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C급 던전 (2)
던전에 들어온 지 사흘째였다. 겨우 한 단계 높아졌을 뿐인데 D급 던전과는 격을 달리하는 난이도였다. D급의 보스몹이 이곳에서는 흔하게 깔려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곧이어 반환점이 되는 여섯 번째 방이었다. 방에 입장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우두머리 오크, 헤드 셰프널이 괴성을 지르며 몸을 던졌다.
“크웨에엑!”
그것도 한 놈이 아니다. 헤드 셰프널 셋에 주술사 여섯. 그리고 늙은 그것들 옆에 딱 붙어서 그것들을 호위하고 있는 컴베트 오크들까지.
방을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난이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다만, C급에서 헤매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발동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5분 동안 두 배가 됩니다.]
[일점폭발을 사용합니다.]
때마침 주요 스킬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끝나 있었다. 끝없는 활력이 몸을 감쌌다.
망설일 것 없었다. 놈들을 향해 도약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우리들의 합은 정형화된 상태였다. 아니, 정확하게 따지자면 일방적으로 나 하나를 위해 나머지가 진형을 맞춘 것에 불과했지만.
어떻게 하면 이태진이 마음껏 날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거기에서 느껴졌다.
전술을 유연하게 쓸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이미 능숙한 헌터라는 뜻.
단순 일대일 결투라면 이 중 내가 제일일지 몰라도. 일성의 전사들을 그것 하나만으로 치부할 순 없었다.
교전은 그런 식이었다. 먼저 팀장 임형원이 선두에서 어그로를 끈다.
그다음 레인저와 마법사가 가장 뒤에 숨어있는 주술사의 마법을 방해하는 데 성공한다면.
나를 비롯한 근접 딜러들이 틈을 타 주술사가 있는 곳까지 파고들었다.
여기까지 성공했다면 이미 전투는 끝났다고 봐도 됐다. 주술사가 없는 우두머리는 그저 힘 좀 센 덩어리에 불과하니까. 이번에도 그런 식이었어야 했는데.
“이런! 조심해!”
레인저가 주술사 하나를 순간적으로 놓쳐버린 것이다. 찰나에 늙은 돼지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놈이 켈켈거리며 지팡이를 휘두른 순간이었다.
[상태이상 : 저주에…!]
일순 사방이 컴컴해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마법저항력이 높습니다.]
[저항에 성공했습니다.]
어딜 감히 잡술을. 걸리는 것 하나 없이 주술사의 목을 갈라버렸다. 역겨운 주술사는 마지막까지 두 눈을 부릅뜬 채 생을 마감했다.
그때까지 놈을 지키던 졸개들은 내 신형을 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몬스터에 한해 내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이 더러운 쓰레기들은 지구상에서 한 톨의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한다.
몸을 한 바퀴 도는 것이면 충분했다. 흉흉한 눈빛으로 호위를 맡고 있던 몬스터의 급소마다 초록색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확신했다. 한 번의 깨달음만 더 찾아온다면 상급 검술에 도달할 수 있다.
칼 한번 휘두를 때마다 한 놈씩. 연약한 주술사의 몸뚱아리는 경험치를 많이 줬다.
그제야 헤드 셰프널이 괴성을 질렀지만. 그것은 오크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털썩하고 놈이 쓰러지는 것을 끝으로.
전투가 끝난 뒤 널브러져 있는 오물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우리들은 주저앉았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 170]
[레벨업!]
[경지에 비해 지나치게 레벨이 낮습니다. 성장 속도가 빨라집니다.]
벌써 D급 던전 두 번을 공략해야 얻을 수 있는 경험치를 먹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젠장할 경험치 분배.
경험치가 나눠지고 있다. 그럼에도 팀원들을 원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연하다. 법적인 문제는 둘째 치고 홀몸으로 이곳을 도전하는 것은 나부터가 사절이었다.
나를 받쳐주는 동료들이 사라지는 순간 생사의 갈림길에 설 것이 분명했다.
다만 조급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1차로 목표 삼았던 레벨이 150이다. 이대로는 까마득할 따름이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B급 던전이 떠올랐지만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된다.
지금의 내 수준을 알고 있다. C급과 B급 그 사이 어딘가에 내가 있었다. 굳이 선을 갖다 댄다면 C급에 더 가까웠고.
“뭘 그리 도끼눈을 뜨고 있어. 무섭게.”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 있었나 보다.
“형. 물어볼 게 있는데요.”
우리의 호칭은 어느새 형 동생이 돼 있었다. 최찬규가 그리 해 달라고 몇 번이나 요청한 까닭이었다.
미래의 검신과 호형호제해 놓으면 어디 가서 떡고물 하나라도 떨어지지 않겠냐며 낄낄대던 그가 밉지 않았다.
“혹시 한석훈 팀장님 정도면 C급 던전 공략하는 데 얼마나 걸리죠? 단일 공략한다는 조건으로요.”
최찬규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눈살을 찌푸렸다.
“표정 썩었던 게 그거 때문이었어? 아서라. 넌 분명히 그 양반보다 강해질 거다. 확신해도 좋아. 하지만 당장의 목표로 삼기엔 나무가 너무 높아. 웃기지만 던전밥 좀 더 오래 먹어본 선배로서 충고 하나 하지. 조급하지 마라. 거기에 먹혀버린 헌터를 수도 없이 많이 봤어.”
방금까지 낄낄대던 최찬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엄숙한 얼굴이었다. 문득 최찬규에게 정을 주고 있는 스스로가 느껴졌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이에요. 한 팀장님이 하도 애송이라고 놀려대길래 뭐 얼마나 되나 싶어서 물어본 것뿐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억지로 만든 웃음이 효과가 있었던지 최찬규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괜한 소리를 했네. 음. 굳이 대답해 보자면. 30분? 길을 헤매지 않는다면 15분 정도.”
순간 나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예상을 아득히 넘어버리는 숫자가 튀어나온 것이다.
“아참.”
충격에 빠져 있는데 최찬규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런데 어째 자세가 이상하다. 허리를 배배 꼬지 않나 얼굴이 벌게지지 않나.
이게 무슨.
“크흠흠! 너 설마 개 같은 생각 하는 거 아니지?”
내 혐오스러운 눈빛을 읽은 건지 최찬규가 헛기침을 했다.
“뭐 때문에 그러세요?”
무뚝뚝한 말에 우물쭈물하던 최찬규가 결심이 섰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너 인마, 여기 들어온 거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하냐. 아무리 니가 실력 있다고 어? 레벨 90짜리 애송이가 여길 들어 올….”
“말씀을 하세요, 말씀을. 말 돌리지 말고.”
“나 어땠냐고.”
“예?”
역겨운 생각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잖아.
“아니, 내 검 어땠냐고. 이 새끼가 진짜.”
내 표정을 읽은 최찬규가 버럭 성질을 냈다.
허. 그런 거였어? 왜 이리 부끄러워 하나 했더니.
“잠깐. 이봐요, 찬규형. 혼자서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요?”
그때 뒤에서 쉬고 있던 무리가 한번에 이쪽으로 튀어왔다. 전투 중에도 보지 못했던 빠른 몸놀림이었다.
“저희 다 반환점만 기다렸다고요.”
“누구는 바보라서 가만 있었는 줄 아십니까?”
“이것들이 뭐라는 거야? 그럼 먼저 말하지 그랬어.”
“타이밍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형이 지금….”
무슨 말인가 싶어서 어안이 벙벙해 있는데 팀장이 한숨을 쉬며 내게 말했다.
“추태 부려서 미안하다. 다들 너한테 한 수 배우고 싶어해. 짧게라도 좋으니 부탁한다.”
심지어 고개까지 꾸벅 숙인다. 처음에 든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나한테 배울 게 뭐가 있다고 이렇게까지 하나 싶어서. 그리고 곧 그들의 용기에 감탄이 나왔다.
입사기수로는 한참 아래고 레벨로 봐도 밑에 있다. 그런 이에게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가르침을 요청하다니.
나는 이 정도로 절박할 수 있을까? 우리 팀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오히려 가르침을 청해야 할 것은 나였다. 문득 기분이 좋아졌다.
“짧게라도 괜찮으시다면요.”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경험치 문제는 지금 고민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전투 중 눈에 밟히는 것들이 있었다.
대번에 최찬규를 포함한 근접 딜러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레인저를 비롯한 마법사는 아쉽다는 듯 입맛만 쩝 다셨고.
민망한 얼굴을 숨긴 채 말했다.
“종베기 한번 해보시죠.”
가장 거슬렸던 것을 말했다.
“종베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최찬규가 그것쯤이야 하고 당장 칼을 들었다.
후웅!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최찬규의 검이 쭉 내려왔다. 쯧. 이게 아니지.
“지금 어깨에 힘이 과해요. 이쪽 허리에서부터 다시 해 보시죠.”
“이, 이렇게?”
후웅!
“아뇨. 방금은 하체가 너무 돌아갔잖아요. 하체는 딱 고정하고 다시.”
후웅!
“부드럽게 동작이 이어져야 하는데 너무 뻣뻣해요. 힘이 과하게 들어가 있는 증거입니다. 다시 해 보시죠.”
그의 열정에 감화된 걸까. 반쯤 장난으로 시작한 교육시간이 어느 순간 나도 최찬규도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슬쩍 보니 모두의 눈이 이곳에 몰려 있었다.
옆에서 최찬규를 따라하는 것 하며, 전혀 상관없는 레인저와 마법사까지 팔짱을 끼며 보고 있었다. 상당히 상당히 민망했다.
후웅!
“어!”
그러던 어느 순간 최찬규가 감을 잡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나를 돌아봤다.
“…뭐. 이 정도면.”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까지도 부족했지만 그래도 놀랐다. 이렇게 단시간 만에 발전할 줄은 몰랐는데. 내가 가르치는 데 재주가 있었나?
“시범 한 번 보여주시죠. 검신님.”
뻘뻘 땀을 흘리던 모습은 어디 가고 최찬규가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됐습니다. 무슨.”
“그러지 말고 한번만 보자 인마. 닳는 것도 아니고.”
마냥 장난은 아니라는 듯 최찬규가 호소를 했다.
이것 참. 아까 조언해 준 것도 있고 하니.
그리고 거절하기에는 모두가 기대된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박수라도 칠 기세로.
“자, 검신님이 한 수 보여주신다. 다들 박….”
정색하며 최찬규를 쳐다보자 이크 하며 어깨를 으쓱한다.
어이가 없어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와 함께 검을 들었다. 그래, 최찬규의 말대로 닳는 것도 아니니까.
“다들 잘 봐놔라. 앞으로는 못 볼 수도 있는 귀한 장면이야.”
누군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곳에 있는 누구도 거기에 반문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되지는 않았다. 애초에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마음도 없었다. 그저 내 수련을 할 뿐이지.
그런데 검을 드는 순간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불쾌하면서도 신선한 기운이었다.
근섬유 한 올 한 올이 선명하게 인식됐다. 지금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주 조금씩 몸을 이동했다. 자칫 답답해 보일 수 있었지만 실상은 다르다.
발걸음 한 번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따분할 만도 한데 잠잠하게 나를 기다려주는 이들이 고마웠다.
불현듯 처음 한석훈에게 검을 배웠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그랬다. 자세가 엉망인 건 알았지만 어떻게 손봐야 할지 몰랐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보인다.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검을 휘두를 수 있는지, 그러려면 몸은 또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까지.
어느 순간 뻣뻣했던 내 몸짓이 술에 취한 듯 부드럽게 이어졌다.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렇게나 휘둘러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검을 휘두른 순간.
“어?”
오러도 씌워지지 않은 검에서 나온 풍압이라기엔 너무 거센 바람이 튀어나왔다. 잠잠했던 던전 내벽이 흔들릴 만큼.
“미, 미친.”
“무슨 칼질 한 번에….”
“허….”
제각각 반응은 달랐지만 표정만큼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내가 지금 뭘 본거지 하는 듯한 얼굴들.
[완벽한 베기에 성공했습니다.]
[중급 검술을 통달했습니다.]
[특성 획득 : 상급검술(A)!]
[상급검술(A) : 평생 검을 수련해도 재능이 없다면 발을 들일 수 없는 영역입니다.
축하합니다! 어엿한 고수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검을 수련하는 자라면 누구나 당신을 우러러볼 것입니다.]
[레벨업!]
[경지에 비해 지나치게 레벨이 낮습니다. 성장 속도가 매우 빨라집니다.]
깨달음이 주는 충만함을 만끽했다. 또한 실마리를 찾은 순간이었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