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오대산 (3)
지금이 몇 번째 방이더라. 벌떡 일어나는 즉시 롱소드를 들었지만 이미 전투는 끝나 있었다. 털썩 주저앉아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꿈인지 현실인지도 분간이 안 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이다.
듬성듬성 날아간 기억의 파편을 모아야 했다.
가만히 떠올려 보자 첫 번째 파편이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여섯 번째 방에 진입하던 때였을 것이다. 그동안 걸린 시간이라고 해 봐야 이틀. 그만큼 우리는 놀라운 속도로 몬스터를 헤치고 나갔다.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놈들의 공격을 막아주는 탱커 역할은 헬리오스의 심장이, 쇄도하는 마법을 방해하는 원거리 딜러는 임한나가 도맡았다. 그래도 문제없었다. 내심 보스전까지는 이런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곧이어 두 번째 기억의 조각이 떠올랐고.
그때 놈이 나타났다. 중대장이라 이름 붙은 쥐. 화려한 로브로 몸을 감싸고 있는 놈을 보자마자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었다.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아카데미의 교수가 화면에 뜬 쥐새끼를 보고 유독 진절머리 치던 모습. 기억하기도 싫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이다.
중대장이 그렇게나 강한가?
세 번째….
레인저가 보고해오는 숫자부터가 그랬다. 소대장 다섯을 위시한 쥐새끼들의 숫자가 백 오십을 넘어섰다.
쿠웅!
놈들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 그제야 중대장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놈의 마법은 가히 절정이었다. 오크 제사장조차 마법에 있어서는 놈에게 안될 정도로.
놈의 주특기는 버프계열이었다. 짧은 순간, 일반 병사 하나하나가 소대장이 되고 중대장을 지키는 다섯 마리의 소대장은 또 다른 수준의 것들이 됐다.
놈들의 광기는 종교의 수준이었다.
중대장의 버프를 받은 쥐새끼들은 마치 그것이 큰 은총이라도 되듯 전신을 부르르 떨며 내게 몸을 던졌다.
“임한나!”
네 번째.
쿠구궁!
불똥이 튈 때마다 헬리오스가 괴성을 지른 기억이 남아있다. 아쉽게도 놈들을 일거에 쓰러트릴 광역 스킬은 그때까지만 해도 없었다. 한 놈, 한 놈. 우리는 그렇게 그것들을 무너뜨리고 나아갔다.
다섯 번째.
소대장 셋의 목을 벨 때였다. 중대장의 기력이 다한 듯 쥐새끼들의 눈빛이 본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지금을 놓칠 수 없다!
여섯.
중대장의 씹어먹어도 모자랄 몸뚱아리를 몇 번이나 짓이겼는지 모른다. 그다음이었다. 머리가 핑 돌더니 의식이 끊어졌다.
일곱.
“4일하고 아홉 시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가는 임한나가 주기적으로 말해줬었다. 우리는 이틀 동안 기절해 있었다.
헬리오스의 빌어먹을 봉인된 능력은 내구도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헬리오스가 충전되기까지 기다리느냐, 아니면 헬리오스의 심장 없이 다음 방을 진행하느냐를 결정해야 했다.
여덟.
보스전을 상정한다면 헬리오스의 심장을 인벤토리에 넣어둔 채 두 개의 방을 클리어해야 했었다. 인벤토리에 갑옷을 집어넣은 직후, 두려움에 덜덜 떨리던 몸이 기억난다.
아홉.
내 정신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안 그래도 조각난 기억들이 이후부터는 희미한 감정만 남겨져 있다.
고통. 고통. 고통.
[상태이상 : 저주에 빠집니다.]
[마법저항력이 높습니다.]
[일부 저항에 성….]
[상태이상 : 저주…!]
[상태이상 : 저주…!]
[중첩된 저주 : 저항하지 못합니다.]
끔찍한 고통만 생각난다.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발동했습니다.]
[레벨업!]
[깨달음을 얻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마지막…열.
여덟 번째 전투를 승리로 끝마친 대가는 무자비했다.
특히나 임한나는.
그녀의 상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중대장 하나에게 가슴을 관통당한 것이 컸다.
징조는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 여섯 번째 방에서부터였을 것이다. 몇 겹이나 중첩된 저주가 임한나를 덮쳤었다. 거기에 더해 강화된 무쉬군단의 마법 세례는 임한나가 버티기엔 가혹한 것이었고.
전투 직후.
감전당한 듯 몸을 부르르 떨며 게거품을 물었던 임한나를 두고 결정을 내렸을 때였다.
공략실패? 지금까지 버틴 임한나에게 찬사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탈출석을 꺼낸 직후였다. 그런데 그때 임한나의 간곡한 눈빛이 있었다.
‘아직. 아직이야.’
비몽사몽한 가운데 탈출석을 깨려던 나를 막던 임한나의 정신력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동료로서 녀석을 존중해야 했다. 하루를 두고 기다렸다. 가지고 온 포션을 모조리 들이부었음은 당연하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녀석이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면 망설임 없이 이곳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되려 아홉 번째 방을 클리어한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있다. 아껴뒀던 헬리오스의 심장을 장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투의 잔해는 어쩔 수 없었다. 숨 한 번 쉴 때마다 폐가 비명을 지른다. 찢어졌던 상처는 아직 완전히 아물지 못했고 끊임없이 쏟아지던 저주도 잔여물로 남아있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 몸이 회복됐다면. 보스몹이 있는 방으로 가는 문이 죽은 쥐새끼들의 시체 사이로 보였다.
다음 방으로 건너가야 한다. 남은 방 하나를 치우고 나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유일하게 남은 원동력이었다.
그 전에.
“임한나.”
쇳소리가 던전을 울렸다. 내 부름에도 임한나가 움직이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임한나의 상태를 살폈다. 숨소리가 가늘지만 이어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임한나의 한계는 여기까지다. 녀석의 의식이 남아있을 때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한 번 더 임한나를 불렀을 때였다. 임한나가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리며 몸을 일으켰다. 임한나가 몇 번 숨을 고른 이후였다.
“…나. 더 이상 안 되겠지?”
아마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두운 동굴 속 적막이 흘렀다. 녀석도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게 아니다.
“보스전이잖아. 나는 방해만 될 거야.”
말없이 탈출석을 건네줬다. 녀석이 이번에는 그것을 막지 않았다. 임한나는 그 정도로 아둔하지 않다.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이던 임한나가 일어났다. 그러자 임한나의 이마에서 시퍼런 눈 하나가 그려졌다.
임한나가 어떤 스킬을 사용 중인지 알고 있다. 초조하게 그것을 기다리던 때였다.
아!
다행이다. 임한나의 표정이 밝았다.
“걱정했던 대대장은 없어. 중대장만 셋이야.”
보스전에 돌입하기 전, 어떤 몹이 있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했다. 전략을 세우는 건 그다음일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던전에 입장한 후 가장 기분이 좋은 순간이었다. 이런 곳이 있다. 특정 보스몹이 서식하는 게 아니라 단지 숫자만 늘어날 뿐인 곳.
“너라면. 너라면 혼자라도 공략할 수 있겠지.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내가 없었더라도 넌 충분히….”
말도 안 되는 소리. 임한나가 이 지옥 같은 소굴에서 내게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녀석의 말을 끊었다.
“임한나. 바깥에서 보자. 아마 포션을 준비해 둬야 할 거야. 엄청 아플 예정이거든.”
내 말에 임한나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9일 하고 스물두 시간째야.”
그러며 내 눈을 쳐다본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었다.
‘꼭 살아남아.’
그것을 끝으로 임한나의 몸이 빛과 함께 사라졌다.
“후.”
던전에 진입하기 전, 데드라인으로 삼았던 시간이 한 시간 남았다. 충분히 넉넉했다. 전투는 아마 10분 안에 끝날 테니까.
완전한 고독이 찾아왔다. 칠흑 같은 어둠 속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 들렸다.
어둠과 고독. 헌터의 오래된 친구다. 이것에 대한 교육은 충분히 받은바, 암흑천지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 덕분에 상념에 잠길 수 있었다.
이참에 내 상태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상태창.”
[이름 : 이태진
레벨 : 107
스킬 : 오러 블레이드(A), 아드레날린 부스트(A), 상급검술(A), 일점폭발(B), 집중(B), 도약(B)
특성 : 검신의 축복(S), 무아지경(B), 인내하는 자(B), 전사(B)
체력 : 166
마력 : 150
근력 : 212
민첩 : 209
B급 이상 스킬과 특성만 나열해도 이 정도다. C와 D급에 머물던 스킬들도 내가 성장함에 따라 등급이 오른 것이다.
스킬 뿐일까. 능력치만 따져도 150레벨에 근접하며 특성창의 검신의 축복은 수치로 따질 수 없는 노릇이다.
냉정하게 생각해 봐도 지금의 내 수준은 160레벨이라 봐도 됐다.
또 하나.
헬리오스의 가호 없이 녀석들의 마법을 온몸으로 얻어맞으며 싸우던 그때. 기억에는 없지만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스킬창 가장 상단에 있는 오러 블레이드가 그 증거였다. 각성하던 순간부터 그토록 염원하던 것이 드디어 내 손에 쥐어진 것이다.
상급 검술에 도달한 자들만 얻을 수 있는 스킬이지 않은가. 물론 한석훈처럼 완전히 푸른빛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쥐새끼들 잡는 것쯤은 문제없었다.
화신의 살수들이 이 타이밍에 왜 생각나는지는 몰랐다. 아닌 듯해도 첫 살인의 충격이 컸던 걸까.
어쨌든.
그 정도 수준의 것들은 이제 숫자가 몇이든 의미가 없어졌다. 무릇 각성자들의 성장에 따른 강함이란 덧셈이 아니라 곱셈인 법이다.
시간이 됐다.
번쩍하고 눈을 떴다. 던전의 마지막 관문이 앞에 있었다. 느껴지는 파동이 거셌다. 놈들 또한 기세를 감추지 않는 것이다.
바라던 바다. 벌컥 문을 연 순간 놈들이 보였다. 동시에 세로로 길게 늘여진 붉은 빛 수백 개가 순식간에 나를 향해 도약해왔다.
“와라!”
나 또한 놈들을 향해 몸을 솟구쳤다.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발동합니다.
남은 시간 : 05:00]
[오러 블레이드를 발동합니다.]
[집중을 발동…!]
[도약…!]
앞에서 마법을 뿌리려던 잡몹 다섯이 칼질 한번에 쓸려나갔다.
[무아지경에 빠집니다.]
놈들 하나하나를 일일이 죽여야 했던 처음과는 달랐다.
서걱-!
번들거리는 푸른빛이 지나간 자리마다 잡것들이 두부처럼 갈려 나갔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상태이상 메시지는 무시했다. 사방에서 범람하는 마법도 상관없다. 실시간으로 나를 옥죄는 디버프까지도!
어디냐!
중대장을 찾는 내 눈빛이 놈들과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잡몹들을 죽여나갔다.
쌓아왔던 분노를 쏟아내듯 전신의 힘이 끓어넘쳤다.
[상태이상 : 무기력에 빠집니다.]
[마법저항력이 높습니다.]
[저항에 완전히 성공했습니다!]
순간 중대장 하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그 즉시 바람을 가르고 놈을 향해 몸을 뻗었다.
보인다. 제 신세도 모르고 부하들 사이에서 여유롭게 전투를 구경하고 있는 놈이. 나를 발견한 놈이 그제야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숨기려 했지만.
“죽엇!”
스악!
***
“푸확!”
던전에서 빠져나온 즉시 안에 있던 피를 게워냈다.
“큭큭.”
그럼에도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놈들을 쓸어버렸다. 기분이 좋을 수밖에.
[던전을 공략했습니다.]
[경험치 획득!]
[골드박스 +1, 실버박스 +1]
[레벨업!]
[레벨업!]
.
.
.
내 수고를 보상하듯 메시지가 끊임없이 쏟아졌다.
“이태진!”
임한나가 저 멀리서 내게 뛰어오고 있었다. 어떻게 구했는지도 모를 포션을 잔뜩 들고서. 이 순간 녀석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기분 좋았다. 그대로 대자로 뻗어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만끽했다. 시원한 공기가 폐부를 감쌌다.
“입 벌려.”
헥헥거리던 임한나가 다짜고짜 내 입을 열고 포션을 부어대도 괜찮을 정도였다.
“성공한다고 말했….”
입을 연 순간이었다.
팟!
지금만큼은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는데. 분위기를 깨고 정신이 미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어. 그런데 이걸 미래라고 할 수 있나?
초능력이 보여주는 환상이 지금까지와 판이하게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