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레인 우버.
낡은 럭키박스에서 나온 광채는 석 달 전 온 산을 뒤덮었던 A급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강렬한 빛이 던전 구석구석을 채웠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짧은 메시지 한 줄에 담겨있는 힘은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컸다. 잠깐 다리를 휘청거릴 정도로.
머리가 아찔했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꿈에서 왜 그리도 1팀장이 기뻐했는지.
아니, 지금 생각하니 그때 1팀장은 감정을 최대한 자제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때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경악. 혹은 당황.
그들도 각성자다. 방금 전의 빛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리가 없었다.
최소한 A급. 잘하면….
차마 직접 묻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의 눈동자 이면에 그런 불신이 가득했다.
진짜냐고. 정말 S급을 띄운 것이 맞냐는 물음.
오색 찬란한 빛은 완전히 사라지고 컴컴한 던전만 남았지만 누구 하나 먼저 입을 떼는 자가 없었다.
태연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던 임한나도. 박스를 깔 때까지만 해도 팔짱을 끼고 있던 1팀장조차도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벌린 채 가만있었다.
“뭐…뭐냐.”
1팀장 김찬현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1팀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지? 아니잖아. 그래선 안 돼.’
눈에는 그런 불신과 바람을 담고서.
“그게…. 특성이 떴는데요. S급이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말끝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까부터 심장이 요동친다. 두 달 전엔 A급 스킬, 오늘은 S급 특성.
보통사람의 정신머리로 이 행운의 연속을 어떻게 버티겠는가. 나도 꿈에서 미리 알지 못했다면 진작에 주저앉았겠지.
“뭐? 트, 특성? S급?”
“태진 씨. 똑바로 좀 말해봐요. 뭐가 떴다고요?”
“야. 장난치지 말고. 정신착란 저주 걸린 거 아니야?”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부정적인 태도였다. 특히나 1팀장은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 있었다.
허나 이들도 사실은 알고 있다. 내가 진짜로 최상위 특성 중 하나를 뽑았다는 것을. 단지 너무 믿기지가 않아 이러는 것뿐이었다.
“하나 더 남았는데요. 이것도 제가 깔까요?”
이 상태를 더 유지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시선을 돌리기 위해 꺼낸 내 말에 그제야 사람들의 얼굴도 현실로 돌아온 듯 보였다.
“뭐? 기다려! 이건 내가 깐다.”
1팀장이 헐레벌떡 말했다. 더 이상 진짜냐는 말이나 그럴 리 없다는 부정적인 태도는 없었다.
1팀장의 얼굴에는 이것마저 내게 빼앗기기 전에 나머지 하나, 그러니까 황금빛 럭키박스를 까야겠다는 의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낡은 상자에서는 S급이 떴으니 황금빛 상자는? 거기에 대한 기대가 커 보였다.
그렇게 김현찬이 허둥지둥 박스를 열었을 때. 오색찬란한 빛이 또다시 우리를 덮쳤다.
“이런 미친!”
팀원 중 하나의 말이었다. 그래 미친 상황이지. 럭키박스 두 개가 전부 대박이라니!
아까와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평범한 광채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빛 사이로 보이는 1팀장의 표정이 저리도 환한 것이겠지.
박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사이로 1팀장을 포함한 이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용한 점쟁이를 보는 듯한 얼굴도 있었고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사람도, 마주치면 속이라도 꿰뚫릴까 눈을 피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오묘한 시간이 지나가고 빛이 사그라들자 날 보던 얼굴들이 일제히 1팀장으로 향했다.
이번엔 뭔데.
우리들은 궁금증을 숨기지 않았다.
“이, 이건.”
1팀장이 어느새 손에 들린 것을 보며 말했다.
보검.
S급 검신의 축복 때문일까. 왜 저것이 A급 아이템인지 알겠다.
일자로 쭉 뻗은 검신은 척 보기에도 날카로워 보였고 손잡이에 박힌 보석은 마법적 장치가 돼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마 원래는 저것이 내가 뽑게 될 것이었고. 지금 1팀장이 짓고 있는 표정이 내 얼굴이겠지.
팀원들은 1팀장이 A급 아이템을 뽑았는데도 축하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오히려 안쓰럽다는 듯 침묵만 유지하고 있었다.
던전에서 획득한 모든 아이템은 회사에 반납한다. 그것이 우리의 규칙 아니었던가.
예지몽 속 1팀장이 뭐라 그랬더라. 푸들푸들 떨리는 1팀장의 얼굴에 대고 말했다.
“팀장님. 그거는…. 반납하셔야겠는데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물론 속마음은 아니었지만.
***
‘너는 알고 있었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개새끼가 진짜!’
같은,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노발대발 침을 튀기며 1팀장이 날뛰었다.
나머지 팀원들은 말리는 데 여념이 없었고 나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탈출석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이대로 공략 진행할 순 없겠는데요.”
모두 그 말에 동의했다. S급 특성과 A급 아이템이 뜬 것만으로도 주체 못 할 흥분이 감돌았는데 던전 공략의 지휘관인 리더가 팀원과 불화가 생겼다.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던 1팀장을 포함해 우리는 모두 인벤토리 안에서 던전 탈출석을 꺼냈다.
[D급 이하 던전 탈출석 :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닥쳐. 어딜 나가. 뒤지고 싶냐?”
우리의 의견은 그 한마디에 묵살됐다. 맞다. 던전 내에서만큼은 지휘관인 리더는 절대적인 힘이 있었다.
특히나 규율화된 일성에서는 더더욱 팀장의 오더는 절대적이었다. 흥분했을지언정, 김찬현 팀장의 말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슬그머니 인벤토리 속으로 탈출석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던전 탈출을 포기한 현 상황보다 더 최악인 점은, 이 앞에 있는 방에 보스가 머물고 있다는 점이었다.
빌어먹을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보스몹과 처절한 전투 중, 흥분한 김찬현에게 목이 베이는 그림 말이다. 저승길 동무는 옆에 있는 임한나와 나머지 팀원들.
허무맹랑한 망상 따위가 아니다. 던전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 따위는 뉴스거리도 안 되는 세상이다.
“임한나.”
작게 임한나를 부른 뒤 주먹을 쥐었다. 그렇게만 해도 임한나는 내 뜻을 알아차렸다. 혹시나 하는 불상사가 생길 때를 대비해서. 아무리 김찬현이라도 던전 밖에서 날 죽일 생각은 못 하겠지.
끼이익-
때마침 김찬현이 신경질적으로 보스룸의 문을 열었다. 미친 새끼. 무려 D급 던전의 보스몹인데도 브리핑 하나 없었다. 김찬현이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무능한 새끼.”
임한나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크뤄러러!”
최악이다. 기다렸다는 듯 헤드 셰프널이 괴성을 질렀다. 제 부하가 다 죽은 탓이었다.
[보스몹을 제외한 모든 몬스터를 제거했습니다.]
[추가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오크족장의 분노 : 부족의 모든 오크를 다스리는 오크 족장이 이에 분노합니다. 헤드 셰프널의 능력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환장할 버프 마법까지.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화가 단단히 난 놈이 콧김을 쉭쉭 뿜어대며 다가왔다.
“환장하겠네.”
“나와도 하필 저런 새끼가.”
“팀장님 지금이라도 빠져나가는 게….”
팀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갑갑한 얼굴로 오크를 쳐다봤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돼지보다 먼저 나한테 목 날아가고 싶은 게 아니면.”
으르렁거리던 김찬현이 급박한 상황에 브리핑을 하겠다며 팀원들을 불러모았다.
그런데 김찬현의 브리핑은 초조함을 잊을 정도로 황당한 것이었다.
“놈은 똑똑해. 힐러부터 노릴 거야. 그러니까 탱커는 힐러 옆에 붙어 있는다. 레인저와 원거리 딜러도 같은 위치에. 나랑 이태진은 놈의 전후방으로 돌격한다. 이태진이 전방. 내가 후방. 걱정 마라 이태진. 곧장 내가 달라붙을 테니까. 뭐해!”
흥분을 가라앉힌 김찬현이 전방을 향해 턱을 까딱거리는데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그로를 끌어줄 탱커 없이 나 혼자 돌진하라고? 그것도 보스전에서?
“공략 리포트에 거짓말하면 안 될 겁니다.”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기도 잠시, 그 말 하나만 남기고 놈을 향해 도약했다.
어처구니없는 김찬현의 명령을 따르는 이유가 나름대로 있었다.
아직 쓰지 않은 아드레날린 부스트와 새로 얻은 S급 특성이 그렇게 속삭였다. 만약의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내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다고.
그리고 이 일은 언젠가 반드시 복수할 수 있다고.
그것과 별개로 호승심이 들끓는 것도 사실이었다. 전과 비교해 얼마나 내가 강해졌을까. 침을 줄줄 흘리며 도끼를 번쩍 들어 올린 돼지가 시험대였다.
아마 동시였을 것이다. 오크가 도끼를 내려찍는 것과 내가 검을 뻗은 것이.
놈의 도끼질이 참으로 느리게 보였다. 시전하지도 않은 아드레날린 부스트 때문이 아니었다. 추측건대, 새로 얻은 특성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몸을 움직여야 할지, 경로가 보인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내 인생 중 이렇게 몸이 부드러웠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크륵?”
몸을 한 번 비트는 것만으로 오크의 도끼질은 허무한 손짓이 됐다. 움직인 나조차 황당할 정도로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내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푸확!
어느새 뻗어 나간 롱소드가 놈의 단단한 흉곽을 뚫고 들어갔다. 두근대는 놈의 맥박이 검을 타고 생생하게 전해졌다.
방금 내가 어떻게 움직였더라? 이거 내가 움직인 게 맞나?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의식 깊숙한 곳에 내재된 본능이 방금 내 몸짓을 복기시켰다.
왼발 엄지발가락을 축으로, 발목, 가자미근, 무릎은 살짝 굽히고, 이때 단전의 마나를 어깨에 응축시킨 후….
다시 한번 동일한 상황이 반복될 때, 내 의지대로 써먹을 수 있게끔.
“취익!”
오크가 눈알을 굴리며 이거 뭐냐? 하고 내게 물었다.
“어? 야. 기다려 봐….”
칼에 찔린 놈이나 찌른 나나 황당한 표정으로 롱소드를 쳐다봤다. 연격을 해야 할 타이밍임에도 그랬다.
“음?”
“이게 무슨….”
뒤쪽에서 그런 말이 들렸다. 김찬현조차 입을 뻐끔거리며 상황을 파악하기 바빴다.
어버버대던 것도 잠시, 내 몸이 또 멋대로 움직였다. 초급검술의 숙련도가 올라갔다는 메시지 창이 없어지면서였다.
오크의 가슴에 박힌 칼을 뽑은 내가 춤을 췄다.
서걱! 서걱! 서걱!
검이 훑고 지나가는 곳마다 눅진한 초록색 피가 터졌다. 때마침 화살이 박히고 마법이 쏟아졌다. 생각보다 보스전이 싱겁게 끝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이태진!”
왜 아닌가 했다. 다급한 얼굴이 된 김찬현이 난입했다. 헌데 순간적으로 번뜩인 예감이 좋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껑충 뛰며 몸을 물렸을 때였다.
촤악!
마치 김찬현의 공격이 내 몸체에 가려져 있다 갑자기 나타난 형상이었다.
헤드 셰프널이 두 눈을 부릅뜨며 고꾸라졌다.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더 이상 공격을 속행하지 않더라도, 얼마 후면 오크는 숨을 거둘 것이다.
그 정도로 김찬현의 공격은 오크의 복부를 관통하는 결정적인 한 방이었다. 하지만!
이전이라면 읽을 수 없었을 김찬현의 ‘의도’가 보였다. 만약 김찬현을 믿고 가만 있었다면 내 손가락이 날아갔다. 혹은 손목이 통째로 잘리거나.
검을 쓰는 헌터에게 손이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두 손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김찬현이 모를 리 없었다. 놈은 방금 선을 넘었다. 일성이 내릴 징벌, 혹은 무시무시하다는 협회의 감찰반이 뜨는 것은, 이 순간 내가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다.
대놓고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김찬현에게 달려들기 직전이었다.
“커헉!”
자동차의 급브레이크를 밟은 듯 내 몸이 멈췄다. 동시에 가장 후미에 있던 팀원 하나가 허물어졌다. 뜬금없이. 방금까지 내게 버프를 걸어주던 힐러였다.
서걱, 따위의 소리도 없었다. 응당 있어야 할 공기의 미동도 없었다. 마치 쓸모없는 배경을 편집해버린 사진처럼,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너희들. 여기서 뭐하는 짓이지?”
낮은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힐러가 쓰러진 자리에서였다. 찌푸린 얼굴로 힐러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남자가 우리에게 턱짓했다.
“프, 플래터?”
누군가 더듬거리며 손짓했다. 노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남자의 이름이었다.
대번에 떠오르는 초상화가 있었다.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마. 촉망받는 헌터에서 한순간에 세계적인 범죄자가 된 테러범.
그런데 놈이 왜 여기에? 그것도 하필 지금 이 타이밍에?
“남의 사업장에서 무슨 소란이냐고 묻잖아.”
남자가 손을 그었을 때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전조도 없이 방금까지 손짓하던 팀원의 손이 잘렸다. 이게 꿈인가 싶을 정도로 허무하게 말이다.
“크악!”
팀원의 절단면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지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놈은 적이다. 그리고 고등급 각성자다.
설령 김찬현과 내가 합세한다 한들, 여기 있는 모두가 전력을 끌어낸다 한들, 결과는 같을 것이다. 개죽음일 뿐이다.
인벤토리 속 탈출석을 꺼내려던 차였다.
“개수작 부릴 생각 하지 마라. 나 지금 굉장히 화났어.”
나른하게 말하던 플래터가 김찬현과 나를 가리켰다. 직감이 들었다. 허튼짓하는 순간 목이 날아간다.
“니가 팀장이지? 아니면 넌가?”
놈이 가리키는 손날의 방향이 나를 향했다. 플래터의 능력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평범한 각성자와 달리 특수한 능력을 개화했다는 것 정도만 세간에 알려졌을 뿐.
지금으로서도 추측할 수 있는 건, 놈의 손짓과 관련된 게 아닐까 하는 것뿐이었다.
“뭐가 됐든 좋아. 너희들 때문에 내 농장이 망가졌거든. 그냥 죽이는 걸로는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아. 아! 이렇게 하자.”
재밌는 놀이라도 발견한 듯 문득 놈이 씨익 웃었다. 불길했다.
“다른 놈들이 무슨 죄겠어. 팀장이 잘못된 거지. 팀장인지, 부팀장인지. 너희 둘 다 칼쟁이지? 모가지 날아가는 것보다 손을 더 중요시 여기잖아. 그러니까.”
휙!
놈이 팔을 휘두른 순간이었다. 김찬현이 크악!, 단말마를 외쳤다. 휙 돌아보자 김찬현이 손을 감싸쥐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그의 중지였다.
허, 복수를 이런 식으로 할 줄은 몰랐는데. 그러나 좋아하기에는 일렀다. 플래터가 정확히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
“거기 젊은 놈. 세 번. 내 공격을 세 번 받아내면 살려주마. 굉장히 자비롭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한번 플래터가 팔을 휘둘렀다.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머릿속에서 번개가 쳤다.
조금 전 오크와의 전투상황 때와 같았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왼쪽!
몸을 구른 직후 던전의 벽면 한곳이 무너져내렸다. 섬뜩하다. 알고 피한 것이 아니었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다시 하라고 해도 못한다.
“휘유! 능력치는 D급인 것 같은데 어떻게 내 공격을 피했지? 재밌네. 한 번 더 피해 봐.”
내 목숨줄을 쥔 플래터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아드레날린 부스트는 진작 발동시켜놨다. 허나 놈에게 달려들기에는, 승산이 없어 보였다.
사기도 저런 사기가 없었다. 손짓 한 번에 전조도 없이 물체를 절삭하는 능력? 젠장할. 듣도 보도 못한…!
불평할 시간도 없었다.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머리통이 예쁘게 절단될 것이라고 말이다.
서커스 단원처럼 몇 번이고 뒤로 굴렀다. 아니, 강제로 몸이 움직였다. 아까보다도 빠른 속도였다.
이게 [검신의 축복]인 건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최적의 경로로 내 몸이 움직였다.
“진짜 너 뭐가 있구나? 자, 이번이 마지막이다. 정말이야. 한 번 더 피하면 살려준다니까?”
개도 안 믿을 소리를 하던 놈이 또다시 손을 위로 올렸다. 반격을 한다면 지금이겠지만, 검신의 축복이 보내오는 신호는 달랐다.
맞서는 순간 목이 날아간다. 반대로, 도주할 수 있는 기회도 지금이 마지막이었다. 고집부릴 때가 아니었다.
“임한나!”
그렇게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임한나가 손에 들린 보라색 돌멩이를 들고 내게 몸을 날렸다. 나 또한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며 임한나에게 손을 뻗었다.
채 10m도 되지 않는 거리가 이토록 멀게 느껴졌다.
쩌저저적!
돌아보지 않아도 소리만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지나오는 자리마다 바위가 쏟아지고 있었다. 정말 간발의 차이였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돌린 눈동자 속에 비친 플래터의 표정이 살벌했다.
직후.
화악!
내 몸이 푸른빛에 휩싸이며 공간의 압력이 나를 휘감았다 뱉어냈다.
푸른 숲속이었다. 던전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허나 좋아하기에는 일렀다. 허공이 일렁이고 있었다. 던전이 무너지려는 조짐이었다.
예상했던 바, 놈이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은신 스킬. 지금 당장!”
임한나의 손을 붙잡고 그렇게 외쳤다. 헐떡거리며 뛰던 임한나 또한 곧장 내 손을 부여잡았다.
직후 보이지 않는 장막이 우리를 둘러쌌다. 터져 나오는 숨을 참으며 우리는 몸을 숙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검신의 축복은 뭐고, 예지력은 뭐고, 난데없이 나타난 플래터는 또 뭔데.
지금부터는 믿지 않는 신에게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젠장할. 포식자에게 쫓기는 초식동물 같은 꼴이라니.
후웅!
직후였다. 놈이 빠져나왔다. 다른 팀원들과 함께였다. 두리번거리던 놈의 눈빛이 서슬 퍼렜다.
콰과과광!
좀 전과 달리 플래터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있다. 아끼던 장난감을 빼앗겼다는 듯한 분노가 놈의 손짓마다 느껴졌다. 고목들이 이곳저곳에서 비명을 질러댔다. 놈의 분노가 이어졌다.
간발의 차로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간 플래터가 어느 순간 뚝 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김찬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것 봐. 이래 봬도 약속은 지키는 몸이라고. 응?”
촤악!
부들거리며 지혈하던 김찬현이 비명을 질렀다. 이번엔 아예 손목이 날아갔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김찬현을 가만히 내려보던 플래터가 조용히 뇌까렸다.
“재밌는 놈이네. 너. 얼굴 기억했으니까 나머지 놈은 다음에 받는 걸로 하자고. 널 쫓다 보면 그놈도 나오겠지. 기다리고 있어라.”
어딘지 나른한 목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놈의 몸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한순간에 놈이 사라진 것이다.
그 후로도 한참을 우리는 잠복하며 놈을 기다렸다. 어딘가 몸을 숨긴 채 우리가 다시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마침내 놈이 사라졌다는 확신이 들 때에서야 비로소 은신 스킬을 풀 수 있었다. 이제껏 참았던 숨을 한 번에 터트렸다.
“허억! 허억!”
처참했다. S급의 특성을 얻었다는 기쁨도 없었다. 손목이 날아간 김찬현 따위는 차치하고, 플래터의 손에 두 명이 죽었다.
아까 전까지 우리 팀에 들어오면 안 되냐던 힐러와 레인저였다. 뜬 눈으로 죽은 그들이 회색빛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D급 농장 하나가 망가졌습니다.”
“쯧. 그쪽 수확이 꽤 좋았는데. 누가?”
타닥타닥 모닥불이 피어오르는 숲속이었다. 플래터와 남자 하나가 대화를 나눴다.
“일성 쪽으로 보이던 것들입니다.”
“죽였어?”
“…예.”
플래터가 그렇게 답한 즉시였다.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슥,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남자가 손가락을 튕긴 즉시였다.
플래터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변했다.
“죽였어?”
“…겨우 농장 하나로 일성을 건드리면 피곤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두 명 죽이고 팀장 손목 하나를 날렸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거슬리는 놈 하나가 있었습니다. D급밖에 안 되는 놈이 몸 쓰는 게 희한했습니다. 극한까지 능력치를 끌어올렸다고 해야 하나.”
곰곰이 당시를 회상하던 플래터가 눈살을 찌푸렸다. 몽롱한 눈빛은 그때까지도 풀리지 않았다.
“그놈. 가만히 놔두면 거슬리게 할 놈입니다.”
“그 정도야?”
“예.”
“…가서 죽여.”
손바닥 뒤집듯 쉽게 말하는 남자의 말에 플래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
명색이 일성이다. 인명 사고가 일어났을 때의 시스템이 없을 리가.
부팀장이 상황을 빠르게 정리했다. 응급용 포션으로 김찬현을 치료하고, 회사에 보고하고, 플래터가 혹시나 찾아올까 경계를 나눴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임한나가 내 머리를 짚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면서 나를 보는데,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애 보듯 발을 동동 굴렀다.
“이상한 생각?”
내 목소리가 나도 놀랄 만큼 건조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시야도 고정돼있는 느낌이다.
아. 멍하니 죽은 동료들만 쳐다보고 있었구나.
“그 미친 자식. 우리 상대가 아니야. 최소 B급이라고. 너 지금 강해진 거 맞아. 맞는데.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알아. 누가 뭐래?”
“알면 좀 앉으라고. 너 지금 굉장히 흥분한 거 알아? 누가 보면 당장 플래터 찾아서 지옥이라도 들어갈 거 같잖아.”
물기 가득한 임한나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임한나의 얼굴에 불안함이 잔뜩 섞여 있었다.
“혹시라도 그놈한테 찾아갈 거면. 미리 말해 두는데 나도 같이 갈 거야.”
임한나의 선전포고에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하던 생각들, 그러니까 어떻게 플래터를 죽일까 하던 계획들을 뭉갰다.
함께 던전을 공략하던 동료가 방금 전 죽었다. 그런데 또 잃으라고?
젠장할. 얼굴을 쓸어내렸다.
“걱정 마라. 허튼짓 안 할 테니까. 난 우리 팀장님한테 보고할 테니까, 경계 좀 부탁할게.”
최대한 톤을 높여 말했다. 표정도 좀 가꾸고. 그래도 불안했던지 임한나는 몇 번이고 확답을 들은 뒤에야 돌아섰다.
한 번 더 깊은숨을 토해낸 다음. 휴대폰을 열었다. 끔찍한 생각들은 그만하자. 이미 일어난 일이다. 끔찍한 생각은 그만하자. 이미 일어난 일이….
-벌써 끝났냐? 욕은 얼마나 처먹었어?
전화를 받자마자 한석훈이 비아냥대듯 말했다. 다만 그 속에 묻어나오는 걱정은 숨길 수 없었다.
한석훈식 언어로는 ‘다친 곳 없이 잘 끝냈냐’ 정도가 되겠다.
“팀장님.”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석훈도 가라앉은 목소리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건지 대번에 태도를 바꿨다.
-말해.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최대한 침착하게 지금까지의 일을 말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한석훈은.
-응, 그래. 그래서. 그다음은.
같은 건조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 S급 특성, 그중에서도 검신의 축복을 얻었다는 부분에서는 한석훈도 잠시 말을 멈췄다.
-…듣고 있어. 계속 말해.
천천히, 또박또박 1팀장이 A급 아이템을 띄운 이후의 반응까지 설명해야 했다. 그리고 그 후 ‘플래터’를 마주친 일까지.
주절주절 내 말이 끝나자 한석훈은 침묵을 지키다 끝내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고도 한석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도 차마 먼저 입을 못 뗐고.
그렇게 영겁 같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전화기 너머 한석훈의 음성이 들렸다.
-너. 지금 당장 집에 가. 그러고 나서 내가 부를 때까지 가만있어. 알겠어? 허튼짓하지 말라는 소리다. 이태진.
보지 않아도 한석훈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건 꼭 들어야 하는 말이다. 무시했다가는 어떻게 될지 상상도 안 간다.
왜 이러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갔지만, 그런 걸 물어볼 때가 아니었다.
결국 알겠노라 하고 내가 대답하자 기다렸다는 듯 전화 연결이 툭 끊어졌다.
이게 뭐지. 뭔가. 뭔가 어느 순간부터 내가 예상한 그림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
이태진의 전화가 끝나고. 한석훈이 헐레벌떡 회장실을 찾았을 때는 이미 열댓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B급 던전 책임자 백인호부터 인사팀장, C급, D급 팀장들이 모두 모인 것이다.
특히 구석에서 한쪽 손을 감싼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김찬현과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표정의 최태성 회장까지.
11시가 넘은 한밤중이었지만 회사 내 간부급들은 모두 모였다고 보면 됐다.
하지만 한석훈은 그게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사안만큼은 새벽 3시였을 지라도 아무 불만 없었을 테니까.
“왔네요. 점쟁이 아빠.”
백인호가 그새 핼쑥해진 얼굴로 한석훈을 보며 말했다.
“점쟁이?”
“점쟁이지 그러면. 느낌 좋다고 럭키박스 뜯는 미친놈이 어딨어. 그리고 거기서 S급 검…. 후.”
“될 놈은 된다더니. 부럽네요. S급 특성이라니. …안될 놈은 뭘 해도 안 되고.”
C급 팀장 중 하나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젓자 당장 한석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럭키박스 뜯을 용기도 없는 새끼가. 내일 눈앞에 박스 하나 갖다 줄 테니까 까 볼래? 플래터도 데려다줄 테니까 한번 살아나와 보고.”
한석훈의 말 한마디에 당장 직책이 더 높은 C급 팀장이 깨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대뜸 백인호가 구석에 쳐박혀 있는 김찬현을 슥 돌아보며 말했다.
“까기 전부터 확신에 차 있었다면서? 점쟁이 맞네. 점쟁이 맞아. 야 인마. 너는 왜 거기서 성질을 내서 애를 기죽게 만들어? 잘했다고 칭찬하진 못할망정. 그리고 그냥 거기서 끝내고 나왔으면….”
백인호가 나무라듯 선수를 치며 김찬현을 질책했다. 반면 그 모습을 본 한석훈은 헛웃음이 터졌다.
‘이 새끼들이 내 앞에서 재밌는 짓을 하네?’
럭키박스에 뭐가 들었을 줄 알고. 만약 감당할 수 없는 저주라도 걸렸다가는. 또 플래터에게 김찬현이 아닌 이태진이 다치게 됐다면. 얼마나 또 후회의 시간을 보냈을까.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 김찬현의 멱살을 잡고 흠씬 두들겨 패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후우.
한석훈은 ‘쯧’ 혀를 차며 김찬현에게 말했다.
“그 손목. 얘기는 들었는데 다시 말해 봐. 처음부터. 똑바로.”
여느 때보다 가라앉은 한석훈의 목소리가 그래서 더 무겁게 다가왔다. 움찔거리는 김찬현을 대신해, 백인호가 한석훈을 말렸다.
“한 팀장님. 일단 진정 좀 하시죠. 얘도 어떻게 보면 피해자예요.”
“피해자? 네 라인이다 이거냐? 어디서 감싸주기야?”
“감싸주기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겁니다.”
“백인호.”
“여기 공석입니다. 한 팀장님.”
“사석으로 따라 나올래?”
그때쯤 해서 최태성이 손을 들어올렸다. 이런 일쯤은 익숙하다는 듯 얼굴에는 아직까지도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건 그렇고….”
최태성이 김찬현을 보며 운을 뗐다.
“부팀장이 작성한 보고서 읽어 줄 테니까 확인해봐. 연이어 뜬 S급 특성과 아이템으로 인한 팀 분위기가 고도로 과열. 팀장을 제외한 전원이 탈출석 사용을 권유.”
취조하는 건지, 그냥 묻는 건지 분간이 안 가는 나른한 최태성의 음성에 김찬현의 얼굴이 지하를 파묻고 들어갔다.
“김찬현 팀장 거부. 던전 공략 속행. 맞아?”
“회장님. 다른 건 차치하고 공략 부분만 놓고 보면 김 팀장 말도….”
“그래서 묻고 있잖아. 김 팀장.”
백인호의 반박은 그걸로 끝이었다. 문득, 백인호의 머릿속에 도마뱀 꼬리가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었다.
“…맞습니다.”
김찬현이 이를 악물며 분을 못 이기겠다는 듯이 대답했다.
“탱커와 레인저를 모두 뒤로 물리고 이태진에게 단일 돌격 명령. 그 후 1인 공략에 가까운 전투. 공략 막바지. 김찬현 팀장, 숨통을 끊는 일격. 허나 부팀장 사견으로는.”
최태성이 숨을 한 번 내쉬고 말을 이었다. 나른한 그의 목소리가 마치 점심 먹었냐는 듯 평안하기까지 했다.
“김찬현의 공격 범위 안에 이태진이 있었으므로, 그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맞아?”
“…….”
장내에 침묵이 찾아왔다. 김찬현의 얼굴이 하얗게 물들었다. 점잖게 자신을 쳐다보는 최태성이 죽음의 사신처럼 느껴졌다
“…악, 악의적인 보고서입니다. 회장님. 제 공격 범위 안에 이태진 공대원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결코 그런 의도는 없었습니다. 아마 부팀장이 뭔가 착오를…!”
“그럼 그 전에 건. 탱커, 레인저 뒤로 물린 거. 그건 맞다는 말이네?”
싱글벙글 얄미운 목소리로 한석훈이 묻자 김찬현은 사색이 된 채 말을 더듬거렸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로.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무슨 상황이지? 나도 억울하다고! 다들 내 손목은 안 보여? 부팀장 그 새끼는 왜 보고서를 이딴 식으로! 이대로면 나는…! 백인호. 백인호 팀장님!’
고개를 번쩍 들어 백인호를 쳐다봤을 때, 백인호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자신의 동아줄이던 백인호가 자신을 버렸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라 판단한 것이다. 김찬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긍정한 걸로 알고. 김 팀장 징계는 감사팀에서 따로 다시 확인하지. 그것보다.”
“문제는 그다음이죠. 레인 우버(Re-In Uber).”
백인호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녀석들. 웬일로 조용하다고 했더니.”
“레인 우버요? 플래터가 아니라 레인 우버입니까?”
“우리도 방금 들은 정보다. 플래터 뒤에 레인 우버가 있어.”
“이런 미친….”
C팀의 팀장 중 하나가 얼굴을 팍 구겼다. 동시에 회장실의 커다란 스크린에 불이 들어왔다. 백인호가 리모컨을 조작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레인 우버가 어떤 놈들인지는 다들 아실 테니까 그 부분은….”
“나 모르는데?”
빠르게 스킵되던 PPT가 멈칫했다. 백인호가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자 한석훈이 눈썹을 까딱였다.
“나 모른다고. 요. 레인 우버가 뭔데? 처음부터 설명해 봐. 요. 백 팀장님.”
“…뭐?”
“여기 공석이니까 말 좀 가려 하시고.”
레인 우버 모르는 각성자가 어디 있을까. 그것도 백인호와 한석훈쯤 되는 고레벨 각성자 중에. 때문에 백인호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애들 장난하자는 겁니까? 꼬장도 정도껏이지. 아까부터…!”
“째깍째깍. 여기 시간 남는 사람이 어딨어? 바쁜 사람들 모아놓고 화만 낼 거야?”
백인호는 그때쯤 해서 김찬현을 죽일 듯 노려봤다.
‘도움 안 되는 새끼. 나한테까지 똥물을 튀겨?’
허나 자신의 말처럼 공석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패배를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백인호는 곧장 호흡을 가다듬었다.
“레인우버. Reigning(군림하는), Invinicible(무적의), Ubermensches(초인들)의 앞글자를 딴 범죄 조직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백인호가 만족하냐는 듯 한석훈을 쳐다봐도 한석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간신히 진정시킨 백인호가 이어 말했다.
“7인으로 구성된 놈들의 목적은 여타 각성자 범죄 조직이 그렇듯 세계정복으로, 걔 중 대장격으로 활동하는 네로드가 이번 D급 던전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선정됐습니다.”
“네로드? 음. 네로드.”
“후우! 네로드는!”
“아아. 그놈은 알아. 설마 네로드를 모를까. S급 정신계열 각성자잖아. 얼굴도, 나이도, 본명도 모르지만. 왜, 더 알려줄까?”
백인호는 자신이 한계라는 걸 인정했다. 또한 능글거리는 한석훈의 얼굴을 보고서 다짐했다.
‘한 번. 한 번만 더 건드려라. 너랑 나 둘 중 하나는 오늘이 제삿날일 테니.’
속마음을 읽은 걸까. 한석훈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백인호를 지나쳐 최태성 옆자리에 앉았다.
“오는 길에 대충 보고서 읽어 보니까, 애들이 공략한 던전이 네로드의 마약 농장 중 하나더라고요.”
“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우리가 둘 죽었으니까 놈들은 넷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한석훈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마 언론이고 자시고 앞으로 여기저기 들쑤실 겁니다. 이태진 그놈. 아직 뭣도 모르는 놈입니다. 막아주십시오. 회장님.”
“그새 정이 들었나 보네?”
최태성이 신기한 듯 한석훈에게 말했다.
“일단은 최대한 안 퍼지게 입단속 해야지. 완전히 막을 수는 없겠지만 당분간은 새어나가면 안 돼. 우리도 정리할 시간은 있어야지.”
“어떻게 할 건지 결정은 됐습니까?”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있나? 그 친구가 하는 거지.”
최태성이 난감하다는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한석훈의 전화기가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아봐.”
끊으려던 그때 최태성이 한석훈에게 말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데일리 뉴스 이명지 기자입니다. 혹시 잠깐 통화되십니까?
모두가 조용하던 때라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회장실 전체에 퍼졌다.
-여보세요? 한석훈 씨 아니에요?
우웅-!
지이잉!
회장실 내 모든 사람의 휴대폰이 동시다발적으로 울린 것도 그때였다.
“늦은 거 같은데요.”
누군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말했다. 장내의 모든 사람이 같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