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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36화 (36/170)

36화 복수 (1)

코끝으로 혈향이 진동했다. 순간 내가 착각을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어느 시기의 어떤 장면이 등장한다 해도 당황하지 않을 것이라 자부했던 다짐이 눈 눈앞의 풍경에 와르르 무너졌다.

일성의 본사 일 층 복도. 길게 뻗어 있는 복도를 따라 사원들이 모조리 죽어있었다.

그것이 나를 길들이려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역린을 건드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말을 거역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이런 것들을 내게 보여주는 것이겠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정녕 나를 꼭두각시처럼 부리고 싶었다면 이래서는 안됐다.

내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이따위 장면을 보여줄 것이 아니라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범인의 얼굴을 보여 줬어야 했다. 내가 놈의 심장에 검을 박아넣는 장면을 보여 줬어야 했다!

‘그것’이 선을 넘었다. 그렇다면 나 또한 똑같이 대응해 줄 수밖에 없었다. 감정적 대응이 내게 안 좋은 쪽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음에도. 내가 놈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야 한다.

이 빌어먹을 곳에서 빠져나가는 즉시 다시 협상테이블에 그것을 앉힐 것이다.

그럼에도 놈이 끝끝내 똑같은 장난질을 반복한다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주 던전에 그것이 안배해 놓은 장치를 어떤 식으로든 망쳐….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잠시, 문득 의문이 들었다. 목적 따위야 지금 당장 알 길이 없지만, 놈은 내가 살아남기를 희망한다. 그것도 아주 간절히.

그런 놈이 내 심기를 건드려가면서까지 나와 척을 지려고 할까? 화를 가라앉혀야 한다. 내 목숨, 나아가 수백 명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다.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

일성에서 일어난 참사를 굳이 다시 재연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저번에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있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더라도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야 한다.

터벅터벅.

이윽고 ‘내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내 기억 일전에 환상을 통해 봤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곳의 ‘나는’ 감정의 동요 없이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마치 그렇게 애도라도 하듯, 면면과 눈을 마주쳐가면서.

머릿속으로 수없이 반복됐던 장면들이었다. 달라진 게 없었다. 눈 뜬 채로 죽어있는 자세부터 벽에서 흘러내리는 진득한 핏물까지도.

조급해진 마음을 달랬다. 자신 있었다. 못 봤던 뭔가가 있다면 분명히 내 무의식이 포착할 것이다.

이윽고 고개가 숙여졌다. 그때처럼 홍주연과 김주현이 눈을 뜬 채 죽어있었다. 보고 싶지 않았지만, 꼼꼼하게 면면을 살펴봤다.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번쩍였다. 뭔가가 잡힐 듯 말 듯했다. 애간장이 탔다.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온 신경을 김주현의 얼굴에 집중했다. 그렇게 ‘내가’ 그때처럼 김현주의 눈을 감겨주던 순간.

어?

아주 미세한 차이. 누가 보면 뭐가 다르냐고 할지 모르지만. 알 수 있었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김주현이 앳된 얼굴로 죽어있었다.

어지간히 눈썰미가 좋은 사람도 놓칠 만큼 미세한 변화지만 장담해도 좋았다.

그렇다 해도 흥분할 때가 아니었다. 그 말인즉슨. 일성의 참사가 저번보다 앞당겨졌다는 뜻이니까.

이제야 알았다. 애초부터 같은 장면을 또 보여주는 게 아니었다. 놈이 내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었다. 미래가 바뀌었다고. 내 죽음이 앞당겨졌다고.

아니다. 아직 모른다. 미래가 앞당겨졌듯, 놈에게 죽는 결과도 바뀔지도 몰랐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희망이라도 없다면 정신을 붙잡을 수 없었다.

‘내가’ 다시 길을 걸었다.

머릿속에서 떠도는 무수한 잡념을 지웠다. 또 어떤 게 튀어나올지 모른다.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모든 정보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어째서!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어떤 행동이 일성참사를 앞당기는 원인으로 작용했단 말인가.

오대산.

생각났다. 결국 그 일이 화를 불렀던 것이다. 혼자 입장했던 미래의 나와 다르게 임한나를 동행했던 그것 하나가, 이렇게 큰 부메랑이 돼서 내게 돌아온 것이다.

충격에 멍해진 내 상태와는 상관없이 장면은 그때와 똑같은 순서로 흘러갔다. 한석훈과 2팀의 전원이 똑같은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나는 그곳에 달려갔고, 한석훈은 내게 도망가라고 한다.

내 손에서 번진 하얀 빛무리가 그때처럼 한석훈을 훑고 갔지만 이미 늦은 것까지도 똑같았다. 미래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때 일성을 나갔더라면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내가 일성에서 나왔더라면! 모두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전부 내 욕심 탓이다.”

한석훈을 부둥켜안은 내가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분석할 틈도 없었다. 시야에 맺힌 풍경이 뒤집힌다. 빙글빙글 도는 풍경 사이로 목만 남은 내가 보였다. 그때처럼, 일격에 죽은 것이다.

화악!

“허억! 허억!”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스스로도 느껴질 만큼 뜨거운 콧김이 뿜어졌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당혹스러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전에 봤던 환상에서 마지막으로 말했던 대사가 달라져 있다.

머릿속을 뒤집었다. 그러니까, 이전에는 분명.

“꼭 이렇게 해야만 속이.”

그래. 이런 말을 했었다.

잔뜩 화가 나서는 누군가에게 울분을 터트렸었지. 그 말을 누구에게 하려 했던 건지는 몰라도. 이제는 무의미해졌다. 사라진 미래가 됐으니까.

“그때 일성을 나갔더라면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내가 일성에서 나왔더라면! 모두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전부 내 욕심 탓이다.”

지금은 이 대사가 더 중요하다.

내 입에서 같은 말이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머릿속이 풀릴 때까지.

일성에서 나와라.

미래의 내 입을 빌려 놈이 말하고 있다. 살고 싶다면 일성을 그만두라고.

괴한의 정체는 아직도 불가사의하지만. 어쨌든 참사를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 보였다. 늘 그랬듯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지만.

환장할 노릇이었다.

***

날이 밝고 있었다. 각성자가 하루 안 잔다고 문제 될 리 없건만 거울 속 내 모습은 꼭 폐인 같았다.

눈은 퀭하게 내려 앉아있고 싸늘하게 가라앉은 입매는 초상이라도 치른 듯하다.

“거지새끼가 따로 없군.”

이런 농담이 튀어나오는 걸 보니 그래도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는 뜻이겠지.

결정은 진작에 내렸다. 일성을 나와야 한다. 모두가 사는 방법이 그것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답지가 뻔히 보이는데 일부러 오답을 적을 이유도 없는 법. 가족 같은 동료애를 내세우기에는 한둘의 목숨이 달린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네가 꿈속에서 말해줬던 그때가 언제냐. 일성에서 나왔어야 했던 그때. 설마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알고 있었지만 미래를 알려주는 녀석은 그리 친절한 놈이 아니다.

“그래, 어련히 때가 되면 알려주겠지.”

오대산 던전을 임한나와 동행한 대가로 내 죽음이 앞당겨졌듯, 사소하다고 여긴 행동이 태풍이 돼서 돌아온다. 경거망동해서는 안 될 일.

때가 되면 녀석이 알람을 울릴 것이다. 놈은 내가 필요하니까. 혹은 내가 눈치챌만한 분기점이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일성에서….

불현듯 휴대폰이 울렸다. 뭔가 해서 확인했더니 캘린더가 알람을 보내고 있었다.

[보름 후, 전주 던전.]

설정해 둔 시간대에 정확히 울린 것뿐인데. 타이밍이 참 묘하다. 터무니없는 억측이겠지만. 마치 그것이 내게 말하는 것 같이 들린다. ‘거래는 거래, 약속을 지켜라.’ 하고.

“걱정하지 마라. 나도 강해져야 할 이유가 있으니.”

‘그것’을 인격체로 대한 이후부터, 놈에 대한 내 태도는 이렇듯 건방져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녀석이 내 신변을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 더 걱정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놈은 내가 사이비 교주가 되면서까지 살아남기를 바라고 있으니.

“설마 진짜로 내가 교주가 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겠지? 알고 있겠지만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내 손으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드는 건 일성참사만큼이나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어쨌든.

내게도 전주의 던전을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분명히 그곳에 기연이 준비돼 있을 것이다.

반드시 얻어야 했다. 일성을 퇴사하는 것만으로 안심할 수 없었다. 느낌이 그랬다. 불가사의한 능력을 얻은 만큼,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은. 강해져야 하는 본질적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머리를 환기시키고자 티비를 켰다. 그러자 대뜸 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온다. 순간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하단에 뜬 것은 더 가관이었다.

[서울역의 영웅, 이태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잖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만 해도 두 번이나 목숨을 잃을뻔했는데. 미래에만 생각이 사로잡혀 있다 보니까 이쪽은 생각도 못 했다.

[…렇게 큰 지네는 생전 처음 봤습니다. 영화에서나 보던,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네요. 어쨌든 그 괴물이 저를 잡아먹으려고 입을 벌리는데 이게 제 마지막인가 싶었죠. 피할 생각도 못 하고 무서워서 눈만 감고 있었는데 정신 차리니까….]

기억나는 얼굴이었다. 남자를 대신해서 산성독을 맞았던 순간이 있었다.

남자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연신 내 이름을 외친다. 고맙다고, 생명의 은인이라고.

“크흠.”

멋쩍어서 채널을 돌리자 이번엔 청와대 대변인이라는 사람이 나와 입장문을 읽고 있었다.

[…서울의 도심 한복판에서 터진 B급 게이트는 역설적으로 건국 이래 발생한 게이트 사고 중 가장 작은 피해만 남겼습니다.

빠른 초동대처와 각성자 협회를 비롯한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민들을 지키고 몬스터를 무찌른 이태진 헌터님께 서울시민을 대표해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나아가 이번 사태는 대한민국 헌터 산업이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며……. 그것과 별개로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부모님과 자녀를 잃은 유가족분들에게 애도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와 관련해 게이트 특별법에 의거해 보상조치….]

줄줄이 읽는 입장문에서 내 이름이 몇 번이나 거론되고 있었다. 우려했던 대로, 그 여자의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은 거론되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CCTV를 포함한 현장의 마력 파장 분석까지 끝났을 텐데. 협회에서 내놓은 입장문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에 대한 감사의 표현만 있을 뿐, 마녀의 행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또한 시간대별로 나열해 놓은 공략개요도 사실과 달라져 있었다. 이태진의 초동조치와 시민의 안전을 위해 모든 몬스터들의 어그로를 끄는 사이, 협회의 각성자들을 비롯한 지원군들의 합세로 마무리한 모양새.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내용을 이렇게 바꾼 이유가 뭐지? 이유는 몰라도 내 공을 깎기 위함은 아니었다.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고 고른 듯 내 활약상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가 대번에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번 알아보려던 차, 때마침 휴대폰이 울린다.

-왜 이리 전화를 안 받아?

김석환이었다. 그러고 보니 부재중 전화가 잔뜩 쌓여 있기는 했는데.

“깜빡 잠이 들어서…. 무슨 일이십니까?”

전화기 너머 곤란한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협회 입장문은 봤겠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어제자 CCTV 자료가 다 날아갔다. 현장 마나 파장도 너밖에 검색 안 됐고.

미간이 찌푸려졌다. CCTV야 어찌어찌 이해는 할 수 있는데, 마나 파장까지도 날아갔다고?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녀의 공능이 그 정도라는 말인가.

-어찌 됐든. 협회에서 내놓은 타협안대로 일단 마무리하기로 했다. 끝까지 가자면 그럴 수 있기는 한데, 그쪽에서도 많이 봐 준 모양새더라고.

그제야 협회가 내놓은 입장문이며, 사건개요도 납득이 갔다. 되려 협회 쪽에서도 이례적으로 한발 양보한 것으로 보였다.

내가 데이터 조작을 반박할 모든 자료가 없어졌다. 되려 조사를 하면 할수록 나 혼자 B급 게이트를 공략시킨 정황만 드러나고 있을 뿐.

이 문제를 공론화시키면 나로서도 어떻게 B급 게이트를 혼자서 공략할 수 있었는지 정확하게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협회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사실 어제….”

어찌 됐든 내가 속한 일성에서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했기에 마녀에 대해 말하려던 차. 김석환이 내 말을 먼저 끊었다.

-사람이 너무 많이 알면 다쳐. 어제 일은 우리도 협회와 같이 묻기로 했다. 혹시 모르지. 회장님은 궁금해하실지도. 어쨌든 난 모르고 살련다.

그러면서 후다닥 전화를 끊는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했던 게 무색해졌다. 좀 억울한데.

“에라이, 모르겠다.”

이렇게 된 거, 오늘 하루는 집에서 푹 쉬기로 결정했다. 안 그래도 어제 퇴근할 때만 해도 이틀 동안은 집에서 휴식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돈이 썩고 있잖아.”

A급과 S급 특성을 얻으면서 갱신된 연봉. 비무 대회를 거치면서 받은 상금, 거기다 어제 게이트를 공략하면서 얻을 돈까지.

통장에 쌓인 돈이 제법 컸다. 각성자라고 해도 초년생에 만질 수 있는 돈은 아닐 만큼.

그동안 쫓기듯 훈련과 던전 공략만 하다 보니까 돈 한 푼 쓰지 않은 것이다. 아이템이야 최태성의 창고에서 가져다 쓰면 됐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플렉스인지 뭔지 좀 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전화벨이 또 울린다. 모르는 번호로. 받을까 말까 고민했던 내 마음이 수화기 너머에서도 느껴졌는지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느껴지는 목소리가 다급했다.

-아! 이태진 씨.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한민국 각성자 협회 감찰팀 손영혁 과장입니다.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각성자 협회?

“…무슨 일이시죠?”

해명할 게 남아있었나. 경계 섞인 내 목소리에도 남자는 개의치 않아 했다.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이태진 씨의 보상안을 산정하고자 연락을 드렸습니다. 바쁘시겠지만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줄줄이 늘어놓는 말의 결론은 지금 협회로 와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거절하려던 차였다. 협회와 길게 엮여서 좋을 게 없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시간이…. 음. 아닙니다. 갈게요.”

생각해보니 협회에서 내 편의를 위해 양보한 게 있었다. 이 기회에 빚을 지우는 게 나을 듯했다. 그 늙은 여우가 어지간히도 나를 궁금해하는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뇌리가 번쩍거렸다. 시간이 멈추고, 미래가 보였다. 아주 짧고 굵은 미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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