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종장 (2)
진재희의 말은 고마운 말이었지만, 그렇기에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난 곧바로 되물었다.
“네 꿈은? 가수를 하겠다는 그 꿈은? 그거 하나만 보고 살아가던 거 아니었어?”
“여기서 하면 돼.”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여기선 불가능하잖아.”
“글쎄, 불가능할까? 그냥 마을 애들 불러 모아다가 기타를 알려 주거나 하면서. 가끔 노래도 부르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난 그녀의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녀의 꿈이 아니었다.
겨우 그 정도로 만족하기 위해서 같이 달려온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가 스스로 꿈을 타협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리고 싫었다.
진재희는 쓰린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식탁보 한 편을 집게손가락으로 꼼지락 댔다.
“불가능하다면 불가능한 대로, 그냥 그런대로 살래.”
“야. 너.”
목소리를 조금 높여 강하게 말했지만, 진재희는 작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난 괜찮아. 괜찮다니까. 네 꿈은 이루어졌으니까. 그걸로 됐어. 그리고 지난 며칠 동안 너의 동생에게 적대감이 드는 내 자신이 너무 싫었어. 그냥 그게 싫어. 그 관계도 싫고, 오묘한 감정도. 내 변화한 기분도. 네 동생이 말하더라. 제주도로 가라고. 그러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래서 정말 그럴까 생각 중이야.”
그녀의 그 말을 듣고, 난 진심으로 허무함을 느꼈다.
난 한숨을 깊게 내쉬곤 의자에 기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재희는 계속해서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 네가 돌아간다는 선택을 해도, 돌아가지 않아도 난 따를 거야. 힘을 기른 건 후회 없어. 돌아가든, 돌아가지 않든 어쨌거나 강한 힘은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그 뒤로 진재희는 아무 의미도 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분명 무어라 떠들고는 있지만, 내 귀에 들어오는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진실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한 가지는 그녀에게 말해야만 했다.
준호에게 말했던 것처럼, 난 사실 어느 순간부터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돌아간 세계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기억을 가지고 되돌아가는 건 그 이후의 일이다. 어쨌든 돌아가는 것이다. 나와 진재희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게 돌아가야만 내가 원하던 세계의 준호를 만날 수 있다.
리그가 시작되기 전, 백화점에서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동생을 위한 옷을 샀을 때 적어도 난 행복했었다.
동생이 옷을 받고 기뻐하는 그 순수한 모습을 보고 싶다.
이제 다시 돌아가 그 선물을 사 가지고 집에 가는 것이다.
그게 원래 내 미래였다.
그리고 절대자는 내 미래를 도둑질했고.
난 말하고 싶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난 변하지 않았다고.
나 역시 돌아가고 싶다고.
같이 돌아가자고.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할 필요 없다고 말이다.
입술을 떼어 그녀에게 말했다.
-난.
그리고 그녀를 향해 첫 마디를 내뱉는 순간,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난 분명 입술을 떼어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내었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묵음.
난 고개를 들어 진재희를 바라보았다. 진재희는 날 바라본 채 멈춰 있었다.
우린 서로를 바라보았다.
난 인상을 찌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황이 변한 건 없었다.
이 묵음, 진공, 공허, 흑백.
관리자들이 흔하게 사용하는 스킬 사일런스였다.
‘이 와중에 관리자의 개입이라고?’
뜬금없는 타이밍이었다.
예상할 수도 없없다.
새로운 라운드가 시작된 것도 아니었으니.
난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확실한 건 지금까지 경험했던 사일런스와는 달랐다.
원래 사일런스 상태가 되면, 관리자가 곧바로 등장하기 마련인데 지금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재희는 여전히 멈춰 있다.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걸 수도 있었다.
‘관리자는?’
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나갔다.
사일런스 상태에서 돌아다니는 건 처음이었다.
원래는 관리자와 동행해야만 했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놈들을 찾기 위해 천천히 걸었다.
청와대에서 나와 거리를 걸었다.
모든 색이 흑과 백으로만 이어져 있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물체는 모두 멈춰있지만, 잔상이 남아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이게 뭐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때, 난 비교적 깔끔한 아스팔트 거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깔끔한 수준이 아니라 완벽하게 멸망 이전 도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교차로에 풍선을 든 아이가 서 있었다.
온 세상이 흑백으로 이루어졌지만, 지금 내가 눈으로 담는 이 장면만큼은 달랐다.
아이의 빨간 풍선, 노란 유치원 모자, 켜져 있는 초록 불.
아이는 무언가 슬픈 눈을 하고서는 그렇게 서 있었다.
난 천천히 다가갔다.
사실 다가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이는 준호였으니까.
‘준호야.’
묵음인 건 알지만, 준호를 불러보았다. 당연하게 이 어린 준호는 날 알아차릴 수도, 볼 수도 없다.
그렇게 몸을 쭈그리곤 동생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동생은 초록 불인데도, 건너지 않고 있을까. 누굴 기다리는 건가.
그렇게 동생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동생의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가며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온통 묵음이었던 세상에 동생의 목소리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동생의 목소리들이 떼를 이루어 계속해서 이 흑백 세계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돌아가고 싶지 않아. 않아. 돌아가고. 싶지. 돌아가고 싶지. 돌아가고 싶지.”
“돌아가고 싶지 않아. 돌아가고 싶지. 않아. 않아. 돌아가고 싶지 않아. 돌아가고 싶지 않아. 돌아가고 싶지. 않아 싶지 돌아가고. 돌아가고 싶지 않아.”
어린 동생의 얼굴이 기괴하게 흘러내리더니 액체가 되어 바닥에 달라붙었다.
난 눈동자만 내려,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동생의 눈알을 바라보았다.
동생의 눈알도 빙글 돌아 날 바라보았다.
입도 없는 주제에, 동생은 말했다.
“왜 그런 시궁창으로 돌아가려는 거야? 이해할 수가 없네.”
“형. 돌아가고 싶지 않아?”
“왜 그러는 거야.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데.”
“내가 장담할게. 돌아가면 우리 둘 다 불행해져. 불행해지고 말 거라고.”
눈알은 또르르 돌아가더니 어느 한 곳을 바라보았다.
난 그 눈동자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보았다.
그러자 그 허공에는 또 다른 눈동자가 또 다른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이 일대에는 새하얀 눈동자들이 가득했다.
그 눈동자를 따라 걸었다.
눈동자의 끝에는 강남의 테헤란로가 있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들이 양옆으로 들어서 있고, 난 그 중간길을 걸었다.
눈동자와 황금빛.
그리고 천상의 천사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도로의 끝에는 새하얀 백옥으로 된 계단이 있었고, 그 계단 위에 있는 건 양쪽으로 열리는 하얀 문이었다.
그때,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실의 문.”
난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검은 가면을 쓰고 있는, 이 리그의 주관자 ‘절대자’가 서 있었다.
키는 나보다 컸으며, 검은 생머리는 땅에 닿을 듯 길게 늘어져 있었다.
절대자는 작게 웃음 지으며 내게 말했다.
“종장에 온 것을 환영한다.”
* * *
순식간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소리들이 사라졌다.
깜짝 놀란 재희는 고개를 들어, 시온을 바라보았다.
시온은 정신을 잃고 앞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쨍그랑-!
그의 이마가 강하게 접시에 부딪혀, 접시는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나뉘었고, 그의 이마는 찢어진 상처 탓에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동시에 재희는 어떤 강력한 힘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진재희는 아티팩트 보호막을 불러들여, 강시온에게 두른 뒤 자신에게도 둘렀다.
그 순간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방이 폭발했다.
콰- 광!
진재희와 강시온이 있던 방이 순식간에 화염 연기에 휩싸였다.
진재희는 강시온을 감싸곤 건물 바깥으로 탈출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본 재희는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하늘을 가득 메우도록 거대한 오우거들이 나란히 떠올라 있었다.
오우거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짓눌려선 빈대떡처럼 납작하게 죽어갔다.
진재희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느껴지는 힘.
굉장히 불길한 힘이었다. 그리고 그 힘에서 희미하게 강준호가 느껴졌다.
진재희는 믿을 수가 없어 연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강준호가? 그럴 리 없어. 아무리 그래도 이곳은 형의 도시인데.’
어쨌든 도시를 침략한 힘을 물리쳐야만 했다. 상황은 급하게 흘러갔지만 그녀는 침착했다.
벌써 몇몇 그녀의 동료가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성검을 불러들였다.
콰과광-!
이제 그녀의 힘은 전투 태세를 갖추는 것만으로도 주변 공기가 일그러질 정도였다.
전쟁 직후, 그녀는 강준호와 부딪혔을 때 그의 힘에 의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준호는 휴식을 취하고 힘을 비축한 상태였고, 진재희는 오랜 전쟁 끝에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강준호는 거신의 힘도 가지고 있었으니, 당시엔 진재희가 밀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진재희는 강해졌다. 이제 그녀는 최강이었다.
진재희도 강준호와 대립하고 싶지 않지만, 만약 대립해야만 한다면.
‘확실하게 뭉개 놓겠어.’
그래야 힘의 차이를 느끼고 다신 건드리지 않을 테니.
그녀는 성검을 반듯이 쥐었다.
강준호와 대면한 진재희는 주위에서 자욱한 그의 힘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건 그렇게 형을 아끼던 강준호가 형이 있는 방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도심 곳곳에 화염 연기가 차올라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어.’
진재희는 자욱한 화염 연기 속에서 거대한 형상이 드러나는 것을 기다렸다.
그것은 마치 문어의 다리처럼 길고 거대한 다리와 같았다.
연기가 서서히 걷히며 드러난, 강준호의 온몸에는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 쇠사슬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온 도시에 흩어져 있었다.
계약자 강준호.
그는 현재 계약된 자로서 절대자의 하수인에 불과했다.
이제 강준호는 모든 것을 멸망시킬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절대자는 이제 이 리그를 종료시키려고 들고 있다.
‘하필 시온이 기절했을 때.’
진재희는 강시온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은빛 보호막에 둘러싸여 눈을 감은 채, 기절해 있었다.
그때, 강준호의 목소리가 울렸다.
“형을 죽여서라도, 형을 이 리그에 남기고야 말 거다. 어차피 형은 퍼즐이니, 죽지 않는다. 형의 육체를 내놔라. 방해하지 마라. 멍청한 것아.”
촤르르르륵-!
쇠사슬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쇠사슬 중간중간에는 거대한 말뚝들이 있어 사슬을 조종하고 있었다.
진재희는 강준호의 모습을 살피다가 이내 힘을 모았다.
성검이 한곳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두 마리의 거신을 잡은 진재희의 힘은 가히 강준호와 맞먹었다.
이제부터의 영역은 전생의 진재희조차 도달하지 못한 초월의 영역이었다.
검은 한데 모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거대하고 아름다운 창날을 만들었다.
그녀의 등에는 네 개에 달하는 화려한 황금 날개가.
은빛의 머리카락은 밝다 못해, 눈부실 정도가 되었고.
아름다움은 극치에 달해, 그녀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그 모습에 홀리게 될 정도였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창뿐만 아니라, 그녀의 왼손에는 7개의 별과 12개의 행성이 박힌 방패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힘이었다.
가디언.
천 리의 수호자.
그녀는 지금 강시온을 지킨다.
강준호와 진재희. 양쪽 모두 최후의 전투임을 직감했다.
승자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고, 패자는 잊힐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