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대한민국 각성자 협회 (4)
협회장 손정연이 바로 앞의 청년을 바라봤다. 이제 막 헌터 세계에 입문한 애송이면서도 가진 잠재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방금 전, 손자와 녀석이 격돌한 것을 봤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기에 아끼는 손자가 혼이 나간 것이 이해가 갔다.
30대의 나이에 협회 수뇌부에 앉은 영혁이다. 성골이라 그렇거니 치부하던 것들은 손자의 검에 모두 쓸려나갔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앞으로의 미래는 더 창창할 것이었다. 그 정도로 영혁의 재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런데 아직 꽃피우기도 전인 손주의 재능이 무참히 짓밟혔다. 그것도 아카데미를 갓 수료한 녀석에게. 단 삼 합만에.
그 심정은 같은 각성자만이, 또 한때 살리에리로 불린 손정연만이 이해할 수 있었다. 압도적인 재능의 차이를 목격한 것이다. 그 옛날 자신이 성요한에게 겪은 것처럼.
손정연은 그것이 안타까우면서도 기꺼웠다. 자신이 계획했던 일에 차질이 생겼지만 영혁의 마음에 호승심을 불러일으켰다면 그것으로 됐다. 그것을 발판삼아 강해지면 된다.
‘매너리즘에 빠질 틈도 없겠지.’
이 일로 인해 자신의 손자는 앞으로 수련에만 매진할 것이다. 이태진이 쫓아오지 못하게끔 말이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이태진이 기어코 따라잡고 말 테지만.
‘그때는 권력으로 찍어눌러라. 너는 그럴 수 있다. 그렇게 만들 것이고.’
훗날 협회장에 올라서야 할 손자이다. 그 정도의 기백은 있었고, 있어야만 했다. 자신이 일선에서 물러난 후의 미래가 그려졌다. 협회장에 올라선 영혁과 영혁을 지키는 검, 이태진.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호령할 만하다.’
그렇기에 애송이 헌터에게 이 자리에서 보여줘야 한다. 협회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를. 원래 계획대로 정신 못 차릴 만큼 선물을 한 아름 안긴 다음 도장을 찍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구궁합진을 공개한다? 그것도 협회의 인사도 아닌 자에게?
“불가능하다.”
자신의 입에서 대번에 반말이 튀어나왔다. 아까와는 눈빛도 달랐다. 자신의 위치를 생각했을 때도 이게 자연스러웠다.
손자를 보는 눈도 달라졌다. 장차 자신의 뒤를 이을 녀석이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앞의 애송이가 돌아가면 단단히 혼을 낼 것이었다.
“다른 것을 원한다면 내가 주겠네. 그러나 대구궁합진만큼은 안돼.”
대구궁합진.
협회가 자랑하는 최고의 합공진이다. 단언컨대, 자신이 합세한다면 누가 됐든 그 자리에서 죽는다. 그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합공진이다.
보안의 중요성은 말해 무엇할까.
더군다나 손자의 검술을 훔친 것도 모자라 단번에 개량까지 한 녀석이다. 대구궁합진이라고 다를까.
만약 녀석이 합진의 비밀을 풀고 세간에 그것을 퍼트리기라도 했다가는.
다시 생각해도 안 된다. 이태진에게는 더더욱.
“협회의 감찰과 과장으로서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이해할 수가 없군요. 아닙니까. 손영혁 과장님. 약속한 것을 주십시오.”
이태진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S급의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자신이 대놓고 호감을 보였다고는 한들.
이곳이 어떤 곳인 줄 알고 아까부터 이리도 막나가는 것일까. 최태성이라 할지라도 협회 본성에서 이럴 수는 없는 법이다.
문득 얼마 전 올라온 이태진에 관한 보고가 생각났다.
[가진 힘과 잠재력에 비해 우유부단하고 제 능력을 확신하지 못한다. 또 유약한 성격과 정이 많아 보여 일성을 버리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해외로 이민갈 가능성도 매우 적다.]
보고서의 내용과 달리 지금 애송이가 보여주는 것은 확실히 우유부단이라거나 유약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잘못된 정보였던 걸까?
아니다. 협회장까지 올라온 문건인 만큼, 심도 있는 자료조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단지 이태진이 각성자로서 성장한 만큼 마음가짐도 그만큼 달라진 것이겠지.
손정연이 앞으로 나섰다.
“그대가 최근 보여준 행각은 헌터로서 매우 귀감이 됐다. 때문에, 협회에서도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하고 있지. 허나 지금은 선을 넘고 있어. 대구궁진법의 가치는 한낱 비무로 오갈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는 것쯤이야 뭐가 어렵다고. 이런 녀석들을 구워삶는 것쯤은 이골이 났다.
“플레티넘 박스. 자네의 공을 생각해서라도 이게 마지막 제안일세.”
쉽게 볼 수 있는 박스가 아니다. A급 각성자들이 목숨을 걸고 던전을 클리어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나온다 해도 B급 이상의 것일 터.
내기의 대가로 지불하기엔 이것도 과했지만 애송이와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더군다나 게이트 보상안을 산정하기 위해 이태진에게 플레티넘 박스를 지급하기로 했다.
플레티넘 박스 두 개.
그 정도라면 섭섭지 않을 것이었다.
“협회장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따라야겠지요. 알겠습니다. 대구궁합진은 포기하겠습니다. 플레티넘 박스또한 받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태진이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겉보기엔 그렇게 겸손할 수가 없었다. 손정연은 순간 헛웃음을 뱉을 뻔했다.
이것 봐라.
우유부단? 정이 많아?
집무실로 가자마자 그 보고서를 찢어 버릴 것이다. 이태진은 정치력으로서도 능구렁이가 다 됐다. 마치 뒤에서 누군가 열성을 다해 가르친 듯 언행에 거침이 없다.
이대로 이태진을 보냈다가는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따로 없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서 이리 나오는 것일 테지. 이런 식의 도발은 너무 오래간만이라 신선한 느낌마저 든다.
인정해야 했다.
이태진은 무력뿐 아니라 성정도 완숙한 단계에 올라섰다. 녀석을 우습게 보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아무리 그런다 한들, 대구궁진법을 내어줄 순 없네. 솔직히 말하지. 자네가 회에 들어온다고 약속만 해준다면 뭔들 아깝겠는가.”
“…….”
딱 잘라 거절할 줄 알았는데 이태진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연기라면 자신의 눈을 속일 수 없다. 실제로 이태진이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기회다!
그럴 나이가 아닌데도 심장이 두근댔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대가 대구궁합진을 찾는 이유를 알고 있다. 협회장으로서도 기쁠 일이지. 그만한 재능에 그만한 상승욕이라니. 대한민국의 미래가 실로 밝다. 그런 뜻에서. 협회장으로서가 아니라, 선배 각성자로서 선물을 주고 싶은데.”
“……?”
이태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구궁합진까지 갈 필요 없다. 그대가 원하는 깨달음은 내가 줄 수 있으니.”
협회장은 절대자들이 보여줄 법한 오만한 걸음걸이로 연무장에 들어서며 말했다.
“검 하나만 다오. 한 수 가르쳐 줄 테니.”
“회, 회장님!”
대번에 이곳저곳에서 반발이 튀어나온다. 지엄한 협회장의 말이었음에도 그랬다. 그만큼 그가 뱉은 말의 무게가 무거웠다.
듣기로는 그랬다. 협회장이 외부인의 환심을 사려고 자신의 검오(劍悟)를 나눠주려 한다. 더군다나 그 형태가 비무라니.
보고도 믿기 힘든 순간이었다.
그것은 손영혁이 보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찔했다. 차라리 대구궁진법을 알려주면 알려줬지 이럴 수는 없었다.
무릎을 꿇으라면 백번도 꿇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일이 너무 멀리 와버렸다.
동시에 후회됐다. 자신의 치기 어린 짓 하나로 이렇게 일이 커진 것이다.
“검술을 알려주시겠다는 말씀이신지.”
“만족할 것이다. 보고 판단하게. 과연 협회에 들어올 만한지, 아닌지.”
손정연이 마치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를 집듯 검을 들었다. 겉보기로는 기력이 쇠한 노인의 몸짓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가진 권력으로 보나, 무력으로 보나 대한민국의 최정점에 선 남자. 그 행동이 가벼울 리가 없었다.
“으음? 설마 이 늙은이와 비무를 하려고? 아서게. 아직은 일러.”
마치 손자를 타이르듯 그렇게 말하는데, 장내의 모두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단 한 사람, 이태진만 제외하고.
“속상해하지 말게. 자네를 위함이니. 이편이 자네에게 맞는 방법이야.”
검을 잡은 손정연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따라 손정연의 손에 담긴 검도 따라갔다. 나풀나풀 움직이는 그의 몸짓에 기품이 서려 있었다.
손정연의 검이 느릿하고도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우는 아이를 달래듯 도저히 살생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꿀꺽.
모두들 숨 쉬는 것마저 잊을 정도로 손정연의 동작에 집중했다. 감찰과의 힐러와 마법사도 마찬가지다.
초고수의 얼굴을 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헌데 초고수가 검을 잡고 무를 보여주는 것은 평생에 몇 번 없을 기회였다.
이태진에 대한 적대감과 별개로 다들 이 순간을 눈에 담듯 뚫어져라 손정연을 쳐다봤다.
비각성자인 손현욱이 봐도 그랬다. 자신의 아버지가 내뻗는 검마다 깊은 뜻이 담긴 것처럼 웅혼한 기운이 느껴졌다.
유려한 곡선이 그어졌다. 한번 움직일 때마다 태산 같은 존재감이 느껴진다. 노인의 몸이 분명한데도 넓은 연무장이 작아 보일 만큼.
‘이것이.’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만든 검술이라 했다. 겉보기로는 부드럽기 그지없었지만, 당신이 말하기를 질투와 한이 서린 검술이라고 했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뻔했다.
검신 성요한.
따라잡으려 발악했지만 끝끝내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성요한이 잠적한 지금에 와서도 손정연은 그를 놓지 못했다.
그래서겠지. 이태진에게 이렇게나 집착하는 이유가.
후웅!
성요한에게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시스템은 손정연의 공로를 인정했다. 청운적하검법이라는 스킬로서.
세간의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초고수의 반열에 이른 자들은 모두 자신만의 스킬이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손정연의 경우는 청운적하검법을 비롯한 몇 가지의 독창적 스킬이 그것이었고.
협회에 수십 년을 몸담으면서 느낀 바가 있었다. 시스템은 철저하게 강자들의 편이다.
함부로 의도를 추측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되지만, 보고 들은 것들이 그랬다.
강해질수록 강해질 수 있는 기회가 쏟아진다. 그 급류에 잘못 휘말리면 죽는 것이고, 살아남으면 아득히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그렇게 몇 번 체에 거르듯 거르다 보면. 소수의 강자 몇 명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가 되는 것이다.
바로 앞의 남자처럼.
부디 자신의 아들도 그렇게 되길 바라며 옆을 돌아봤다. 이 모든 사달을 만든 문책은 당연히 받아야 했지만 손영혁으로서도 귀한 기회였다.
자신의 아들이 거기서 뭔가를 얻어가길 바랐다. 조부를 바라보는 손영혁의 눈빛에 경외가 가득했다.
비각성자인 자신이 느끼는 것 너머가 보이는 것이겠지. 그런데 단계를 뛰어넘는 깨달음의 순간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런 순간은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이 겹겹이 쌓이고 쌓여서 어느순간 펑 하고 터지는 것이지.
그러던 문득.
고개를 돌렸다. 녀석. 이태진. 그 맹랑한 애송이가 두 눈을 부릅뜨고 손정연을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