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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4화 (4/170)

4화 예지력 (1)

지금 내가 그 기분 더러운 꿈을 부정하든 긍정하든. 중요한 것은 꿈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다음이 어떻게 됐더라? 호기롭게 오크에게 달려들었다가 당황해서는 검까지 놓쳤었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오크의 힘이 꿈속에서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 봤다.

분명 꿈에서는 그랬다. 내 생각보다 강한 충격에 당황했고 그 이후부터는 계속 밀리기만 했었다. 오크가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냐는 마음 때문이었다.

한석훈을 비롯한 2팀이 너무 쉽게 던전을 공략하는 바람에 나까지 마음을 놓아버린 것도 있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결국엔 다 핑계일 뿐이다. 내가 방심해서 저것에게 틈을 내어 준 것뿐이다.

반대로.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면.

“왜. 막상 해보려니까 무서워졌나? 소드마스터?”

팀장의 비아냥이 귓속을 파고들었지만. 지금은 대답할 정신이 아니었다. 대신 스킬을 발동시켰다.

[도약(跳躍) 스킬을 발동합니다.

효과 : 10분간 이동속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집중 스킬을 발동합니다.

효과 : 집중상태로 돌입합니다. 10분간 모든 스탯이 소폭 상승합니다.]

잔뜩 힘주고 있던 다리를 쭉 뻗었다. 순식간에 오크를 향해 상체가 쏟아진다.

느긋하던 오크의 표정이 일순간 바뀐 것도 그때였다.

놈. 이게 끝이 아니다.

[일점 폭발을 발동합니다.

효과 : 단 한 번, 마나를 집중시켜 힘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대상 : 롱소드]

콰앙!

놈의 칼과 내 검이 맞부딪친 순간이었다. 던전을 울리는 큰 소음이 터졌다.

이 한 번의 일격으로 놈이 들고 있던 검에 좌르륵 금이 생겼다.

“크륵?”

멍청한 돼지 대가리의 오크가 당황스럽다는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놈만큼은 아니었지만. 나 또한 내 전력을 쏟아부었음에도 한 번에 제압하지 못했다는 게 분해서 이가 갈렸다.

확실히 이제껏 상대해왔던 돼지머리들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하지만 한 번 복습하고 온 효과 때문일까.

“이 정도란 말이지.”

놈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됐다. 동시에 이 정도라면 내가 이길 수 있다는 확신까지도.

일점 폭발은 한 번밖에 쓰지 못한다. 그러나 이미 승기는 기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놈의 목을 겨냥하고 검을 내질렀다. 균형을 잃은 오크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방어를 시도했다. 목을 지킨 대가로 놈은 칼을 쥐고 있던 오른 손목을 내줘야만 했다.

“케르륵! 크워!!!”

놈이 고통에 울부짖었다. 벌써 울지마라. 이제 시작이니까.

다섯 번의 칼질에 놈의 왼팔이 날아갔다. 일곱 번의 칼질에 오른팔을 베었고. 열 번의 칼질 끝에 오크의 대가리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한석훈만큼 깔끔하진 않았지만 오크는 공격다운 공격 한번 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스르륵.

롱소드를 칼집에 집어넣었다. 헐떡거리는 숨을 뒤로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젠장할.

원래는 이렇게 됐어야 했다. 이게 내 본 실력이라는 말이다.

쓰러져있는 오크를 바라보는데 입맛이 썼다.

한 번에 너무 많은 마나를 쓴 탓일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직접 맞붙어 보니 알겠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면 상당히 고생했을 것이다.

다음을 생각하지 않고 마나를 다 쏟아부었는데도 놈을 잡는데 열 번이 넘는 합을 거쳤으니까.

활화산처럼 펄떡이던 심장이 차츰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그나저나 왜 아무도 말이 없지?

시야를 돌렸다. 나를 지켜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그런데 표정이 이상하다.

모두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김세린은 물론이고 지금껏 말이 없던 이지은까지도 입을 다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뭔가에 많이 놀란 얼굴이었다.

왜 이래?

정적도 잠시. 김세린이 하이 톤 목소리로 괴성을 질렀다.

“대, 대박! 오빠 진짜 소드마스터였어요? 혹시 S급 스킬이나 특성 숨긴 거 있어요? 힘숨찐 같은 건가?”

“네?”

뭐라고? 김세린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다가온다. 이상하게 눈을 빛내며 말이다.

그 뒤를 박하영, 전용철, 이지은이 졸졸 따라왔다. 똑같은 눈빛을 하면서.

왜 이래 진짜.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들은 내 주변으로 모여서는 자기들끼리 이런저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와. 옛날 생각난다. 나는 아깝게 졌었는데.”

“아깝게 진 게 아니라 고블린 한 마리에 엉엉 울었지.”

“그냥 고블린이 아니라 도니쉬(Donish) 고블린이었다고! 그리고 엉엉 울다니. 그러는 너야말로 오크 한 마리에 당황해서는 팀장님이 구해주실 때까지 아무것도 못 했으면서.”

“고블린보다는 낫지 않을까?”

투닥거리는 김세린과 박하영을 보고 있는데 옆으로 이지은이 다가와 손을 뻗어 왔다.

“치료해 드릴게요. 손 주세요.”

마법을 쓴 것도 아닌데 나지막하게 말하는 이지은에게 자동적으로 다친 손을 내밀었다.

곧 이지은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전투 중 찢어졌던 손은 물론이고 체력이 회복되며 활력이 솟아났다.

방금까지도 어지러웠던 머리가 더없이 맑아졌다.

역시 일성이라서 유달리 뛰어난 걸까. 아니면 이 팀이 유독 뛰어난 걸까. 어쨌든 이 파티, 보면 볼수록 놀랍다.

“처음이거든. 팀장님 신고식 통과한 사람 말이야.”

이지은의 치료에 몸을 맡기던 중 전용철이 의외라는 듯 내게 말했다.

“아. 말 놔도 되는 건가?”

딱 봐도 삼십 대 후반처럼 보이는 전용철이다. 덩치만 봐도 왜소한 사람은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을 것이다. 존댓말을 했다면 오히려 불편할 뻔했다.

“네. 편하게 해 주세요. 그나저나 신고식이라니요?”

“신입 들어오면 하는 거 있어. 팀장님이랑 일한 지 3년 넘었는데 처음 봤어. 죄다 어영부영하다가 팀장님이 구해주거든. 우리 전부 다 그랬고.”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사실은 저 괴팍한 팀장의 신고식이었다니.

무슨 신고식을 목숨 걸고 하나? 심지어는 지는 게 당연하다고 한다.

전혀 자존심 상할 필요 없다고, 원래 그렇다고 전용철이 말했다.

알고 보니 애초에 한석훈, 저 변태 같은 양반이 그렇게 의도하고 만든 판이었다. 그걸 3년 만에 깨부순 게 나였고.

사실 어제 꿈에서 본 대로라면 나 또한 오크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한석훈이 나타나 ‘쯧’ 하며 구해줬겠지만.

그 정체 모를 꿈 덕분에 나는 졸지에 처음으로 신고식을 통과한 인재가 돼 버렸다.

도대체 그 꿈은 뭐였을까. 머리가 복잡했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그나저나 이 양반은 어디서 뭐 하는 거야?

무슨 이런 무시무시한 신고식이 있냐고 따져야지 안 되겠다 생각하며 한석훈을 돌아봤을 때였다. 팔짱을 끼고 묘한 표정으로 한석훈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귀찮은 얼굴은 어디 가고 눈을 반짝이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김세린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다.

마치 사냥감을 보는 것 같은 맹수의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잘 걸렸다는 얼굴이다.

그러다 한석훈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한석훈이 씨익 웃어 보인다. 오싹한 기분과 함께 등 뒤로 닭살이 돋았다.

오늘 처음 봤지만 이 사람. 확실히 변태다.

***

도망쳤던 그 개잡놈을 포함해서. 새로 들어오는 것들은 하나같이 기고만장하다.

3년간 학교 비스무리한 곳에서 굴렀다고 하는데 한석훈이 보기엔 그곳은 걸음마 배우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이 회사에 오는 것들이란 그곳에서 최상위의 성적을 받은 것들이니 얼마나 기고만장한지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의 과정은 필수였다. 아카데미에서 얄팍하게 배운 놈들이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천둥벌거숭이처럼 설쳐대기 전에 꼭 한번 기를 꺾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나중에 큰 사고를 안 치게 되니까.

문자 하나 남겨두고 도망친 개잡놈도 그랬다. 일정 수준 이상의 몬스터를 만나보기 전까지 그렇게 기고만장할 수 없었다.

김세린은 그 개잡놈이 겁이 많다고 했지만 한석훈은 애저녁에 놈을 파악해 두었었다.

겁이 많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비슷하거나 그 위에 있는 몬스터를 상대할 때고.

조금이라도 약해 보이는 몬스터를 상대로는 용사가 따로 없었지.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던전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던전 안에서 방심이란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몇 번이나 직접 보지 않았던가.

힘을 조절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매 순간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말이다.

결과만 보자면 그놈의 자만을 꺾는다고 몇 번 고생 좀 시켰다가 결국 못 버티고 도망쳐버렸지만. 그래도 한석훈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대로 뒀다가는 언젠가 초상을 치렀을 게 뻔했다. 오히려 자신은 그놈의 목숨을 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의도치 않게 자신의 팀으로 들어온 이태진도 한석훈이 보기에는 여타 다른 놈들과 비슷해 보였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부터 뚱한 표정이었던 이 신입은 자신과 팀원의 합에 감탄한 것 같았다. 한편으론 풀이 죽은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롱소드를 쥔 손에 잔뜩 힘이 실린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방금 전 봐 두었던 이 녀석의 프로필을 살펴본 것이 생각났다.

확실히 이 녀석 또한 아카데미에서는 최상위권의 각성자였었지. 물론 실기에 한정해서.

어설픈 상대는 오히려 이 녀석이 기고만장해질 계기만 만들어줄 뿐이다.

그래서 적당한 상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그래. 전사계급에 해당하는 컴베트(Combet) 오크 정도라면.

아마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면 이길 수도 있겠다.

물론 다른 녀석들이 그러했듯 이태진이 그럴 것이라 생각되진 않는다만.

이런 녀석들의 머릿속이란 훤했다. 전력을 다하기는커녕 간을 본답시고 이리저리 검을 휘두르다 놓치지 않으면 다행이지.

“신입아. 실력 한번 볼까?”

그런데 그 말에 좀 전까지 자신만만하던 표정은 어디 가고 신입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이제 와서 두려워진 건가?

다행히 겁쟁이는 아니었던지 생각을 마친 녀석이 오크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한석훈은 이 얼빵한 신입놈을 언제 구해줄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한번으로 녀석의 기세가 눌러진다면 다행이고 아니라면 몇 번 더 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러면 되겠지.

콰앙-!

그런데 녀석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이태진이 몸을 날린 속도부터가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훨씬 빠르고 폭발적이다.

마치 컴베트(Combet) 오크와 자신의 수준을 정확히 이해한다는 듯 녀석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여유를 부리지 않았다. 저놈의 수준을 생각한다면 이런 움직임은 전력을 다해야만 나오는 수준.

“허어.”

쩔쩔매던 오크의 대가리가 날아간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후우. 후우.”

신입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기고만장하지도 거만하게 뽐내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대인 것 같았다.

녀석은 마치 방금 전 전투를 복기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자책 어린 표정으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신입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녀석과 자신의 눈이 마주쳤다.

한석훈의 눈이 빛난 것도 그때였다. 어쩌면. 어쩌면 자신이 대어를 발견한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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