청운적하검법. 손 회장이 내게 보여주고 있는 검술의 이름이었다. 시스템 메시지만 보자면 그랬다.

손정연이 만들어낸 검술이 스킬로 구현된 것 같은 설명이었다. 초고수의 경지란 이런 것일까.

스킬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협회장쯤 되면 이런 일도 가능하다는 건가?

시스템의 숨겨진 기능 중 하나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놀랍지는 않았다. 미래도 보는 판에 스킬 만드는 게 뭐 대수라고.

정면을 바라봤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검무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청운적하검법을 알고 다시 보니 또 새로운 게 엿보인다.

직접 사용해 봐야 알겠지만 단연코 F급 스킬은 아니다. 무려 손정연의 정수가 담겼다고 하니.

숙련도를 높이면 어디까지 성장할지 상상이 안 된다. 최소한 A급. 혹은….

아직 얼떨떨해서 실감 나지 않을 뿐, 엄청난 기연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브론즈 박스에서 A급 스킬을 얻은 것만큼이나 굉장한 일이었다.

그때 손정연이 멈춰 섰다.내가 생각에서 빠져나온 것도 그때였다. 그러고 보니 얼빠진 얼굴을 한 채였다. 내 모습을 본 협회장이 희미하게 웃었다.

“뭘 보긴 했나 보구려. 말했지 않았나. 대구궁진법보다는 이게 나을 것이라고.”

“감사합니다.”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인사는 당연했다.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터. 시간을 두고 천천히 복기해 보게. 분명 큰 도움이 될 테니.”

“이런 선물을 받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선배님.”

선배로서 보여준 것이라 했기에 똑같이 되돌려 준 것뿐인데 여기저기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야말로 내 검을 알아봐 주니 고맙지.”

어찌됐든 훈훈한 분위기다. 이대로가 딱 좋겠다 싶었다. 얻을 건 다 얻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다가는 또 무슨 사고가 터질지 몰랐다.

“좋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럼….”

“으음? 선물이라니. 아직 답례는 하지도 못했는데. 영혁아. 손님을 모셔라. 몸이 더러워졌을 테니 일단 씻는 게 좋을 테지.”

거절도 못 할 만큼 단호한 목소리였다. 청운적하검법만으로 충분했는데. 심지어 스킬로 체화되기까지 했는데.

생각해보니 오늘 이곳에 온 이유가 게이트 사태의 보상안 때문이었다. 고민하던 것도 잠시, 준다고 하는데 안 받는 것도 이상했다.

내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기도 했고. 고개를 끄덕이자 손영혁이 나를 안내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아까부터 손영혁이 극진하게 나를 대하고 있다. 놈의 연기가 우스울 따름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김석환이 내게 존대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상황.

‘잠시만. 그러고 보니. 김석환. 김석환?’

후다닥 휴대폰을 열었더니 부재중 전화만 열 통이 넘게 와있다. 김석환뿐만 아니라 정철규와 윤진아의 이름까지 찍혀있다.

메시지 함도 불이 나 있었다. 싫다고 몇 번이나 거절했음에도 억지로 초대한 단체대화방은 더 가관이다.

[김석환 : 살았냐, 죽었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정철규 : 누구랑 비무를 한다고요? 손영혁? 와, 그 양반 장난 아닌데.]

[윤진아 : 태진. 그 사람 협회장 손자인 건 알고 있지? 꼭 이겨라. 본때를 보여줘.]

[정철규 : 안 되겠습니다. 당장 협회로 출발하시죠. 팀장님은 걱정되지도 않습니까?]

[김석환 : 가만있어, 인마. 나도 기다리는데 네가 뭔데 나서?]

[정철규 : ㅗ]

[김석환 : ?]

[정철규 : 옆에 고양이가 잘못 눌렀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화로 사정을 설명하기에는 말이 길어질 게 뻔했다. 더군다나 A팀의 불같은 성격으로 볼 때 당장 이쪽으로 튀어올지도 모르고.

걱정 마시라는 말만 남기고 휴대폰을 끄려던 차였다. 이번엔 다른 대화방이 난리였다.

[김세린 : 오빠. 지금 뉴스에 뭐라고 나오는 데 이거 뭐예요? 서울역의 영웅 이태진?]

[전용철 : B급 게이트 참사를 막았다는데. 설명 좀.]

[김세린 : B급 게이트라니. 상상도 안 가요. 아 참, 요즘 그런 말도 돌던데. 오빠 A팀으로 부서 이동한다고. 진짜예요? 엊그제 김석환 팀장님이랑 한 판 붙었다는 소문도 돌고.]

[박하영 : 와우, 이겼대? 그나저나 넌 그런 소문은 대체 어디서 듣는 거냐?]

[임한나 : 김석환 팀장님? 진짜야??

[김세린 : 오빠 우리 버려요? 진짜?]

[이지은 : 헉!]

요즘 하도 정신없이 살다 보니 이곳을 잊고 있었다. 당연히 먼저 말해줬어야 했는데.

[나 : A팀 안 감. 나중에 다 설명해줄게.]

일단은 그렇게 문자를 보내놓고 정면을 바라봤다. 손영혁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네놈에게 감탄했다는 말은 진짜다.”

둘만 남은 공간이었다. 녀석이 곧바로 반말을 지껄였다. 그럴 줄은 알았는데 바로 본색을 드러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검은.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군. 그래. 내 검술을 훔쳐간 것은 더 이상 추궁은 하지 않겠다. 나도 새로운 길이 보였으니. 하나씩 주고받은 셈 쳐야겠지. 대신.”

녀석이 얼굴을 구기며 말을 이었다. 마치 잠시나마 자존심을 내려놓은 듯했다.

“언젠가 다시 한번 비무를 요청할 일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오늘 있었던 일을 반대로 돌려주마. 치욕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녀석은 내 허락도 구하지 않았다. 협회라는 장소와 녀석의 직책을 생각했을 때 뭐라 말하기도 애매해서 가만히 있었더니 요상한 눈빛을 보내며 다시 길을 안내했다.

협회에 찾아온 손님을 위한 전각으로 보였다. 고급스러운 침구류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벽에 걸린 그림과 도자기, 조명이 그다음이었다. 하나같이 비싸 보였다.

“오늘은 여기서 쉬시면 됩니다.”

사람이 보는 곳이라면 놈은 다시 가면을 썼다. 실로 놀라운 연기력이었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침대 옆 벨을 누르라는 말과 함께 손영혁이 떠나갔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낯선 곳인데도 침대에 누우니 잠이 솔솔 온다.

***

다음날이었다. 손영혁이 직접 나를 마중 왔다. 아침 먹자고. 아직도 공손한 투는 여전했다.

고려정이라 적힌 전각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차려진 음식이 우리를 기다렸다.

이곳은 어딜 가나 명품밖에 쓰질 않나 보다. 고풍스러운 한식집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음식도 그랬다.

“밥은 입맛에 맞습니까?”

완벽하게 차단된 공간이 아니라면 이렇듯 녀석은 말을 높여온다. 볼수록 웃긴 놈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장조림을 비롯한 간단한 밑반찬들뿐인데 하나같이 정갈하다. 집에 싸가고 싶을 만큼.

“기가 막히네요.”

어제까지 멱살 잡고 싸우던 양반이랑 마주 앉아 밥 먹는 게 어색해서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손영혁이 벌떡 일어나더니 문을 박차고 나갔다 돌아왔다.

“댁으로 넉넉하게 보내놨습니다. 또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말씀하시면 됩니다.”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었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차까지 얻어 마신 후, 정신을 차리자 협회장의 집무실 문 앞이었다.

협회장의 집무실은 성안 쪽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희한하게 전각의 크기도 가장 작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가사도우미가 자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소박한 공간이었다.

“저 혼자 들어갑니까?”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협회장과의 독대라. 청심환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싶다. 아닌가?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최태성을 만날 때처럼 긴장되지는 않았다. 협회장이 최태성보다 아래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일들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문을 열었다. 외관과 어울리는 테이블이 앞에서 나를 반겼다. 상석에는 손정연이 앉아 있었고. 화려한 최태성의 방과는 180도 다른 취향이었다.

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같았다. 최태성과 눈을 마주쳤을 때처럼, 손정연의 묵색(墨色) 빛 동공을 바라보자 빨려 들어갈 것처럼 깊은 힘이 느껴졌다. 짐작도 되지 않는 강자의 기세였다.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최태성과 이 양반이 맞붙는다면 누가 이길까. 혹은 일 장로 그 마녀와 싸운다면?

인터넷에서 떠도는 유치한 말장난을 하자는 게 아니다. 내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아직까지 한석훈의 경지조차 까마득할 따름인데, 그 한석훈을 일격에 죽인 놈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일성을 그만둔다 해도.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할 것이다. 일 장로도, 참사의 범인도.

“앉게.”

협회장이 인자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손자가 누구에게 가면 쓰는 법을 배웠겠는가. 방심해서는 안 됐다. 자리에 앉자마자였다.

“영혁이가 실례가 많았어. 다시 한번 사과하지.”

“아닙니다.”

멱살 한번 잡힌 것 치고받은 게 컸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자 협회장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말을 이었다.

“보는 눈이 많아 어제는 말하지 못했지만. 청운적하검법. 자네라면 얻었을 것이야.”

“…예.”

“그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도 알 테고.”

“예.”

“왜 준 것 같나?”

“대구궁진법의 대가였습니다.”

협회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깟 내기쯤이야 엎어버리면 그만인 것을. 이곳이 어디인지를 기억하게.”

손가 특징인가. 둘만 남으면 이렇게 노골적으로 본색을 드러내는 게. 다만 손자와는 달리 협회장은 여전히 은은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절대자의 얼굴에서 의중이 읽히지 않았다.

“제가 협회에 들어오길 바라십니까?”

“반은 맞았네. 최태성 고놈이 준 쇳덩이보다야 아무렴 내 것이 낫지.”

헬리오스의 심장을 그런 식으로 빗대어 표현한다. 가상의 저울에 청운적하검법과 헬리오스의 심장을 달아봤다. 쉽사리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두 가지 모두 지금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나는 봉인되고, 나머지 하나는 F등급으로 표시되는 것만 봐도 그랬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문득 깨닫는 것이 있었다.

“제가 입회할 것을 확신하시는군요.”

“왜 아니겠는가. 불완전한 것과 완전한 것 사이에는 넘볼 수 없는 차이가 있는데. 내가 선물을 준 것 같은가? 아닐세. 그 반대야. 청운적하검법의 핵심은 자네가 회에 들어와야만 얻을 수 있어.”

음?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청운적하검법보다 더 위의 것을 준비해 놓은 게 아니었나? 나도 모르게 표정을 드러내고 말았나 보다. 협회장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경황이 없었나? 상태창을 열어보게. 스킬명 옆에 분명 그리 적혀 있을 것이니. 불완전하다고.”

[청운적하검법(F) : 간절히 바랐지만 닿을 수 없는 손정연의 마음이 담긴 검술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한 손정연의 정수가 담긴 기술입니다.]

불완전? 비슷한 글자도 안 보인다. 아차 싶었다. 당장 표정을 바꿨다. 잔뜩 심각한 얼굴로.

“이제 발견한 모양이군. 그래. 불완전한 청운검도 분명 자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지만, 자네라면 알 수 있을걸세. 완전한 청운검이 어떤 위력을 발휘할지. 눈에 훤해. 자네가 그것을 완성시키려 발악하는 모습이.”

내가 멍청했다.

하기야, 자신의 비기를 그렇게 쉽게 줄 리가 있나. 협회장이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와 동시에 깨달았다. 이걸 들키면 큰일이고,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고.

“확실히. 지금의 제가 파훼할 수 있는 검술은 아닙니다.”

생존본능 때문일까.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내 입에서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온다. 패배감에 젖은 얼굴은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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