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미래를 본다-3화 (3/170)

3화 개꿈은…이루어진다. (3)

나. 방금 잘못 본 거 아니지? 분명 던전 등급에 D라고 적혀 있었잖아.

“아 맞다. 깜빡하고 너한테 브리핑을 안 해줬네. 여기 D등급인 거 봤지? 별거 없어. 그냥 고블린 나오고 오크 나오고. 똑같아.”

한석훈이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깜빡했다고 한다. 아 깜빡. 심지어 별거 없다고 말한다.

지옥 같았던 아카데미 졸업시험도 E급 던전 공략이었다.

단순히 등급 한 단계 올라가는 문제가 아니다. E급과 D급은 몬스터의 수준 자체가 다르다. 몬스터의 강함도, 그 숫자도.

한 손에는 아메리카노를, 목에는 출입증을 걸고 ‘좋은 아침입니다!’ 하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아무렴, 나도 헌터인데. 던전을 우리집 안방처럼 드나들고 밥 먹듯 몬스터와 부대낄 각오도 돼 있었다.

그것만큼 성장에 빠른 길도 없으니까. 다만 첫 출근의 로망이라는 게 나름대로 있는 법 아닌가.

출근 첫날부터 던전 레코드를 달성했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훗날 자서전을 쓸 수 있다면 꼭 넣어야 할 내용이다. 다만, 오늘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는 가정하에.

숨을 크게 들이쉬고 인벤토리 안에 잠든 롱소드를 꺼냈다.

‘후우.’

조금이나마 진정이 된다. 주위를 둘러봤다. 습한 공기. 간간이 호롱불이 떠 있는 동굴. 꿈에서 나왔던 곳과 비슷해 보인다.

머리를 휘휘 저어 생각을 날렸다. 아까 다짐했던 것과는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필사적으로 생존에만 집중할 때였다.

여타 다른 던전과 마찬가지로 이 던전도 첫 번째 방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지체 없이 다음 방으로 넘어갔다.

끼이익-

기분 나쁜 소리를 내는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자.

“캬르륵!”

기다렸다는 듯 고블린 하나가 우리를 덮쳤다.

“어딜!”

한석훈이 고블린을 발로 찼다.

“쿠엑-!”

호기롭게 달려오던 고블린이 괴상한 신음과 함께 저 멀리 날아갔다. 놈은 잠시 꿈틀거리더니 곧 움직임을 멈췄다.

“…….”

죽었어? 이게 뭐지? 내가 이제껏 배운 전투방식과는 전혀 다른. 그러니까 이걸 전투라고 할 수 있나?

내 반응과는 다르게 팀원들은 이런 게 익숙한 듯 이미 전투를 위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전방에 롱소드를 쥔 팀장을 필두로 힐러와 마법사가 뒤에 자리 잡고, 탱커와 레인저가 주위를 둘러쌌다.

교과서에서 보던 완벽한 포지션이었다. 이렇게 되려면 얼마나 합을 맞춰야 될까.

나 또한 손에 힘을 바짝 쥐고 언제라도 튀어 나갈 수 있게 준비했다.

“아, 너는 일단 대기.”

한석훈이 고블린의 목구멍에 칼을 쑤시며 말했다. 귀찮다는 얼굴은 그대로다.

도약 준비를 마친 다리에 급제동이 걸렸다.

“어떻게 하는지 봐. 거기서.”

한석훈이 가리킨 곳은 싱긋 웃고 있는 원거리 딜러 김세린이 자리한 곳보다도 뒤에 있었다. 그러니까 전투와는 완전 동떨어진 곳.

문득 아까 전 인사팀장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구경이나 하라는 말. 아무래도 진짜였나 보다.

던전에서 리더의 말은 절대적이다. 팀장과 투닥거리던 김세린도 지금은 철저히 한석훈의 오더에 따르고 있었다.

하물며 입사한 지 하루도 안된 애송이가 그 권위에 대들 수 있을 리가.

나는 조용히 던전 구석으로 밀려나 이들의 전투를 관전했다. 이들의 싸움은 대략 이런 식이었다.

콰앙-!

먼저 김세린의 파이어볼이 적진 한가운데에 폭발한다. 그렇게 고블린이 폭발에 허둥지둥하는 사이 한석훈이 놈들 사이로 들어간다.

여기까지 오게 된다면 남은 것은 무자비한 학살밖에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김세린 옆에 꼭 붙어있는 이지은은 착실히 버프와 저주마법을 퍼붓고 박하영은 활을 들고 열심히 짤짤이를 넣었다.

제 몸만 한 방패를 든 전용철은 힐러와 마법사 사이에서 묵묵히 놈들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고.

이 사람들. 합도 합이지만 개개인의 무력이 상상 이상이다. 역시 일성이란 말이 절로 나왔다.

특히, 한석훈의 무력은 그중에서도 압권이었다. 괜히 팀장이 된 건 아니었는지 그의 칼끝에서 스킬이 뿜어져 나올 때마다 꼭 몇 개씩의 대가리가 딸려 나왔다.

이들이 고블린 한 부대를 쓸어 버리는 데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도 주술사 고블린까지 포함된 이것들을 말이다.

맙소사.

“대체 이게 무슨.”

후드득.

남이야 감탄을 하든 말든 칼에 묻은 핏물을 털어낸 한석훈이 무심하게 말했다.

“네 번째 방까진 안 쉬어도 되지?”

끼이익.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한석훈이 다음 방문을 연다. 그 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데 김세린이 그런 나를 보며 웃었다.

“푸흡! 뭐해요. 빨리 와요.”

“아, 네!”

젠장.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다니. 직전의 전투가 남긴 잔상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몇 번 털고 빠르게 무리를 뒤쫓아갔다.

***

던전은 일반적으로 열한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무것도 없는 첫 번째 방과 보스몹이 있는 방을 제외하면 일반몹이 나오는 방은 총 아홉 개. 그러니까.

서걱-!

한석훈이 마지막 고블린의 목을 뎅겅 썰어버린 이곳은 던전 전체로 치자면 다섯 번째 방이다.

하프 지점을 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한 시간 반 남짓.

아카데미 시절 F급 던전 공략 평균 레코드가 얼마였더라? 일곱 시간?

“여기서 잠시 휴식.”

이 사람들은 이런 속도로 던전을 공략하고 있음에도 힘든 기색은커녕 무덤덤한 표정으로 방패와 활을 다듬거나 명상으로 기력을 보충할 뿐이었다.

문득 아카데미 3학년 시절 교관이 들려줬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니들 이제 졸업할 때 되니까 죄다 만만하지? F급 던전도 별거 없고 밑에 일학년들 하는 꼴 보니까 막 능숙한 각성자 된 것 같고. 크큭. 너네들 그런 마음가짐으로 밖에 나갔다가 큰코 다친다. 명심해.’

그때는 재수 없는 교관이 또 시비를 건다고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젠장할. 아카데미에 대한 생각은 그만하자. 거기와 비교하면 여기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잖아.

그러지 않으려 해도 롱소드를 잡은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휴식시간이 끝났다. 그렇게 다음 방으로 가려던 그때, 레인저 박하영이 말했다.

“팀장님. 오크요.”

박하영이 아까부터 다음 방으로 통하는 문을 유심히 관찰하길래 뭘 하나 했더니. 탐색 스킬을 쓴 모양이었다.

“그래? 흠.”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한석훈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진형은 슬슬 눈에 들어오지? 뭐 기초적인 대형이기도 하고.”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따라 할 엄두는 나지 않지만.

“호오. 그래? 그러면 실력 한번 볼까? 뭐 억지로 시키는 건 아니고.”

“기회만 주신다면 같이 싸워보고 싶습니다.”

빈말이 아니다. 안 그래도 이들의 전투를 보면서 불쑥불쑥 호승심이 이는 걸 참느라 혼났다.

주먹구구식의 인사이동 과정을 보며 취업 사기를 당했다는 마음은 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까부터 가슴이 두근댔다. 애초에 저런 팀원들과 같이 합을 맞추고 싶어서 일성에 온 것이지 않은가.

그런데 한석훈이 내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는다.

“허, 얘 봐라. 자신 있나 보네. 아까까지만 해도 죽을상이더만.”

그거야 첫날부터 던전 들어가라니까 그런 거고.

속내를 감추고 머쓱하게 웃자 한석훈이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면 한번 해 보든가. 신호 줄 테니까 한번 싸워 봐. 뒤에서 봐줄 테니까 겁먹지 말고.”

말만 들으면 엄청 든든한데 표정은 여전히 귀찮고 나를 못 미더워하는 듯하다.

앞으로는 눈을 감고 말을 들어야 하나?

어쨌든 준비를 마친 한석훈이 오크든 나발이든 상관없다는 듯 망설임 없이 다음 방문을 열어 재꼈다.

“이리 오너라-!”

대차게 문을 걷어찬 한석훈이 몬스터 무리 사이로 뛰어들었다.

박하영의 말대로 고블린 대신 오크 무리가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콰광-!

한석훈의 몸이 놈들에게 떨어지기 직전 김세린이 날린 폭발마법이 무리의 중앙으로 쏟아졌다.

이번에도 전략은 같았다. 다만 오크들은 고블린과 달랐다.

놈들은 폭발에도 살아남았으며 저주를 받아도 기어코 움직였고 서너 발의 화살이 가죽에 박혀도 멈추지 않았다.

“쿠워어!”

잔뜩 성난 놈들이 이리저리 괴성을 질러댔다.

콰앙!

돼지 대가리를 한 오크들의 몽둥이에 전용철의 큼직한 방패가 크게 울렸다.

하지만 뒤로 조금 물러났을 뿐 전용철은 여전히 끄떡없어 보였다.

덕분에 김세린과 이지은은 마음 놓고 폭발 마법을 뿌려댈 수 있었고.

결국 속도가 느려졌을 뿐 이대로라면 문제없이 놈들을 공략하는 게 가능했을 터였다.

사실 지금이 내가 생각했던 전투와 가장 흡사했다. 이제까지가 이상했던 거지.

그런데 뭔가 답답했을까. 쯧 하며 혀를 차는 한석훈의 검에서 푸른색 빛이 뿜어져 나온 것이 그때였다.

쉐에엑-!

방금 전과는 분위기부터 다르다. 한석훈의 검이 지나갈 때마다 걸리는 것 없이 돼지 놈들의 목이 뎅겅뎅겅 날아갔다.

이거. 그거 맞지?

나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오러 블레이드.

상급 검술 영역에 들어선 자들, 그중에서도 선택받은 몇몇의 고수들만이 얻을 수 있다는 그것 아니던가.

내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턱이 빠질 듯이 입이 떡 벌어졌다. 내가 꿈에도 바라던 경지가 바로 저것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초고수들의 동영상에서 본 것처럼 완연하고 선명하진 않았지만. 분명한 오러 블레이드였다.

“하.”

저 경지의 끝자락이라도 붙잡으려 헌터들이 목숨을 걸고 던전에 들어간다.

나는 이곳이 어딘지도 잊은 채 몬스터를 도륙 내는 한석훈을 멍하게 지켜봤다.

“어휴, 팀장님 또 답답했나 보네.”

옆에서 전용철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들에게는 한석훈의 오러 블레이드마저도 일상의 한 부분처럼 보였다.

어느새 서른이 넘던 오크가 몇 안 남았을 때였다. 멍하던 정신이 돌아온 것도 그때였다.

그때까지도 한석훈은 내게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두근두근!

지금 심장이 두근대는 이유는 한석훈의 오러 블레이드 때문만이 아니었다.

언제쯤 내게 싸우라고 신호를 줄 것인지 때문도 아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다. 이윽고 오크 부대가 전멸하고 한 녀석만 남았을 때였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며 소름이 돋았다.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생각하지 않으려 했었다.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았었는데.

하지만 본능적으로 앞으로 펼쳐질 상황이 눈앞에 그려진다.

아마 지금 한석훈이 하려는 말은.

‘신입아. 솜씨 한번 볼까?’

“신입아. 솜씨 한번 볼까?”

이것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