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제2의 성요한 (1)
홍보팀장 홍주연은 프로페셔널한 사람이었다. 젊은 나이에 팀장을 달았다더니 괜히 그런 것이 아니다.
열흘째 우리 팀 앞에 죽치고 나를 기다리는 것이 하도 부담스러워 후딱 거절하자 싶어서 앉은 것인데.
“태진 씨가 불편한 점 없게 하겠습니다. 물론 비밀유지서약서도 받을 거고요.”
솔깃했다.
“같은 회사의 동료를 쓰러트리는 것, 그것도 선배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무는 늘 부담을 떠안죠.”
맞다, 맞다.
“태진 씨. 저 이제 겨우 서른이에요. 지금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 짐작 가시나요? 태진 씨가 걸어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누구보다 제가 잘 알 거라 생각합니다.”
아. 이거 말리는 거 같은데.
“크흠. 그래서 비무 상대는 누구로 정한 겁니까?”
내 목소리가 나도 놀랄 만큼 부드럽게 나갔다. 발작하듯 싫다고 거절하던 때와는 180도 다른 말투.
홍주연이 여유롭게 웃었다.
“이제부터 선별해야겠죠. 혹시, 원하는 상대가 있으신가요?”
그녀는 원하는 상대가 있다면 반드시 앞에 갖다 놓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근데 이 사람은 진짜 그럴 것 같다. 왜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한다고 하면 반드시 지키는 사람. 그런 점에서 홍주연은 배울 점이 많은 사람 같았다.
“음.”
누구라도 좋다? 떠올리자니 막상 생각나는 인물이 없었다. 나보다 강한 사람. 그렇다고 너무 강자는 또 곤란하고 적당히….
“그 부분은 걱정 마라. 내가 기가 막히게 뽑아올 테니.”
어느새 뒤에서 다가온 한석훈이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아. 저 양반이 있었지.
인정하긴 싫어도 꾸역꾸역 이길 수 있는 상대만 기가 막히게 골라오던 사람이었다.
“어쨌든. 그러면 하는 거다? 이태진? 이제 무르기 없다?”
한석훈이 못을 박듯이 나를 독촉했다. ‘아 예예’ 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문득 한석훈이 보기 흉할 만큼 웃었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내 말대로 되지 않았냐며 혀를 낼름거리는 것하며.
아 진짜. 하지 말까?
***
한국의 강대기업 일성 배(盃) 세계 헌터 최강자전.
일성의 이름을 내세워서 만든 비무대회였다. ‘어어어’ 하다 생각보다 일이 커져 버렸다. 단순히 내 비무상대나 찾는 건 줄 알았는데 아예 전국구로 어그로를 끌어버린 것이다.
홍주연에게 당했다는 생각보다 그녀의 일처리 능력에 감탄부터 나왔다.
이름부터 거창한 이 비무대회가 생각보다 뜨거웠다.
지원자만 벌써 천 명이 넘는다. 90레벨 이상, 130레벨 이하라는 조건이 붙었는데도 그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이다.
억대의 상금도 상금이었지만, 사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우승한 사람에게는 내 개인 창고에서 무구 하나를 주겠다.”
최태성이 한 말이었다. 보구 수집가, 최태성의 무구 중 하나라니.
[최태성 회장 공식선언! 비무 대회 우승자에겐 이것을?!]
[최태성이 말하다. 제2의 성요한은 누구?]
[베일에 쌓인 성요한의 능력은 얼마나 대단할까. 심층취재!]
커뮤니티를 포함한 인터넷은 이미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최태성은 굳이 자기 무기를 왜 건 거임? ㅂㅅ인증하나]
└ 사람들 끌어모으는데 저만한 게 어딨다고? 이미 스폰서 붙은 것만 백 개가 넘는다 ㅋㅋ ㅂㅅ은 너 같은데
└ 지금 비무 대회 이야기 안 하는 커뮤니티 본 사람?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 정도면 개최되고 나서는 얼마나 뜨거울지 감도 안 옴ㅋㅋ 걍 최태성은 사업 천재가 맞음
└ 최태성이 무리한 건 맞음ㅇㅇ. 저 스폰서들 다 붙어봤자 어차피 S급 무기 하나 값어치도 안 나오는 게 현실. 그냥 그놈을 믿는 거임. 그 최태성이 믿을 정도면 대체 얼마나 괴물일지 궁금하긴 함.
└ 그놈? 제2의 성요한? 근데 나도 이 말이 맞는 듯. 어차피 우승은 제이성
└ ㅋㅋ 방금 암표 파는 사이트 들어갔는데 입석만 200만 원이더라. 에라이.
└ 그거 내일 되면 400됨.
“내 생각보다 규모가 훨씬 커졌다.”
한석훈이 난색을 표했다.
“단순히 토너먼트고 우승이고 하는 단계는 지나간 것 같다.”
“떨어지면 떨어지는 거지, 뭘 그렇게 신경 쓰십니까. 언제부터 그랬다고.”
미안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한석훈이 ‘그게….’ 하며 입을 열었다.
“레벨 130이하라고 조건을 내걸었던 건 단순히 네놈 수준에 맞춘 것뿐이었는데. 이게 어쩌다 보니 대기업들의 기대주끼리 붙는 꼴이 돼 버렸다.”
“어, 그러니까….”
“일성의 명예가 달렸다는 거지.”
일성의 명예가 내 손에 달렸다. 그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명성 하나에 죽고 사는 게 각성자들이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각성자들은 자신이 속한 길드에 소속감이 강한 자들이다.
내 새끼 우승시키려고 만든 대회에서 다른 사람이 우승을 한다?
[일 크게 벌리길래 진짜 뭐라도 있는 줄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최 회장도 이제 한물갔네. 저딴놈 때문에 돈을 얼마나 날린 거야?]
[제2의 성요한? 진짜 정신 놔버린 거냐.]
[성요한이 ㅈ으로 보이나.]
벌써부터 나와 일성을 비웃는 사람들이 그려졌다. 만약에라도 그리 된다면.
나 혼자 욕먹고 끝나는 게 아니라 길드끼리의 신경전이 벌어질 수 있었다. 무릇 각성자들의 세계라는 게 그런 거니까.
“어떡할래. 지금이라도 그만둘 거야?”
한석훈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진짜 내가 원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대회를 중지시키겠다는 듯.
“…그만두긴 이제 와서 뭘요. 그냥 우승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럴수록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배웠다. 위기 속에 기회가 조용히 숨어 있는 법. 은 사실 그냥 질러본 말이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서 애써 태연한 척했을 뿐이다.
돌연 한석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자세다. 성장했구나! 이태진.”
성장은 개뿔. 그냥 가볍게 생각하기로 한 것뿐이다. 난 원래 명예욕이 없어서 욕 좀 먹어도 타격 같은 건 없고, 일성의 권위야 뭐. 내가 알 바는 아니니까.
우승하면 좋고 못 하면 욕 좀 먹지 뭐.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석훈은 마음가짐이 올바르다느니, 일성의 전사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한다느니 하며 나를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음. 굳이 정정해 줄 것까지는 없으니까.
***
카메라 셔터가 여기저기서 번쩍였다. 회사 입구에서부터 늘어선 기자단과 방송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대회 개막날의 아침이었다. 그래서 빨리 이 숨 막히는 현장부터 벗어나려고 했는데.
“저기요!”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또래처럼 보이는 여자였다. 달랑 카메라 하나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우연히 날 발견한 듯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인터뷰 잠시 가능하실까요?”
“네?”
“아. 각성자님 아니신가요?”
“맞긴 한데.”
“이번에 비무 대회 참여하시는 거 맞죠? 잠시만 인터뷰 한번 부탁드립니다! 유튜버 김주현이라고 합니다. 짧은 말씀이라도 좋으니 딱!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이미 몇 번이나 거절을 당한 이후였던 것 같다. 절박하다는 듯 두 손을 꼭 모으는데 좀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기야 예민할 대로 예민할 대회 개막일에 어떤 각성자가 흔쾌히 시간을 내줄까. 그것도 일개 유튜버한테.
원래라면 나 역시 거절했을 텐데.
“잠깐이라면요.”
문득 변덕이 생겼다. 확연히 밝아진 얼굴이 된 그녀가 몇 번이나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 전에 혹시 소속과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물론 원하신다면 무기명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일성의 이태진이요.”
“아!”
일성 소속이라는 말에 김주현이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썩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했는데 알고 보니 금으로 된 튼튼한 밧줄이 얻어걸린 얼굴이 됐다.
내가 세간에 떠들썩한 검신의 축복의 새 주인이라는 걸 알면 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여기서 더 진행하면 네 이름, 얼굴 다 까발려질 수밖에 없다. 그건 막을 수 없어.]
문득 근래의 일이 떠올랐다. 한석훈과 홍주연이 최선은 다하겠지만 어쩔 수 없을 것이라며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핀 적이 있었다. 물론 나도 백번 이해했고.
언제까지 숨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굳이 이름을 알리지 않으려 했던 것은 귀찮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니까.
“아, 아. 네. 이태진 헌터님. 이번 비무 대회에 나가시는 소감은 어떠신지….”
뻔한 질문에 뻔하게 대답해줬다.
“감사합니다. 정말 큰 도움 됐습니다. 연락처 남겨주시면 소정의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은데 혹시 괜찮을까요?”
소정의 선물이라는 건 핑계고 줄을 만들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 모습까지도 퍽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홍주연 같은 사람에 비해서는 새파랗게 어리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을까. 괜히 신경쓰이게 하는 재주가 있네.
경기장은 일성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대회장에서 진행됐다. 관중석까지 동원됐는데 만석인 것도 모자라 어떻게든 관전이라도 하겠다는 듯 연무장 뒤쪽까지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이게 뭐 이 정도까지 할 일이야?”
맡겨만 달라고 하더니. 정말 스케일 한번 어마무시하다.
“태진 씨!”
스태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홍주연이 나를 발견하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컨디션은 어때요?”
“나쁘진 않습니다.”
“다행입니다. 아참! 그리고 저기….”
답지 않게 홍주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태진 씨의 캐릭터와 퍼포먼스가 필요합니다.”
“캐릭터? 퍼포먼스?”
“예. 동의하시기 힘들겠지만 헌터는 이미지가 반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동의하지 않았지만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일단 오늘은 등장에 관한 연출인데요. 예를 들어 관중석에서 점프로 연무장에 착지하는…”
뭔 소린가 듣다 보니까. 내가 다 부끄러울 정도로 뜨악스러운 말들을 쏟아냈다.
이 사람은 부끄러움도 없나?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하는 걸까.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일이에요? 그러다가 경기 지면 어떡하려고요.”
“그 뒤의 일은 미래의 저한테 맡기는 거죠. 호호!”
너무 당당해서 되려 그럴듯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얼굴을 대중에게 공개해야 한다면, 최대한 화려하게 포장된 자리에서 하는 게 나았다. 그렇게 등장한 첫 경기에서부터 내가 질 확률은 낮기도 하고.
물론 어디까지나 회사의 입장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 첫 상대는 누굽니까?”
“대현. 대현의 김현일이다.”
옆에 있던 한석훈이 내 눈을 피하면서 말했다. 대현의 김현일.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대현의 김현일?
“잠깐만요. 대현의 그 김현일이요?”
생각났다. 아카데미에서 지겹도록 들었던 이름이었다. 나보다 한 기수 높은 선배이자 기록이란 기록은 죄다 갈아치운 전천후의 천재.
나 같은 기연빨이 아니라 하늘이 내려준 재능, 천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인간이었다. 졸업할 때 이미 100레벨을 찍었다지?
“그래. 대현의 그 김현일. 어쩔 수 없었다. 대진표는 공정하게 짜야 했으니까.”
한석훈이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는데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는다.
대련 순서도 마음대로 못할 거면 굳이 일성에서 대회를 주관할 이유가 어딨어?
이렇게 된 데에는 제일 재밌는 경기를 제일 빨리 보고 싶기 때문이겠고.
그런데 왜일까. 평소라면 첫 대진부터 이게 뭐냐고 칭얼거렸을 텐데.
왜 전혀 긴장되지 않는 거지?
대현의 김현일이면 나보다 강할 것이 분명한데 이상하게 떨리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질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되려 한석훈이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괜찮냐?”
“화려한 데뷔전이 되겠네요.”
홍주연이 흠칫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고 한석훈은 반색했다.
“크허허! 기세가 좋다! 말하는 거 보니까 오늘 이기겠네.”
“그런데 혹시라도 제가 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일성은 문 닫고 우린 튀어야지.”
한석훈이 진지한 표정으로 품 안에서 사직서를 꺼내며 ‘네 것까지 준비해 놨어.’라며 말했다.
이 양반 가만 보면 웃기는 재주가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경기 준비도 할 겸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듣고 관중석으로 이동했을 때였다.
“어? 이태진?”
옆자리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김국진.”
“아 맞다. 너도 여기 다녔었지.”
아카데미 동기였던 녀석이다. 김국진이 반갑다는 듯 자연스레 내 어깨에 팔을 감쌌다. 녀석의 팔을 내팽개치고 말했다.
“웬일이냐. 여긴?”
내 말에 녀석이 물어볼 것을 물어보라는 듯 묘하지만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웬일은 무슨. 당연히 와야지. 다른 건 몰라도 그 사람 얼굴은 봐야겠다. 그거 아냐? 오늘 이 자리 표값만 천만 원인 거.”
“그 사람?”
의뭉스럽게 물어보자 김국진이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일성 다닌다면서도 몰라? 그 사람 말이야. 제2의 성요한.”
김국진은 유독 성요한이라는 부분에서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어쨌다고? 하는 얼굴로 김국진을 쳐다보자 녀석이 고개를 저었다.
“얼레? 이놈이 진짜.”
김국진이 쯧쯧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너 여기서도 친구 안 사귀고 혼자 다니지? 그럴 줄 알았다. 던전 공략 그거 혼자 하는 거 아니다? 결국엔 사회생활이라고.”
순간 그 시절 녀석의 별명이 떠벌이였다는 게 생각났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김국진은 쉴 틈 없이 입을 놀려댔다.
“제2의 성요한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의 데뷔전이잖냐. 무슨 일이 있어도 눈에 익혀놔야지. 인사라도 나누면 내 평생에 길이길이 남을 안줏감이라고.”
떠벌이라는 별명과는 상반되게도 녀석의 실력은 아카데미 내에서도 탑 티어였다. 나보다도 높았고.
“그럼 너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처럼 기연의 연속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녀석이 내 공격을 한 번이라도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설마. 난 90레벨도 안 됐고. 우리 선배님이 나가신다.”
녀석이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두고 봐라. 너도 알고 나면 깜짝 놀랄걸? 크큭. 지금 말해줄 수는 없지만….”
김국진은 그때부터 자신의 선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선배란 사람이 콧대 높은 제2의 성요한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지도.
“그나저나 너는 알 거 아니야. 제 2의 성요한인지 뭔지가 누군지.”
김국진이 눈썹을 까딱거렸다. 자신에게만 말해달라는 듯 귀를 기울이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난감한 기색을 표했더니 녀석이 내 태도를 제멋대로 해석한 듯했다.
“쳇! 대외비라 이거냐? 어차피 조금 후에 알게 될 건데. 어찌 됐든 일성 최고 간부들이 주목한다던데. 부러워 미치겠네. 물론 우리 선배님한테는 안 되겠지만.”
어느새 임한나가 내 옆자리에 앉더니 조용히 김국진에 대한 감상평을 남겼다.
“선배 똥꾸멍이라도 핥을 기세네. 저거.”
나는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도 녀석의 말을 무성의하게 대꾸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대회개막을 알리는 화려한 춤과 노래가 시작됐다.
돈 좀 썼다는 게 느껴진다. 저 가수들, 연예계는 전혀 모르는 나도 알만큼 유명한 사람들이다.
그 후 몇 가지 안전에 대한 공지를 끝으로. 비무 대회가 시작됐다.
“와아아!”
우레와 같은 관객들의 함성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TV에 중계도 하는지 대련장 곳곳에 카메라가 배치돼 있었다.
“역시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이겠지?”
“그렇겠지. 여기 있는 사람중에 절반은 그것 때문에 왔을걸?”
첫 경기가 이제 막 시작했는데 옆에 있던 관중들이 벌써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맞다. 나는 오늘 마지막 경기에 나선다.
캉!
“그만! 김태한 승!”
눈 깜빡할 사이 첫 번째 경기가 끝나 있었다. 비교적 급하게 개최됐다고는 해도, 회사를 대표한다는 명예가 달려 있는 대회였다. 매 경기의 승자와 패자의 표정이 또렷하게 대비됐다.
“흠. 확실히 강하다. 우리 같은 것들은 상대도 안 되겠어. 쩝.”
김국진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승자에 대한 감상평을 남겼다. 굳이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열 합.
저 남자를 검 열 번 맞대기 전에 이길 자신이 있었다.
***
아직 예선전이라 그런 건지 생각보다 경기 하나하나가 빨리 끝나고 있었다. 그럴수록 관중의 환호성은 커져 가고 있었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오늘의 하이라이트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오늘의 메인 매치가 시작됩니다!]
“그나저나 네 선배라는 사람은 어디있길래 안 보여?”
문득 생각나 김국진에게 물었더니 김국진이 큭큭대며 웃기 시작했다.
“인마! 혹시 내 소속이 어딘지 까먹었냐?”
소속?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내가 눈썹을 찌푸리자 녀석이 카드 하나를 보여줬다. 대현 헌터즈의 사원증이었다. 순간 ‘아!’ 하고 떠오르는 게 있었다.
“김현일?”
“어허! 장차 우리나라 헌터계를 이끌어 나갈 분이시다. 높여 부르지 못해?”
이런 게 인연인 건가. 녀석을 놀라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옆에 있던 임한나를 바라보자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어떠냐. 놀랍지? 아무 말도 안 나오지? 아주 화들짝 놀랐지? 얼굴을 보니 깜짝 놀랐구만!”
다른 의미에서 놀라긴 했는데. 내가 뭐라 입을 열려던 그때, 김국진이 대련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와! 저기 봐! 저기 나오신다!”
대련장에 젊은 남자 하나가 올라왔다. 김현일이었다.
김현일이 등장한 것만으로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몇 배나 커졌다.
나도 아는만큼, 그는 이미 스타였다.
“언젠가는 마주칠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드디어 만나게 돼서 기쁩니다. 오늘 일성 당신들이 떠들어댄 그 이름. 제가 받아가겠습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제2의 성요한!”
김현일이 마이크를 잡고 관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럴수록 경기장의 열기를 더해갔다.
매체를 활용할 줄 아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너무 멋있지 않냐? 간절하게 부탁하면 내가 한번 인사라도 나눌 기회를 주….”
으스대는 김국진의 말을 뒤로하며 벌떡 일어나 연무장 한가운데로 몸을 날렸다. 약속된 연출을 위해서였다.
뒤에서 김국진이 ‘어어! 야! 뭐해!’ 하는 소리가 지나가고, 대련장에 착지했을 때. 방금까지의 뜨거웠던 열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아 있었다.
다시 한번 홍주연이 의심됐다. 정말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숨죽이며 나를 지켜보는 관중석의 사람들을 둘러봤다. 생경한 눈빛으로 나를 보거나, 혀를 차거나, 옆 사람과 저놈이 그놈이냐며 소곤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약속이라도 한 듯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앞에 있는 김현일에게로. 그때쯤 심판이 내게 마이크를 건네왔다.
“저놈이야?”
“긴장했나? 왜 말이 없어?”
“쑥스러움을 타나?”
할 말 있으면 하라는 듯한 기대의 시선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과연 제 2의 성요한이라 불린 놈이 어떤 말을 할까. 그런 눈빛이었다.
기대를 깨서 미안하지만, 나는 김현일처럼 달변가가 아니다. 내가 할 말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덤벼.”
최대한 지루한 표정으로 낮게 읊조렸을 때.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인정했다. 홍주연이 맞았다. 김현일이 등장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큰 함성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