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2)
아득해진 정신이 어느새 미래로 와 있었다.
아무것도 못 한 채 몸 안에 갇혀 관찰만 하는 이 느낌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집중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죄다 집어넣을 기세로.
일단 체력과 마력이 많이 떨어져 있다. 금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던전 안이었다.
그때 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생뚱맞게도 좀 전에 봤던 D-1팀장이 앞에 서 있다. 이름이 김찬현이라고 했지? 그런데 아까 똥씹은 얼굴로 노려보던 것과 달리 지금은 더없이 즐거워 보인다. 아니, 그보다는 감격스럽다는 느낌까지 든다.
“이야…! 너 진짜 뭐가 있긴 있나 보다.”
1팀장이 눈을 반짝이며 내게 말했다.
“S급 특성이 여기서 뜰 줄이야. 그냥 지나쳤으면 큰일날 뻔했어. 덕분이다. 고맙다! 이태진.”
그러면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S급 특성?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아니. 잘못 들었을 리가 없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S급 S급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까.
어떻게 1팀장이 S급 특성을 얻은 걸까. 나에게는 왜 고맙다고 말하고. 미치도록 궁금한데 그곳에서의 나는 굳은 얼굴로 일관하고 있었다.
“아 참. 너 그거는 반납해야 하는 거 알지?”
뒤통수로 1팀장의 말이 꽂혔다. 돌아보니 비릿하게 웃는 1팀장이 내 손에 들린 것을 까딱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손에 느껴지는 감각이 낯설다.
익숙한 롱소드보다 좀 더 묵직한 느낌. 때마침 고개가 돌아갔다. 척 보기에도 고등급인 것이 확실한 검이 손에 들려 있었다.
지금 내 표정을 볼 수는 없지만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다. 쓰게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하는 순간.
파앗!
“정신 안 차리냐.”
“컥!”
“뭐야. 왜 이래? 무슨 얼굴이 그렇게 사색이야.”
물먹은 솜처럼 가슴이 묵직했다. 갈 때도 그랬던 것처럼 부지불식간에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괜찮아요?”
언제 왔는지 모를 이지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지만 제대로 대답할 정신이 아니었다. 현재로서는 이 예지몽(?)을 정리하기도 벅찬 상태였다.
“이거 안 되겠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한석훈이 이지은에게 턱짓하자 이지은이 내게 손을 올렸다. 한석훈 때문이 아니었지만 이지은의 치료 스킬 덕분에 요동치던 심장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한석훈이 내일 보자며 연무장을 빠져나가고, 주춤주춤 내 눈치를 살피던 이지은까지 꾸벅 인사를 하고 사라졌을 때도.
내 시선은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정확히는 머릿속으로 그 장면들을 몇 번이고 되감고 있었다.
‘S급 특성, 덕분에, 내 손에 들린 고등급 검, 반납.’
1팀장의 말에서 특정할 수 있는 단어 몇 개가 있었다. 그러자 유추되는 상황 한 가지가 떠올랐다.
말이 되나?
가정이 맞다면.
브론즈 박스에서 A급 스킬을 띄운 나조차도 믿을 수 없을 만큼의 확률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랬다.
허. 그렇단 말이지.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내가 웃고 있는 게 보였다.
***
한석훈과의 대련은 그날로 끝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시작일 뿐이었다.
입사한 지 한 달째. 처음의 다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아침마다 퇴사를 외치는 보통의 회사원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퍽!
빠악!
[감당할 수 없는 신경통을 인내합니다. 체력이 1 상승합니다.]
여지없이 내 몸이 연무실 구석에 꽂히고 말았다.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지겨울 만큼 반복되는 레퍼토리.
진전이 없는 건 아니다. 무려 한석훈의 검을 두 합은 받아 낼 정도가 됐기 때문에.
그래, 무려. 그것조차 내게는 엄청난 성장이었다.
확실히 훈련방식이 극단적인 만큼 효과도 없지는 않았다. 아니, 이만한 훈련도 없었다.
스탯만 보자면 입사 전과 비교해서 무려 서른다섯 개가 오른 상태.
레벨이 하나 오를 때마다 스탯 다섯 개가 부여된다고 보면, 그저 하루 종일 맞고 구르기만 했는데 레벨업만 일곱 번을 했다는 소리였다.
레벨 일곱 개를 올리려면 지금 내 수준으로는 F급 던전 스무 번은 돌아야 가능한 수치다.
더군다나 고레벨이 될수록 스탯 하나하나가 소중한 법. 그때는 이런 방법을 쓴다고 해서 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너 어디 가서 이런 훈련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축복인 줄 알아.”
누군가는 이걸 보고 기연을 얻었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다.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을 받았을 뿐.
다시 생각해보니 오히려 보상이 짜다고 느껴질 만큼 한석훈의 훈련은 자비가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다시 일어서려고 다리를 부여잡는데 한석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솔직한 심정으로, 여기까지만 하자는 말에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오늘은 더 이상 맞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함께.
그러다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정신 차리자 이태진. 저놈은 악마다. 악마.
어기적어기적 수련실을 빠져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이지은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화아악!
새하얀 빛이 몸을 감쌌다. 빛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찢어지고 멍든 몸 곳곳이 멀쩡하게 돌아왔다.
이제는 헛웃음만 나왔다. 고맙지 않냐고? 천만에. 왜 2팀 멤버들이 유독 강한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이런 식이다. 때리고 치료하고 때리고 치료하고.
“생각보다 끈질기네. 더 굴려야 하나.”
한석훈이 고민된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눈으로는 ‘네가 이래도 안 도망쳐? 이래도? 독하다 독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고.
“내일 봅시다.”
나는 이를 ‘빠득’ 갈며 말했다. 도저히 저 얼굴에 한 방 먹이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 언젠가는 말이다.
한창 독기 가득한 눈으로 한석훈을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잘 버티는데?”
“그러게요. 일단 일주일 넘었으니까 하영이는 2만 원 내고.”
“쳇. 저 오빠 제법이네.”
전용철을 비롯한 김세린과 박하영이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팀장님 이번에는 아주 작정하고 패시네요?”
“그러게.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A급 신입사원이니까 더 각별하게 다루는 거 아닐까요?”
마치 다른 나라 이야기하는 것처럼 대화한다. 물론 그 말에 대꾸할 정신 따위는 없었다. 자그마하게 숨을 고르면서 다음을 기약할 뿐.
“아 참. 팀장님. 인트라넷에 던전 공략 일정 잡혔던데요.”
박하영이 휴대폰을 보며 말했다. 그 말을 듣는데 왜 내 눈에 생기가 도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어둡고 컴컴한 던전에 들어가는 것이 차라리 지금보다 낫다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하는 걸까.
“아냐. 그거 우리가 안 들어가.”
한석훈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내 희망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네? 왜요? D급이라는데.”
“우리 말고 1팀이 들어간다.”
그렇게 말하며 한석훈이 킬킬댔다. 문득 저번에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 팀만 D급 던전에 가는 건 공공연한 사실 아니었던가?’
그래. 분명히 저랬는데, 왜 갑자기. 그리고 나는 왜 절망하는 건데?
문득 한석훈이 날 보며 껄껄댔다. 고맙다며 어깨를 두드리기까지 한다.
1팀의 팀장에게 모종의 빌미라도 잡은 게 아닐까 하는 추측만 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말인데 사람 한 명만 빌려주시죠. 한석훈 팀장님.”
뒤에서 들리는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1팀장이 대련장 문에 기대고 있었다.
“사람? 무슨 사람.”
한석훈이 1팀장을 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마치 ‘넌 똥을 줘놓고 나한테 금을 내놓으라고?’ 하는 표정이다.
“이번에 팀원 하나가 다쳐서요. 지원 좀 부탁드립니다. 안 돼요?”
하며 1팀장이 ‘씨익’ 웃었다.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당연히 안 되….
“그래. 용철아. 너 한번 갔다 와야겠다.”
당연히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턱을 문지르던 한석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양반, 밥을 잘못 먹었나?
“알겠습니다.”
하고 전용철이 고개를 꾸벅 숙이는데,
“아뇨. 저도 양심이 있지. 용철이 데려가는 건 너무 도둑놈 심보고. 얘 정도면 되겠네. 얘 빌려주세요. 안 그래도 다친 애가 근거리 딜러였는데.”
그런데 1팀장이 뜬금없이 나를 턱짓했다.
그때였다. 멍하던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비디오를 되감은 것처럼 기억 하나가 좌르륵 떠올랐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 달이나 지났고, 또 요즘엔 한석훈에게 구타당하는 일상밖에 없었거든. 일전에 예지몽이라 부른 그것 말이다.
그 장면이 떠오르자마자 방관자였던 내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거. 무조건 가야 한다.
심장이 쿵쾅대며 주체가 되질 않았다.
“미쳤냐? 얘를 보내게.”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입을 열려던 순간 한석훈이 말을 가로챘다.
“너. 얘한테 엿 먹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래서 지금 꼬장 부리는 거야?”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꼬장을 왜 부립니까. 오히려 미안하면 미안했지.”
1팀장 김찬현이 능글능글한 얼굴 그대로 말을 덧붙였다.
“빚진 것 같아서 경험치라도 챙겨주려고요. 보상으로 박스 뜨면 그것도 하나 챙겨주고.”
“꺼져. 그딴 거 필요 없으니까.”
그때만큼은 한석훈도 단호한 얼굴이었다. 이거, 평소라면 감동깨나 먹었을 텐데 타이밍이 영 안 좋다.
지금은 내가 먼저 가겠다고 말해도 시원찮은 상황이거든.
“팀장님. 그냥 제가 가겠습니다. 이 친구는 아직….”
전용철이 내 얼굴을 살피며 1팀장에게 말하려던 때.
“가겠습니다.”
내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뭐?”
“네?”
“그렇지!”
내 한마디에 반응이 가지각색이다. 한석훈의 얼굴은 더 없이 찌푸려지고 팀원들은 놀랐으며 1팀장은 반색했다.
“갈게요. 제가.”
“하. 미쳤네, 이거. 한번 들어가 봤다고 거기가 아주 만만하지? 아직 네 수준으로는….”
“자신 있습니다. 그동안 빡세게 구르기도 했고, A급 스킬도 있잖아요. 진짜 자신 있습니다. 그리고…. 느낌이 정말 좋아서 그래요.”
내가 들어도 웃긴 말을 뱉어냈다.
그렇다고 ‘제가 미래를 봤는데 거기서 S급 특성이 나와서요, 제가 확인 좀 해 볼게요.’ 하고 있는 그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사실 답답한 것으로 따지면 내가 제일인데.
한석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리에 손을 짚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1팀장은 아예 박장대소하며 끅끅댔고.
한석훈의 시선이 정수리에 무섭게 꽂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 있습니다.”
한 달 동안 저 양반한테 처맞으면서 내성이 생긴 걸까. 한석훈의 눈빛이 무서운 것보다 안 된다고 하면 또 뭐라고 말해야 할까 하는 생각밖에 안 든다.
“아직 정신을 덜 차린 거야. 그러니까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는 거지.”
당장 노발대발 육두문자가 쏟아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한석훈의 말투가 차분하게 바뀌었다.
“그래. 한번 갔다 와 봐. 직접 찍어 쳐먹어 봐야 무슨 맛인지 알지.”
한석훈의 악의없는 악담을 실컷 들은 후였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걸 잘된 거라고 해야 하나.
살짝 고개를 올려 한석훈을 힐끔 봤다. 아닌 것 같다. 보인다 내게는. 깊게 잠긴 동공 속으로 활화산처럼 터진 한석훈의 분노가.
아, 이제는 또 얼마나 굴리려나.
그래도 팀장님.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거길 가 봐야겠습니다. S급 특성인지 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거든요.
더군다나 잘하면, 내 예상이 맞다면. 그게 내 것이 될 수도 있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