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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17화 (17/170)

17화 제2의 성요한 (2)

우리가 잡은 콘셉트. 아니, 정확히는 홍주연이 내게 바란 캐릭터란 바로 광오함이었다. 무엇이든 아래로 보는 듯한 거만함이 바탕에 깔려 있는.

정말 믿기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관객들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어라. 왜들 이래?

이런 낯간지러운 말과 액션을 좋아할 줄이야.

이유야 어찌 됐든 수천 명이 나에게 열광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압도적인 장면이었다.

크흠. 다시 생각하니까 방금 등장할 때 멋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슬쩍 홍주연 쪽을 보니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호오. 그대인가! 기억이 난다. 아카데미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군. 분명 나와는 기수 하나 차이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앞을 보자 김현일이 짐짓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한껏 과장된 표정으로 턱에 손을 괴고 있었다.

응?

“그래. 기억나! 그때에도 눈여겨보고 있었다. 분명 책을 좋아하진 않았었지. 하지만 실전에서의 번뜩이는 감각은 분명 발군이었어!”

어, 그렇긴 한데.

겨우 상위권 끄트머리 성적으로 졸업한 나를 기억하는 그의 비상한 머리와는 별개로. 뭔가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랑 너무 다른데? 말투 왜 이래?

이 사람. 컨셉이 좀 지나친 것 같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더니. 그대가 검신의 축복을 얻게 된 건 우연이 아닌 게 분명하다. 이태진! 그대는 나를 기억하는가?”

이 무협지에나 나올 것 같은 대사를 현실에서 하는 미X놈이 실재하다니. 대중들에게 같은 부류로 보이지 않으려면 신중히 대답해야 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짧은 시간, 머리를 굴려봐도 도무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김현일을 가만히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

거만한 캐릭터는 이런 점이 좋다. 그냥 아무 말 안 하는 것만으로도 싸가지 없기 때문인 걸로 보이거든.

“크하하! 좋다! 분명히 오늘은 내가 도전자의 입장이었지. 나는 대현의 김현일이다. 이태진! 내 도전을 받아라.”

난 저 연극에 도저히 못 맞춰주겠다. 일절 고민 없이 인벤토리에서 롱소드를 꺼냈다. 괜히 말해서 산통 깨느니 그편이 더 나을 것 같아서였다.

반면에 내가 그럴수록 관객석에선 더 뜨겁게 반응했다.

“뭐야? 왜 대답이 없어! 받는다 만다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현일의 샤라웃이라고! 너무 건방진 거 아니야?”

“아카데미에서 예의는 똥꾸멍으로 처먹었냐!”

한쪽은 이런 반응을 보인 반면, 다른 쪽은.

“받는다 만다? 눈깔이 없냐? 칼 꺼내는 거 안 보여?”

“아카데미? 선배? 아까부터 왜 이리 혓바닥이 길어? 이 바닥은 실력이 선배야! 입만 나불대는 김현일 참교육 드가자!”

“쟤네는 대체 뭐라는 거냐? 곧 싸울 상대한테 주도권 뺏길 일 있냐! 여기서 인사를 왜 해?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이런 반응이 한 데 뒤섞였다.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문득 홍주연의 말이 떠올랐다.

‘까가 빠를 만들고 빠가 까를 만듭니다. 하나만 있어서는 슈퍼스타가 될 수 없죠. 저희가 노리는 건 극과 극의 팬층입니다.’

과연 그녀의 말은 상황을 잘 꿰뚫고 있었다. 연출에 관해서 홍주연의 말은 진리였다.

“흐음.”

김현일은 그러거나 말거나 싱글싱글 웃으며 칼을 꺼내 들었다. 우리는 동시에 심판을 바라봤다.

“준비됐나? 생사결이 아닌 걸 명심해라. 내 판단하에 승부가 결정되면 말릴 것이다. 이의는?”

그런 심판의 말에 김현일이 시선을 내게 돌리며 말했다.

“없습니다.”

“….”

아무 말 없는 내 태도 역시 암묵적인 동의가 담겨 있다고 판단한 심판이 곧 경기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손을 들었다.

“좋다. 시작!”

칼끝을 한 번 맞대는 걸로 결투가 시작됐다.

선공은 김현일의 것이었다. 왼쪽 어깨를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을 여유롭게 막았다.

전력을 숨기는 건 좋은 전략이었다. 다만. 한번 검을 섞어봤을 뿐인데 김현일의 의도가 보였다.

김현일은 전력을 숨긴 게 아니다. 혹 한 합 만에 경기가 끝날까 봐 봐준 것이지.

문득 짜증이 났다. 김현일만 들릴 만큼 작게 속삭였다.

“왜. 내가 생각보다 약할 것 같습니까?”

김현일의 머릿속이 보였다. 어떻게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위해서는 한 끗 차이로 승부가 나야 할 것이다. 그게 놈의 생각이었다.

“한 합만 섞어봐도 알 수 있다!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란 이런 것이구나!”

그럼에도 김현일은 연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이 새끼가 진짜. 김현일은 비무에서까지 그 가면을 끌어와서는 안 됐다.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발동합니다.]

[일점폭발을 사용합니다.]

[질주]

[도약]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짜냈다. 어디 이것도 웃으면서 막아봐라. 단숨에 녀석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권법을 따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만류귀종이라 했다. 날붙이와 주먹의 차이는 리치일 뿐.

그 생각으로 놈의 옆구리에 주먹을 뻗었다.

짜증나는 김현일의 연기와는 별개로 놈은 괜히 천재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다. 김현일의 동공이 순간을 포착하고 나를 따라온 것이다.

김현일은 내 권격을 막는 대신 똑같은 상처를 입히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좋은 선택이었다.

주먹이 놈의 늑골에 적중한 순간. 내 옆구리도 화끈해졌다.

옆을 돌아볼 시간 따윈 없다. 주먹을 회수한 직후 한 번 더 권격을 날렸다.

파앙!

확실했다. 김현일의 늑골이 부서졌다. 비틀대던 김현일이 겨우 중심을 잡고 몸을 뒤로 뺐다.

“커헉!”

놈의 여유로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김현일의 입에서 피가 주르륵 새어 나왔다.

나 또한 갈비뼈에 금이 갔지만 하나를 내주고 둘을 얻었으니 분명한 이득이었다.

슬쩍 심판을 바라보니 무표정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직이란 뜻이었다.

김현일이 검을 세우고 경계를 취했다. 주먹 대 주먹의 대결은 패배했으니 전략을 바꾸겠다는 것이다.나 또한 롱소드를 움켜쥐고 몸을 뻗었다.

카앙!

쇠붙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상단세에 이은 중단세, 좌에서 우로. 다시 우에서 좌로. 그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펑펑 터져댔다.

어쨌든 공격은 일방적으로 내 몫이었다. 때문에 아쉬웠다. 김현일이 방심하지 않았다면 좋은 승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합이 길어질수록 김현일의 몸이 기울어졌다. 늑골의 상처가 점점 벌어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김현일의 손해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후웅!

전력을 담은 검이 그의 목을 노리고 뱀처럼 휘어들어 갔다.

그때.

순간 놈의 눈빛이 달라졌다. 내 시야가 반전된 것도 그때였다. 비틀거리는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턱을 한 대 얻어맞은 것이다.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김현일은 목소리 톤부터 달라져 있었다. 정말 순수하게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할게. 아카데미 시절을 상정하고 손속에 사정을 뒀다. 생각해보니 내가 기억하는 넌 언제나 수련 중이었어. 검신의 축복을 얻고도 게으름 피우지 않았었나?”

“….”

김현일이 피식 웃었다.

“잠깐이지만 전력을 다할 수 있으니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김현일의 기감이 달라졌다는 걸 느낀 것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검을 들었다.

콰앙!

폭발에 가까운 충돌이었다. 주변의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김현일의 안광이 붉게 변해있었다. 아드레날린 부스트처럼 시간의 제약이 있는 스킬이 분명했다.

김현일의 검이 변칙적으로 이곳저곳을 찔러댔다. 이제껏 경험해본 적 없는 검술이었다.

비틀비틀 중심을 잡아가며 막아야 했다. 어느새 공수가 바뀐 것이다. 처음 겪는 검로는 그만큼이나 당황스러웠다.

한석훈의 검술은 철저한 정석에 기반한다. 그의 밑에서 검을 배우는 나 또한 마찬가지고.

반면에 김현일의 검은 변칙적이기 그지없었다. 찔러오는 경로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신선했다. 김현일에 대한 원망은 이미 씻긴 듯 사라졌다.

다만 감탄에 그칠 순 없었다. 어찌 됐든 이 결투의 승자가 돼야 했다. 이마가 뜨끈한 게 느껴질 정도로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좌상단?

부닥치는 즉시 롱소드가 얕게 떨었다. 우하단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허벅지부터 내 몸이 양단됐을 것이다.

또다시 김현일의 검이 춤춘다. 이번엔 확실했다. 아래쪽에서 놈의 공격이 들어온다!

휘익-!

빌어먹을. 옆구리를 찔러오는 검격을 간신히 피했다.

“후우.”

고집부릴 때가 아니었다. 본래의 자질만 따졌을 때 나는 김현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언제부터 내가 그만한 재능이 있었다고. 노력과 끈기야말로 나를 상징하는 대명사다. 자존심은 승부 앞에서 하등 쓸모없다.

온전히 내 몸을 본능에 맡겼다. 정확히는 검신의 축복이라는 특성에. 굳이 거부하지 말자. 이 특성 또한 내가 얻은 내 것이다.

승기를 잡으려는 듯 과감하게 들어오는 김현일을 응시했다. 전신의 힘을 빼고 나니 그제야 검로가 보였다. 나도 놀랄 만큼 부드럽게 몸이 움직였다.

한 발짝 움직이자 김현일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적중과 간발의 차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간격이 있는 법이다.

예상 못 한 게 아니라는 듯 김현일은 곧장 몸을 회전시켜 다시 나를 덮쳤다. 그것마저 나는 가볍게 피했다.

변칙 속에 규칙이 있었다. 풀이법만 찾으면 문제는 쉬운 법이다. 그래서 타인이 수련할 때는 함부로 봐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 변칙만의 파훼법을 찾자 그다음은 쉬웠다. 몇 번이고 그의 검을 피하자 김현일이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띠며 몸을 멈췄다.

“내가 졌….”

“잠시만!”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잡힐 듯 말 듯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승부는 이미 정해졌지만 내 고집이었다. 다행히 김현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수련하는 자로서 통감하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검을 휘둘렀지만 힘은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방금 깨달은 것을 풀어내는 것일 뿐.

어느새 김현일도 복싱선수의 주먹을 받아주는 코치로 변해있었다.

변칙 속의 규칙. 김현일이 가진 검술의 핵심이었다. 평소대로 생각해서는 안 됐다.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을 모두 비우고 김현일과의 일전만 생각했다.

좌에서 우, 하단에서 상단. 꼼수가 아니라 그 속에 정수가 있었다. 풀어낼수록 현묘함이 느껴진다.

동시에 김현일이 이것을 만들면서 얼마나 고찰했을지도. 확실했다. 김현일은 천재다.

그러던 중 잡히는 게 있어 선을 따라 검을 그었다.

스악-!

이렇게. 맞나?

시험지를 채점 받는 기분으로 정면을 보자 김현일이 경악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김현일의 얼굴이 푸르르 떨렸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듯 천천히 고개를 저으면서.

아차. 내가 무슨 짓을. 남의 기술을 허락 없이 훔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생사결을 치러도 할 말이 없는 짓이다.

더군다나 우리 둘 모두 소속이 있었다. 개인을 넘어 단체끼리의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바로 갈등을 없애야 했다. 하지만 말로는 풀 수 없는 사항이다.

나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정석으로 배운 검이 먼저였다. 우직하고 강직한 기운이 거기에 담겨 있었다.

기운이 어느 지점에 다다랐을 때. 그 속에 변칙의 묘리를 풀어냈다. 김현일의 것과 비슷하지만 또 전혀 다른 검술이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의 단점을 보완했다. 뻔하지 않지만 깊이가 있는 것이다.

즉흥적으로 만든 검술이지만 당장에 애착이 갔다. 이 검술을 대성하면 어떻게 될지가 궁금했다.

그때부터는 무아지경이었다. 다른 것들은 사라지고 나와 검만 남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의 개념이 사라지고 마침내 눈을 떴을 때였다. 만 명이 있는 공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응?”

이 비현실적인 장면에 어안이 벙벙해서 앞을 봤더니.

“하늘이 내린 천재가 바로 여기 있었군.”

김현일이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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