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예지력 (2)
컴베트 오크 이후로 내가 전투에 관여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간간이 팀장이 내게 보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는 것 정도만 빼면 우리는 별일 없이 던전을 공략했다.
그래도 꿈 덕분에 망신은 간신히 피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저 양반 뭔가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케르륵! 크륵!”
던전의 열한 번째 방, 그러니까 보스방에서 등장한 것은 오크 무리의 우두머리, 헤드 셰프널(Head shrapnel)이었다.
놈이 만든 대부분의 시체가 머리만 사라진 채 널브러져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헌터 사이에서는 ‘뚝배기 브레이커’로 자주 불리곤 한다.
투두둑. 콰광!
지면을 울리는 폭발과 정확히 급소를 찌르고 들어간 화살에도 놈은 코웃음 칠 뿐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놈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를 비롯한 팀원들이 긴장한 것과는 달리 그때까지도 한석훈은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던 한석훈이 검을 뽑은 것은 우두머리가 지척에 왔을 때였다.
“아직 한참 멀었구만.”
그 말과 함께. 다시 한번 한석훈의 검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뿜어져 나온다.
비록 아까보다 색이 옅어 보였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해 보였다. 내가 육안으로 확인한 것은 거기까지였다.
파앗-!
시야의 중앙이 하얗게 물들기 시작하면서 내 정신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뭐야 갑자기?
하지만, 예상과는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우웅-!
작은 진동음과 함께 헤드 셰프널이 든 도끼의 날에 옅은 핏빛 수증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순간 놈이 예상과는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한석훈과 싸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놈이 목표로 달려가는 곳에 이지은이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전용철이 곧장 이지은의 앞을 막아섰지만.
쿠웅!
놈의 손짓 한 번에 나가떨어졌다. D급 던전이라지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보스몹이었다.
놈이 크게 팔을 올렸다. 그대로 내려친다면 연약한 힐러의 몸뚱이는 반으로 갈리고도 남았다.
한석훈은 아직도 저 멀리 있었다.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나라도 달려가서 오크의 공격을 막아야 하는데!
그런데 다리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 놈과 눈을 마주친 직후부터 그랬다.
“…어?”
이지은의 허무한 목소리가 이어진 직후.
팟!
롤러코스터에서 떨어진 기분이다. 장기가 붕 떴다가 다시 돌아온 듯 간질거리는 느낌.
그런데 그것보다 이건 또 뭐지?
앞에 보이는 이지은은 물론이고 나가떨어진 전용철마저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어라. 분명 헤드 셰프널이 이지은을 내려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헛것을 봤나?’ 싶은 그때였다. 작은 진동음과 함께 헤드 셰프널이 든 도끼의 날에 옅은 핏빛 수증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순간 놈이 달려온다. 방금 전과 똑같이. 상황을 파악하고 어쩌고 할 시간도 없었다.
곧장 땅을 박차고 나섰다. 똑같이, 전용철이 손짓 한 번에 나가떨어지고 놈의 도끼가 순식간에 이지은에게 향한다.
“…어?”
이지은이 멍한 얼굴로 그렇게 외치는 것까지 같았지만, 내가 봤던 환상과 달리 이번에는 내 몸이 뜻대로 움직였다.
다행이었다. 놈이 도끼를 내려찍기 직전 이지은의 앞에 내가 있었다.
놈은 상관없다는 듯 도끼를 번쩍 들었다. 오히려 잘됐다는 표정이다. 나와 이지은을 같이 갈라버리려는 게 분명했다.
놈의 도끼에 맺힌 핏빛 오러가 살벌하다. 피하기도 이미 늦었다. 전신에 마나를 두르고 놈의 공격에 대비했다.
온다!
맹렬히 바람을 가르는 공격으로 미루어보아 충격 또한 대단할 것이었다. 각오를 단단히 끝마친 후였다.
스악-!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었음에도 어떻게 된 일인지 분간이 안 갔다.
눈 한 번 깜빡인 순간 놈의 거대한 상반신이 반으로 갈려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이게 어딜.”
한석훈이 나지막하게 말한 후 검에 묻어 있는 놈의 피를 털어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확인조차 안 될 만큼 빠른 속도였다.
“괜찮냐?”
한석훈이 그렇게 물었다. 괜찮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이 자식 보게. 무슨 용기로 거길 뛰어들었냐?”
나를 응시하는 한석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모한 행동을 나무라는 듯했지만 어투는 전혀 달랐다.
“그래도 그 움직임은 칭찬할만 하네. 잘했다.”
하며 퉁명스럽게 말을 건넨다. 저게 칭찬인지, 아니면 나무라는건지 헷갈리는 톤으로.
“뭘요. 한것도 없는데.”
똑같이 퉁명스러운 투로 답해주니까 어쭈? 하는 눈빛으로 한석훈이 피식 웃었다.
“모르는 척하는 거냐? 아니면 겸손한 거야? 내가 달려올 동안 네가 한 턴 번 거잖아. 잘했다고. 신입. 방금 그건 내가 확실하게 보고서에 기입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아, 네.”
모르는 척도 아니고 겸손한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 이 상황이 납득이 안되는 것뿐이다. 지금 이게 뭐지? 내가 방금 뭘 본거지?
“우, 우와! 방금 그거! 오빠! 그게 무슨 스킬이에요? 아니 그것보다, 경력직으로 들어온 거였어요? 아닌데, 아까 분명 신입이라고 했는데!”
그사이 김세린이 폴짝폴짝 뛰며 난리를 피웠다. 눈에 안 보일 정도로 빨랐다느니, 신입이 맞냐니 호들갑을 떨면서.
“농담이 아니라 이 친구 진짜 우리 팀 들어와야겠는데요 팀장님? 뭣하면 제가 인사팀에 말해둘게요.”
이제는 덩치가 산만한 전용철이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매우 요상했다.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오크 맞아요 이거? 말이 안 되는데.”
박하영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나와 오크를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요상한 눈빛은 이 팀 전매특허인 건가?
“던전은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했을 텐데.”
부르르 몸을 떠는 김세린을 향해 한석훈이 꿀밤을 먹였고.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돌리자 이지은이 꾸벅 고개를 숙인다. 그때쯤 내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래. 내가 아니었다면, 이지은은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니 내 활약이 작은 건 아니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
그때쯤 슬슬 던전이 무너지고 있었다. 동굴 벽에서부터 공간이 뒤틀리며 ‘쩌저적’ 갈라졌다.
공략을 완료했으므로 던전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눈 한 번 깜빡일 사이에 동굴은 사라지고 산 중턱으로 장면이 전환됐다.
그와 동시에 메시지가 떴다.
[던전공략 성공!
획득 경험치 : 130exp
실버 박스 1개, 브론즈 박스 1개를 얻었습니다. 획득자를 정하여 주십시오.]
잠시 뒤 이지은의 치유 스킬 덕에 정신을 차린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래도 얼떨떨한 것은 여전했다. 가만히 방금까지의 과정을 되짚어봤다.
한 것이라고는 오크 한 마리 잡았을 뿐인데 경험치가 130이나 들어왔다. 마치 온라인 게임에서 쩔이라도 받는 기분이다. 좋은데?
나뿐만 아니라 팀원 모두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어찌됐든 무사히 던전을 공략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갑옷이며 얼굴이며 온통 찐득한 피와 땀이 달라붙어 찝찝하다. 그런데 이 사람들 왜 멀뚱멀뚱 나만 쳐다보고 있는 걸까. 뭐. 왜.
“우리 팀 규칙 중 하나. 신입이 들어오면 처음에 한하여 박스 선택권을 준다.”
한석훈이 짧게 말했다. 그제서야 나에게 시선이 모였던 이유를 알게 됐다. 모두들 궁금한 것이다. 새로 온 신입이 상자에서 어떤 것을 띄울지 말이다.
던전 박스.
열기 전까지는 뭐가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스탯 포인트가 될 수도 있고 스킬이나 아이템이 나올 수도 있다.
우리가 계약금으로 그 많은 돈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양도 불가능한 것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회사에 반납한다는 계약 조항.
“그래도 아이템 뜨면 알지? 반납해야 한다?”
한석훈이 회사에 제출할 목적으로 카메라를 켰다. 혹시라도 있을 횡령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어. 저기, 그게….”
실버 박스를 열어 본 건 이제까지 딱 두 번뿐이었다.
그만큼 나 같은 풋내기가 가지기엔 귀한 것. 사람인지라 준다면야 감사히 받겠지만 이거 좀 부담스러운데.
“뭘 눈치를 봐. 생긴 건 철판 잘 깔게 생겨놓고는. 뭐. 브론즈 박스 줘?”
아무래도 이 사람은 사람 속 긁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다.
그래, 뭐. 준다는 데 받아야지. 내가 성인군자도 아니고.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
말을 끝맺기 직전이었다. 불현듯 눈앞이 깜깜해졌다.
어어 하고 당황하는 사이, 곧바로 시야가 환해졌다.
한석훈의 일그러트린 얼굴부터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몸은 움직이는데 내 의지가 아니다. 어라. 이건 마치….
그래, 오늘 아침 꿨던 그 꿈처럼 말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웠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물어본다. 진짜 후회 안 해?”
“네. 진짜 후회 안 합니다.”
“허 참. 고집 보게. 네가 선택한 거다?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
[브론즈 박스를 획득하였습니다!]
[박스를 개봉해 주십시오.]
뭐? 뭐라는 거야.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아닙니다 팀장님! 아니에요! 실버 박스를 받고 싶습니다!
입을 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손끝 하나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순간 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멈춰! 멈추라고!
말릴 틈도 없었다. 결국 이 미친놈이 망설임 없이 브론즈 박스를 열었다.
아, 그래. 여긴 꿈이다. 바깥에서의 나는 아직 기회가 남아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뭐가 나오나 보자는 심정이 됐다.
끼이익.
특유의 낡은 소리가 나오며 박스가 열렸다.
그런데. 어라. 그런데 이상하다. 특유의 황동빛이 아니라 하얀색 빛이 흘러나온다.
그것도 그냥 흘러나오는 수준이 아니라 시야 전체를 덮을 정도로 거세다.
원래 박스를 열면 빛이 나오기는 한다. 그런데 겨우 브론즈 박스가 이 정도로 환하고 밝은 빛을 뿜어낸다고? 이런 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경우였다.
안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내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시야 전체가 휘황찬란한 빛으로 뒤덮였다.
누구라도 그 빛을 본다면 황홀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었다. 지금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머물던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었을 때.
메시지 창이 떴다.
[띠링!]
***
“…골라.”
“…….”
“…하냐고. 안 고르고.”
흡!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느새 현실로 돌아왔다. 내 의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현실로.
환한 빛도 사라지고 브론즈 박스도 아직 열리지 않았다. 그 대신 한석훈이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빨리 골라. 실버 박스 할 거지? 실버 박스를 이태지….”
“자, 잠깐만요!”
“왜.”
“저 브, 브론즈 박스로 하겠습니다.”
대답은 했는데 정신이 말이 아니다. 방금 건 뭐지? 이것도 예지몽인가? 이걸 꿈이라고 말할 수 있나?
“뭐? 인마. 눈치 안 봐도 돼.”
“맞아요. 저희들도 다 받은 거예요.”
한석훈과 김세린이 나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한데 말은 또 잘 나온다.
“아뇨. 그게 아니라요. 진짜 브론즈 박스 받고 싶어서요.”
“뭐? 왜?”
별안간 한석훈을 비롯한 팀원들이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런 거 받으면 우리가 텃세라도 부릴까 봐 그러냐?”
한석훈이 그렇게 말하고.
“에이. 우리 그런 사람 아닌데.”
김세린이 팔짱을 끼며 속상한 표정을 한다.
“넌 그런 사람 같아 보이긴 해.”
거기에 대고 박하영이 면박을 주고. 하루도 안 봤는데 이 레퍼토리가 벌써 눈에 익었다.
“진짜 그런 건 아니고요. 그, 촉이란 게 있잖아요. 실버 박스보다 브론즈 박스가 더 좋을 것 같다는 촉.”
그래. 없는 사례는 아니다. 상위박스 내용물이 아랫것에서 튀어나오는 경우가. 다만 극악의 확률이라 그렇지.
촉이란 말에 팀원 전원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특히나 한석훈은 내 얼굴을 뚫을 기세로.
“마지막으로 물어본다. 진짜 후회 안 해?”
“네. 진짜 후회 안 합니다.”
“허 참. 고집 보게. 니가 선택한 거다?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
“네.”
한석훈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말은 안 했지만 박하영도 어깨를 움찔하고 있고 이지은은 커다란 눈을 끔뻑거린다.
전용철은 아예 팔짱을 끼고 재밌다는 듯 보고 있고.
하기야. 세상 어느 미친놈이 소수점 아래의 확률을 믿고 실버 박스 대신 브론즈 박스를 선택할까.
심지어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 나조차도 의심스럽다. 그래도 지금은….
확인해 보자. 어제와 오늘, 연달아서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진짜 예지몽인지 아니면 단지 내 착각인지.
“웃기는 녀석이네. 그래 어디 보자 그 촉. 이태진에게 브론즈 박스를.”
“이태진에게 브론즈 박스를.”
그렇게 팀원들 모두 브론즈 박스의 소유자로 나를 지목했다.
[브론즈 박스를 획득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디 봅시다. 팀장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인벤토리 안에서 낡은 나무상자를 꺼냈다.
“오픈.”
꿈속과 같이 그것을 열었고.
끼이익.
느낌이 좋다. 데자뷔처럼 어딘가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박스가 반쯤 열렸을 때.
화아악!
시작됐다. 심장이 쿵쾅쿵쾅 도무지 멈출 줄 몰랐다. 곧 하얀색 빛이 온 세상을 덮을 기세로 뿜어져 나왔다. 무엇이냐!
예지몽(?)에서는 메시지 창이 뜨기 직전 현실로 돌아왔다. 다만 이 빛으로 유추하자면 최소한 플레티넘, 혹은 다이아 급 상자에서나 볼 수 있는 빛이다.
‘와라! 어떤 것이든.’
***
치이익.
소고기가 맛있게 익어간다. 이름부터가 화려하다. 황제꽃갈비살. 뿐만 아니라 따뜻한 밥과 된장찌개도 있다.
던전 공략을 끝내고 깨끗하게 씻고 옷도 갈아입고 온 회식 자리이다. 이제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즐거워야 할 회식인데 분위기가 묘했다.
생글생글 웃으며 서빙하던 직원도 위화감을 느낀 건지 굳어진 표정과 함께 얼른 소주와 맥주잔을 놓고 사라졌다.
“…이제 먹어도 될 것 같은데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못 들은 건지 안 들리는 척하는 건지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소고기 소고기 노래를 부르던 김세린까지도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눈치 없이 행동해야지.
“팀장님. 드셔도 될 것….”
“촉이 좋다고?”
“네?”
한석훈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귀찮은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재밌는 놀이를 발견한 아이같이 눈을 빛내고 있다.
“촉이 좋아서 브론즈 박스를 골랐다고?”
“…네.”
“그리고 그 안에서 A급 스킬이 떴고.”
“……네.”
“용철아. 브론즈 박스에서 A급이 뜰 확률이 어느 정도냐?”
옆에서 한석훈과 같은 얼굴로 나를 보던 전용철이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걸어가다 벼락 두 번 맞고 살아남았는데 때마침 주머니에 있던 로또가 1등 당첨될 확률 정도요.”
“말도 안 된다는 거네?”
“그렇죠.”
“그런데 그게 됐네?”
“그러게요.”
“그것도 첫날에?”
“그러니까요.”
“하! 도사님. 제 점도 한번 봐 주시죠.”
그러면서 둘이 동시에 나를 바라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불판에 놓인 고기를 집어삼켰다.
맛있기는 한데 체할 것 같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뿐이다.
고기를 우걱우걱 입안으로 더 쑤셔 넣었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저항이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젓가락을 든다. 그마저도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는 않은 채로.
“오빠! 이번 주 로또 번호 좀 알려주세요.”
김세린은 아예 수첩과 펜까지 꺼내 들고 나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13, 15, 20, 27, 43, 44. 적었어?”
장난식으로 말했는데 김세린은 그걸 또 열심히 받아적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웠다.
알고 보니 김세린과 박하영은 나보다 두 살 어린 스물넷, 이지은은 스물셋이었다.
앞으로도 얼굴 볼 사이기에 우리는 말을 놓기로 했는…. 그나저나 쟤들 지금 뭐하는 거지?
자세히 보니 옆에 있던 이지은이 김세린의 수첩에 적힌 번호를 따라 적고 있었다.
맞은편에 있는 박하영은 그것을 흘끔흘끔 보면서 중얼거리고 있고.
번호를 외우고 있는 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중에 틀렸다고 욕하거나 그러진 않겠지?
그때를 분기점으로 다들 심각한 표정은 사라지고 어느새 웃고 떠드는 회식이 시작됐다.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팀원들은 텃세 없이 나를 대했고.
왁자지껄한 시간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렸을 무렵에는 거나하게 취한 한석훈이 2차를 외치고 있었고 이지은은 그런 한석훈을 택시에 구겨 넣고 있었다.
“오빠는 반대편이시죠? 저희는 같이 살거든요.”
한숨을 돌린 이지은이 김세린과 박하영을 챙기며 말했다.
“그래. 오늘 수고 많았어. 내일 보자.”
이지은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익숙한 듯 김세린과 박하영을 택시에 구겨 넣고 앞자리에 탔다.
“내일 뵐게요. 아참! 그리고 정말 축하드려요!”
그 말과 함께 택시가 출발했다. 나는 택시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길 위에 서 있었다.
취기가 한껏 올라 몸이 제멋대로 비틀댔다.
어떻게 어떻게 꾸역꾸역 씻고는 허둥지둥 침대에 눕자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각성자에게 취기란 마나 한 번으로 털어낼 수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술기운이라도 없으면 머리가 터질 것 같거든.
체감으로는 한 달은 지난 기분이다. 스펙터클하긴 했지. 첫 출근부터 D등급 던전에 들어간 것이나 컴베트 오크와 맞붙은 것이나.
[스킬 : 아드레날린 부스트
등급 : A
효과 : 전사는 위기의 순간에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생명력을 대가로 폭발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사용 시 5분간 모든 스탯이 두 배가 됩니다. 하지만 사용시간이 소진되면 남은 체력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 24시간.]
그리고 브론즈 박스에서 뜬 이것까지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좋다. 당연히 좋지. 예지몽이라 불러야 하나 싶은 것 때문에 두 번이나 도움을 받았으니까.
그런데 동시에 찝찝하다. 근 삼십 년 살면서 얻은 지혜가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스킬이 생긴 것일까 싶어 상태창을 열어봐도 별다른 것은 없다.
상태창에도 안 뜨는 스킬 같은 게 있는 건가? 사용 조건이나 재사용 대기시간은? 이 정도로 큰 효과라면 분명 리스크도 있을 텐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정답을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지금부터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리라는 강한 확신만 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