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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는 나만 지킨다-221화 (완결) (219/221)

제221화. 다녀왔어

길고 지루한 이명이었다. 그리고 시야에는 온통 하얀색뿐이었다.

마치 흰 도화지 속에 살아가는 것 같았다. 옆으로 구르고 위로 오르거나 아래로 떨어져도 똑같은 배경뿐이었다.

나는 이 공간 안에서 처음 며칠간은 시간을 세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뒤에는 세는 것이 의미가 없음을 깨닫곤 그저 기다리기만 했다.

공간의 느낌은 전체적으로 물에 빠진 것처럼 몸이 붕 떠오른 기분이었다.

아니, 물보다는 우주인가. 우주에는 가 보지 않아 정확한 느낌은 모르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감각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음을 느꼈다.

처음에는 손에 감각이 돌아왔다.

두 손 가득 무언가가 쥐어졌다.

다음은 소리.

사람들끼리 떠들어 대는 소리.

방송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뒤이어, 전등 빛이 눈동자에 들어왔다. 손전등 같은 것이 아니라, 넓게 퍼지는 빛이었다.

이어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여름에 부는 따듯한 바람 같은 것이 아니라, 실내 난방기에서 나오는 따뜻한 바람이었다.

이제 감각이 전부 돌아왔다.

난 눈동자를 내려 손에 쥐어진 물건을 바라보았다.

비닐에 포장된 검은 후리스…….

이건 분명 준호를 위한 중학교 입학 선물이었다.

그걸 바라보던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곤 비닐 포장된 후리스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파스락-.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나 정말 돌아왔구나.’

리그가 시작되기 전, 동생의 선물을 사러 온 이 아웃렛으로.

“영수증 드릴까요?”

눈앞에 있던 직원은 내게 물었다.

난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 다시 포장된 후리스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직원은 절대 이해할 수 없겠지.’

직원은 내게 다시 물었다.

“저, 손님?”

“예. 주세요. 영수증.”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뜨득-.

직원은 영수증을 뜯어서 내게 건넸다.

하지만 난 그 영수증을 받지 않고 매장을 나왔다. 그녀에게 영수증을 요구하고 기다리던 도중 익숙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난 그들을 따라갔다.

등 뒤로 다급한 점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손님? 영수증? 손님?”

많은 사람이 쇼핑몰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모두 정갈하게 차려입고 깔끔한 모양새였다. 지난날 내가 봐 왔던 사람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난 무리 사이를 빠르게 지나쳤다.

그리고 어느 한 명품 매장 안에서 익숙한 얼굴의 세 사람이 보였다.

“이걸로 할까? 세범아?”

“아무거나 해.”

“아잇! 좀 잘 봐! 아빠 생신 선물인데.”

“알겠다고. 뭐, 적당히 예뻐 보이네.”

1라운드를 같이 치른 이주연과 이세범, 그리고 둘을 안내하고 있었던 건 1라운드 청 팀의 지점장이었던 김동길이었다.

이주연은 고급 지갑을 들곤 살피며 김동길에게 물었다.

“아버지 선물인데, 이런 디자인이 요즘 50대한테 잘 나가요?”

지점장 김동길은 친절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네-. 손님. 이 지갑의 가죽은…….”

그때, 이주연 곁에 무뚝뚝하게 서 있던 이세범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우린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이내 내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1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난 코너에서 빠져나오는 사람을 못 보곤 그대로 부딪혔다.

커피가 묻은 채로 쓰러진 나에게 건장한 키를 가진 남자가 손을 건넸다.

“아, 미안해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1라운드에서 자살한 군인 출신의 권경수였다. 난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권경수는 내게 연신 고개를 굽신거리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정말 괜찮아요……?”

그는 무어라 말했지만, 난 그를 지나쳐 도망치듯 걸었다.

“아. 앗. 저기…….”

난 그대로 밖으로 향했다.

내 옷차림은 그 때 그 시절과 같았다.

그들을 지나쳐 기어이 1층 쇼핑몰 문을 열었다.

찬 바람과 함께 뜨거운 태양 빛이 얼굴에 쏟아졌다.

무너졌어야 할 도로는 멀쩡했고, 거리에 시체는 없었으며, 사람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이 도시를 올려다보는 나의 감정은 허탈함과 동시에 뿌듯함이 들었다.

난 그들의 사이를 걸었다. 허물없이 걸었다. 원래 가야만 했던 그 자리로.

비산대교를 넘어, 동생이 있는 빌라로 향했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

그리고 마침내 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허름한 입구. 입구 곳곳에는 관리인이 잔뜩 가져다 놓은 갈색 화분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웬 할머니가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지긋한 눈매가 살며시 내려갔다.

“왔어?”

“할머니.”

“시온이 아니더냐~? 왜 이렇게 늦었어~?”

윗집에 사는 할머니였다. 가끔 반찬을 가져다주시는 고마운 할머니. 준호도 가끔 봐주시는 할머니.

똑똑히 기억난다. 정 할머니.

난 할머니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추워요. 들어가시지.”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오래 기다렸어.”

“……일이 좀 있어서요. 정말 많은 일이.”

정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손이 내 손을 감쌌다.

“젊은 애가 얼굴 봐아- 고생이 많았어- 고생 정말 많았다. 오늘 하루 정말 길었겠구나- 그렇지-?”

정 할머니의 말은, 오늘 하루 노가다판을 다닌 나에 대한 말이겠지만. 왜인지 다르게 느껴졌다.

난 지난 10년간의 리그에서의 고통을 할머니에게 위로받고 있었다. 정 할머니는 내게 있어 정말 고마운 사람이었다.

정말.

“정말……. 하루가 길었어요.”

정말 너무 길었다. 여기에 다시 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너무도 오랜 시간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왔다.

“준호가 기다린다. 시온아. 얼른 들어가-. 밥 먹어야지.”

“네. 그래야죠. 너무 오래 걸렸어요.”

“반찬 필요하면 말하고.”

“네. 감사합니다.”

“그려 그려.”

난 할머니를 뒤로 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집으로 내려가는 길.

마음이 가벼우면서도 무겁다.

조심스럽게 열쇠를 구멍에 집어넣었다.

철컥-.

잠금장치가 풀리며 나는 소리가 요란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전등 빛이 흘러나왔다.

문이 열렸을 때까지 내 시선은 오로지 신발장에만 머물러 있었다.

차마 고개를 들기가 무서웠다.

왼쪽 겨드랑이에는 준호의 선물이 들려 있었다.

그렇게 심호흡하던 와중……. 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난 그제야 고개를 들어 준호를 바라본다.

“…….”

준호였다.

쫄쫄이 내복을 상하로 맞춰 입은 준호가. 숙제라도 하고 있었는지 손에 볼펜을 쥐고 있던 동생이.

내가 정말 보고 싶었던 준호가, 그 준호가 내 눈앞에 있다.

반드시 돌아간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은 지금에서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이 어린 것이 그 험한 세상에서 살기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믿기지가 않았다.

준호는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애써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들어가려고 했으나. 사람의 마음이 간사한 게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금껏 겪었던 여러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리고 이렇게 준호를 마주 본 순간 깨달았다.

돌아오길, 정말 잘했다고.

리그에서 준호를 만났을 때 난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결국 이게 옳은 일이었다.

근거는 단순하다.

지금 내가 행복하기 때문이다.

동생은 내게 물었다.

“형……. 왜 울어? 내가 미안해…….”

철푸덕-!

애지중지 가져왔던 후리스는 바닥에 떨어트린 채로 난 신발장에 무릎을 꿇고 준호와 시선을 마주쳤다.

난 준호의 얼굴을 매만지며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잘 있었어? 준호?”

“응. 형. 근데 형 왜 울어?”

“기뻐서. 준호. 오늘 뭐…… 그러니까…… 힘든 일은 없었고?”

“형…… 울지마.”

“미안해. 형이 조금 오늘 기분이 이상하네. 조금 이상하니까 이해해줘.”

“형…….”

준호는 내 목에 자신의 팔을 둘렀다. 난 깜짝 놀랐다. 동생이 먼저 안길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어느새 준호도 울먹이고 있었다. 준호는 말했다.

“형……. 나 부탁이 있어.”

난 준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뭐든.”

“이제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마. 나도 이제 중학생이야. 이제 어른이니까.”

“…….”

“난 형이 행복했음 좋겠어. 그러니까 혼자 울지 마. 형도 형의 인생을 살아 줘. 날 위해 희생하지 않아도 돼. 형. 일이 힘들면 그만둬. 형도 공부하고 싶음 해.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니까. 난 형이 힘든 게 싫어. 형. 힘든 일 하는 거 안 하면 안 돼? 조금만 쉬면서 하면 안 돼? 형 힘들어하지 마. 응?”

“…….”

언제 이렇게 성숙해졌을까.

어쩌면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동생을 품에 안은 채, 등을 토닥였다.

정말……. 정말이지.

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난 준호를 품에서 살짝 밀어내고 얼굴을 살폈다. 조그마한 놈이 눈물 질질 짜며 콧물을 흘려 대는 꼴이 참 기특했다. 지금의 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어린 동생은 이 말을 하기 위해 많은 용기를 냈을 거다.

그야, 난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기특하고 고맙다.

그리고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준호 다 컸네.”

“나 이제 중학생이야 형. 어른이라고.”

“어른이지. 중학생이면 어른이지.”

“응!”

“그럼 어른된 기념으로 오늘 밤은 치킨이나 시켜 먹을까?”

“치킨? 좋아……. 근데 형 괜찮아?”

“형 이번에 보너스 받았어. 일 잘한다고 말이야. 넌 이제 돈 걱정하지 마. 하고 싶은 거 해. 형 이제 돈 많으니까. 치킨 먹을래?”

“치킨……?”

“그래. 먹자. 두 마리로 가자.”

“시장 치킨?! 와아-!”

“아니아니- 호디기 치킨.”

“호호호호디기 치킨? 지, 진짜? 오늘 진짜 파티네?”

“그래~ 준호야. 테이블마저 닦아놔. 형 옷 갈아입고 올게.”

“응. 형! 형! 근데 이건 뭐야?”

“아, 맞네. 준호 잠깐 눈 감아 봐. 자- 형이 뭘 가져왔나~ 이제 눈 떠. 짜잔-! 준호 입학 선물!”

“우, 우, 우, 우와! 새 옷이야?! 혀, 혀엉-! 혹시 로또 맞았어?”

“무슨 소리야. 내가 아무리 구두쇠라도 동생 입학 준비 하나 못하겠냐?”

“형! 진짜 기뻐! 와아-! 와아! 새 옷이다! 새 옷! 진짜 아껴 입을게! 정말 고마워 형!”

“아껴 안 입어도 돼. 그리고 준호. 너 앞으로 용돈 생긴다?”

“진짜?! 난 백 원이면 돼!”

“껌도 못 사 먹겠다 야. 중학생이 된 기념이니까. 일주일에 만 원! 소중히 써야 해?”

“마, 마마만 원?! 혀엉……. 우리 이제 부, 부자 된 거야?”

“부자는 무슨. 중학생은 다 만 원 정도 받지. 아닌가? 더 줄일까?”

“아냐! 형! 나 진짜 소중하게 쓸게. 완전 고마워 형!”

“공부 열심히 하라고 주는 거야. 아, 그리고 준호. 진짜 진짜 마지막 발표.”

“뭔데? 뭔데!”

“우리 이사 가자.”

“아파트?!”

“아……. 아파트는 조오금 그렇고. 아파트는 준호가 대학생이 되면 가자. 지금은 음 신축 빌라로?”

“와-! 신축! 혀엉! 오늘 나 기절할 것 같아. 오늘 진짜 최고로 행복한 날이야!”

“준호도? 형도 그런데.”

“진짜?!?”

“응. 준호야. 형은 오늘 제일 행복해. 마치 오늘을 위해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나도야, 형. 오늘 진짜 진짜 최고다!”

“그래그래. 준호. 치킨 먹게 테이블 정리해 줘.”

“알겠어! 혀엉!”

준호는 안방으로 달려갔다. 난 그런 준호을 붙잡았다. 꼭 하고 싶었던 말을 못 했기 때문이다.

“……아 참. 준호야.”

“응? 형.”

“…….”

“……형?”

난 꿈에 그리던 말을 동생에게 말했다.

“다녀왔어.”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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