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미래를 본다-35화 (35/170)

35화 서울역 게이트 (5)

한 달에 한 번. 각성자를 둔 회사는 그들의 데이터를 모두 협회에 보고해야 한다. 당연하다. 엄연히 말해 우리는 무력집단이니까.

그래. 하나하나가 초인으로 구성된 반군세력은 국제적으로도 큰 문제이긴 하다. 때문에 협회가 데이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그것도 상황과 때를 가렸어야 했다. 보이는 것만 따졌을 때 지금의 나는 홀로 B급 게이트를 막아낸 장본인이다. 더불어 몬스터들의 모든 어그로까지 감당함으로써 민간인들의 피해도 최소화했고.

몬스터들에 의해 건물 몇 채가 무너졌지만 B급 게이트가 도심지에 등장했을 때마다 얼마나 많은 피해를 일으켰는지를 생각하면. 정철규의 말대로 상을 주면 줬지 이렇게 압박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의문이 생겼다. 이렇게까지 내 신변을 확보하려는 이유가 있을 텐데.

몇몇 건물이 붕괴되긴 했지만 널리고 널린 게 CCTV다. 그것들만 돌려봐도 어차피 밝혀질 일 아니던가.

협회의 간부가 하는 행동은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웠다. 당장 그의 주변에 있는 부하들도 눈을 굴리고 있었으니까. 이게 맞나 하는 표정으로.

“손정연. 그 늙은 여우가 널 아주 궁금해 한다더군.”

정철규가 웃는 낯으로 작게 소곤거렸다. 순간 내가 들은 게 맞나 싶었다. 협회장의 이름을 이렇게 부르는 사람이 있다니.

“그 늙은 여우가 저를 싫어한답니까? 인터뷰는 간도 빼줄 것처럼 하더니.”

분위기를 바꿔보자 했던 말인데 정철규가 끅끅대며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누군가 툭 건드리면 폭발할 것만 같았다.

특히나 데이터 조작 운운하는 저 녀석의 면상에 주먹을 꽂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어찌 됐든. 짐작 못 했던 것은 아니지만 손정연 회장이 굳이 빈축을 사면서까지 나를 보려 한다는 것도 이상했다.

“충성 경쟁인 거지. 늙다리가 네 얼굴 보고 싶다고 염병을 떨어대니까 어떻게든 한번 자리를 마련해보려고 오버한 모양인데. 아마 저 녀석도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거야. 이게 아닌데, 하면서. 이미 물은 엎질러졌지만.”

그 말과 함께 윤진아가 콧방귀를 꼈다.

겨우 그런 거였다니. 혹시 그 미친 여자와 나를 엮어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했던 게 무색했다.

일촉즉발의 상황과는 달리 우리는 꽤나 여유 있었다. 협회의 권력이 아무리 크다 한들 그것은 소프트파워의 영역일 뿐.

단순히 무력만 따지자면 대한민국에서 일성의 A팀을 찍어누를 수 있는 세력 따위는 없다. 더군다나 명분도 우리에게 있는 만큼 두려울 것은 없었다.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었다. B급 게이트 출몰 소식을 듣고 온 헌터들이었다. 하나하나가 내로라하는 기업의 정예 헌터들. 그들이 마치 재밌는 구경거리를 발견한 듯 근처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협회의 간부 녀석이 아까부터 말이 없어진 것도 그래서였다. 간부의 안색에 후회스러운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녀석이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고 입을 열려던 순간.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일성의 고의 데이터 누락 또는 이태진 저 본인의 불법적 도핑 의혹을 협회의 공식 입장으로 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앞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우리들의 방식대로 녀석에게 돌려줬다.

대번에 녀석의 표정이 곤란함으로 인해 일그러졌다. 구경하고 있던 헌터들은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낄낄댔다.

이렇듯 협회의 인식은 어딜 가나 비슷했다. 일성의 A팀도 내가 이렇게 나오자 더 해보라는 듯 등을 떠밀었다.

“…이태진 씨. 아무래도 서로 감정이 격해진 것 같군요. 오해가 있었다면….”

“그렇게 풀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우리 위신도 있고.”

정철규가 빙긋 웃으며 이죽거리자 녀석의 표정이 더없이 찌그러졌다.

그럼에도 녀석은 상황을 바꿔보려고 제 딴에는 용을 써댔다. 그 노력만은 가상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사과드리죠. 다만, 협회에 소속된 인원으로서 합리적인 의심이었다는 점…어?”

녀석은 이번에도 말을 끝내지 못했다.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된 현장에 차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녀석의 안색이 파리하게 변한 것도 그때였다.

“오호. 구미호가 꽤 진심인가 보네.”

차에서 중년의 사내가 내렸다.

“누굽니까?”

“손현욱. 손정연 회장의 아들.”

듣고 보니 그랬다. 손정연 회장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내 앞에 있던 녀석이 쏜살처럼 손현욱의 앞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손현욱이 기다렸다는 듯 팔을 올린 직후.

짜악!

녀석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다음 순간 고개를 숙이며 눈을 질끈 감는데 그깟 뺨을 맞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봤기 때문일 것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 일로 인해서 사내정치에 굉장히 큰 타격을 입은 것이겠지.

“언제 적 액션질인지, 원.”

정철규가 쯧쯧거리며 내게 속지 말라고 한다.

“저놈이 일성에서 데이터를 누락시켰다느니 도핑했다느니 했던 말. 생각보다 의미가 크다. 우리만 떳떳하다면 저런 액션으로 넘어갈 일이 아니란 거지.”

그렇게 정철규가 은근슬쩍 내 결백을 떠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손현욱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무리들도 사뭇 진지한 태세로 바뀌었다.

점점 일이 커지고 있었다. 이쯤 되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을 벗어난 게 확실했다.

나를 뒤로 물린 김석환이 선두에서 손현욱을 맞았다.

“이태진 씨를 비롯한 일성의 헌터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 모든 게 제 탓입니다.”

손현욱이 그렇게 말해도 김석환은 요지부동이었다. 협회장의 아들 앞에서도 팔짱을 끼고 있는 김석환이 달라 보였다.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란 거, 아시잖습니까.”

김석환의 냉정한 말에 손현욱이 쓰게 웃었다.

“예. 그렇지요. 공식적으로 입장문을 발표하겠습니다.”

“저희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합당한 보상안이 오갈 거라며 정철규가 설명했다. 그 보상안이라는 건 당연히 내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오늘 하루만 몬스터와 광신도에게 두 번 죽을 뻔했다. 휴식이 간절했다.

다행히 대화는 빨리 마무리됐다. 나머지 뒷정리는 협회 쪽에서 진행될 것이라는 말과 함께, 김석환이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이긴 하다만. 일단은 푹 쉬고 보자.”

정철규가 내 상태를 보고 알 만하다며 이만 돌아가 보라고 권했다. 내가 느끼기에도 지금 나는 매우 예민해진 상태였다.

안 그래도 머릿속이 터지기 직전이었던 만큼,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집으로 오자마자였다. 당장 침대에 눕고 싶은 충동을 이기고 노트에 오늘 있었던 일을 정리했다.

마녀의 정체도, 추측상 시스템을 섬기는 그 종교단체의 이름도 밝혀내지 못했다. 그녀가 어떻게 나를 알고, 살려준 것까지도. 지금으로서는 풀 수 없는 문제였다. 그것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고.

그보다 아까부터 찜찜했던 것이 있었다. 내가 그 사이비 종교단체의 교주가 된다면 그 시기가 언제일까 하는 것.

일성에서 참사가 일어나는 시기를 추측해보면 앞으로 5년이 채 남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5년 후 나와 일성의 전원이 정체불명의 무언가에게 죽는다.

첫 번째 가능성. 일성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내가 교주가 되는 경우다.

바로 고개가 저어졌다.

교주가 된 미래의 내가 일 장로에게 전권을 위임한 적 있다. 그 사이코패스 광신도가 과연 일성을 내버려 뒀을까?

짧은 대화 속에서, 그리고 미래에 내가 봤던 상황 속에서도 그랬듯. 시스템을 섬기는 종교들은 하나같이 같은 특성을 공유한다. 자신들의 신을 섬기지 않는 각성자를 극도로 혐오한다는 것.

백번 양보해서 일 장로가 일성을 내버려 뒀다고 쳐도. 일성부터가 서울이 불바다가 되는 꼴을 두고 볼 리 없었다.

인과관계가 맞지 않는다. 일성참사와 마녀의 일은 연관이 없었다.

두 번째 가능성. 일성의 참사를 막은 이후에 내가 교주가 된 것이라면? 그러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일성 참사를 본 직후부터 지금까지 일성 참사를 막을 수 있을 만큼 유의미한 사건이 필요했다. 특정할만한 일이 없었다.

“아니, 하나가 있지.”

당장 오늘 일 장로를 만난 것. 그녀가 일성 참사의 범인이라면. 납득이 가는 전개였다.

그녀의 힘은 내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강하다. 어쩌면 일성의 모든 인원들이 합쳐도 못 이길 만큼의 고수일지도 모르는 일.

만약 마녀가 일성의 직원들을 인질로 삼고 나를 교주로 추대했다면? 그곳의 내가 어쩔 수 없이 그 조건을 수락한 것이고.

곧장 자조적인 웃음이 터졌다.

“어떻게든 피해자 코스프레라도 하려는 꼴이라니.”

일 장로에게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라고 지시한 것이 나다. 내 손으로 일성을 없애라고 말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것도 기각.”

세 번째 가능성. 오대산 던전을 공략하고 빠져나올 당시를 떠올려보면. 초능력은 내게 일어나지 않은 일을 보여준 적이 있다. 깨끗한 모습으로 오대산의 던전을 공략하고 나오는 모습을 말이다.

마치 왜 내 말을 듣지 않았냐고 화를 내듯 평행세계의 나를 보여준 적 있다. 그런 것처럼, 초능력이 이번에도 평행세계의 미래를 보여 준 것이라면?

그 미래가 하필 이태진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드는 사이비 교주가 되는 것이었고.

“이유가 뭐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럴수록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였다. 결국 내 힘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면 문제를 낸 놈에게 물어보면 어떨까.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듣고 있는 것 다 안다. 네가 어떤 존재인지는 몰라도 내가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허공을 향해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게 미래를 보여주는 ‘것’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래, 너는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은 없어. 믿기 힘들게 만들 뿐이지. 인정하기는 싫지만 분명 어떤 조건을 만족하면 나는 사이비 교주가 될 거야. 그렇다면 왜 굳이 그런 미래를 보여 준 거지? 혹시 내게 바라는 것이 그것이냐? 내가 교주가 되길 바라는 것이냐!”

누가 보면 거실을 빙글뱅글 돌면서 혼잣말을 지껄이는 미친놈처럼 보이겠지만.

나로서도 절박했다.

“누군가한테 휘둘리는 건 사양이다. 그러니까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그것’은 신적인 능력을 행사한다. 내 일거수일투족 정도야 파악하고 있는 게 당연할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말도, 어쩌면 생각마저도 듣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미친놈처럼 혼잣말로 물었을 때도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놈이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방법이 있었다.

“나를 꼭두각시로 쓰고 싶어 한다는 걸 안다. 마지막 기회다. 대답해. 싫다면 나도 더 이상 네놈 뜻대로 움직이지 않겠다.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전주의 던전을 네가 얼마나 원하는지는 알고 있어. 그러니까 이건 거래다.”

일종의 협박이었다. 진심이었다. 지금 내게 환상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나는 전주 던전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일성 참사에 대한 단서는 무엇보다 내게 중요했다.

화악!

역시나였다. 녀석이 내 협박에 응답을 해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