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오대산 (1)
괜한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된다. 때문에 녀석들을 죽이는 건 곤란했다.
“얼레?”
녀석이 비틀어진 손목을 멍하니 바라봤다. 약에 취한 탓이었다. 차라리 통각이 살아 있었다면 졸도라도 했을 텐데.
“이 개 같은 것들이!”
방금까지 헤실거리던 놈이 갑자기 성을 내며 칼을 휘둘러 댔다. 각성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어설픈 움직임으로.
빠악!
녀석의 안면에 주먹을 꽂은 직후였다.
“이런 씨발! 다 덮쳐!”
털보의 명령이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내 입장에서 녀석들은 민간인과 다를 바 없다. 고려해야 할 건 힘 조절뿐이었다.
퍽! 퍽! 퍽!
한 방에 한 놈씩.
놈들의 더러운 면상에 주먹을 먹여줄 때마다 예외 없이 뒤로 넘어갔다.
“이, 이런 미친…! 너, 너! 내가 얼굴 다 봐놨어!”
털보가 푸들푸들 얼굴을 떨며 씨알도 안 먹힐 협박을 해왔다. 그러면서도 털보는 내가 다가올 때까지 손에 든 중식도를 휘두르지도 못 했다.
아까부터 거슬렸던 누런 이빨을 박살 내려 할 때였다.
“그쯤 하지.”
뒤에서부터 들려온 음성이었다. 뒤를 돌자마자 인벤토리 안에 잠들어 있던 롱소드를 꺼낸 것은 물론이다.
캉!
제대로 된 각성자가 있기는 했다.
“화이!”
털보의 환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야?”
화이라 불린 자식이 나와 대치하면서 털보에게 물었다.
“이것들이 우릴 건드렸어. 교육해주고 있던 참이었다.”
“개발리던 참이었군. 이봐, 친구들. 내 부하들이 무례를 범했어. 사과하지.”
녀석이 갑자기 두 손을 들고 항복의사를 표해왔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놈의 점잖은 척이 역겨웠다.
“이대로 여길 나가면 너희들은 제 발로 집에 못 가. 곳곳에 숨어있는 내 친구들이 많거든.”
“얼마든지.”
내 대답에 녀석이 피식 웃는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찾는 게 뭐야. 사과의 의미로 선물하지.”
“쯧.”
놈들을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몸을 돌리고 나가려 했는데 임한나가 입을 열었다.
“C급 던전 탈출석. 내놔. 아니면 넌 죽어.”
어느새 임한나의 활이 녀석의 안면을 조준하고 있었다.
“오우! 어쩐지. 털보새끼야. 사람 봐가면서 덤볐어야지. 너희 주제에 C급 헌터를 건드려?”
시위에 걸린 화살이 무섭지도 않은지 화이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손에는 돌멩이 두 개를 들고.
“여기. 선물이야.”
우리는 녀석이 휙 던진 그것을 하나씩 받아들었다.
“다음번에 올 땐 내 이름을 대면 될 거다. 여기뿐만 아니라 암시장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야. 이놈들은 내가 이번 기회에 확실히 교육시켜 놓지.”
화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쓰러져 있는 것들을 툭툭 건드렸다. 문을 열고 나가는 우리에게 손까지 흔들면서.
여러모로 재수 없는 놈이었다.
술집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화이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우리를 지켜보는 더러운 시선이 곳곳에 있었다.
다음?
여기에 다시 올 일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암시장을 빠져나왔다.
“모로 가도 서울은 왔으니 된 거 아닐까?”
임한나가 내게 해명을 했다. 속상한 표정이 꼭 비에 젖은 강아지 같았다.
“꼭 비에 젖….”
생각해보니 그렇게 말하면 화낼 것 같다.
“뭐? 비가 온다고?”
“아니. 이동하자고.”
날이 밝고 있었다.
***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리는 건 물론이고 전화기도 공기계로 대신했다. 신분을 특정할 만한 건 모조리 두고 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속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탔다. 휴게소에 들릴 때마다 어김없이 옷을 갈아입은 것까지.
우리는 그렇게 모습을 바꿔가며 이동했다. 그 와중에도 불평 한마디 없는 임한나가 고마웠다.
오대산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휴대폰을 열자 시간이 뜬다. 오후 두 시 정각이었다.
“올라가자.”
“응.”
길은 모두 외워 뒀기 때문에 문제 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과정이 사라진 것이다. 던전이 열리는 걸 어떻게 알고 미래의 나는 여기까지 찾아왔을까. 현재의 나는 오대산에 오는 동안 던전 생성과 관련된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저 미래의 내가 온 길을 따라왔을 뿐. 선후(先後)가 따로 없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이번뿐만이 아니다.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얻었을 때도 그랬다. 미래의 나는 어떻게 A급 스킬이 거기 있는 줄 알고 브론즈 박스를 골랐지?
어쩌면. 예정된 미래가 아니라 그저 누군가의 환영 마법일 뿐이라면? 이유야 어찌 됐든 말이다.
“후.”
거친 숨을 토했다. 신비로운 능력에 한 발자국 다가간 줄 알았는데 두 발 멀어진 느낌이었다.
“여기다.”
복잡한 생각과 달리 몸은 잘 움직였다. 경로는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여기라고? 아직 아무것도 없는데?”
미래의 내가 보여주었던 장소에 도착했을 때였다. 임한나가 주위를 둘러보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나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던전이 어디있는지 찾는 모습이었다.
“이제 곧…. 지금이군.”
지이잉!
약속한 듯 빈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그럴 줄 알았다. 설령 환영이라 한들 그것은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진짜였잖아!”
임한나가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봤다. 설마설마했다며 이리저리 떠드는 모습이 소풍 나가는 초등학생과 다를 바 없었다.
그것도 잠시, 임한나가 던전을 파악하려는 듯 눈을 감고 집중했다.
“몬스터 종류는 알 수 없지만. 일방통행처럼 보여. 확실해. 미로는 없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열흘이라는 조건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지만 이 정도면 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정말 들어갈 거냐? 지금도 늦지 않았어.”
“동기사랑 나라사랑. 누나는 너 혼자 못 보낸다?”
녀석이 내 엉덩이를 툭툭 쳤다.
“…고맙다 임한나. 이건 빚으로 달아둬.”
“까먹지 마라.”
[던전에 입장하시겠습니까?
등급 : C]
“그래. 입장한다.”
일단은 앞만 바라볼 때다.
***
과연 화신그룹이 애지중지하는 후계자다웠다. 거주지에 침입하는 것부터가 난제였다. 고레벨의 각성자 열 명이 항시 하오란의 거처를 지키고 있었다.
“놈들을 속이고 몸을 숨기려면 한 달은 걸릴 겁니다.”
그동안 음식은 물론이고 물 한 모금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하물며 그렇게 잠입한다 해도 문제였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기량으로 놈을 순식간에 제압한 뒤 철통같은 호위까지 뚫고 빠져나가야 한다.
“불가.”
한석훈이 고개를 저었다. 기다렸다는 듯 다음 방안이 튀어나왔다.
“사흘 뒤, 하오란이 산둥에 갈 일이 있습니다. 자세한 내막까진 알아내지 못 했지만 커루이안과 세력구도 협상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수행원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평소라면 다섯을 대동합니다만, 사안이 큽니다. 열은 예상해야 합니다.”
하오란의 경로를 파악해뒀다. 과연 중대사안이라는 정보는 거짓이 아니었다.
하오란은 호위병 열다섯을 대동한 채 위풍당당하게 산둥으로 떠났다.
“불가.”
놈들을 덮쳐봤자 암습의 의미가 없다. 화신에게 빌미만 만들어 줄 뿐이다.
한석훈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다음은?”
“창화루. 하오란이 자주 애용하는 기루입니다.”
태블릿에 사진이 떴다.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전각이었다. 손가락을 넘기자 상세 이미지가 뜬다.
“하오란은 늘 꼭대기 제일 끝 방을 사용합니다.”
넓은 방 안으로 몸을 숨길만 한 데가 곳곳에 보였다.
“다른 성으로 출장을 갔다 오면 꼭 들리는 곳입니다. 오히려 잘된 일이지요. 이곳에 올 때 놈은 늘 혼자니까요.”
기대해 볼 만했다. 기루의 직원들은 비각성자들이었다.
“잠시만 보류해봐.”
작전을 시작할 때 한석훈은 철저한 편이다. 혹시 모를 함정에 대비해 며칠을 그곳 근처에 머물면서 기루를 파악했다.
“각성자 몇이 지키고 있긴 하지만 별것 없습니다. 민간인에게나 먹힐 수준입니다.”
한석훈이 보기에도 그랬다. 철저하게 상류층을 위한 공간이었다. 이런 곳들의 특징이 있다.
애초에 괜한 시비를 걱정할 일 없는 손님들만 온다는 것. 경비에 투자할 돈으로 차라리 프라이버시에 신경 쓴다는 뜻이었다.
“절묘해. 마치 여기에서 덮치라고 아예 자리를 깔아준 수준이야.”
“…….”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지금을 놓치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모른다. 작전 개시.”
한석훈 앞에서 조용히 답을 기다리던 일성의 암살자 넷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률을 따지자면 80%가 넘는다.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창화루에 잠입하는데도 무리가 없었다. 한 명 한 명이 일성에서 자랑하는 고수들이다. 기척을 숨기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한석훈은 천장 틈에 몸을 숨겼다. 지금부터 음식과 물을 섭취해서는 안된다. 온전히 마나를 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동료들에게 눈짓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했던 자리에 숨어든 모습이었다. 한석훈이 신호를 주자 모두 눈을 감고 동면에 들기 시작했다.
생체시계가 느리게 흘러갔다. 가팔랐던 심장박동이 점점 느려진다. 1분에 80번씩 전신에 피를 공급하던 그것이 10분, 1시간, 하루 단위로 바뀌었다.
완전히 기척을 감췄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비각성자는 물론이고 수준이 낮은 것들이라면 바로 옆에 있어도 인기척을 못 느낄 정도다.
이 정도면 됐다. 하오란은 반드시 이 자리에서 죽는다. 확신이 들었다. 약속된 순간이 왔을 때였다.
“크하하!”
이미 술에 취한 듯 벌게진 얼굴이었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하오란의 뒤로 여자 셋이 따라 들어왔다. 끝이 아니다. 수행원으로 보이는 두 명이 뒤이어 들어왔다.
녀석들의 수준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려면 자신도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결정은 빨랐다. 지금 와서 작전을 물리기에는 들인 공이 컸다. 두 명 정도라면. 이 정도는 예상범주에 들어간다. 대세에는 지장이 없을 터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일성의 전사들이다. 다섯의 합격이면 한 칼에 녀석들의 목을 베고도 남았다.
“커루이안의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습니다.”
“큭큭. 아예 카메라로 찍어둘 걸 그랬어.”
하오란은 작정한 듯 술을 들이부었다. 녀석의 호위를 자처하는 놈들도 그랬다. 마나로 술기운을 정리하는 것 없이 모두 받아들이고 있었다.
‘운이 좋다.’
일이 더 쉽게 풀리는 듯싶었다.
째깍 째깍.
약속했던 시간이 다가왔다. 술판은 점점 무르익었다. 그럴수록 하오란은 조금의 대비도 없이 완전히 풀어진 모습이었다.
녀석이 여성의 가슴을 주무르고 있을 때였다. 번쩍하고 한석훈이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천장이 무너졌다.
인벤토리 안에 있던 아이템들이 장착되기까지도 순식간이었다. 마나를 전신에 퍼뜨리며 시선을 돌렸다.
동료들 또한 사방에서 놈을 향해 몸을 던지고 있었다.
순간에 하오란이 술기운을 배출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런데.
‘웃어?’
죽음을 앞두고 미친 것일까. 뭐가 됐든 상관없다.
“뻔하다. 너희 잡것들은 왜 이리 뻔한 짓을 못해서 안달이냐.”
하오란이 나지막이 말했을 때였다. 순간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기세가 강했다. 한둘이 아니다.
촤악!
한석훈의 가슴이 뜨끈해진 것도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