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S급 특성
석 달 전에 맞붙었던 그놈과 다른 종이 아니다. 비록 그때와 장소는 달라졌다 한들 컴베트(Combet) 계급에 해당하는 오크놈들의 수준은 대동소이하다.
분명 그때만 해도 이것들과 같은 수준의 오크 하나를 잡는데 내 전력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래. 분명 석 달 전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직접 싸우는 나조차도 놀랄 만큼 내 몸이 기민하게 반응했다.
놈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눈에 훤했다. 위에서, 아래에서, 옆에서 오는 사방의 모든 궤적들이 마치 슬로 비디오라도 되는 것처럼 선명했다.
전방의 오크들은 서투르고 힘은 과했으며 느리기 짝이 없었다.
촤악! 서걱! 캉!
오크 다섯을 쓰러트리는 데 채 스무 합이 걸리지 않았다.
피하고 찌르고 베고 넘긴다. 멈추지 않았다. 놈들이 오지 않으면 내가 그것들 사이로 몸을 구겨 들어갔다.
최후에는.
내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오크들은 멈칫거리기 일쑤였다. 그 틈이 보일 때마다 여지없이 돼지 대가리가 하나씩 떨어졌고.
한석훈에게 당한 것을 풀기라도 하듯. 자비 없이 놈들의 목을 넘겼다. 재밌다! 전투가 이리도 즐거운 것이었던가.
미친놈 같겠지만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내 표정이 밝아질수록 놈들은 더 뒤로 물러났다. 공포를 모른다는 오크족의 전사들이 나를 피하고 있었다.
어딜!
[특성획득 : 무아지경(C)!]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듭니다.]
[무아지경 : 전투 중 집중상태를 높입니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스물이 넘던 놈들이 다섯밖에 남지 않았을 때는 놈들의 전의가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힘이 잔뜩 빠진 놈들의 저항은 무의미한 반항일 뿐이었고.
촤악!
끝끝내 마지막 하나까지 말끔하게 죽였을 때였다.
[레벨업!]
[스탯을 분배하십시오!]
[수준에 비해서 지나치게 레벨이 낮습니다. 성장 속도가 다소 빨라집니다.]
지금 체력이 차오르는 것은 레벨업의 효과 때문일 것이었다. 저기서 입을 떡 벌린 채 나를 보고 있는 힐러의 마법이 아니라.
지나온 자리를 돌아보았다. 널브러져 있는 것들 중 절반 이상이 내 손에 죽은 것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나와 함께 무리 속으로 진입했던 1팀장은 물론이고, 뒤에서 스킬을 뿜어대던 팀원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전투를 멈추고 나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하나같이 저런 표정들을 하고선 말이다.
눈에는 ‘내가 지금 뭘 본 거지?’하는 의문을 가득 담고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을 한 채로.
“A급 스킬 있다 이거야? 왜 이리 나대? 팀플레이 몰라?”
방금까지 다른 팀원들처럼 입을 쩍 벌리고 있던 1팀장이 그새 정신을 차리고 한 말이었다.
1팀장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그제야 ‘아!’하며 A급 스킬을 사용한 것이라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닌데…. 원래 있던 스킬로만 싸운 건데. 저거.”
임한나가 혼잣말하듯 작게 소곤거렸다. 그런데 하필 그때는 모두가 조용했던 때였다.
고개를 끄덕거리던 사람들의 머리가 다시 휙 나를 향해 돌아갔다. 그게 사실이냐는 듯 얼굴에는 의문을 가득 담고서.
심지어 그 가운데 1팀장까지도 껴 있었다.
무슨 코미디 쇼도 아니고. 이쯤 되니 나도 민망해졌다.
임한나를 쳐다봤지만 ‘내 말이 맞지?’ 하고 입모양만 뻥긋거리고 있다.
확실하다. 저거 사람들 들으라고 일부러 혼잣말인 척한 것이 틀림없다.
“그게 사실이긴 한데요. 어, 죄송합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띠껍긴 했지만 1팀장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니까.
적당히 나댔어야 했는데. 한석훈에게 당한 것이 어지간히 쌓였었나 보다. 미친놈마냥 날뛰어 댔으니 다른 팀원들도 퍽 곤란했을 것이다.
“시키는 거나 열심히 하라고 이 새끼야! 당장 다음 방만 넘어가도 까발려질 실력으로 나대지 말고.”
1팀장이 그렇게 말하고서는 나를 슥 지나쳤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순간 가슴속에서 불끈거리는 게 올라왔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목적을 잊지 마라 이태진. 애초부터 S급 특성을 얻고자 들어온 것이 아니던가.
그래야 되는데. 지금은 그것에만 집중해야 하는데. 그때 임한나와 눈이 마주쳤다. ‘뭘 망설여? 질러!’
임한나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아홉 번째 방을 지나던 시점이었다.
나는 첫 번째 방처럼 길길이 날뛰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숨죽여 있지도 않았다.
예를 들자면, 2팀의 원거리 딜러가 몬스터를 붙들어 놓는다. 그사이 내 칼이 오크의 심장을 파고든다.
동시에 레인저 임한나가 몬스터의 시선을 돌려놓으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내가 목을 뎅겅 썰어버리고.
아까처럼 나 혼자 몬스터 사이로 뛰어들어 쓸어버리는 일은 없었다. 대신 팀원들과의 호흡 면에서는 더할 것이 없었다.
처음 합을 맞추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조화.
“이태진 씨. 신입사원 맞아요? 너무 노련한데. 우리 팀으로 다시 넘어오면 안 되나. 하하.”
오죽하면 1팀원 중 하나가 이런 말을 했을 정도였다.
“뭐 인마?”
1팀장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1팀장은 아까보다 기분이 더 안 좋아 보였다.
그러니까 세 번째 방에서부터 쭉 저런 얼굴이었다. 뭔가 트집을 잡아야겠는데 거리가 없으니 못마땅하다는 표정.
차라리 내가 아까처럼 날뛰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내게는 1팀장의 저런 반응이 계속되는 것이 나았다.
최소한 웃는 얼굴로 뒤에서 칼 맞을 걱정은 없으니까.
“이태진. 여기 좀 봐.”
아까부터 께름칙한 얼굴로 던전 구석구석을 유심히 살피던 임한나의 말이었다.
“어? 팀장님! 이거 럭키박스인데요?”
먼저 달려간 팀원 중 하나가 그렇게 말했다.
럭키박스? 시큰둥하던 1팀장의 얼굴이 바뀐 것도 그때였다.
럭키박스. 공략과 별개로 던전 내부에서 아주 가끔 뜨는 아이템이었다.
잘 뜨지도 않을뿐더러 이름과는 달리 행운과는 상관없는 물건이기도 했다.
십중팔구는 저주와 관련된 것만 떠 버리니까. 그것도 지독한 저주만 골라서 말이다.
그래서 죽음의 위기가 아니라면 열지 않는 것이 각성자들 간의 암묵적인 규칙인데.
“두 개네.”
1팀장이 그렇게 말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잘 뜨지도 않는 럭키박스가 두 개나 등장한 것은 나도 처음 보는 경우였다.
그래. 두 개. 내 확신이 맞는 순간이기도 했다. D급 던전에서, 그것도 공략 도중에 어떻게 S급 특성과 고등급 아이템이 나왔겠는가.
저주 덩어리인 이 망할 상자가 그럼에도 럭키박스라 불리는 이유.
만 번, 아니 십만 번 중 하나의 확률로 최상급 아이템과 스킬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했다. 그 십만 번 중 한 번, 아니 두 번이 여기서 뜬다고.
“어때 보이냐고!”
상념에서 깬 건 1팀장이 신경질적으로 나를 불렀을 때였다.
“촉이 좋다며? 어때. 뭐가 보이나?”
1팀장이 트집 잡을 거리가 생겼다는 듯 눈을 빛냈다. 침을 꿀꺽 삼켰다. 잘 말해야 했다. 사실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분명 꿈에서는 1팀장이 특성을, 내가 아이템을 가졌었다. 그 아이템마저 회사에 반납해야 하니 내 것이 아니기도 했고.
도대체 어떤 박스에 특성이 들어있는 걸까. 하나는 황금빛 테두리를 비롯한 화려한 치장의 박스, 다른 하나는 볼품없는 낡은 박스.
생각하자. 이 꿈을 모른다면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할까. 이것만큼은 예상에 없던 것이어서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안 들려? 아니면 감이 죽은 거야?”
1팀장이 재촉하듯 나를 몰아세웠다.
“그게. 두 개 다 좋아 보여서요.”
“뭐?”
“제 생각에는 두 개 다 좋은 게 뜰 거 같은데요. 1팀장님.”
생각이 끝났다. 확신이 든다. S급 특성을 뽑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
***
김찬현은 이 미친놈이 뭐라고 하는지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태진 씨! 럭키박스 몰라요?”
아까부터 이놈 옆에서 비위 맞추느라 굽신대던 부하 녀석까지도 이번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이었다.
“제 촉이 그렇네요. 두 개 다 좋을 것 같다는 촉.”
그런데 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한 얼굴 그대로 고집을 꺾지 않았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솔직히 이태진의 활약은 자신의 예상을 빗나가도 한참을 빗나갔다. 한석훈에게 녀석을 보낸 게 잠시 후회될 정도로.
녀석은 실력은 물론이고 전투센스까지 훌륭했다.
팀플레이에서도 흠잡을 곳 없었다. 이래서는 단체훈련에서 제외시킨 것이 의미가 없게 돼 버렸다.
분명 석 달 전 봤던 이태진의 프로필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활약은 설명할 수 없었다.
2팀 녀석들이 그러하듯 한석훈이 또 무슨 마법을 부렸겠지. 그럴수록 김찬현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녀석이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실컷 혼낼 생각이었는데 도통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때마침 기회가 왔다.
“럭키박스 두 개가 다 감이 좋다고?”
“네. 제 직감으로는요.”
놈이 확신에 찬다는 듯 눈을 끔벅거렸다.
‘하. 이 새끼 봐라.’
운 좋게 A급 한 번 뜬 거 가지고 직감이니 촉이니 사람들이 떠받들어 주니까 진짜 무당이라도 된 줄 아는 거냐.
그때 김찬현의 눈이 반달을 그렸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면 공략보상으로 받기로 한 박스. 이걸로 받아도 되겠네?”
저번에 분명 그렇게 말했지.
‘미안한 것도 있고. 보상으로 뜨는 박스 하나 챙겨주려고요. 이 친구한테.’
한석훈이 미심쩍은 얼굴을 했지만 진짜 챙겨주려고는 했다. 물론 실컷 조롱과 눈치를 주고 나서 말이다.
“저야 감사하죠. 그러면 저는 이걸로 할게요.”
그런데 당황할 줄 알았던 이태진이 오히려 기쁘다는 듯 박스 쪽으로 걸어갔다.
“어, 어, 잠깐만.”
그제서야 뭔가 이상한 느낌이 왔다. 저렇게까지 자신만만하다고?
김찬현이 뒤늦게 말했지만 그땐 이미 녀석이 낡은 박스를 들어 올려 거침없이 열어 재낀 후였다.
‘진짜 미친놈이야? 당연히 저주….’
김찬현의 생각이 그때 멈췄다. 낡은 박스 안에서 저주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밝고 영롱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각성자 네 명이 있다. 한국의 신성한 사신수라 불리는 이들.
일성의 최태성을 비롯한 임혜원, 이정환, 그리고 성요한이다.
각성자들의 숫자도, 레벨도 서구 열강에 뒤처지는 우리나라가 여전히 주류사회에 머물 수 있는 이유는 이들 넷 덕분이었다.
비각성자인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신성한 사신수들은 화제의 중심이었다.
특히나 네 명의 무력순위를 매기는 것은 늘 커뮤니티의 인기글 상단에 위치할 정도.
나 또한 흥미롭게 지켜봤던 가십거리지만. 단연코 1등만큼은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검신 성요한.
칼 한 자루만 있으면 못 벨 것이 없다 해서 붙은 이름이 검신이다. 그것도 자국민이 아니면 일단 아래로 보는 중국에서 먼저 붙인 별호였고.
그는 20년 전 세계 각성자 랭킹 1위에 올라섰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리를 내주지 않은 부동의 최강자다.
모든 스킬과 특성이 베일에 싸여있는 성요한이지만 딱 하나 대중에게 공개된 것이 있다. 지금의 성요한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특성.
그래. 이제껏 그리도 사족이 길었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특성획득 : 검신의 축복(S)!]
[하위 특성, 검술재능(C) 특성이 사라집니다!]
내가 성요한과 같은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