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C급 던전 (1)
어느새 의식 저편이 미래에 도착했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담아가야 한다. 모든 감각에 주의를 기울였다.
가장 먼저는 후각이었다. 익숙하고 비릿한 냄새가 났다. 그다음은 시야가 밝아졌다. 일성의 본사 안이었다.
어? 피?
벽에서부터 낭자한 붉은 혈액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복도에 널브러진 것 하나하나가 시신이었다. 미동 없는 주검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지천에 깔려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현실감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이 끔찍한 광경에 눈을 감고 싶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이곳에서 나는 철저히 관찰자일 뿐이다.
그 와중에도 상황에 대해 분석하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니라 무의식에 가까웠다.
주변의 공기가 뜨거웠다. 참사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래의 내가 지그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 지경이 됐는데도 그곳의 나는 태연했다.
아니, 오히려 침잠한 것에 가까워 보였다. 심장박동이 그것을 반증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침착하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정보를 모아서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미래를 바꿀 수 있다.
나는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그러던 어느 지점에 쭈그려 앉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홍보팀장 홍주연이 죽어있었다. 지금보다 세월이 흐른 얼굴이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김주현?
지금보다 확실히 시간이 느껴지는 얼굴이었지만 김주현이 맞았다.
그녀는 뜬 눈으로 죽어 있었다. 얼마간 지그시 김주현을 응시하던 내가 그녀의 눈을 감겨주고 일어났다.
저벅. 저벅.
내가 걷는 것 말고는 어떤 소음도 없었다. 소름끼치는 정적이었다.
참상은 복도를 지나 로비까지도 이어졌다. 쓰러진 주검은 하나같이 일격에 심장이 꿰뚫려 있었다.
정말 웃기는 말이지만 이 짓을 저지른 새끼는 일성에 악의가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 대부분은 죽는지도 모르고 죽었겠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끝없이 주검을 넘으며 회사를 돌아다니던 내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언제까지고 태연할 줄 알았던 그곳의 내가 동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찾아왔다.
참상을 보면서도 제발 이것만은 아니길 바랐던 장면. 한석훈을 비롯한 2팀 전원이 그곳에 죽어 있었다.
“아. 아아.”
내가 손을 부르르 떨었다. 철퍼덕 넘어져서는 기어가듯 한석훈에게 다가갔다.
기적이었다. 미약하지만 숨소리가 들렸다. 한석훈이 아직 살아 있었다.
“도, 도망….”
“말하지 마요. 내가 지금 살릴 테니까.”
덜덜 떨리는 내 손에서부터 번진 하얀 빛무리가 한석훈의 전신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놀라웠다. 찰나의 순간에 한석훈의 외상이 사라진 것이다. 자잘한 흉터부터 심장에 꿰뚫린 자상까지 한석훈의 몸은 말 그대로 씻은 듯 깨끗해졌다.
다만. 두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신묘한 마법이었지만 한석훈의 의식은 이미 꺼진 이후였다.
몇 번이고 더 같은 마법을 쓰던 내가 결국 포기했는지 한석훈을 껴안고 꺽꺽댔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갑자기 귀가 먹먹해졌다. 물속에 잠긴 듯 그곳의 내가 부르짖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젠장, 조금만 더! 단서가 필요하단 말이다!
화악-!
미래로 갈 때처럼 현재로 돌아오는 것 또한 부지불식간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내 앞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한석훈이 앞에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웨엑!”
몸은 현실이지만 아직도 의식 저편에서 겪었던 현장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코끝에서 혈향이 진동했다. 게워내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이태진!”
극도로 피곤이 몰려왔다. 버틸 수 없었다. 이지은의 손끝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걸 끝으로 세상이 컴컴해졌다.
***
첫째. 내가 본 미래는 확정된 미래가 아니다. 미래는 바뀔 수 있으며 나는 그것을 경험한 적 있다.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얻는 과정에서.
둘째. 참사가 일어난 건 근시일 내의 미래가 아니다. 최소 5년 이후. 몇 번이고 그 지옥 같은 미래를 복기하고 내린 결론이다.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셋째. 예지력의 출처는 어디인가. 혹 스킬이 아니라면 누가 무슨 목적으로 나에게? 이것이야말로 내가 풀어야 할 숙제였다.
역시 당장 생각나는 건 신적인 존재였다. 퍼뜩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 차려라. 이태진.”
감히 각성자로서 신을 들먹이다니. 아카데미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 또한 이것이다.
우리는 이성에 근거하여 현상을 이해한다. 시스템에 신격(神格)을 부여하다 얼마나 많은 인간이 비명에 횡사했던가.
번개가 치는 이유는 얼음 간의 마찰 때문이지 제우스의 분노가 현신한 게 아니다.
세상에 던전이 나타나고 각성자가 탄생한 건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한 어떠한 이유 때문이다. 혹은 우연이거나.
어찌 됐든. 며칠에 걸쳐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때의 끔찍한 참상이 그려졌다.
“성장.”
그러고 내놓은 답은 결국 뻔한 것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했다.
미래는 바꿀 수 있다. 내가 그만큼 강해지면 되는 것이다. 내게 미래를 보여주는 능력이 의도하는 바도 그것일 가능성이 컸다.
얼마나 강해져야 할까. 한석훈을 일격에 죽인 놈이다.
아직 정체도 모르는 놈을 죽이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정도의 경지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도 5년 안에.
이럴 때가 아니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 길로 한석훈을 찾아갔다.
“C급 던전에 가고 싶습니다.”
다짜고짜 하는 말 치고는 좀 싸가지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한석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네?”
예상했던 반응과 달리 되려 ‘언제 그 말 하나 했다.’ 하며 기다렸다는 듯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어. 어. 내일 C급 들어가던가? 한 명 들어갈 자리 있지? 눈치도 빠르다. 그래, 이태진. 뭐? 이게 미쳤나. 파견이다. 파견. 부서이동 좋아하네. 뒤질래? 끊는다.”
툭. 하고 끊더니 ‘내일이라는데? 괜찮지?’ 하며 어깨를 툭툭 친다. 김찬현을 따라 D급 던전에 들어갔을 때와는 반응이 전혀 딴판이다. 그것도 C급 던전인데.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쇠뿔도 단김에 빼는 게 맞긴 한데. 너무 화끈하게 일이 진행되니까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저 내일 대회 64강인데요.”
“딱 좋네. 몸 풀고 바로 던전 들어가면 되겠다.”
오히려 잘됐다는 듯 한석훈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나저나 며칠 동안 죽상이더니 오늘은 또 왜 이리 다부져? 여자한테 차였냐?”
한석훈 나름대로의 위로였다. 피식 웃으며 ‘예. 제대로 한 방 먹었습니다.’ 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다음날이었다. 한석훈의 말이 맞았다.
“시작!”
스악-!
“이태진 승!”
딱 몸풀기에 제격이었다.
***
허물어져 가는 건물, 낡은 티비, 헤진 소파.
로브를 뒤집어쓴 네로드가 화면 속 이태진을 응시했다.
“그렇게 눈빛이 야해서야. 너무 노골적이잖아. 쯧.”
옆으로 다가온 인영을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화면 속 이태진의 빛나는 재능이 네로드를 매혹시켰다.
“저놈. 죽이려고 했는데.”
“그런데?”
“계획이 바뀌었어. 내 인형으로 삼을까 해.”
“뭐?”
“저것 좀 봐. 죽이기엔 너무 아깝잖아.”
“이봐. 내가 누군지 착각하는 모양인데.”
“일성을 줄게.”
네로드가 고개를 돌려 남자를 응시했다. 눈에 맺힌 열망이 남자를 움찔할 정도로 강렬했다.
“저놈을 줘. 최태성을 죽여줄 테니까.”
***
레벨은 무엇 보다 우선된다. 특성이나 스킬은 능력치를 보조해주는 수단일 뿐 절대 우선이 될 수 없는 법이다.
당장 각성자 간의 등급을 나누는 것도 레벨이다.
상태창을 열었다. 이제 겨우 91레벨. 겨우라고 하기에는 회사 역사를 통틀어도 이만한 성장세를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기준점이 다르다. 아직 갈 길이 태산처럼 높았다.
약속장소에 도착했을 때였다. 이미 대원들이 도착해 있었다. 하나같이 이미 장비를 착용하고 눈빛을 벼려내는 중이었다.
이 사람들이 일성의 C급 헌터. 어딜 가도 어엿한 헌터로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자들이다.
그들 중 나를 향해 수군대는 소리가 있었다.
‘쟤야.’
‘찬규 형이 붙었다가 깨졌다며?’
‘찬규 형뿐이게? 다른 팀 들어보니까 붙을 때마다 더 세진다더라.’
‘미친. 사이어인이라도 돼?’
‘더 놀라운 점이 있다. 저놈이랑 붙어본 당사자들이 그러던데. 어떤 점을 보완해야 할지 짚어준다고. 그것도 말이 아니라 검으로.’
‘그, 그게 정말이야? 아! 최근에 찬규 형 검이 유난히 무시무시하던 이유가….’
“어이. 너희들! 준비 다 끝난 거 맞아?”
팀장의 말이었다. 그 말에 팀원들이 아차하며 뿔뿔이 흩어진다.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C급 던전 2팀의 팀장이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쪽으로 다가온다. 옆에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최찬규를 대동하면서.
“이태진.”
“예.”
“D급 던전만 돌아봤다고?”
뭐라 한마디 들을까 바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팀장이라는 사람이 되려 의문스럽다는 말을 했다.
“석훈이 형이 어지간히도 아꼈나 보네. 비무대회는 잘 봤다. 그 검술은….”
그 말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어쨌든 너무 긴장 안 해도 될 거야. 그렇게 보이긴 하다만.”
“잘하겠습니다.”
생각보다 이 사람들, 쿨한 면모가 있었다. 나 같으면 신참 녀석 하나가 팀에 끼면 대번에 화부터 낼 텐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리핑은 간단하게 끝났다. 오크 던전이라는 말과 함께 포지션을 나누는 게 전부였다.
오히려 그게 더 신뢰가 갔다. 별말이 필요 없는 프로 레벨이라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빛이 내 몸을 감싸고 있었다.
화악!
과연 C급과 D급은 다르다는 것일까. 공간의 압력이 나를 뱉어내는 순간 곧바로 녀석들이 보였다.
첫 번째 방은 아무것도 없다는 불문율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D급과는 확연히 다른 무구와 장비를 갖추고 있는 오크들.
몬스터의 덩치도, 착용하고 있는 무기들도 지금껏 만나왔던 것들과 같은 종인가 싶을 정도로 월등했다.
문득 브리핑 때 팀장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태진 너는. 근접 딜러 역할이다. 합을 맞추기에는 시간이 없으니까 네 판단에 맡기겠다.]
아무렴. 자신 있었다. 새로 얻은 스킬도 스킬이었지만. 처음 겪는 C급인 만큼 그만한 준비도 갖추고 왔다. 몬스터의 장비만 업그레이드된 게 아니다.
철컥철컥!
인벤토리 안에 잠들어 있던 아이템들이 하나씩 내게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철혈무제의 강철갑옷
레벨 제한 : 80
등급 : A
방어력 : 50
*철혈무제 세트 사용 효과 : 근력 5% 증가]
[철혈무제의 귀걸이
레벨 제한 : 80
등급 : B
효과 : 재사용 대기시간 10% 감소
*철혈무제 세트 사용 효과 : 민첩 5% 증가]
[철혈무제의 날개 달린 신발
등급 : B
효과 : 민첩 30
*철혈무제 세트 사용 효과 : 민첩 5% 증가]
[성기사의 수호검
레벨 제한 : 80
등급 : A
공격력 : 87
효과 : 부정한 것들을 대상으로 추가 공격력 5%]
일성의 무구 창고는 과연 소문대로였다. 발에 걸리는 게 B급 아이템이었고 심심찮게 A급 아이템도 있었다.
그중 내가 착용할 수 있는 최고의 장비가 이것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어찌나 아쉽던지.
레벨이 100만 됐어도 지금 두르고 있는 이것들보다 훨씬 상위의 아이템을 가져올 수도 있었을 텐데.
배부른 소리라는 것은 알고 있다. 당장 철혈무제 세트는 그 옛날 최태성도 즐겨 사용했던 것이니.
이것들 하나하나가 세상에 풀리는 순간 여느 각성자나 눈에 불을 켜고 탐낼 아이템이었다.
철컥!
은빛 갑주와 신발이 덧씌워지고 성기사의 수호검이 손에 들리는 순간 남아 있던 아쉬움도 저 멀리 사라졌다.
이제껏 사용하던 보급 아이템과는 궤가 다른 힘이 전해졌다. 스킬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들끓는 활력이 몸에 넘쳤다. 무엇이든 벨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 또한.
“크르륵.”
방금까지 앞에 있던 것들의 기세 때문에 긴장됐던 게 허무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넘쳤다.
우락부락하고 섬뜩했던 놈들의 체격도 쓸데없이 덩치만 큰 경험치 덩어리로 보였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나는 곧장 몬스터 무리 사이로 몸을 날렸다.
“어, 어? 뭔 놈의 새끼들이 1층부터…! 다들 대열 갖춰! 뭐야…. 이태진!”
뒤에서 팀장이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고성을 터트리고 있었다.
어라. C급 던전이면 원래 첫 번째 방부터 이런 게 아니었어? 나 혼자 지금 나대고 있는 거라고?
팀장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제 와서 몸을 틀기에는 늦었다. 이미 나는 오크 무리 사이로 떨어지고 있었다.
“케르륵!”
땅바닥에 착지한 순간 가장 앞에 있는 놈 하나가 잘 걸렸다는 듯 도끼를 위에서 아래로 찍어 내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내 머리통을 반으로 갈라놓으려고 맹렬히 휘두르던 그것이 하품이 나올 만큼 느리게 보였다.
쉐에엑!
긴장한 것이 무색해질 만큼. 오크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못한 채 대가리가 싹둑 잘려나갔다.
허무하게 죽은 놈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일까. 몬스터의 공격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까딱하고 한번 잘못하는 순간 체력이 죽죽 닳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녀석들 사이로 보이는 틈이 확연했다. 제일 앞에 오는 놈의 검을 한번 흘려버리는 것이면 충분했다.
촤악!
뒤에서 찔러 들어오는 오크 하나가 동족의 검을 맞고 쓰러졌다. 의도치 않게 동료를 죽인 오크는 당혹스러운 얼굴이 됐다. 자신의 미래는 상상도 못 한 채 콧김만 쉭쉭 뿜어대면서.
그다음 순간 수호검이 놈의 상반신을 갈라버렸다. 보급형 롱소드였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
기세를 몰아 일자로 죽 그은 검을 한번 회전시키는 것으로 나를 에워쌌던 두 녀석 또한 동료들 곁으로 보내주었다.
그쯤 해서 날 구하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는 C팀이 오크들의 수급 사이로 보였다.
“어, 어? 너, 너. 어떻게….”
특히나 방패를 들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팀장의 표정은 적잖이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신고식인가요?”
‘하!’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최찬규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