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서울역 게이트 (2)
번뜩이는 놈의 눈이 나를 발견했을 때였다. 순간 시야 가득 초록색이 확대됐다. 동시에 몸이 본능대로 움직였다.
콰앙!
손끝이 저릿했다. 게이트의 1열에 있던 놈이다. 가장 약할 것이 분명한데도 검 끝에서 묵직한 힘이 느껴졌다. 롱소드가 고통스럽다는 듯 이리저리 울어댔다.
단번에 깨달았다. 놈을 이길 수는 있지만, 지금도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는 놈들까지 다 막을 수는 없다.
협회에서, 혹은 다른 곳에서 지원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 그게 내 임무였다. 순간적으로 나도 느낄 만큼 침착한 상황판단이 이루어졌다.
검을 한 번 털어내는 것으로 롱소드를 진정시킨 후였다. 방금 전 나와 맞붙었던 놈이 괴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왔다.
한 번의 교전으로 놈이 할만하다고 느낀 걸까. 달려오는 녀석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오크의 호승심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방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놈이 전력 질주로 내 앞에 당도했을 때였다. 가속으로 몸을 움직였다. 놈의 입장에서는 내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케륵!”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를 주먹으로 가로지른 놈이 고개를 ‘갸웃’ 했을 때였다. 놈의 목에서 실선 하나가 그려지는 것을 끝으로.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스템부터가 말해주고 있었으니.
[경험치 획득 : 48exp!]
넉넉한 경험치에 만족하던 것도 잠시였다. 쩍 벌어진 공간에서 밀려드는 놈들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사, 살려주세요!”
사람들의 비명이 이곳저곳에서 산발적으로 울렸다.
콰과과과!
서울역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대피할 수 있을 리가. 지금부터는 온전히 운의 영역이다. 도망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부모님이 겹쳐 보였다.
“무슨!”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몸을 날렸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남자에게 다가간 즉시였다.
집채만 한 지네형 몬스터, 센디타이드가 남자를 집어삼키기 직전이었다. 순간 놈이 위협을 느낀 듯 몸을 틀었지만 그때는 이미 오러 블레이드가 놈의 아가리를 찢은 후였다.
땅바닥에 놈의 사체가 떨어졌다. 동시에 울컥하고 놈의 목구멍에서부터 액체가 쏟아졌다.
후두둑!
놈들의 피는 독한 산성이다. 민간인에게는 치명적일 게 뻔했다.
“숙여!”
덜덜 떨고 있는 남자를 감싸 안은 직후 뜨끈한 것이 등에 쏟아졌다. 그 정도로는 끄떡없다는 듯 헬리오스가 놈의 피를 털어낸 즉시였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남자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 입을 뻐끔뻐끔 대는 것을 본 후 곧장 몸을 움직였다.
“꺄악!”
내 체감과 상관없이 놈들이 여기로 넘어온 지는 채 1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쑥대밭이 되고 만다.
콰앙!
환장할 노릇이었다. 공중형 몬스터가 쏘아댄 불덩이에 기어코 건물 한 채가 무너졌다.
거기에 깔린 사람들은….
도심에서 발생하는 게이트를 재앙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 차원에 존재한다고 밝혀진 그것들이 여기로 넘어오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다. 물론 몬스터가 친절하게 예고 따위를 해줄 리도 없고.
오늘처럼 도심에서 게이트가 열릴 때는 생지옥이 따로 없는 것이다. B급 몬스터만 넘어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이 부리는 수하들도 함께 딸려온다.
한 종류만 넘어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고. 민간인에게는 B급이나 D급이나 모두 똑같이 위험하다. 그게 문제였다.
“후우.”
주위의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있었지만 심장은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무슨 연유 때문인지는 몰랐지만 다행이었다. 감정에 지배당해서 큰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에 넘쳐흐른다. 모두를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능력을 자학할 틈 따위도 없다. 이 시간에 한 발이라도 더 움직여야 한다.
타다다닥!
벽을 박차며 하늘을 유영하고 있는 몬스터에게 몸을 뻗었다. 중력을 거부하듯 내 몸이 높게 솟구친 즉시였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쉐아악!
검 끝에 맺힌 기운이 놈에게 쇄도한 즉시 몬스터의 몸이 반으로 갈렸다.
느껴진다. 지금 이 긴박한 순간에도 성장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상황이라 더 빠르게 강해지고 있다.
그래도 부족하다.
한 마리를 없애봤자 두 마리가 더 게이트에서 튀어나온다.
콰드득!
놈들을 죽이고 죽였다. 실시간으로 내 검술이 깔끔해졌다. 자질구레한 검로는 모두 없앤다. 감정은 배제하고 놈들의 급소만 찌르는 살검만 남겼다.
[상급검술의 숙련도가 높아집니다.]
[검술이 더욱 정교해집니다.]
[레벨업!]
내 밑으로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쓰러졌다. 무아지경의 상태였다. 그럼에도 부족했다.
“미친새끼들.”
끝없는 몬스터의 행렬을 막으려면….
그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마치 사자후를 터트리듯 기운을 성대에 집중시킨 후였다.
“우와아악! 이 개새끼들아아악!”
탱커들의 스킬이 아니었다. 단순히 기운을 잔뜩 담아 쏟아낸 것에 불과했다. 그래도 효과는 충분했다.
저릿저릿한 놈들의 시선이 단번에 내게로 쏟아졌다. 그 기세에 저절로 손이 떨렸다. 내가 저질러 놓고도 순간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지금 쇄도하는 공중형 몬스터를 먼저 없앤 다음, 마법을 부리는 무쉬, 오크, 리저드를 마지막으로 없앤다.
그런 생각으로 공중으로 도약했을 때였다.
“…어?”
내게 달려오고 있는 수백 마리의 몬스터 뒤로 오크 하나가 보였다. 놈이 민간인 하나에게 뛰어가고 있었다.
판단은 빨랐다. 놈이 뛰어가는 쪽으로 나도 몸을 날렸다. 나를 따라 몬스터 군단 또한 우르르 쏟아져 왔다.
오크가 대상으로 삼은 것은 여자였다. 우뚝 선 채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여자. 두려움에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겠지.
순식간에 여자 앞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면. 전장의 한복판에 있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녀에게 달려가면서도 의문스러울 정도로.
사람이 이렇게나 예쁠 수가 있나?
칠흑처럼 새카만 머리카락과 대비되게도 눈처럼 새하얀 피부, 연꽃을 겹쳐 놓은듯한 입술.
그녀의 웃음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목숨이라도 바칠 남자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나만 해도 그렇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따위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그때 여자와 내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여자가 웃었을 때였다. 순간 세상이 밝게 빛나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웃어?’ 라는 의문이 들지도 않았다. 쏟아지는 몬스터의 강대한 파동도 이때만큼은 느껴지지 않을 만큼 화사한 웃음이었다.
퍼뜩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도망치라고 말하려던 때였다.
“내 뒤에 꼭 달라붙어 있어요.”
그러기에는 연약한 민간인의 체력으로는 무리였다. 차라리 내 뒤에 있는 게 더 안전하면 안전했지.
그녀를 지키면서 싸우려면 예상보다 더 고전해야겠지만. 지원군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런 생각으로 놈들에게 기합을 질렀을 때였다.
“…스템은 위대하시다. 정말이었군요. 아아.”
그녀가 뒤에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목소리만으로도 사람을 홀리기에 충분할 만큼, 외모와 비견될 만큼 매혹적인 음색이 귀를 덮쳤다.
정말 매혹 마법에라도 걸린 걸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콰앙!
전략을 수정했다. 공중형 몬스터의 공격은 온전히 받아낸다. 여자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었다.
오크의 주먹과 부닥쳤을 때였다. C급 수준이 아니다. 명백한 B급이었다. 놈의 장비만 봐도 그랬다.
검이 찌르르 울었다. 오러 블레이드로 미리 코팅해 놓지 않았다면 단번에 검이 깨졌을 것이다.
지능적이게도, 놈들은 내가 지킬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늘에서 불덩이가 쏟아진다. 내 뒤에서 아직까지도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여자를 향해서.
미처 피할 수 없다. 있는 그대로 맞아야 했다.
콰아앙!
헬리오스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누적된 데미지에서 살려달라고, 봉인된 능력치로는 이게 한계라고 말이다.
그래도 버텨야 한다. 전략을 바꿨다. 힘을 아끼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죽죽 뽑아냈다.
“…아아! 벌써!”
뒤에 있던 여자가 흠칫 놀란 듯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럴 만했다. 수백 마리의 고등급 몬스터의 기세를 민간인이 버틸 수 있을 리가. 당장 혼절하지 않은 게 기특할 정도였다.
“뒤로 이동해!”
가혹할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공격의 범위를 최대한 줄여야 했다. 대견하게도 여자가 작게 “…네.” 하더니 천천히 이동했다.
촤악-!
교활한 리저드 하나를 벤 후였다. 그게 신호였다. 놈들이 한 번에 내게로 쏟아졌다.
[중첩된 저주 : 일부 저항하지 못합니다.]
어김없이 놈들의 간악한 저주가 내게 붙었을 때. 헬리오스가 도망치듯 인벤토리로 돌아갔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헬리오스의 심장을 장착하지 못합니다.]
[아이템의 내구도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일정 기간 봉인됩니다.]
“개 같은!”
무려 B등급의 게이트다. 아드레날린 부스트도 재사용 대기시간에 걸려있다. 헬리오스의 심장도 벗겨졌다. 맨몸으로 놈들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스화아아악!
혼신을 다해 오러 블레이드로 놈들을 쓸어봤자다. 한 마리를 죽이면 두 마리가 달려들고, 세 마리를 죽이면 열 마리가 나를 덮쳤다. 그 와중에 뒤에 있는 여자까지도 지켜야 한다.
젠장할. 지금 죽을 수는 없는데. 순간 몸속의 마나가 텅텅 비었다는 게 느껴졌다.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롱소드가 깨졌다. 죽음이 바로 앞에 당도한 것이다.
“미안하지만 어쩔….”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내 바로 뒤 꼭 붙어있던 여자가 내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어?”
뭐라 반항할 틈도 없이,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은은한 나뭇잎 향이 번지는 것과 동시에 여자가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못 믿겠어. 네가 정말 그분께 선택받은 자라고?”
짜증이 한가득한 그녀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앞에는 도마뱀 무리와 오크, 저 멀리서는 얼음송곳이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여자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위에서 아래로였다. 마치 이 근처만 시간이 느리게 움직이는 듯 천천히 그녀의 손이 한 획을 내리그었다.
백옥 같은 손이 허공을 갈랐을 때였다.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방금까지 흉흉한 기세로 달려들던 놈들의 몸이 굳은 듯 멈춰 섰다.
영상의 일시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듯했다. 내 바로 앞에서 대가리를 들이밀고 있던 센디타이드와 도끼로 나를 찍으려던 오크는 물론이고, 공중에서 비행하던 것들까지도.
눈알만큼은 예외였던지, 놈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이리저리 눈알을 굴려댔다.
내 덜덜 떨리는 손을 미루어보아 그녀의 마법이 내게도 미친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죽어라.”
그녀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울렸을 때였다. 작게 말했는데도 내 귀에는 또렷하게 들렸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무렵.
퍼억!
도끼를 든 녀석의 대가리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고, 놈의 몸은 그대로 허물어졌다.
퍼억! 퍼억!
곧이어 거대한 지네도, 빌어먹을 파충류도 마찬가지였다. 말 한마디였을 뿐인데 놈들의 대가리가 터져나갔다. 공중에서 뭔가가 뚝 떨어졌다.
목이 없는 가고일과 그와 똑같은 쥐새끼 한 마리였다.
[경험치 획득 : 67exp]
[경험치 획득….]
[경험….]
[레벨업!]
[레벨업!]
신기할 노릇이었다. 파티를 맺은 것도 아닌데 경험치가 들어오고 있다. 좀 전까지 팽팽하게 돌아가던 머리가 멈췄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그 와중에도 강한 독기를 띈 놈들의 피는 어떤 막에 막힌 듯 단 한 방울도 내게 닿지 않고 있었다. 이 여자가 마법을 부린 게 분명했다.
그때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화를 주체못하겠으면서도, 차마 날 건드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영광으로 알아.”
화르륵!
몬스터의 사체에 불이 붙었다. 이 정도의 마법을 부리려면 심장에 얼마나 많은 고리가 있어야 되는지 짐작도 안 됐다.
하나만은 분명했다. 내 생사여탈권이 몬스터에서 이 여자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기회라고 해야 할까. 부디 말이 통하는 사람이기를 바라면서 입을 떼려던 순간.
그때, 시간이 정지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운행하던 공기가 멈추고, 불꽃을 내뿜는 몬스터의 잔해들도 사진을 찍은 듯 동작을 멈췄다.
바로 앞에 있는, 이제는 정체불명의 초능력자로 보이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향해 천사 같은 미소를 띤 채 우뚝 서 있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이 공중으로 부양했다. 아차할 틈도 없이 빠른 속도로 내 몸뚱아리가 땅에서 멀어졌다.
사람은 물론이고 건물까지도 한 점으로 보였을 때였다. 보이지 않는 뭔가가 내 몸을 집어삼켰다.
이제까지도 이런 식이었나. 처음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미래로 가는 순간을 포착해 낸 것이다. 어쨌거나.
이 정체불명의 마법사가 내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게 분명했다. 불현듯 내 의식이 미래를 향해 빨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