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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40화 (40/170)

40화 대한민국 각성자 협회 (2)

“이태진 씨도 만족할 만한 상대일 겁니다.”

만족?

풍기는 기세부터가 나보다 강하다. 이제 막 B급에 들어선 나와는 달리 퍼지는 파동으로 짐작했을 때, 사내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서로 전력을 다한다고 해도 아슬아슬하게 내가 진다. 헬리오스의 심장과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감안해도 그랬다.

상대와의 격차를 정확히 아는 것도 실력인 법. 또한 내 실력이 조만간 앞의 남자를 따라잡을 것이 확실했기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스킬과 아이템의 제한을 두겠습니다. 또한 스테이터스도 150레벨로 상한을 두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날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해가 안 갔다. 전력으로 맞붙어도 한 끗 차이로 사내가 이길 것인데, 그 정도로 조건을 맞춰준다면?

아슬아슬하다는 것은 순전히 내 생각이었던 듯싶었다. 사내를 보는 손영혁의 얼굴에 신임이 가득했다. 협회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가장 믿을만한 자를 내보낸 것일 테지.

“몸 풀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손영혁의 명령을 받고 튀어나온 사내가 내게 말했다. 눈빛이 살벌하다. 방진 어쩌고 한 말을 담아두고 있는 듯했다.

“괜찮습니다.”

“그러시다면.”

사내는 단검을 쓰는 자였다. 손안에서 이리저리 단검을 굴리는 여유로운 모습과 달리 사내의 눈빛에 방심은 없었다.

혹시 몰랐다. 김석환에게 현재 좌표를 문자로 찍어 보냈다. 물론 이들이 나를 죽이기라도 하겠냐마는. 각성자의 세계는 그런 일도 일어나는 법이니까.

그런 생각과 함께 연무장을 굴러다니는 롱소드 하나를 손에 쥔 즉시였다.

“시작하시죠.”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감찰 1과 단원 김석환이라고 합니다.”

“…이태진입니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임에도, 그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나와의 거리를 재는 모습이 사뭇 신중했다. 꼭 이겨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엿보인다.

나도 자세를 잡았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지금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건지 싶어서. 잡념도 잠시, 뎅 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무가 시작됐다.

하수에게도 방심하지 않는 남자는 전투 스타일도 그와 비슷했다. 단검을 들었으면서도 일정 거리 이상을 다가오지 않았다.

그 뜻이 무엇이겠는가. 장기전으로 가겠다는 말이었다. 거기에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 내 목적은 그 뒤에 있었기에.

불현듯 몸을 날렸다. 남자의 눈이 부릅떠졌다. 순수하게 육체로만 다투는 싸움이다. 스킬도 빼고, 아이템도 뺐다. 스테이터스마저 동일하게 맞췄다.

그렇다면 기교와 경험만 남는데, 그것은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이었다. 한석훈에게 짓밟히던 나날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남자가 급격하게 거리를 좁히려 했다. 판단은 좋았으나 투로가 뻔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내게는 뻔하게 보였다. 순식간이었다.

“…졌습니다.”

짧은 번쩍임과 함께 내 검이 어느새 사내의 목 앞에 있었다. 단 한 합만에 승부가 결정됐다. 순간 장내에 정적이 흘렀다.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단원과 손영혁의 얼굴에 경악이 물들어있었다.

이쯤 되자 내가 더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내 파동만 파악해도 유추할 수 있었던 일 아니던가. 이것들이 단체로 날 속이고자 연기라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망상까지 이어질 무렵.

고개를 저었다. 다음 목적을 위해서였다. 그들을 도발하고자 입을 열었다.

“또 없습니까?”

내 생각보다도 효과가 좋았다. 한석훈이 그러기를, 내 능글거리는 얼굴이 그렇게 약오를 수가 없다고 한다.

이번에도 그런 듯싶었다. 대번에 감찰단원들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당장이라도 씹어 삼킬듯한 얼굴로 나를 보는데, 괜히 통쾌했다. 각성자를 대상으로 하는 그들의 합진을 보고 난 후라서 그런 것이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이번엔 여인 하나가 자신의 과장에게 허락을 구했다. 느껴지는 파동이 방금 전의 사내보다 약했다. 전력까지 가지 않아도 내 필승이다.

그렇기에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째선지 손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킬의 제한은 두되, 스테이터스는 그대로 둘까 하는데 어떠신지.”

그래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도리어 내게 더 유리할 뿐. 이쯤 되자 손영혁을 포함한 감찰반이 파동을 읽는 능력을 모르는 건가 싶을 정도다. 어? 그럴 수도 있나?

기세를 파악하는 능력 정도야 없을 리가 없지만. 나처럼 디테일하게 읽는 것까지는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 또한 축복 덕분에 개화한 능력이었으니까. 잠시 쓸데없는 생각이 이어진 가운데 종이 울린다.

뎅-

퍼억!

그 순간 내 주먹이 그녀의 복부를 강하게 타격했다.

“커억!”

그것으로 끝이었다.

당혹, 경악. 그런 것은 이제 없었다. 다만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단원들이 하나같이 손영혁을 바라봤다. 다음 차례로 자신을 꼽아달라고.

이대로 나를 보내면 안된다는 건 누구보다 손영혁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손영혁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눈이 가라앉았다. 드디어 깨달은 것이다. 동일한 조건으로 붙는다면 여기서 날 이길 사람은 없다는 것을.

그걸 이제서야 알았다는 뜻은 녀석이 김석환보다 밑이라는 증거였다. 김석환은 일검만 보고서 내 모든 것을 파악했으니까. 일성을 떠나야 하는 신세임에도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다음은 누굽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손영혁이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적당히 하라는 그만의 경고였다. 그런데 내가 바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손영혁. 놈을 불러내야 한다.

“없으시다면….”

손영혁을 바라봤다. 이제 그만 이동하자는 뜻을 담아서.

까드득.

손영혁이 이를 악다문 것도 잠시, 녀석이 바라던 제안을 걸어왔다.

“이거, 제가 오해를 해도 단단히 했군요.”

“제한한 게 많습니다. 전력을 다했다면 저의 필패였겠지요.”

그게 사실이었기에, 손영혁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끝끝내 참아낸 손영혁이 미소를 지었다. 다만 입매 끝이 떨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나 보다. 그 어색한 웃음은 안 짓느니만 못했다.

“겸손하시기까지. 다만, 이대로면 너무 아쉬울 듯한데. 혹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어떠십니까.”

이미 감찰과로서의 위신은 무너졌다. 그럼에도 나에게 이러는 것은 협회의 자존심 문제였다.

“글쎄요.”

하고 거절의 뜻을 밝히자.

“저는 어떠십니까?”

녀석이 마치 큰 아량이라도 베푼 듯 굴었다. 실제로도 그렇긴 하다. A급 헌터, 그것도 협회 감찰과의 과장이 비무를 도와준다? 넙죽 절할 인간이 한 트럭이었다.

단원들의 표정이 그와 동시에 일그러졌다. 자신들 때문에 손영혁까지 나서게 됐다는 걸 자책하는 듯이.

그럼에도 아무런 반발이 없는 것을 보니, 손영혁의 리더십만큼은 인정할 만했다.

“겨우 저 하나 때문에 과장님까지 나서야 되겠습니까.”

“…당연히 저 또한 스테이터스와 스킬을 봉인할 것입니다. 이태진 씨의 수준에 맞춰서.”

“흐음.”

아무래도 나는 천성이 연기자였던가 보다.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된다는 듯 턱을 매만지자 손영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원하시는 조건이라도 있으신지.”

과장직을 운으로 얻은 것은 아닌지, 그는 눈치가 빨랐다.

“아까 그 합진. 그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건!”

애초에 비무에 응한 것도 이것을 염두에 두고 한 일이었다. 미래를 알려주는 초능력이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그 합진 속에 내 깨달음이 숨어있다고. A급 헌터와의 비무보다, 그게 더 중요했다.

한편, 손영혁이 고민을 하는 시점에서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놈은 절대 거절할 수 없다. 당장 내일 이태진에게 협회의 감찰단 정예 헌터 두 명이 한 합만에 박살났다는 기사를 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게 되면 손영혁 개인의 입지까지 위태로워진다. 협회에 존재하는 이름 모를 라이벌이 반드시 그를 물어뜯을 테니.

일이 이렇게까지 번질 줄은 몰랐는지 손영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셰익스피어의 원숭이를 보는 눈빛. 녀석이 날 대하는 태도가 딱 그것이었다.

운으로 얻은 능력에 취했을 뿐, 아직 애송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마 녀석은 수하들을 시켜 전투센스만으로 나를 꺾은 후, 그런 식으로 말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런, 아무리 검신이라도 경험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나 봅니다.’

그런데 놈이야말로 검신의 축복을 무시했다. 그것은 아득히 벌어져 있는 세월을 메꾸고, 나를 천재로 둔갑시킨다. 손에 쥔 나조차도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추측이 안 될 정도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보라는 듯 턱짓하자, 손영혁이 치욕스럽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저를 이기셔야 합니다. 그러면 친히 보여 드리죠. 다른 것도 아니고 대구궁합진입니다. 이것만큼은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불가하다. 지금의 내가 손영혁과 싸우면 필패였다. 어떤 조건을 갖다 붙여도 똑같다.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손영혁과의 전투는 백이면 백 내가 쓰러지고 있다. 레벨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말대로 경험의 차이였다.

A급에 달하는 깨달음은 아직 요원했다. 그래서 대구궁합진인지 뭔지가 필요한 것이고. 다만, 녀석에게 수치를 당할 바에는 하지 않는 것이 맞았다.

녀석이 제 안위를 걱정하듯, 내 뒤에 있는 일성의 위신이 지금 내게 달려있다. 이쯤에서 멈춘다 해도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오히려 대단한 성과지. 홍주연과 김주현이 입을 쩍 벌리며 좋아할 게 벌써 눈에 훤했다. 그런 생각으로 발을 틀자, 녀석이 허겁지겁 말을 덧붙였다.

“이건 어떠십니까. 승패와 상관없이, 저의 인정을 받으면 이태진 씨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인정? 그게 무슨. 너무 추상적이지 않습니까.”

“감찰과장의 명예를 걸고 정직하게 판단하겠습니다. 또, 보는 눈이 있습니다. 이태진 씨가 어떻게 생각하건, 저도 그렇게 못난 놈은 아닙니다.”

손영혁이 뒤에 있는 자신의 수하들을 가리켰다. 나를 보는 그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했다. 여기까지 오면서도 처음 보는 얼굴. 깨끗한 눈 안으로 고수의 풍모가 엿보인다. 이 장면만 보면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다.

“…예, 뭐. 좋습니다.”

진심이 뭐라고, 결국 나를 움직였다. 한석훈에게 미안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낭만을 버릴 수 없나 보다. 자신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인정? A팀의 감탄도 일으킨 나다. 손영혁이라고 못할 게 없었다.

***

“뭐? 다시 말해봐.”

못 들어서 물어본 말이 아니다. 그저 믿기지가 않아서일 뿐. 손현욱이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누, 누가 어딜 왔다고?”

아연실색한 협회 이사의 모습이 낯설다는 듯 보고를 하는 비서도 곤란한 표정이 됐다.

“30분 전에 이태진 씨가 협회에 입문했….”

“그걸 왜 이제 말해!”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런데 화를 낼 시간도 없다. 일어난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섰다.

“어딨어!”

“혈현전에 막 도착했다고 합니다.”

“거긴 또 왜…!”

각성자들의 생각이란 이렇게나 알 수가 없다. 오자마자 한바탕 싸움이라도 할 생각인가? 누가 그곳까지 안내해 준 건지는 몰라도. 단단히 징계를 내릴 생각이었다.

“이런 미친.”

걸어가면서도 이게 현실인가 싶었다. 철저히 준비하고, 일을 치를 셈이었다. 아버지의 말대로 협회의 미래, 나아가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린 일이다. 성대하게 귀빈을 맞을 준비를 해야 했는데.

“말해 봐. 어떻게 된 건지.”

손현욱이 으르렁거렸다. 그가 비각성자라 해도, 협회의 실세로서 풍기는 기세라는 게 있다. 비서가 창백한 낯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소, 손…, 누구? 손영혁?”

그런데 난데없이 차남의 이름이 튀어나온다. 아침부터 다짜고짜 이태진의 집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그놈이 귀하게 자란터라, 또 각성자로서의 재능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터라 세상 물정 모르고 설치고 다니는 일들은 자신의 선에서 커버 가능했다. 지켜야 할 선을 모르는 녀석이 아니기도 했고.

그런데 이번엔 정도를 넘어섰다. 어떤 이유로 이 짓을 벌이는지도 짐작이 갔다. 질투심, 혹은 호기심 정도겠지.

녀석의 성격으로 보아, 벌써 몇 번이나 도발을 걸었음이 분명할 것이다. 그러니까 혈현전에 있는 것일 테고. 아찔했다. 이번 일로 인해서 이태진이 협회에 안 좋은 감정이라도 갖게 된다면.

“빨리 가자.”

손현욱이 발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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