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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39화 (39/170)

39화 대한민국 각성자 협회 (1)

성문 안에 입성한 직후, 완전히 다른 공간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었다. 가늠도 안가는 내부의 넓이도 그랬지만 뿌리처럼 박혀 있는 전각들이 곳곳에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아주 진하게.

흡!

외성벽에서 느낀 중압감과 비교해도 차원이 달랐다. 감히 내 입장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진득한 기운이 이곳저곳에서 나를 짓눌렀다. 나를 특정해서 저주계열의 마법을 시전한 건 아니었다. 그저 이 공간이 원래 이렇게 설계돼 있을 뿐.

속이 진탕되는 기분이었다. 손영혁에게 내 상태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호흡을 붙들었다. 내 노력이 나름 통했는지 줄곧 내 반응을 살피던 손영혁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전혀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온전히 이 공간의 기운에 적응하는데 마나를 집중했다. 손영혁이 미리 주의를 주지 않은 이유도 분명 털썩 주저앉는 내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기에. 굽은 등을 바짝 펴고 태연한 척 이곳저곳을 눈으로 살폈다.

어떤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추측도 되지 않는데, 거기에 부여된 효과 또한 그랬다. 마치 살아있는 듯 넘실거리는 기운 중 그나마 파악한 것이라고는 물리 방어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 정도.

시선을 하늘로 올렸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성 전체를 돔형태로 둘러싼 기운이 있었다. 나 혼자 이 광경을 봤다면 분명 혼잣말로 이렇게 내뱉었을 것이다.

‘어이가 없네.’

S급 아이템을 실험하는 곳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분명했다. 여기는 국가 간의 전쟁을 대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핵탄두는 물론이고 S급 몬스터와 각성자들이라 할지라도 이곳을 침입하기란 요원할 것이다.

“협회에 방문해 본 적 있었던가?”

손영혁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혼잣말인지 나에게 하는 말인 건지 구분이 안 됐다. 똥개도 제 동네에선 한 수 먹고 들어간다더니.

“처음이긴 한데.”

애매하게 말하는 투 그대로 돌려줬다. 떨리는 목소리가 그대로 나갈까 걱정했는데, 내가 듣기에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건조한 얼굴을 유지한 채 손영혁에게 턱짓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사실 협회에 처음 오신 각성자 분들은 많이들 놀라십니다. 민간인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지만, 협회성 전역에서 뿜어내는 기운은 각성자의 속을 헤집어 버리거든요.”

“…….”

“간혹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구토하는 경우도 있는데. 제가 미리 말씀 못 드린 점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렇게나 태연하신 걸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하기야, 검신께 이런 잡기 따위야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하하.”

그러면서 손영혁이 비릿하게 웃었다. 겉으로는 미안하다고 하는데 표정도, 말투도 전혀 그게 아니다.

이런 같잖은 도발은 기분 나쁘지 않다. 오히려 의문만 들 뿐. 이놈이 이렇게까지 나를 도발하는 저의가 뭔지 궁금했다. 간부 배지를 달고 있던 녀석. 자충수를 두다 손현욱 이사에게 뺨을 맞은 놈이 생각났다.

그놈이 손영혁의 친한 동료였나? 그렇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동기가 너무 빈약하다. 손영혁이 협회장의 혈통이라면? 마침 성씨도 같다.

우연일까? 그럴 리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녀석의 직책을 봐도 그랬다. 녀석은 흔히 말하는 성골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이런 오만방자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일 테고.

그렇다 해도. 모르긴 몰라도 협회장은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을 것인데. 인터뷰를 봐도 그랬고, 게이트 사태의 조치를 봐도 그랬다.

뭐가 됐든. 협회 본성에 들어온 이 순간부터 손영혁을 적으로 간주해야 한다. 각성자의 세계는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법.

설령 그게 황당하다고 여길 만큼 말도 안 되는 일일이지라도. 헬리오스의 심장을 언제든 꺼낼 수 있게 준비했다.

“이왕에 여기까지 오신 거, 저희가 준비한 보상을 드리기 전, 협회 내부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미처 내가 대답하기도 전, 손영혁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제일 먼저, 협회를 수호하고 있는 천신의 방어막을 알려드려야 하는데. 느껴지실지 모르겠습니다. 성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돔형태의….”

“예, 그뿐만 아니라 저를 특정해서 쫓는 기운도 있군요. 협회 내부에 있는 인물이라면 언제든 추적할 수 있게끔. 어떤 마법인지 궁금합니다.”

녀석의 말을 끊었다. 네가 느낄만한 수준이 되겠냐는 자극일 게 뻔한지라, 더 예민한 것을 꺼내 놓았다. 그쯤 하라는 뜻에서.

어느 정도 협회 내부가 주는 중압감에 적응한 후였다. 진득한 기운 가운데 숨어있던 것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

바람처럼 나를 간질거리면서 따라오는 기운이 있었다. 어지간히 감각이 예민하지 않다면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은밀한 마법.

흡족했다. 손영혁에게 한 방 먹인 것 보다, 내 성장 속도가 나도 놀랄 만큼 빨랐기 때문에. 그렇게 S급 검술 재능이 날이 갈수록 잠재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점차 검술을 넘어 기감의 발달까지도 극도로 자극시키고 있다.

“…죄송합니다. 절차의 문제일 뿐, 이태진 씨에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녀석의 미간이 순간이지만 꿈틀거렸다.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동공에는 지진이 난 것 같다.

“이런, 협회의 기밀이었군요. 제가 괜한 소리를. 당연히 밖에 발설할 일은 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모시죠. 다음으로 보여드릴 곳은….”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한 손영혁이 앞장섰다. 이미 파동을 퍼트려 어떤 구조물이 있는지 확인한 후였다.

그것들에 대한 감탄은 이미 진작에 끝났다. 그럼에도 협회 내부를 눈으로 기억하는 건 또 다른 말이기에 별말 하지 않고 그를 뒤따라 갔다.

딱히 감흥 없이 손영혁의 설명을 듣는 가운데 문득 한석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S급 검신의 축복을 획득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의 말대로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를 걸었을 당시.

‘아카데미 물도 안 빠진 놈답게 아주 낭만 넘치는구나. 동료애? 의협심? 비꼬는 거 맞으니까 실실 쪼개지 말고. 아마 네놈도 이제 곧 느낄 테지만, 이쪽 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잘 없거든.’

‘설령 그게 나 같은 초고수, 슈퍼 섹시 가이일지라도 말이야. 아니, 레벨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더해. 언제 등에 칼을 맞을지 몰라서 항상 불안에 떨어야 하지.’

‘그딴 순진한 마음가짐으로 어디 계속 있어봐라. 대놓고 칼에 찔리거나, 아니면 동료라고 생각했던 놈이 네 놈 등에 한 방 먹여 줄 테니. 그렇게 뒤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다.’

그렇게 말하는 한석훈의 얼굴은 어쩐지 침울해 보였다.

‘명심해라. 고등급 헌터의 죽음은 둘 중 하나뿐이야. 몬스터 아가리 속에서 죽거나, 다른 각성자의 손에 뒤지거나.’

어쨌든 방법은 강해지는 것뿐이라며, 검을 들라고 했었지. 한석훈의 말이 맞았다. 나와 아무 연관도 없는 녀석도 내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겠지. 그 이유가 질투심이 됐건, 모종의 사연이 있건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쓴웃음이 나왔다. 세간의 말과는 달리, 스스로가 처량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곳은 혈현전(血玆殿)입니다. 협회 직원들의 수련 장소로 쓰이고 있죠. 아!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상념에서 나온 즉시, 흥미가 동하는 말이 들렸다. 파동이 유독 결집 된 곳이 있더라니. 바로 앞의 전각 안으로 기운이 밀집해 있었다.

“저에게 보여주셔도 괜찮으십니까?”

무려 군사시설을 외부인에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발설이라도 하실 겁니까?”

“…….”

“들어가시죠.”

상관없다는 듯 손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협회의 기밀일 게 분명한데도 손영혁은 전혀 경각심이 없는 모습이었다.

네깟 놈이 헤집어봤자 어찌할 수 있는 협회가 아니다. 녀석의 눈빛이 그리 말하는 듯했다.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추적 마법을 내 입으로 밝힌 것이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는데.

적에게 내 전력을 밝혔다고 자책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놈은 아직도 나를 경계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력으로 따져도 손영혁은 최소 A급의 고수임이 틀림없으니까.

전각 안으로 들어가자, 십 수명의 인원들이 연무장에서 훈련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즉시. 협회를 그저 정치집단으로 오판한 것을 취소했다.

체력의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훈련과정도 그랬지만, 훈련의 목적이 우리와는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한 명을 중앙에 두고 나머지 열 명이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그와 같은 훈련이야 일성에서도 하는 것이지만, 언제나 가둬진 한 명을 몬스터로 상정해두고 훈련에 임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것들의 대형은 무엇인가. 단번에 알아차렸다. 녀석들의 합진은 몬스터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같은 각성자들을 척살하기 위한 것이지.

그때만큼은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협회의 존재 목적을 생각하면 그들의 훈련방식이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었지만, 저 가운데의 인물이 내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었기에.

“부끄럽지 않은 제 수하들이지요.”

범죄를 저지른 각성자들이 제일 두려워한다는 감찰단원들이 이들이었다. 손영혁이 자랑할 만했다. 저 가운데 누가 있다 한들, 고초를 겪을 것이다.

오로지 각성자를 죽이고 레벨업을 한다는 괴소문이 돌만큼, 각성자라면 누구라도 이들을 껄끄러워 한다.

“과장님!”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일시에 모두가 동작을 멈췄다. 헌터라기보다는, 잘 훈련된 정예병사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일렬로 늘어선 그들이 대번에 나를 알아봤다. ‘어?’ 하는 목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경계태세를 거두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따끔따끔한 살기가 쏟아졌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외부의 침입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들 무기를 거둬라. 손님께 무슨 무례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손영혁은 뿌듯한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정치와 그리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떠십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일성의 검신께서 이 녀석들에게 검 한 자락 알려주시렵니까?”

이제는 귀여워 보이기까지 하는 녀석의 도발을 무시하고 단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방금 전의 방진을 상대로 싸워볼 순 없겠습니까?”

나도 모르게 그렇게 물었다. 죽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설령 죽음을 각오하더라도 저 대형과 싸워보는 경험은 내게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검신의 축복은 한번 맞붙어 보는 것만으로 상대방의 기술을 모두 파악해 버리니까.

하나하나가 B급의 각성자들. 진다고 해서 손해 볼 것도 없었다. 내 말이 애송이의 도발처럼 들렸는지 대번에 단원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때문일까. 손영혁 또한 그것만은 안 되겠다며 웃는다.

“태진 씨가 협회로 소속을 바꾸시겠다면, 당연히 응해드리죠.”

에둘러 거절하는 뜻이었지만, 의외로 그럴듯하게 들린다. 언젠가는 일성에서 나와야 했기에, 잠시나마 협회에 몸을 담그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강해질 수만 있다면 염치 따위가 무슨 대수라고.

“실망하셨군요. 이래 봬도 이 녀석들 하나하나가 B급의 실력을 지녔지요. 태진 씨로서도 나쁜 제안이 아닐 것 같은데.”

이번엔 손영혁이 은근슬쩍 물었다. 당연히 이들 하나하나가 나보다 강자였다. 그랬기에 스킬을 빼고 기교만을 다투자는 말이 바로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굳이.

B급 각성자와 대련하고자 한다면 일성의 B팀도 있다. 데이터로 내 전력을 보고하는 것과 실제 내 전력을 보여주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것이었기에, 거절하려던 차였다. 그러던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네. 그러죠.”

내가 그렇노라 대답할 줄은 몰랐던지 손영혁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혹시라도 말을 바꿀까 얼른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사내 하나가 호명된 즉시 튀어나왔다.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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