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돼지목에 진주목걸이 (3)
검 한 번 휘둘렀다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등줄기가 축축해서 슬쩍 만졌더니 이미 전신이 푹 젖은 상태였다.
나도 모르게 거친 숨소리가 튀어나왔다. 한 번 휘두른 것만으로 이렇게 되고 만 것이다.
방금의 감각은. 이제까지 내가 휘둘렀던 검술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슬쩍이지만 새로운 경지를 엿보고 말았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다는 걸.
S급의 검신의 축복을 얻었다고 순간이나마 우쭐했던 마음이 절로 겸손해졌다. 성요한? 나 따위가 감히.
힐끔 옆을 쳐다보자 한석훈이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동공은 흔들리고 어깨는 부르르 떨면서.
“어땠습니까.”
칭찬을 바라고 물은 것이 아니다. 방금 것이 얼마나 엉성했는지는 나부터가 잘 알고 있었다.
정말 순수하게 어떤 점을 고쳐야 하는지 궁금했다. 엉성한 건 알겠는데 이걸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서.
“크흠! 뭐, 그 정도면…. 처음치고는.”
그런데 어째 한석훈의 반응이 예상과는 달랐다.
평소라면 ‘어떠냐고? 눈도 못 뜰 만큼 쓰레기였다.’ 라거나 ‘아이고, 저한테 묻는 건가요. 선생님? 잘 아시잖아요.’ 하며 비꼬기 바빴을 텐데.
지금은 내 눈을 피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한석훈이 고개를 돌리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자세히 들을 수는 없지만 3년이니 5년이니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다음은 뭡니까?”
“무, 뭐?”
“다음이요. 오늘은 이걸로 끝입니까?”
하나도 완성 못 하고 둘을 배우려는 것이 얼토당토않은 소리라는 걸 알지만 욕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려치기 하나만으로도 이토록 경이로울 정도인데. 이다음은 얼마나 굉장한 게 튀어나올지 벌써부터 기대됐다.
그런데 이상하다. 한석훈의 입에서 당연히 튀어나와야 할 욕지거리가 이번에도 없었다.
이 양반이 이렇게 당황하는 건 처음 보는데.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자 그제야 한석훈이 소리를 꽥 질렀다.
“배운 거나 제대로 할 것이지! 다음은 무슨 다음! 쯧.”
튀어나와야 할 것이 응당 나오기는 했는데 이것조차도 평소와 달리 부자연스럽다.
어안이 벙벙해서 멀뚱멀뚱 서 있으니 한숨을 푹 쉰 한석훈이 몸을 휙 틀었다.
오늘은 이만하고 가거라. 하며.
***
다음이 뭐냐니.
얼토당토않은 소리에도 한석훈은 뭐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처음에는 이 애송이 녀석이 자기가 얼마나 큰 보물을 얻은 것인지도 모른 채 잔뜩 주눅들어 있길래.
그것이 꼴 보기 싫어서 검 한 자락 가르쳐 주려 했던 것뿐이었다. 분명 그랬다.
때마침 지금까지의 수련 방식으로 올릴 수 있었던 추가 스탯 또한 한계에 다다르기도 했고.
뭘 가르칠까 고민하다 생각난 것이 베기였다. 자신도 처음 검을 잡을 때 이것만 주야장천 연습하지 않았던가.
베기 동작을 떼는 데에 3년이 걸렸던가? 자신의 스승이 다음 동작을 가르쳤을 때가.
녀석은 모를 것이었다. 지금 자신이 가르치는 게 얼마나 심도 있는 기술인지.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데, 일련의 동작을 본 이태진의 표정이 생각보다 진지했다.
녀석이 입을 떡 벌린 채 자신을 바라볼 때는 뿌듯한 마음까지 들었다.
이것을 알아봐 준 사람이 얼마 만이더라. 그래서였다. 아까 가졌던 마음보다 좀 더 열의를 가지고 가르칠 생각이었다.
녀석이 평소처럼 엉망진창으로 검을 휘두른다 해도 살갑게 대해줄 마음이 있었다.
놈이 한껏 긴장된 표정으로 검을 들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화악!
“어?”
한석훈 자신도 감히 베기를 완벽히 숙지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 이 녀석의 동작 또한 완벽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방금 그건…. 뭐지?’
한석훈은 순간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레벨은 안 봐도 뻔했다.
거기에 검신의 축복을 더한다 한들 녀석이 낼 수 있는 퍼포먼스란 것도 결국 예상을 벗어나기 힘들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방금 그 장면은.
“허.”
녀석이 휘두른 검은 자신이 과거 3년 동안 쌓아 올린 그것에 필적했다. 단 한 번 만에!
그런데도 녀석은 만족을 모르는 듯했다.
심지어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지 찌푸린 표정으로 어깨를 이리저리 돌려댔다. 순간 심장이 철렁거렸다.
그 상황에서 튀어나온 말은 더 가관이었다. 이 다음은 뭐냐니.
여기 더 있다가는 이 녀석에게 무슨 꼴을 보일지 몰랐다.
차마 자신이 감탄했다는 걸 내보일 순 없다. 이태진의 성격으로 보건대 향후 한 달은 놀림감이 될 게 분명했다.
후다닥 연무장에서 도망친 건 그래서였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 동안 심장이 쿵쾅댔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보물을 몰라본 건 정작 자신이었다.
이태진을 해외로 보내겠다는 처음의 생각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갔다. 이태진을 키우고 싶다는 욕심이 속에서부터 근질거렸다.
궁금했다. 자신이 키운 이태진이 얼마나 성장할지.
“이기적이라고는 하지 마라. 이태진은 내가 키워야겠으니.”
향후 이태진을 탐낼 모든 경쟁자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자신을 보고 군침을 흘리던 스승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고인물 컨텐츠의 끝판왕은 역시 뉴비 키우기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이건 먼저 주운 놈이 임자인 것이다.
***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현재 한석훈은 피가 말리는 기분과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상단이 열렸다.”
“아, 이렇게요?”
휙!
“…크흠! 그, 그래, 그렇게.”
이태진은 도저히 만족을 모르는 놈이었다. 녀석은 하나를 배우면 둘을 원하고 셋을 가르쳐 주면 열을 달라고 졸라댔다.
처음 검을 잡은 애송이들이 응당 그러하듯 녀석 또한 열의에 찬 모습이었다.
가르치면 가르치는 족족 솜처럼 빨아들이는 탓에 지도하는 맛 또한 확실했다. 그런데 녀석의 재능이 웬만해야지.
자신이 일 년 걸린 것을 일주일 만에 습득하고 삼 년 걸린 것을 한 달 만에 해치워 버리니.
검이라면 일성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한석훈조차도 감당이 되질 않았다. 오늘만 봐도 그렇다.
챙! 챙챙!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대박! 지금 팀장님이 밀리는 거야?”
“…봐주는 거겠지. 설마….”
뒤에서는 김세린과 박하영이 설마 하며 지켜보는 중이었다.
저 멀리 서 있는 이지은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싶어서. 물론 그럴 일은 없었다.
한석훈의 발이 이태진의 배를 가볍게 건드리자.
퍼억!
여지없이 이태진의 몸이 저 멀리 처박히고 말았다. 김세린과 박하영이 뜻 모를 한숨을 내뱉었다.
“그, 그치? 당연히 안 되지….”
“아, 아무렴! 휴…. 우리도 슬슬 훈련 시작할까?”
“어, 어! 그래야지.”
김세린과 박하영이 몸을 돌리려던 그때. 구석에 처박힌 이태진의 몸이 훌쩍하고 뛰어올라 다시 한석훈에게 돌진했다.
챙!
그들의 눈으로는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날카롭게 한석훈에게 달려들었다.
캉! 캉!
빠악!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여지없이 이태진의 몸뚱어리가 구석에 꽂혔다. 그렇지만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다.
‘또 온다!’
꿀꺽 침을 삼킨 그때. 퉤 하고 피가 섞인 침을 뱉은 이태진이 슬금슬금 일어났다.
“뭔가…. 전이랑은 좀 다른 느낌이지 않아?”
박하영이 김세린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물었다
“그, 그러게? 옛날에는 뭔가 발악이라 해야 하나 몸부림친다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었는데 지금은 좀….”
“대련 비스무리해졌지.”
어느새 이쪽으로 온 전용철이 김세린의 말을 이어받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이 떨어진 때는 이태진이 네 번째로 구석에 처박히던 순간이었다.
“나는 어디 하늘에서 S급 스킬 뚝하고 안 떨어지나? 용철 오빠! 우리도 안 따라잡히려면 열심히 해야겠는데요?”
기가 죽은 김세린이 울상을 짓자 옆에 있던 박하영이 조소를 지었다.
“안 따라 잡히려면? 말은 바로 해야지! 최대한 쫓아가려면 죽을힘을 다해야지. 라고 해야지? 아니, 그런다고 되려나?”
“…….”
“야. 이제 저 오빠는 우리랑 다른 세계야. 너 같은 건 지금 일 초 컷이라고!”
“일 초? 그러면 너는! 너는 몇 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난 1.5초.”
“하! 너 잘났다.”
“너보다는 원래 잘났지.”
김세린과 박하영의 유치한 말장난을 보다 못한 전용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그런 전용철의 표정은 더없이 굳어 있었다.
‘검신의 축복이 없었더라도 이태진은 지금처럼 빠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타고난 끈기와 독기라는 게 있다.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능력 말이다.
시스템 창에 표기되지는 않지만 A급 이상의 각성자들은 모두 가지고 있을 그것.
이태진은 자신이 봐왔던 각성자 중 가장 독종이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는 내가 살 떨릴 만큼 독종이다.’
이태진이 가진 능력 중 가장 귀한 것은 그런 것이다.
저런 건 따라 한다고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타고난 것이지.
‘이거. 오랜만에 동기 부여되네.’
그때는 이미 이태진이 일곱 번째로 쓰러진 순간이었고, 한석훈이 마침내 깊은숨을 토해내던 때였다.
***
“팀장님! 이건 아니죠!”
앞에 있는 남자가 흘깃 나를 보며 말했다. 나이는 서른쯤 됐으려나.
“아무리 그래도 제가 저런 애랑 뭘 합니까?”
그러면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어이없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뭘 했다고 날 저런 눈으로 봐?
발단은 어제이지 않을까 싶다. 한석훈이 조마조마하단 얼굴로 발도술을 가르쳐 주던 시간에.
평소보다 어렵고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던 그것을 따라 하다 잘되지 않아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한석훈이 벌컥 소리를 질렀다.
“해도 해도 너무하네! 그렇게 가져가 놓고도 똥 씹은 표정이면 나더러 어쩌라고!”
다짜고짜 한석훈이 버럭 화를 내자 나로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석훈이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할 말을 찾고자 어버버하며 더듬거리고 있는데 한석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무장을 박살낼 듯 박차고 나갔다.
이런 말과 함께.
“자신감이 부족한 거냐? 그런 거야? 휘두르기만 해도 쑥쑥 크는 녀석이 뭘 그리 한 번 훈련할 때마다 그렇게나 심사숙고하는지. 알았다. 기다려 봐라.”
나는 한석훈의 급발진에 어처구니가 없어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이쪽은 C급 던전 2팀 최찬규 대원이다. 그리고 이쪽은…. 일성의 슈퍼스타 이태진.”
한석훈이 나와 남자를 불러내며 말했다.
‘이게 뭐하는 겁니까?’ 하는 눈으로 한석훈을 쳐다봤지만 내 눈을피할 뿐.
“팀장님. 저 던전밥 먹은 지만 7년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이런 애송이랑…. 급이 안 맞잖아요.”
“몸 근질근질하다 할 때는 언제고?”
“그거야 용철이 형 정도 붙여달라는 말이었죠. 무슨 저런…. S급 특성 하나 얻었다고 하루아침에 성요한이라도 된답니까?”
남자는 내가 앞에 있는데도 서슴없이 나를 까내리기 바빴다. 이쯤 되자 나도 어떤 상황인지 대충 그려졌다.
물론 이해는 간다. 7년 차 헌터랑 아직 1년도 안 된 애송이를 붙여놓으면 누구라도 저런 반응일 게 뻔하지.
당장 나한테 아카데미 1학년을 붙여놓았어도 똑같은 반응이었을 테고.
그래. 이해는 하는데….
“이태진 맞지? 레벨은 몇인데?”
“61인데요.”
나도 말이 곱게 나가지는 않는다. 안 그래도 신경 쓰이는 것 잔뜩인데 내가 저딴 소리 들으면서 참아야 하나?
“아나 진짜 미치겠네.”
최찬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석훈한테는 ‘진짜로 얘랑 해야 해요?’ 하며 착잡한 표정을 보이며.
갑자기 이거 없던 승부욕도 생기네?
“이기면 골드박스 하나 준다.”
“네? 진짜요?”
다시 돌아가려던 최찬규에게 한석훈이 내건 제안이었다. 한석훈의 표정을 보니 진심인 것 같다.
뭘 믿고 저러는 거지? 정말 내가 저 사람을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합니다! 예! 하고말고요!”
대번에 최찬규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최찬규의 눈빛에서 탐욕이 이글거렸다.
곧장 대결이 성사됐다. 물론 여기에 내 의사 따윈 없었고.
“이태진 파이팅!”
“난 이태진에 5만 원. 너는?”
“나도.”
“엇, 나돈데. 지은이도?”
“…저도 태진 오빠가 이길 것 같아요.”
“에이. 이러면 내기가 성립이 안 되잖아.”
어느새 뒤에는 심심하던 차에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단체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임한나는 왜 우리 팀이랑 있는 거야?
심지어 우리팀 사람들과 재밌다는 얼굴로 이런저런 이야기까지 주고받고 있다.
“허…. 이것들이 진짜! 어이가 없네. 좋다! 나는 내가 이긴다에 건다!”
잔뜩 자존심이 상한 최찬규가 길길이 소리를 질렀다. 뒤에 있던 관객들은 좋다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정작 진짜로 어이가 없는 건 난데.
“팀장님. 안 봐주고 해도 되죠?”
자신은 없는데 일단 뱉고 봤다. 기세다. 기세. 기세에서 밀리면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면서 최대한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이미지고 뭐고 최찬규의 신경이나 긁기로 했다.
효과는 좋았다. 최찬규가 아까보다 더 길길이 날뛰어댔다.
“애송아! 여기저기서 떠받들어 주니까 벌써 뭐라도 된 것 같냐?”
아닌데. 떠받들기는커녕 매일 구타만 당하고 있는데.
“하, 진짜! 이게 뭐 하는 짓인지는 모르겠는데 빨리 끝내자. 자, 들어와 봐!”
최찬규가 나를 향해 검 끝을 까딱대며 들어오라는 제스쳐를 해댔다. 조금의 경계심도, 방어 자세도 취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사양할 것 없지.
나는 있는 힘껏 최찬규에게 몸을 날렸다. 쓸 수 있는 스킬은 모조리 쏟아부으면서.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던 최찬규의 동공이 커졌을 땐 이미 내 몸이 최찬규의 바로 앞에 있었다. 어어 하던 최찬규가 순간 몸을 비틀었지만.
늦었어.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