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S급 아이템 (3)
시원하고 맑은 공기가 느껴지는 가운데 오대산이라 적힌 팻말이 가장 먼저 보였다.
산?
근미래였다. 친절하게도 그곳의 내가 휴대폰을 열어 날짜와 시간을 알려준 것이다.
오늘로부터 사흘 후, 오후 두 시.
참사의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게 사실이다. 조금 맥이 빠진 가운데 계속해서 나를 지켜봤다.
그나저나 나는 왜 이런 곳을 홀로 왔을까. 그것도 마스크와 모자로 꽁꽁 얼굴을 숨기고 묵직한 백팩까지 멘 채로 말이다.
슬그머니 불길한 예감이 드는 가운데 내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마디 말도 없이. 그럴만했다. 인적이 드문 곳만 골라서 다니니까.
점점 조마조마했다. 미친 짓을 저지를까 봐. 혹시 몰라 일단 꿈 속의 내가 이곳에 오기까지의 길을 모두 외워 두었다.
한참을 걸었던 그때.
인적이 없는 곳이었다. 내가 숨을 돌리고 정면을 바라볼 때였다.
지이잉!
놀라운 순간이었다. 현실이었다면 소리를 질렀을 만큼.
텅 빈 허공의 공간이 일렁인다. 던전이 생성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장면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마치 알고 있었던 것 마냥.
어떻게?
의문은 접어두고 집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공간의 일렁임 끝에 쩍 하고 허공이 완전히 벌어졌을 때였다.
철컥철컥!
헬리오스의 심장은 던전에서 흘러나오는 신비로운 빛마저 덮었다. 그것이 내 몸에 완전히 장착됐을 때였다.
놀라운 광채에 감탄하던 것도 잠시. 멋대로 입이 움직였다.
“입장한다.”
이 미친!
설마설마하던 일이 벌어졌다. 혹시나 했는데 파티로 보이는 인원은 아무도 없다.
혈혈단신. 기어코 내가 단독으로 던전에 입성하고 있었다. 그것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팟!
영상은 그게 끝이었다. 현재로 돌아온 내 눈앞에 최태성이 팔짱을 끼고 서 있다.
“어때. 마음에 드나?”
“괴, 굉장합니다.”
복잡한 머릿속을 숨기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내 연기가 나쁘지 않았던지 최태성이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설마 헬리오스의 심장을 보고 단독으로 공략할 만하다느니 하는 생각을 해서?
단지 비유였다. 그 정도로 굉장하다는 뜻이었지 다른 의미가 아니었는데.
만약 협회의 허락 없이 단독으로 던전을 공략하다 걸리면. 최소가 징역 3년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헌터면허가 말소된다.
협회가 다른 건 몰라도 던전 출입만큼은 엄격하게 징벌하기 때문이다.
머리를 털었다. 방금 봤던 미래는 잠시 잊기로 했다.
“음? 더 볼일이라도?”
최태성이 의뭉스럽다는 듯 물었다.
“설명창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자 그제야 헬리오스의 심장이 보였다. 이걸 두고 딴생각을 했었다니 할 정도로 S급 아이템의 스펙은 상상 이상이었다.
[헬리오스의 심장
등급 : S
착용레벨 제한 : X
물리 방어력 : 120/???
마법 방어력 : 120/???
근력 : 8% 증가
민첩 : 6% 증가
효과 1 : 모든 종류의 상태 이상에 강하게 저항합니다.
효과 2 : ???
효과 3 : ???
설명 :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심장으로 만들어진 갑옷입니다. 신성함이 몸에 깃듭니다. 마귀형 몬스터는 사용자의 근방 10m 이내로 진입할 시 초당 100G의 중력이 배수로 가해집니다.
제한 : 레벨이 낮습니다. 능력이 극히 제한됩니다.]
단순 방어력만 봐도 철혈무제의 두 배가 넘는다. 심지어 이것조차 제한된 능력이라고.
헬리오스의 심장을 완벽하게 길들였을 때 어떤 공능이 발휘될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마음에 드냐니. 그걸 질문이라고. 다시 묻는다면 진심을 담아서 대답해 줄 수 있다.
정말 살날이 얼마 안 남은 걸까. 그래서 이생에는 미련이 없어 내게 이런 걸 주는 걸까.
이 정도면. 내가 모르는 꿍꿍이가 숨겨져 있다 해도 모른 척할 만하다. 당장 술잔에 든 술이 너무 달콤했다. 취하고 싶을 정도로.
***
차라리 던전을 공략하고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그랬다면 망설임 없이 도전했을 텐데.
눈길도 주지 않겠다는 처음의 결심과 달리 시도 때도 없이 이런 생각이 든다.
경험치는 얼마나 될까.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도 적지 않을 텐데.
어떤 유형의 던전일까?
쓸데없는 잡생각이 나를 좀먹었다. 이럴 때가 아니다. 최찬규를 찾아갔다.
“던전? 다음 달까지 공략 일정 없을걸?”
“네? 다, 다음 달이요? 아니 왜…?”
“글쎄다. 윗분들 생각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우리만 노난 거지.”
자기는 이미 유럽행 티켓을 끊었다며 낄낄대는 최찬규였다.
이제 보니 일성 전체가 휴가 분위기였다. 연말도 다가오니 조용히 한 해를 마무리하자는 최태성의 지시라고 한다.
“이참에 푹 쉬어야지. 너도 좀 쉬어 인마.”
“…….”
충격이었다. 아무리 일성이라지만 워라밸이 이렇게까지 좋아도 되는 건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뭔가 답이 있을까 해서 한석훈을 찾아갔지만.
“너. 휴가 좀 다녀와라.”
“예?”
뜬금없는 말이나 들었다.
“요즘 너무 지친 것 같다. 보는 내가 안쓰러워. 들어본 적 있지? 휴식도 훈련이다.”
“지금 쉬면 게을러진다고 하루도 빠지지 말고 연무장 나오라고 할 땐 언제시고.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이가 없어 그렇게 묻자 한석훈이 돌연 화를 냈다.
“이 새끼가! 감사합니다, 하고 갈 것이지. 쉬고 싶다고 할 땐 언제고? 청개구리냐? 쯧. 한 달 정도 푹 쉬고 와!”
“무슨. 됐습니다. 연말까지 공략 계획도 없던데 이참에 저랑 훈련이나 해 주십시오.”
“…안돼.”
한석훈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아쉬워 죽겠다는 표정 같았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내쳤다.
“나도 휴가 갈 거야.”
이 양반 진짜 왜 이래?
“갑자기요? 어딜 말입니까?”
“……괌.”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내놓은 답이 가관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된 걸로 알아라. 너도 이참에 푹 쉬어.”
그 말만 남기고 한석훈이 축객령을 내렸다. 할 일이 있다면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모든 상황들이 짜기라도 한 듯 딱딱 맞아떨어졌다.
마치 나를 오대산에 보내려고 사람들이 연기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거, 설마 진짜.”
그럴수록 오대산의 던전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당분간 C급은커녕 D급 던전도 못 들어갈 상황인데. 하루하루가 소중한 이때 두 달이나 허공에다 날리라고?
“그럴 순 없어.”
던전이 열리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틀. 그 안에 결정해야 했다. 그런데 이미 마음이 기운 걸까. 나도 모르게 공략시간을 계산하고 말았다.
“협회가 던전 파장을 찾는데 걸리는 시간이 평균 보름.”
그전에 던전을 무너뜨려야 하니까 대충 열흘로 잡고. 단순 계산으로는 방 하나당 하루씩 걸린다. 미로형이 나오는 순간 깔끔하게 포기해야 하고.
잠시만.
포기? 어떻게?
탈출석을 구하는 것도 문제다. 회사의 것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쩔 수 없이 암시장을 뒤적거려야 할 텐데 그곳에 접근하는 방법도 모른다.
젠장할.
믿을만한 동료 하나만 있었어도.
힐러면 더할 나위 없고 레인저도 나쁘지 않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헌터 한 명만 있어도 무난하게 C급 던전은 격파할 수 있다. 그보다 조금 밑이라도 문제는 없는 수준이고.
탈출석을 찾을 게 아니라 나와 미친짓을 같이 해 줄 사람을 찾아야 하나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연무장에서 검술을 다듬고 있을 때.
파앙!
공기를 맹렬하게 찢은 화살이 정확하게 표적의 정중앙에 꽂혔다. D급 연무장에 이런 수준이 있었나 하고 뒤를 돌아봤는데.
임한나?
파앙!
말을 걸기 위해 입을 떼기도 전에 화살 하나가 더 꽂힌다. 이번에도 정중앙이다. 멈춰있는 표적을 맞추는 것쯤이야 별로 어렵지 않지만.
저 힘은 뭐지?
“임한나!”
파앙!
하얀 손끝에서 또다시 뻗어간 화살이 표적을 뚫고 지나갔다. 이 정도 수준이면.
“임한나! 잠깐 멈춰봐!”
아예 내 말도 안 들리는 것 같았다. 녀석의 시선이 표적만 담고 있었다.
심지어 점점 힘이 세진다. 정확도는 또 어떻고. 박힌 화살을 반으로 가르고 그 자리에 새 화살이 꽂히는 건 기예의 수준이었다.
내가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기껏해야 입사한 지 1년도 안된 우리다. 놀라운 기연을 만나지 않은 이상 이렇게 빠른 성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파앙!
아니면 애초에 실력을 숨기고 있었거나.
마지막 화살이 표적을 부수고 나자 드디어 무아지경에서 깨어난 듯했다.
답답한지 얼굴을 찌푸리며 머리를 질끈 묶고 있는 녀석에게 다가갔을 때였다.
“이, 이태진…. 여기 있었어? 휴가 갔다고 들었…는데…?”
임한나가 동그란 눈을 치켜뜨며 나를 봤다. 마치 잘못한 걸 들킨 어린애처럼 꽁무니를 빼려 했다.
“나는 할 일이 있어서. 그럼 이만…!”
이해한다. 뭐, 누구에게나 비밀 한 가지는 있는 법이지.
그런 생각과 함께 도망가려던 임한나의 팔을 잡고 말했다.
“너 나랑 일 하나만 같이 하자.”
***
강남의 뒷골목은 한산했다.
“여기라고?”
내 물음에 임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 여기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암시장이야.”
솔직히 녀석이 내 부탁을 들어줄 줄은 몰랐다.
“정말 괜찮은 거냐? 지금이라도 말해. 괜한 의리로 따라가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몇 번 말해. 간다니까.”
그것도 이렇게 흔쾌히.
거절을 전제하고 물어봤던 건데 되려 적극적으로 나오니까 찜찜하기까지 하다. 물론 임한나가 협회에 신고할 성격은 아니긴 하다만.
“그보다, 던전이 뜰 거라는 건 어떻게 안 거야? 등급은? 왜 하필 강원도인 거야?”
“…….”
나를 믿고 가준다는 동료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다. 미안하지만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다.
“그냥 촉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 중 제일 그럴듯한 핑계를 댔다. 그러자 녀석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어쨌든 나를 동료로 고른 건 탁월한 선택이야. 후회하지 않을 거야.”
임한나가 결의를 다지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놀러 가는 것도 아닌데 녀석의 표정이 더없이 밝았다.
징역이니 협회의 엄중한 처벌이라느니. 몇 번이나 말했던 리스크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당연히 큰 도움이겠지. 레벨부터가 나보다 높을 테니.”
농담처럼 말했는데 녀석이 답지 않게 당황했다. 우물쭈물거리며 ‘어쩌다 보니’ 하는 임한나에게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생각보다 큰 비밀인 듯싶었다.
“일단 여기야.”
우리가 도착한 곳은 작은 선술집이었다. 그런데 도저히 믿기지 않는데. 우리나라 최대 크기의 암시장이 겨우 이 정도라고?
“아니. 여긴 첫 번째 블록일 뿐이야. 이 골목 전체가 암시장이지.”
임한나가 흐뭇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넌 여길 어떻게 알고? 와본 적 있나?”
“…단골이야.”
끼익-!
얼렁뚱땅 대답한 임한나가 선술집의 문을 열었을 때였다. 방금까지 왁자지껄하던 술집의 소음이 일시에 사라졌다. 안에 있던 녀석들이 짠 듯이 우리를 쳐다봤다.
본능적으로 숫자부터 셌다.
열하나.
느껴진다. 여기 안에 있는 녀석들 모두가 각성자였다.
“아가씨가 올 만한 데가 아닌데….”
구석에서 낄낄대던 녀석 하나가 일어나 눈을 흘겼다. 동공이 풀린 게 약을 하는 모양이었다.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파동은 별것 없었다. 쓸데없는 데 시간을 허비할 순 없다. 녀석을 무시하고 바텐더 쪽으로 다가갔다.
바텐터는 털보였다. 잔을 닦고 있던 녀석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당장 주먹을 꽂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말했다.
“11월에도 모기가 너무 많아.”
임한나가 가르쳐 준 암호였다. 매체에서나 보던 유치한 말장난인 줄 알았는데 털보가 재밌다는 듯 반응했다.
“찾는 게 뭐야. 때깔을 보니 아직 깨끗한 녀석들인 것 같은데.”
“C급 던전 탈출석.”
“호오. C급 던전? 그건 왜?”
과장 섞인 털보의 말에 술집 안의 녀석들이 모두 박장대소했다.
“닥치고 가격이나 말해.”
녀석들에게 곱게 말이 나갈 리가 없다. 하나같이 중범죄를 저지른 놈들이다.
“1억.”
털보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팔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상관없다.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다. 강남 지천에 깔린 게 암시장이다.
“나가자.”
임한나의 팔을 끌고 녀석들을 스쳐가려고 할 때였다.
“끌끌. 여기가 처음인 것 같은데 그런 식이면 어딜 가도 구할 수 없을 거다.”
단검을 핥으며 다가오는 녀석이 있었다. 녀석뿐만 아니라 어느새 열한 놈 모두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가씨는 잠시 남아 봐. 저 멀대 같은 녀석은 죽이고 우리랑 놀자.”
단검 든 녀석을 무시하고 임한나에게 말했다.
“임한나.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녀석들의 수준은 뻔한 것이어서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그저 이곳만의 대처방법이 있나 궁금했을 뿐.
“어. 글쎄. 사실 나도 여기 처음이라.”
임한나가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한 기색을 폈다.
“…이러면 던전 가는 거 끼워줄 거 같아서. 헤헤.”
어처구니가 없었다. 노력이 가상하다고 해야 할지, 굳이 이러지 않았어도 됐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처음이라고? 더 좋지.”
동공이 한껏 커진 녀석이 임한나를 붙잡으려고 할 때였다.
콰득.
최대한 조용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든 것은 놈의 손목을 꺾은 직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