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돼지목에 진주목걸이 (2)
“사내 장비 보관소 무기한 대여권 정도면 어떨까 싶은데.”
최태성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예? 회장님! 장비 보관소라 하심은….”
백인호가 쩔쩔매며 묻자.
“당연히 비매품까지도 포함해서.”
최태성이 태연하게 말했다. 덧붙여 ‘마음 같아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거라도 주고 싶은데, 아무래도 레벨 제한이 있으니까.’ 하며 아쉬워하기까지 한다.
들은 적 있다. 일성의 장비 보관소. 장비 판매가 주력사업이 아닌데도 일성의 비밀창고는 각성자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나 같은 애송이도 알 만큼.
판매업체에 납품한 것을 제외한 알짜배기만 보관한 곳이라지? 듣기로는 발에 걸리는 게 A급 아이템이라는 말도 있었고.
지금 최태성은 그곳을 언급하고 있었다.
최태성의 설명이 계속됐다. 듣다 보니까 말이 대여권이지 그곳에 있는 아이템 전부를 주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 이후로도 연봉인상이나 레벨 상승에 따른 파격적 인사이동 같은 조건이 줄줄이 나열됐다. 거기까지 가서도 최태성은 뭔가 부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쯤 되자 듣는 나도 부담스러웠다. 대기업을 일군 남자한테 할 말은 아니지만 최태성 이 사람.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거 아닐까.
아니고서야 저렇게까지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할 리가 없잖아.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 레벨이 몇인지는 알고 지금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차라리 한석훈에게 얼마나 처절하게 짓밟히는지 보여주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그만큼 부담스러웠다.
내가 기대에 부응 못 하면 어쩌려고 지금 저러는 거야? 검신의 축복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실력이 뒷받침돼야 써먹지.
쥐뿔도 없는 놈한테 이렇게나 퍼줘도 되는 건가?
오만 잡생각을 하며 눈만 끔벅끔벅 뜨고 있자 최태성이 ‘흠. 이걸로 부족하면.’ 하고는 또 뭔가 말하려고 한다.
“그게 아니라….”
‘너무 과한데요?’ 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당사자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좀 이상하잖아.
보통 이러면 주위 참모들이 말려주지 않나? ‘회장님! 이제 겨우 신입사원인데 조금 더 지켜보시죠.’ 하고 말이다.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간부라는 작자들도 처음에는 당황하던 기색이 역력하더니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수긍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고만 있었다.
한석훈을 바라봤지만 입 모양으로 ‘더 뜯어내!’ 같은 말만 하고 있었고. 저 인간을 믿은 게 바보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최대한 얼굴을 가다듬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내 말에 최태성은 물론이고 장 내 간부들의 표정이 그제서야 한결 풀린 듯했다. 당장 S급 특성의 위력이 이 정도구나. 실감 난다.
그 후로도 얼마간 말을 주고받았을까. 나는 진이 다 빠진 채로 겨우겨우 회장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진심이냐?”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한석훈이 물었다.
“뭐가요?”
“여기 남기로 한 거.”
“네. 진심인데요.”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표정을 팍팍 내비치자 한석훈이 한숨을 푹 쉬었다.
“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러나 본데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솔직히 말하자면 일성에서 줄 수 있는 건 저게 전부일 거다. 그런데….”
그때부터 또 시작이었다. 해외 초거대기업의 인프라와 자본 규모부터 시작해서 성장 가능성이니 뭐니. 이제는 저 대사까지도 외울 지경이다.
“저도 다 생각하고 결정한 겁니다.”
그럼에도 한석훈은 못 미더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눈으로는 ‘퍽이나 니가 잘도’ 같은 말을 하는 채로.
“꿈이 작은 거냐? 그냥 우물 안 개구리로 만족하는 거냐고.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고 해서 그래? 야 인마 그건 농담이고.”
얼씨구. 이제는 하다 하다 이런 말까지 듣네. 그런데 한석훈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마치 애송이 헌터가 정에 휩쓸려 잘못된 길을 선택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것 같다.
“하아. 다른 데 가봐야 지금만큼 빨리 성장할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요. 솔직히 팀장님 수련법이 무식하긴 해도 그만한 게 없기도 하고. 거기다 당장 해외 진출해서 망한 애들이 한둘이냐고요.”
“야, 그건….”
“아뇨. 됐습니다. 그냥 있을 때 잘해 주시죠. 때가 되면 나가지 말라고 붙잡아도 나갑니다.”
결국 내가 더 이상 대화하기 싫다는 듯 입을 꾹 닫자 입술을 달싹이던 한석훈도 마지못해 한숨을 쉬며 네 맘대로 하라고 한다. 그래도 어찌어찌 넘어간 건 맞지?
한석훈에게 변명하듯 여러 가지 이유들을 나불댔지만. 차마 진짜 이유 중 하나인 ‘지금 2팀이 좋아서.’라는 말은 못 했다. 그건 너무 낯간지럽거든.
해외라. 일이 터지고 나서 어떻게 알아낸 건지 이미 몇몇 곳에서 연락이 오긴 했다.
걔 중에는 비각성자조차도 이름만 들으면 알 정도로 초일류기업도 있었고.
그곳에서 제시한 조건은 이전의 나는 꿈도 못 꿀 정도로 높았지만. 뭔가 끌리지 않았다.
한석훈이 말한 것처럼 애송이 헌터의 섣부른 판단이라 해도 좋다. 지금은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싶었다.
당장 1팀으로 파견 한번 갔다 왔는데도 알겠다. 2팀처럼 가족의 품이 생각나는 팀은 잘 없다는 걸.
어쩌면 S급 특성보다, 초자연적인 예지몽보다 더 귀한….
“오빠 바보예요? 회사 지분이라도 달라고 했어야지. 그렇게 세상 물정을 몰라요?”
“헐. 지금까지 김세린이 한 말 중에서 제일 똑똑한 발언이었어.”
“지은아. 팀장님이 쟤 잘못 때린 거 아니야? 한번 가서 봐봐.”
“…헉.”
아닌가.
***
이쯤에서 한 번쯤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아드레날린 부스트, 검신의 축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상태창에도 기술되지 않은 예지능력에 대한 것 말이다. 혹시나 싶어서 스킬 목록을 다시 살펴봐도 역시나 예지 비슷한 것조차도 없다.
우연이나 환상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능력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상태창에 없는 스킬이 발현될 수도 있나 싶어 한석훈에게 물어봤지만.
“덜 맞았냐? 헛것이 보여?”
괜히 핀잔만 들었다.
생각을 바꿨다. 그래. 어떻게든 내게 미래를 보는 능력이 생겼다고 납득한다 치자.
그렇다면. 사용법은 몰라도 조건만큼은 알아야 했다.
어떤 스킬은 발동 시 패널티가 부과되는 것들이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당장 아드레날린 부스트가 그랬다.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뛰어나지만 시간이 끝나면 대번에 체력이 반으로 줄어버린다. 쓸 때마다 직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당장 A급이라 지칭된 스킬에도 이만한 패널티가 있는 것인데. 무려 미래를 보여주는 스킬이다.
만약 앞날을 볼 때마다 수명이 반씩 줄어든다면?
극단적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아드레날린 부스트 따위는 우습게 보일 만큼 예지능력은 사기적이니까.
그렇기에 나 말고도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찾아야만 했다. 당장 인도에 있다는 오라클이 떠올랐다. 열 명의 수도승으로 이루어진 집단이라지?
다만 그들도 비유로 미래를 암시할 뿐이지 나처럼 당장 들이닥칠 사건을 뚜렷하게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또 다른 사람은 없을까 싶어 나름대로 뒤적거려 봤지만 수확은 없었다. 결국 빙빙 돌아왔지만 결론은 같았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한석훈에게 한 말처럼 있을 때 잘 활용하자는 다짐뿐이었다. 답답했지만 할 수 없었다.
“뭘 그렇게 죽을상이야?”
한석훈이 내 표정을 보고는 쯧 하면서 말했다.
“오랜만에 맞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운 빠져서요.”
나는 피식 웃으며 인벤토리 안에서 롱소드를 꺼냈다. S급 특성을 가진 이후로는 처음 가지는 수련이었다.
“불행히도 오늘은 나한테 안 맞아도 된다.”
한석훈이 자못 씁쓸하다는 듯 말했다.
“자기 수준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야. 이래서는 답답해서 내가 먼저 죽을 지경이다. 영광으로 생각해라. 네 놈이 두 번째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석훈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 한석훈이 검을 꺼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흠칫했는데 다행히도 날 향한 것은 아니었다.
조용히 숨을 들이마신 한석훈이 느릿하게 검을 그었다. 천천히. 아주 답답할 정도의 속도로 말이다. 위에서 아래로 작은 바람 소리와 함께.
처음에는 뭔가 했다. 그러던 순간에 내 모든 신경이 그곳에 집중됐다. 조금이라도 놓칠까 봐 눈도 못 감은 채로.
길고 긴 시간이 끝나고 마침내 검 끝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아!
감탄사를 숨길 수 없었다. 단지 내리긋는 동작 하나만으로도 순간이나마 정신을 놓을 뻔했다.
이전까지, 그러니까 보름 전까지만 해도 방금 전의 장면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터였다.
어쩌면 뭐하냐고 비아냥댔을지도 몰랐다. 가르쳐 줄 거면 제대로 된 걸 보여줄 것이지 이게 뭡니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한석훈의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그것이 허리를 타고 올라와 어깨를 관통해 결국 검으로 도달되는 그 힘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동작의 연속이 내게 똑똑히 보였다.
누군가 둔기로 내 머리를 한 대 친 것만 같은. 그런 충격이었다. 그때, 눈 앞을 가리는 메시지가 떴다.
[절정에 달한 검의 끝자락을 아주 살짝 엿보았습니다.]
[특성 획득 : 중급검술!]
이깟 메시지 따위는 지금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보다. 지금까지 내가 휘둘렀던 검은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너무 놀라 입만 뻥긋거리고 있는데 한석훈의 검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방금보다 조금 더 빠르게.
후웅!
더 빠르게.
훅!
눈으로는 따라가지도 못할 만큼!
확!
그러던 직후 한석훈이 턱을 까딱거렸다. 한번 따라 해 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선뜻 팔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보고 이걸 하라고?
약간이나마 방금 그것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보고야 말았다. 더불어 지금의 나는 죽었다 깨도 저렇게는 못 한다는 것도.
문득 저 양반의 레벨이 궁금해졌다. 모르긴 몰라도 A급 헌터는 되지 않을까. 이런 사람이 대체 왜 여기서 나를….
내가 말도 못 한 채 꾸물대고 있자 한석훈이 ‘음?’ 하며 쳐다봤다.
“돼지 목에 진주라도 진주기는 한가 보구나. 뭔가 보이기는 하니.”
“방금 그, 그건 뭡니까.”
“설명해 준다고 알아들을 수 있겠냐? 잔말 말고 따라해 보기나 해.”
답도 못들은 채로 나는 롱소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젠장할.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지금껏 한석훈이 얼마나 나를 우습게 봤을지는 안 봐도 뻔한 것이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머릿속으로 한석훈이 보여준 장면을 되감았다.
거울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얼마나 엉성한 자세로 그것을 흉내내고 있는지.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 올린 검을 내리기 시작했다. 발끝에서부터. 허리를 타고 올라와 어깨를…!
화악!
[완벽에 가까운 베기를 성공했습니다.]
[중급검술이 숙련 단계에 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