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서울역 게이트 (4)
그렇게 미래에서 빠져나온 순간이었다. 일 장로가 나를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저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었을 정도로 매력적인 얼굴이었지만. 현재에서도, 또 일어나서는 안 될 미래에서도 이 마녀가 어떤 존재인지 톡톡히 느낀 후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사이비 종교단체의 핵심 멤버다. 교화의 여지도 없는 인물. 반드시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시야 가득 몬스터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러고도 마녀는 지친 기색 하나 안 보였고.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자조적이게도, 레벨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얼마나 갈 길이 멀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 마녀는 손짓 한 번에 내 대가리를 터트릴 수 있을 것이다. 저 몬스터가 내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함부로 적의를 드러내서는 안 될 일이다. 더군다나 지금의 나는 마나 한 줌 없는 상태. 시간을 벌어야 한다. 조만간 협회에서 지원이 도착할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으음?”
그때 그녀가 의뭉스럽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서.”
그러더니 픽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을 찌푸리며 첫인상이니 어쩌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내 주위를 이리저리 서성이는 것까지.
확신했다. 지금 당장은 마녀가 적의가 없었다. 현재의 나는 그녀의 교주가 아닌데도 그랬다. 어찌 됐든 한 차례 고비를 넘긴 기분이었다.
시간을 계산해 봤다. 앞으로 1분. 그 안에 서울시에 있는 B급 이상 헌터들이 모두 이곳에 올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당신은 누구시죠? 협회 소속은 아닌 것 같은데. 정체를 밝혀 주십시오.”
시간을 끌려는 내 수작에 마녀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대하신 ‘시타둠’의 딸이다.”
그게 아주 자랑스러운 호칭이라도 되듯 마녀가 당당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40초. 속으로 시간을 쟀다. 심장이 두근댔다. 어떻게 합공할 것인지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조금씩이지만 마나가 차오르고 있었다.
“시타둠의 딸?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이름을 밝혀 주십시오.”
35초. 시간이 참 더디게도 갔다.
“네가 한 번 이름 붙여봐. 어떤 이름이 좋겠어?”
재밌는 장난을 치듯 일 장로가 깔깔거렸다. 나를 희롱하는 것이 분명했다. 일어나서는 안 될 미래에서 불바다가 된 서울역이 그 위로 겹쳐 보였다. 가증스러운 여자였다.
“아까부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시는군요. 제 추측이 맞다면 지금 굉장히 위험한 발언을 하고 계신 겁니다. 그리고 제 이름은 어떻게 알고? 저는 당신을 오늘 처음 봅니다. 분명하게 대답하셔야 할 겁니다.”
내 말에 그녀가 여유롭게 웃었다. 30초.
“시타둠께서는 자비로우시지. 너 따위를 선택한 것만 봐도 그렇지. 진실을 알고 싶니?”
그녀가 뭔가를 알려주겠다는 듯 열성적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할 때였다. 어쩔 수 없이 내 얼굴에 스쳐 지나간 적의를 발견한 게 분명했다.
그녀가 쓰게 웃었다. 그러더니 허공을 응시했다. 20초가 남은 상황이었다.
“네 친구들이 오고 있어.”
그때 그녀가 새하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간사한 위정자들은 뱀 같은 혀로 너를 속이고 있지만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야. 만약 운명이 맞다면, 지금 내 손을 잡아. 어서.”
마녀가 매혹 마법을 쓰는 게 분명했다. 나도 모르게 그 손을 잡을 뻔했으니.
정신을 붙잡아야 했다. 아직 추측뿐이지만, 이 여자는 시스템을 추종하는 종교단체의 일원으로 보였다.
시스템을 섬기는 종교단체는 협회에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안이다. 던전에 몰래 들어가는 것보다도 더.
혹여라도 마녀와 긴밀한 사이처럼 보인다면 그것만큼 최악이 없다. 그럴 바에 차라리 이 자리에서 머리가 터져 죽고 말지.
전신에서 비명을 질렀지만 젖먹던 힘까지 짜내 몸을 일으켰다. 10초만 버티면. 아직 나는 느껴지지 않지만. 분명했다. 각성자들이 지척에 도착했을 것이다.
“이 손을 잡으면 어떻게 되지? 세뇌마법이라도 걸리는 건가?”
말투부터 차갑게 바꿨다. 갑자기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도발을 위한 목적이었는데 마녀의 눈빛은 아까부터 그대로였다. 나를 향한 무한한 신뢰밖에 보이지 않는다.
“진실을 알려주마.”
“진실? 나는 사이비를 믿지 않아. 차라리 내 머리를 터트리겠다고 하는 게 어때.”
5초.
설령 이제 와서 도망치려 한들 협회의 A급 헌터들이 그녀의 뒤를 뒤쫓을 것이다.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나를 공격하는 것뿐이다.
마나를 끌어올렸다.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준비를 마쳤을 때였다. 나는 채 느끼지도 못한 찰나의 순간이었다.
마녀가 사라졌다. 신기루처럼 사라진 그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마나의 파동 따위는 느끼지도 못했고.
“제기랄!”
바로 다음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파동이 순식간에 지척까지 온 순간.
쿠웅!
두 사람이 내 앞에 내려섰다. 그것을 시작으로 스물이 넘는 인원들이 차례대로 땅에 도착했다. 하나같이 협회의 문양을 달고 온 자들이었다.
“요인 확보 완료. 미션 B로 넘어간다.”
제일 처음 땅을 밟은 두 사람이 귀에 대고 그렇게 말한 직후였다. 둘을 제외한 나머지가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이태진 씨!”
가슴에 힐러 문양을 새긴 사내가 내 앞에 허겁지겁 내게 달려왔다.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하얀색 기운이 시야를 가렸고, 다음 순간 벌어지고 찢어졌던 상처들이 아물며 꺼졌던 활력이 샘솟았다.
힐러의 치유능력에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어서 흔적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려던 때, 이미 두 명 중 나머지가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 푸른색 눈이 돋아났다가 순식간에 없어지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봤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나머지 인원은 어디 있습니까?”
나도 모르게 욕지기가 차올랐다. 실패다. 뭔가가 느껴졌다면 이 남자부터가 기운을 쫓아갔을 것이다. 애초에 협회의 헌터들도 쫓지 못할 만큼의 수준차였던 것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남자가 휴대폰을 열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닙니다. 자상 외에는 특별한 부상은 없습니다. 예. 다른 헌터는 보이지 않습니다. 느껴지는 기척도 이태진 씨 하나뿐입니다. 전투는…. …이미 끝났습니다. 게이트는 완전히 닫혔고 생체반응을 보이는 몬스터도 없습니다. 민간인들의 대피도 이미 끝난 상태로 보입니다.”
협회의 간부 배지를 찬 사내였다. 더 강한 사람을 불러오라고도 못한다. 이 현장에서는 그가 제일 강하다는 뜻이었다. 전화를 끊은 협회의 간부가 굉장히 미심쩍다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설마 이 현장을 이태진 씨 혼자서. 이럴 게 아니라 이태진 씨. 경황이 없겠지만 일단 저희와 함께….”
그때였다.
저 멀리 또 다른 기운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쿠웅!
바로 앞에서 먼지 바람이 거세게 일어났다. 협회의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날 만큼. 한차례 돌풍이 지나간 후에야 그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김석환과 정철규, 윤진아를 비롯한 일성의 A팀이었다. 그들이 내 사방을 막으며 등장했다.
김석환과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살기가 흉흉한 것이 따끔할 정도였다.
“음? 이게 무슨….”
활을 들고 경계태세를 취하던 김석환이 고개를 갸웃하며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대가리가 터져 죽은 몬스터 파편들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그러더니 눈을 감는다. 김석환의 이마 정중앙에 푸른색 눈이 등장했다가 순식간에 사라진 후였다.
김석환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심각해졌다. 마치 유령을 보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면서.
“뭔 상황이냐. 이게?”
김석환과 정철규가 나를 부축했을 때였다. 뒤쪽에서 날 선 목소리가 울렸다.
“잠깐. 김석환 씨 맞으시죠? 이렇게 가시면 안 됩니다. 기다려 주세요.”
김석환이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내 어깨를 두 번 두드린 그는 뒤를 돌아 터벅터벅 협회의 간부 앞으로 걸어갔다.
“도움은 감사합니다만, 저희 쪽 인원입니다. 이 친구 치료는 저희가 맡죠.”
마치 화를 꾹꾹 눌러 담은 듯 김석환이 낮게 말했을 때였다. 목소리가 사뭇 무거워서 협회 간부는 물론이고 나도 흠칫할 만큼 분노가 느껴졌다.
“김석환 씨. 협회의 절차입니다. 이태진 씨는 이 시간부로 협회에서 책임지도록 하죠. 물론 치료와 보상 문제도 당연히….”
“웃기는 소리. 당신들 검은 속내를 모를까 봐. 만약 조사를 위한 거면 우리 쪽 변호사도 있으니까 정식으로 문의하시든가.”
그가 고개를 까딱거렸을 때였다. 나를 둘러싼 A팀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더불어 협회 쪽에서 우리를 둘러싸려는 움직임도.
“게이트 발생 직후부터 지역 내 모든 회사는 협회의 명령을 듣게 돼 있습니다. 설마 그것도 모르진 않으실 테고. 혹시 일성의 공식 입장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중요한 말을 빼먹으셨네. 사건이 일단락될 때까지. 지금 대가리 달려 있는 몬스터가 하나라도 있나?”
간부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우리가 정하는 겁니다. 또한.”
마치 말해야 하나 말아야 고민된다는 듯 시선이 땅으로 향하던 간부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이어서 말했다.
“게이트 출현 직후 최초 신고자도 이태진 씨였을뿐더러, 우리가 도착할 당시 현장에 있던 각성자 또한 이태진 씨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김석환이 설마설마하는 얼굴로 간부를 바라봤다. 그의 주먹이 꿈틀댔다.
“…제 추측이 맞다면 이태진 씨 혼자 B급 게이트를 공략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협회에서 가지고 있는 데이터와 이태진 씨의 현재 능력에 상당히 많은 간극이 있다고 봐야겠죠.”
“이 새끼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투두둑.
김석환의 몸 주변에 빛이 어리며 하나둘 아이템이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김석환만이 아니었다. 뒤에서 침묵하고 있었지만 일성의 A팀 또한 싸늘한 표정으로 기세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협회의 간부는 이렇게 된 이상 끝을 보자는 듯 내 쪽으로 걸어왔다.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군요. 이태진 씨가, 아니, 일성에서 조직적으로 이태진 씨의 데이터를 허위로 보고했다고. 저희 측에서 가지고 있는 자료로 파악했을 때 이태진 씨의 레벨은 백….”
“더 지껄여봐.”
김석환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나로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타인의 레벨을 밝힌다? 생사투를 걸어오는 것과 다른 말이 아니었다.
놈이 헛기침을 하더니 할 말은 해야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S급의 특성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현장에 있습니다. 예컨대 머리가 터져 죽은 이것들은 마법으로 죽은 게 분명해 보이는군요. 혹, 저희가 모르는 이태진 씨의 능력 개현이 있었던 겁니까? 아니면 불법 도핑이나 시술을 받은 것일 수도 있겠군요. 이태진 씨. 물론 이번 일을 막아준 것에 대해 협회에서는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겠지만, 그만큼 이 부분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소명해 주셔야 할 겁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지금요.”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정철규가 앞장섰다.
“이 친구가 없었다면 민간인 사망자가 얼마나 나왔을까.”
“…….”
“서울역 한복판에서 일어난 게이트다. 못해도 1만 8천 명 이상은 죽었을 거란 말이지. 그걸 혼자서 막아낸 사람한테 상을 줘도 모자랄 판에. 뭐?”
정철규가 언제라도 튀어 나갈 준비가 됐다는 듯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흉흉한 기세가 사방에서 넘실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